< 제36장 - 카라발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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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잘 오크들의 피를 이은 칼날노래 부족의 전사들은 육체적으로 우월했다.
힘과 민첩성 등등 단순한 육체 능력만을 논한다면 인간보다는 오히려 짐승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태양노래는 그런 칼날노래 부족의 전사들 가운데서도 손에 꼽히는 존재였다.
정면에서 힘 대결을 한다면 붉은바람은 단 몇 초도 견디지 못 할 터였다. 아니, 견디지 못 하는 수준을 넘어 온 몸이 바스러질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말할게. 제대로 맞으면 한 방도 견디기 어려울 거야.’
체중 차이만 세 배 이상이었다.
근력 차이는 여섯 배 이상이라 해도 좋았다.
정타를 당하면 그걸로 끝.
가슴이나 배를 당하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 하게 되리라.
‘그러니 한 대도 맞으면 안 돼.’
무리한 요구였다.
하지만 해내지 못 하면 승산이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진 하나.
유더가 가르치는 걸 옆에서 가만히 쳐다보던 코델리아가 꺼낸 한마디.
‘괜찮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냥 잘 보고 잘 피하면 되니까. 나도 늘 그러는 걸.’
너무나 활짝 웃으며 말한 터라 무어라 반박조차 할 수 없었던 그녀의 말.
“우오오!”
고함소리가 고막을 뒤흔들었다.
거칠게 땅을 박찬 태양노래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진해왔다.
붉은바람은 집중했다.
숨조차 멈추고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유더의 말을 떠올렸다.
‘뭐, 이 짐승의 말도 틀린 거 아니야.’
‘짐승? 지임스응? 왈왈! 왈왈! 으르릉!’
아니, 이거 말고.
그 다음에 했던 말.
‘잘 보고, 잘 피한다. 충분히 가능해. 내가,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줄게.’
시간이 정지했다.
눈앞에 튀어 오르는 모래알이 보였다.
태양노래의 커다란 입에서 뿜어져 나온 침방울도 보였다.
윈터 엘프의 피를 이은 붉은바람은 애당초 타고난 눈이 좋았다. 여기에 유더의 스크롤이 보조 마법을 걸어주었다.
아이 오브 타이거.
동체시력을 극대화시키는 주문.
그것도 모자라 훈련시켜주었다.
‘이게 태양노래의 움직임이야.’
“쿠어!”
태양노래가 언월도를 휘둘렀다.
붉은바람은 태양노래를 오늘 처음 보았고, 그가 전력을 다해 언월도를 휘두르는 것 역시 처음 보았다.
하지만 눈에 익었다.
저 공격이.
태양노래의 속도가.
‘보여.’
단순히 순간의 움직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 공격이 어떻게 이어질지.
언월도가 어떤 궤적을 그려 어디까지 닿을지.
유더가 가르쳐주었다.
유더가 눈에 익게 해주었다.
‘잘 보고, 잘 피한다.’
코델리아의 말.
그리고 더해진 또 하나의 말.
‘그러다보면 느낌이 올 거야. 보는 것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 온 몸으로 느끼게 될 거야.’
무슨 말인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공격을 온몸으로 느낀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정말정말 좋아하는 언니지만, 설명은 참 못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언니는 있는 그대로를 말해준 것이었다.
‘느껴져.’
시각만이 아니었다.
청각이 반응했다.
촉각이 반응했다.
오감을 초월한 제육감이 인지했다.
소리를, 공기의 떨림을, 태양노래가 발산하는 기세를.
‘알 것 같아.’
온몸으로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두 가지가 있어.’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언월도가 느리게 다가왔다.
태양노래의 포효 사이로 코델리아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속삭였다.
‘일단 느끼게 되면 네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야.’
칼날이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동강낼 것 같았다.
붉은바람은 태양노래를 보았다.
하이잘 오크의 피를 이은 자답게 전투포효를 지르고 있는 얼굴은 무시무시했다.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송곳니는 사람이 아닌 맹수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그의 눈.
붉은바람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충혈 된 눈동자.
검은자위에 사람의 얼굴이 어렸다.
붉은바람 자신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붉은바람은 그 얼굴에서 코델리아를 떠올렸다.
같은 여자가 봐도 반할만치 아름다운 그녀는 송곳니를 빛내며 말했었다.
‘물러나거나,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거나.’
보통은 물러난다.
