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105화 (105/473)

< 제38장 - 출정 >

제38장 - 출정

카라발 진행 도중 나타난 타락한 야생신의 모습은 동부 전체에 큰 충격을 가져왔다.

비록 목격한 이들의 숫자는 동부 전체로 치면 소수에 불과했지만, 대부분이 부족을 이끄는 위치에 있었기에 그 영향력이 남달랐다.

“한시라도 빨리 서부를 쳐야 해요.”

야생신들 가운데서도 순한 성격인 고운눈바람조차 강경하게 공격을 주장할 정도였던 터라 동부의 의견 자체는 쉽게 하나가 되었다.

“애당초 이번 싸움은 수비를 위한 싸움이 아니다. 서부를 쳐 악마 추종자 놈들을 야생의 땅에서 몰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어차피 일어날 전쟁이라면 동부보다는 서부에서 싸우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야생의 땅에서의 싸움은 전부 회전이다. 그렇다면 굳이 우리 땅을 전쟁터로 삼을 필요는 없지.”

물론 보급 문제도 있고, 성벽이 없는 회전이라 해도 지형적 이점 등을 논할 수 있으니 수비 측이 공격 측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동부에게는 서부로 공격해 들어가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오염된 용맥을 터트려 황금의 용왕님의 깊은 잠을 깨워야만 한다.”

야생의 땅의 수호자인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황금의 용왕이 직접 내린 신탁이었다.

고운눈바람과 위대한폭풍을 비롯한 야생신들이 두 사람이 수호자임을 입증하니, 동부의 누구도 두 사람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동부의 힘을 모아 서부를 친다.”

이미 결정사항이었다.

카라발을 보기 위해 모였던 부족장들은 서둘러 자신들의 부족으로 돌아갔고, 본격적인 원정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흘.

카라발로부터 나흘이 지났을 때, 고운눈바람의 땅에 다시 위대한폭풍 부족과 칼날노래 부족이 집결했다.

&

야생의 땅의 회의는 기본적으로 바닥에서, 원형으로 모여 앉아 의견을 주고받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때문에 고운눈바람이 준비한 회의장 역시 가운데 놓아둔 커다란 지도를 중심으로 모여 앉는 형태로 준비되었는데, 특별한 점이 하나 있었다.

‘상석이 네 개.’

원형으로 모여 앉은 사람들 뒤에 자리한 반쯤 누울 수 있는 커다란 의자가 넷.

다름 아닌 야생신들의 자리였다.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이에요, 오라버니.”

고운눈바람과 살갑게 인사를 나눈 위대한폭풍이 남쪽에 위치한 상석에 착석했고, 고운눈바람은 동쪽의 상석에, 거친눈사태는 서쪽의 상석에 각각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북쪽의 상석.

“한 자리에 이렇게 넷이 모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검은 수염을 짧게 기른 잘생긴 청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야생신 칼날노래.

본신이 거대한 늑대임을 드러내듯,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지금도 그의 두 눈은 늑대의 그것처럼 강렬하기 짝이 없었다.

“여전히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구나.”

“나부터가 화려하니까.”

위대한폭풍이 미간을 찌푸리며 건넨 말에 킬킬킬 웃으며 답한 칼날노래는 헐벗은 상반신에 새겨진 색색의 문신들을 자랑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알았으니까 일단 앉자구. 이야기를 진행해야 하니까. 우리끼리 떠들고 있으면 애들이 이야기를 못 하잖니.”

“오오··· 거친눈사태님. 어찌 이리 귀여워지셨습니까. 아니지, 본래부터 귀여우셨나?”

“그래, 그래. 본래부터 귀여웠으니까 일단 앉으렴.”

“흐흐, 역시 노련하다니까.”

거친눈사태에게 도발이 통하지 않자 다시 킬킬 웃은 칼날노래는 북쪽의 상석에 착석했다.

“이제 진행하렴.”

거친눈사태가 눈짓하며 말하자 고운눈바람이 가볍게 손뼉을 쳤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이들이 회의장 안에 들어섰다.

“위대한폭풍 부족의 붉은질풍이 야생신님들을 뵙습니다.”

“칼날노래 부족의 아홉칼날이 야생신님들을 뵙습니다.”

“고운눈바람 부족의 고운눈이 야생신님들을 뵙습니다.”

차례대로 예를 표한 족장들이 자리를 잡자 연이어 각 부족의 주요인사들 역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유더와 코델리아 역시 끼어있었다.

‘유더야, 유더야. 저 새끼가 자꾸 꼬라봐.’

‘너도 같이 노려보면 안 되는 거 알지?’

‘알긴 아는데 꼬라보고 싶어.’

‘···안 꼬라보면 맛있는 거 해줄게.’

‘맛있는 건 어차피 해줄 거잖아.’

‘우리 지금 뜻 통하고 있는 거 맞지?’

‘어··· 아마도?’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던 유더와 코델리아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코델리아가 말한 시선.

유더도 느낄 수 있었다. 맞은편 상석에 자리한 칼날노래가 자신과 코델리아에게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흥미가 동한 거겠지.’