물러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그저 도망만 치게 될 뿐이었다.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할 때가 있었다.
‘판단의 기준은··· 헤헷, 그냥 그 순간이 오면 너 스스로 알게 될 거야.’
‘뭔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 얘는 생각 자체를 안 해. 짐승이니까.’
‘뒤진다?’
필요 없는 것까지 떠올리고 말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붉은바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스스로도 놀랄 만치 활짝 웃으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츠콰학!
언월도가 허공을 베었다.
허리를 뒤로 젖혀 공격을 피한 붉은바람의 머리 위.
흩날리는 새하얀 머리칼 몇 올이 언월도에 갈라졌다. 휘두르는 힘을 주체 못한 태양노래는 그대로 나아갔고, 그의 시야에서 붉은바람이 사라졌다.
아주 잠깐.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
“후.”
붉은바람이 숨을 토했다. 젖혔던 허리를 바로 세우며 훤히 드러난 태양노래의 등을 보았다. 자신을 찾기 위해 급히 고개를 돌리는 그의 얼굴을 보는 대신 검을 휘둘렀다. 바람을 일으켰다.
콰하악-!
검이 허공을 베었다.
하지만 의도한 바였다.
검이 그리는 궤적을 뚫고 솟구친 불사조가 홰를 치고 돌진했다.
검기처럼 뻗어나간 그것이 태양노래를 강타했고, 태양노래의 거체가 뒤로 크게 튕겨져 나갔다.
쾅!
폭음이 터졌다.
아무도 듣지 못 했지만 작고 가벼운 발걸음이 함께 울렸다.
탁.
한 바퀴 몸을 회전시킨 뒤 재차 자세를 잡은 붉은바람은 숨을 삼켰다.
다시 한 번 태양노래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가 멀찍이 날아가는 것을, 바닥을 뒹구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통하는 것을 감지했다.
“하아.”
절로 숨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붉은바람은 생각했다.
‘이게··· 언니가 사는 세계인가?’
틀렸다.
코델리아의 세계는 좀 더 특별했다.
온갖 천재란 천재들은 죄다 겪어본 유더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저 짐승이라고 밖에 표현 못 할 전투의 천재가 보는 세계에 작금의 붉은바람이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으로 족했다. 태양노래를 느낄 수 있다면, 태양노래를 읽어낼 수 있다면 충분했다.
쾅!
이번에는 붉은바람이 먼저 지면을 박찼다. 오히려 태양노래를 향해 돌진했다.
화려한 싸움이었다.
불꽃이 비산하는 가운데 붉은바람이 빠르고 크게 움직였다.
태양노래는 노련한 전사답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싸움을 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단 한 대.
한 방만 적중시켜도 자신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그는 인내했다.
고통을 참아내며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마치 바람따라 부는 버드나무 잎처럼 자신의 검기 위에서 춤추는 붉은바람을 포기하지 않았다.
츠화아! 츠화아!
붉은바람의 공격이 연속해서 쏟아졌다.
태양노래가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며 붉은바람에게 연격을 퍼부었다.
콰가가!
불꽃이 튀었다.
양쪽 모두 불을 사용하니 그 싸움의 모습이 화려하고 또 화려했다.
서로 다른 불꽃이 맞불려 새로운 꽃을 피웠다.
“계획대로.”
지켜보던 유더가 말했다.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노래의 전투패턴을 모조리 외우고 있는 유더 덕분에 붉은바람은 태양노래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온갖 보조 마법의 도움을 받은 결과이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느낀 것은 느낀 것이었다.
“붉은바람이 이길 거야.”
코델리아의 확신에 유더 역시 동의했다.
예지에 가까운 직감으로 과정을 초월해 결과를 보는 코델리아의 말에 유더의 계산이 고개를 끄덕인 까닭이었다.
붉은바람이 이긴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끝내 승리에 도달한다.
그렇기에 유더는 시선을 분산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붉은바람과 태양노래의 싸움에 집중할 때 홀로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고 생각했다.
‘기우일려나.’
카라발에 여러 족장들이 모였다.
누가 이기든 이번 카라발을 끝으로 동부 연맹이 구축될 터였다.
그러니 움직인다면 지금이었다.
무언가 훼방을 놓는다면 지금이어야 했다.
그런데 성난뿔소 부족은 오지 않았다.
서부 원정을 아직 완벽히 마무리 짓지 못 했기 때문일까.
본거지에 남겨둔 병력을 섣불리 움직였다가 오히려 자신들이 위험해지는 상황을 피하려는 것일까.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너무 손을 놓고 구경한다는 느낌이었다.
유더는 카라발이 펼쳐지고 있는 고운눈바람의 땅을 생각해보았다.
사방이 탁 트인 평원이었기에 누군가 침공해 온다면 일찌감치 알 수 있는 곳이었다.
‘소수 병력으로는 무리야.’
이곳에 모인 전사들의 숫자만 백을 우습게 헤아렸다.
강력한 족장들도 여럿 있으니, 아무리 정병으로 가려 뽑는다 해도 수십 단위의 병력을 움직여야만 했다.
‘그 정도라면 무조건 눈에 띌 수밖에 없어.’
더욱이 지금 이곳에는 고운눈바람이 있었다.
거친눈사태와 달리 권능을 온존한 그녀가 주변 일대를 살폈지만 딱히 병력의 이동을 감지하지 못 했다.
적은 오지 않는다.
서부는 동부의 연맹 구축을 방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서 모두가 카라발에만 집중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붉은바람과 태양노래의 싸움에 온신경을 집중하였다.
유더 역시 방금까지 그러했다.
그랬기에 굳이 한 번 더 의심했다.
혹시 놓친 것은 없을까.
생각지 못 한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늘.’
아직은 맑고 푸르렀다.
이제 곧 노을이 질 터였지만 지금은 파란 하늘이었다.
‘서쪽.’
유더는 고개를 돌려 서쪽을 보았다.
여전히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저 하얀 눈이 내린 평원만이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역시 괜한 걱정인 걸까.’
그게 제일 좋은 거겠지만.
유더는 쓰게 웃으며 다시 붉은바람의 싸움을 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누군가가 유더의 팔을 잡아당겼다.
“유더야.”
코델리아.
눈이 마주친 순간 알 수 있었다.
미간을 좁힌 채 뭔가 마려운 표정으로 몸을 비비 꼬는 코델리아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불길함.
뭐가 불길한지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코델리아는 분명 무언가를 느꼈다.
그렇기에 유더는 집중했다.
자신이 놓친 무언가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다시 코델리아가 유더의 팔을 당겼다.
“진동.”
눈을 크게 뜨며 말했고, 턱짓으로 발쪽을 가리켰다. 덕분에 유더도 깨달았다.
코델리아의 말을 들은 그 순간 집중해서 겨우 알아차렸다.
진동이 느껴졌다.
아주 작은 진동.
코델리아 정도로 민감한 이가 아니면 느끼기 힘든 그것.
그게 점점 커지고 있었다.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래.”
유더와 코델리아가 동시에 발쪽을 쳐다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쳐들며 소리쳤다.
“조심해!”
“밑에서 온다!”
외침에 이어졌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나듯 진동이 순간 격해졌고, 지면이 갈라졌다!
콰강!
땅을 뚫고 거대한 가시들이 솟구쳐 올랐다.
노린 것인지, 아니면 공교로운 우연인지 하필 붉은바람과 태양노래의 발밑이었다.
콰가가-!
칼날처럼 가시가 솟구쳐 오른 그때 붉은바람은 태양노래와 솟구치는 가시를 동시에 보았다.
가시가 이제 곧 태양노래의 몸을 꿰뚫게 될 것을 감지했다.
그래서 붉은바람은 움직였다.
생각을 앞선 본능이 그녀를 움직였다.
태양노래는 적이 아니었으니까.
서부에 맞서 힘을 합칠 동부의 동료였으니까!
퍼억!
붉은바람이 태양노래에게 몸을 부딪쳤다. 온몸을 날려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피.
찢어지는 비명.
“붉은바람!”
츠카악!
커다란 가시가 붉은바람의 가느다란 허리를 스쳤다. 나자빠진 태양노래 위에 쓰러진 붉은바람이 신음을 토하며 몸을 웅크렸다. 찢어진 허리에서 붉은 피가 솟구쳐 올랐다.
“피해!”
코델리아가 외침이 지워졌다.
땅을 부수고 거대한 괴물이 솟구쳐 올랐다. 연이어 지하와 연결된 구멍에서 인간과 마물을 뒤섞은 것 같은 괴물들이 줄줄이 일어섰다. 얼결에 붉은바람을 끌어안은 태양노래가 다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대적하라!”
“태양노래를 구해!”
“붉은바람!”
동시 다발적으로 목소리들이 터졌다.
카라발을 위해 모인 전사들이 저마다의 검을 뽑아들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고운눈바람 또한 노성을 토하며 날개를 크게 펼쳤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아아!”
땅을 부수고 솟구친 괴물이 포효했다.
키가 5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거대한 두더지였다. 머리에 몇 개나 되는 뿔이 나있고, 붉은 안광을 빛내는 그것의 몸에는 보랏빛 기운이 마치 저주처럼 얽혀 있었다.
“마, 맙소사! 어둑시니!”
거친눈사태가 비명처럼 외쳤고, 고운눈바람이 눈을 크게 떴다.
어둑시니.
유더와 코델리아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두 야생신의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괴물은 타락한 야생신이었다.
아니, 제대로 된 타락조차 아니었다.
어둑시니는 악마의 눈의 입장에서 보면 온전히 타락하지 못 한, 그저 미쳐 날뛸 뿐인 실패작이었다.
“아아아!”
어둑시니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야생신의 힘이 담긴 그 외침에 동부의 전사들이 괴로워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틈을 어느새 수십 마리로 늘어난 마물들이 파고들었다.
‘실패작들!’
마인을 양산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인 인간과 마물의 결합.
성공하면 인간의 지성에 마물의 힘을 갖춘 최하급 마인이 만들어졌지만, 실패하면 그저 괴물이 될 뿐이었다.
“크아아!”
기형적으로 생긴 마물들이 전사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게일이 검을 뽑아들었다. 아델리아의 안전부터 확보한 그가 응축한 기운을 사자후로 발산했다.
“갈!”
무지막지한 힘이 실린 일갈에 어둑시니가 토한 저주의 비명이 순간 상쇄되었다.
전사들이 안정을 되찾았고, 게일이 그대로 지면을 박차올랐다.
“붉은바람을 구한다!”
게일이 적진 한복판으로 거침없이 돌진했다. 아델리아 역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연속해서 마법을 시전했고, 겨우 정신을 차린 전사들과 마물들 사이의 싸움이 벌어졌다.
“어둑시니!”
“어둑시니 오라버니!”
거친눈사태와 고운눈바람이 외쳤고, 고운눈바람은 아예 어둑시니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안 돼! 우리가 알던 어둑시니가 아냐!”
거친눈사태가 고운눈바람의 발을 붙잡고 늘어졌다.
변해버린 어둑시니의 모습에 울음을 터트린 고운눈바람을 진정시키며 어떻게든 작금의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이런 제기랄! 대체 어떻게!”
거친눈사태 자신이야 힘을 거의 다 잃었다지만 고운눈바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놈들은 어떻게 고운눈바람의 감각을 속인 것일까. 아무리 땅속이었다 한들 이 정도로 접근하면 알아차릴 수밖에 없거늘.
무언가 기운을 숨길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리고 타락.
용맥과 성역이 타락해 함께 몰락해버린 야생신.
거친눈사태 자신도 저렇게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어둑시니가 영락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더와 코델리아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게일을 도와 붉은바람을 구하려던 두 사람을 한 번 더 멈추게 하였다.
[죽···여줘! 나를··· 죽···여줘!]
어둑시니의 외침이었다.
황금의 용왕에게 야생의 땅의 수호자로 인정받은 유더와 코델리아이기에 고통에 찬 그의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안, 돼. 안, 돼. 모두를 다치게- 거친눈사태- 고운눈···바람. 안, 돼. 나를 죽···여······.]
어둑시니의 울부짖음이 커졌고, 저주의 힘 역시 다시 강해졌다.
고운눈바람이 힘을 발해 저주를 상쇄시켰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유더!”
거친눈사태가 소리쳤다.
그 역시 어둑시니의 비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알 수 있었다.
어둑시니가 스스로를 죽이라 하는 이유가 단순히 고통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폭탄.”
코델리아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어둑시니는 폭탄이었다.
카라발이 펼쳐지는 장소 한복판에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 동부의 족장들을 일소한다는 것이 악마의 눈의 계획이었다.
‘소모품.’
어차피 실패작들이었다.
이렇게 소모하는 것이 효율적인 전술이었다.
설사 실패한다 할지라도 최소한의 피해는 줄 수 있겠지.
불량품을 처리할 수 있겠지.
“개새끼들!”
코델리아가 노성을 터트렸다. 악마의 눈의 행동에 분노했다.
유더는 숨을 골랐다. 게일이 태양노래와 함께 붉은바람을 데리고 이탈하는 광경을 보며 어둑시니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도망···쳐!]
본래라면 땅을 부수고 솟구친 순간 자폭했어야 할 어둑시니였다.
폭발하지 않고 난동을 부리는 것은 아직 온전히 타락하지 않은, 일부나마 남아 있는 어둑시니의 의지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리 길지 않을 터였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크아아아!”
어둑시니가 다시 저주의 외침을 토했다.
순간 고운눈바람이 울음을 터트렸다.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둑시니의 의지가 사그라졌다.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미쳐 날뛰는 괴물에 불과했다.
“시간이 없다! 모두 도망쳐야!”
거친눈사태가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어둑시니의 의지가 사그라졌으니, 눈앞의 괴물은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를 폭탄이었다.
하지만 무리였다.
이미 전사들과 마물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와중에 도망치고자 등을 돌리면 남은 것은 몰살뿐이었다.
“후우, 후.”
유더는 다시 숨을 토했다. 방법을 모색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마물들 때문에 도망치는 것도 무리다.
하지만 이대로 방치하면 어둑시니의 자폭에 모두가 휩쓸일 뿐이다.
‘방법을 찾아야 해.’
무언가 다른, 단순히 폭발 범위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
“유더!”
유더는 눈을 크게 떴다. 바로 코앞에 코델리아가 있었다. 그녀가 파란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터트리자!”
“뭐?”
“자폭하기 전에 폭발시키자!”
이게 무슨 말일까.
자폭과 폭발에 무슨 차이가 있다고.
어차피 죽을 거 죽이기라도 하자는 걸까?
“아니이! 그거 말고오!”
코델리아가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무어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 눈빛으로 말했고, 유더는 비로소 이해했다. 저도 모르게 말했다.
“넌 천재야.”
“당연하지!”
코델리아가 웃었다. 유더는 충동적으로 그런 코델리아를 꽉 끌어안았고, 코델리아는 발버둥쳤다.
“야! 야?!”
“가자.”
유더는 바로 코델리아를 놓아주었다. 뺨에라도 키스해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어둑시니를 향해 돌진했다.
“가즈아!”
마녀로 화한 코델리아가 유더의 뒤를 쫓았다.
아델리아가 뒤에서 무어라 소리쳤지만 일단은 듣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어둑시니에게 도달해야만 했다.
“언니이! 열어줘어어!”
코델리아의 외침에 아델리아가 욕지거리를 토했다.
돌연 두 주먹을 움켜쥐더니 가슴 앞에 모았다가 옆으로 크게 휘둘렀다.
“파이어 월-!”
더블 캐스팅.
아델리아의 작은 몸에서 마력이 폭발하듯 발산되었고, 무지막지한 이적이 일어났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
불의 장벽이 굉음과 함께 뻗어나갔다. 높이가 근 3미터에 달할 불꽃이 솟구치며 길을 만드니, 사이에 놓여 있던 마물들이 모두 불타올랐다. 누구도 감히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 했다.
“와우.”
“언니 최고!”
유더와 코델리아가 문자 그대로의 불꽃 길을 달렸다.
사이에 놓여 있던 마물들이 덤벼들었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그리스!”
공격마법 따위 낭비였다. 그리스로 미끄러트리니 넘어진 마물들이 절로 불의 장벽에 밀려들어갔다.
콰아아!
불꽃이 타오르는 그때도 유더와 코델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미끄러지지 않았거나, 운좋게 불의 장벽에 닿지 않은 놈들을 짓밟으며 어둑시니를 향해 돌진했다.
“크아아아!”
어둑시니가 비명을 질렀다.
한 발 먼저 달려나갔던 게일이 붉은바람을 품에 안더니 그대로 이탈했고, 태양노래가 전투포효로 조금이나마 어둑시니의 비명을 상쇄시켰다.
“오오오!”
어둑시니가 미쳐날뛰며 두 손을 휘둘렀다.
칼날과도 같은 손톱들로 허공을 찢으니, 그 기세가 실로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유더와 코델리아는 이번에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높이며 소리쳤다.
“내가 모루!”
“내가 망치!”
조율이 끝났다. 황금빛 선풍과 함께 유더가 비상했고, 코델리아는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염동력을 발했다. 가지고 있는 힘을 모조리 쏟아 부어 어둑시니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으아아아아!”
단순히 묶는 것이 아니었다. 일정한 방향으로 힘을 가했다. 동시에 두 눈을 크게 뜨며 마안을 발동시켰다.
“커억!”
어둑시니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더니 꼼짝도 하지 못 했다. 코델리아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유더어어!”
“코델리아!”
유더가 허공에서 주먹을 당겼다. 코델리아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움직임이 봉쇄된 어둑시니의 머리 위에 주먹을 내질렀다.
“흑룡십자격!”
크게 외쳤다.
칠흑의 십자가가 유더의 주먹으로부터 일어나 맹진했고, 어둑시니의 몸을 찍어 눌렀다. 일정한 방향으로 밀어붙였다.
“오오오오!”
유더가 지르기에 힘을 더했다. 단전의 기운을 총동원하였고, 코델리아가 이를 보조했다. 뒤늦게 두 사람의 계획을 눈치 챈 거친눈사태가 고운눈바람에게 외쳤다.
“도와줘! 구멍에 밀어 넣어야 해!”
고운눈바람은 바로 이해하지 못 했다. 하지만 유더를 도와야 한다는 것은 이해했다. 그렇기에 일단 유더와 같은 방향으로 힘을 발산하였다.
콰가강!
어둑시니가 밀려났다. 스스로 뚫어놓은 구멍에 빠져 나자빠졌다.
“들어가아!”
코델리아가 눈을 꽉 감으며 마지막 힘을 발했고, 유더가 발한 검은십자가가 어둑시니를 완전히 찍어 눌렀다. 고운눈바람의 힘이 어둑시니를 구멍 깊은 곳까지 밀려나게 하였다.
코델리아의 계획.
단순했다.
자폭하기 전에 터트린다.
땅 속에서.
놈들이 뚫어놓은 구멍 속에서!
“폭발으으은!”
뒤를 잇지 못 했다. 힘을 너무 써서 머리가 아팠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숨이 막혀왔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쓰러지지 않았다. 거친 숨을 토하며 달려온 유더가 코델리아의 허리를 안아 지탱했다. 대신하여 말해주었다.
“예술이다.”
유더가 코델리아의 입에 포션을 부었다.
코델리아가 유더의 몸을 와락 끌어안으며 마나 드레인을 펼쳤다.
“끄으윽······.”
두 사람이 동시에 괴로운 신음을 토했다. 하지만 덕분에 코델리아의 마력이 회복되었고, 코델리아는 지체 없이 회복된 마력을 이용해 새로운 주문을 만들었다.
“검은칼날.”
조종이 가능한 마녀의 주문.
유더의 품에 머리를 기댄 코델리아가 손가락을 놀렸다. 마치 진짜 총을 쏘듯 검지를 튕겨 검은 칼날을 내쏘았다.
츄화아!
총알처럼 날아간 검은칼날이 구멍을 파고들었다. 고운눈바람과 어둑시니의 힘이 충돌하는 지점을 관통해 도달하였다.
어둑시니에 의해 억눌렸던 힘.
검은칼날이 그것을 자극했다.
다시 한 번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꽝.”
코델리아가 말했고, 유더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보호하기 위해 등을 돌린 순간 무지막지한 폭발이 땅속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콰가가가가가강-!
지면이 들썩였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쳤다.
전사들과 마물들을 가릴 것 없이 서 있던 모두가 넘어지고 말았다.
그 정도의 진동.
지축을 뒤흔들 정도의 폭발.
하지만 지하 깊은 곳이었다.
구멍을 통해 보랏빛 기둥이 솟구쳐 올랐지만 거기까지였다. 폭발의 여파는 결코 지상에 닿지 않았다.
쿠르르르-
여진.
두 번째 울림.
하지만 작았다. 금방 잦아들었다.
“허억.”
유더가 숨을 토했다.
혹시 모를 여파로부터 코델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일단 가슴 위로 올린 채 드러누운 터라 가슴이 무거웠다.
“하아.”
코델리아가 유더의 가슴 위에서 몸을 늘어트리며 안도의 숨을 토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렸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살았당.”
혀 짧은 말에 유더도 웃고 말았다. 서로를 감싸듯 떠오르는 빛의 고리 속에서 다시 한 번 코델리아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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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6장 - 카라발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