황금의 용왕이 야생의 땅이 아닌, 오랜 세월 야생의 땅과 대립해온 세일룬 왕국의 소년과 소녀에게 수호자 자격을 부여하였으니까.

남쪽에 위치하긴 했지만 세일룬 왕국과 직접 대립한 일이 적은 위대한폭풍 부족과 달리 칼날노래 부족은 언제나 세일룬 왕국과의 싸움에 앞장서던 이들이었다.

기본적인 성향과 살아온 역사가 다르니, 유더와 코델리아를 보는 칼날노래의 시선이 고우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였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고운눈의 개회 선언 이후 일단은 기본적인 이야기들이 오갔다.

“동부에 연합군의 병력이 1차적으로 집결하는 것은 앞으로 이레 뒤. 출정은 여드레 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부의 병력이 모두 집결한다면 그 숫자가 5만을 넘어 10만에도 육박할 수 있었지만 그건 총동원령을 내렸을 때 이야기였다.

방비를 위한 병력과 보급선을 유지하기 위한 병력, 여기에 다시 지리적으로 먼 곳에 위치한 부족들의 이동 속도까지 감안하면 1차 집결 때 모일 수 있는 병력은 2만에서 3만 남짓이었다.

“1차 부대가 우선적으로 서부로 진격해 들어가고, 뒤이어 2차 부대가 출정해 뒤를 받쳐줄 예정입니다.”

기본적인 전략 자체는 무난했다.

동부와 서부를 구분 짓는 대산맥의 존재 때문에 애당초 공격해 들어갈 수 있는 루트가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타락한 야생신들.’

기본적으로 야생신들은 자신들의 성역에 머물게 마련이었지만, 악마의 눈 놈들이 타락시킨 야생신들을 그런 식으로 놀릴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적극적으로 전장에 투입할 터였다.

“서부의 야생신들은 우리가 막는다.”

칼날노래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자 위대한폭풍 역시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의 성역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같은 야생신들과 싸워야 한다는 현실이 괴로운 탓이었다.

‘기본 골자는 갖춰졌어.’

동부의 대군이 서부로 진격해 들어가고, 야생신들이 본대와 함께하며 서부의 야생신들을 맞상대한다.

통상이라면 이 흐름에 유더와 코델리아도 몸을 맡겨야 할 터였지만, 유더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저와 코델리아는 따로 움직일 생각입니다.”

이미 의견을 교환한 위대한폭풍 부족과 달리 칼날노래 부족은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함을 표했다.

대군과 대군의 싸움에서 단 둘이 따로 움직여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설명해라.”

칼날노래가 상석에서 명령하듯 말하자 코델리아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유더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정중히 예를 표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보시다시피 동부와 서부 사이에는 커다란 산맥들이 마치 성벽처럼 늘어서 있습니다.”

때문에 동부군은 산맥과 산맥 사이에 위치한 남부의 평야 지대로 군대를 진군시킬 예정이었다.

“저와 코델리아는 본대와 함께 하는 대신 따로 북상, 하늘지붕 산맥을 넘어 무방비 상태인 서북부의 부족들을 타격하려 합니다.”

서부 역시 동부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으니 남부 평야 지대 쪽으로 병력은 물론이고 야생신들까지 파견할 터였다.

그리하면 자연 후방이 비게 되어 있으니, 유더는 산맥을 넘어 그 후방을 공격하겠다 말한 것이었다.

“저와 코델리아의 목적은 오염된 용맥을 폭파시키는 것이니 후방의 부족들과 정면대결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잠입하여 용맥을 폭주시키면 되니까요.”

물론 일단 하나가 터지면 적들 역시 방비를 강화할 터이니 반복하기는 어렵겠지만, 정말로 하늘지붕 산맥을 넘어 후방에 잠입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용맥을 폭주시킬 수 있을 터였다.

“이에 따른 전략적 효과는 큽니다. 적들은 전방뿐만 아니라 후방까지 신경 써야 하고, 언제 자신들의 본거지가 막대한 타격을 입을지 몰라 전전긍긍해야만 할 겁니다.”

야생의 땅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용맥은 신성한 것이었고, 악마 추종자 집단인 악마의 눈에게 있어서는 오염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즉, 용맥을 폭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이 땅에 유더와 코델리아가 유일하다는 사실이었다.

‘상식을 부수는 공격은 언제나 유용하지.’

상상 밖의 일이니 방어 또한 제대로 할 수 없고.

유더의 설명에 칼날노래 부족은 눈을 껌벅였고, 가만히 듣던 칼날노래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미친놈들이군. 그래서 마음에 든다만.”

용맥을 폭주시켜 성역을 파괴한다.

간단한 말이었지만 야생신인 그에게는 남다른 의미를 가진 말이었다.

성역의 파괴는 곧 야생신의 근본을 부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고, 이는 또 야생의 땅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삶의 보금자리를 통으로 날려버리겠다는 소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걸 허락한 것이 황금의 용왕이시라 이건가.’

사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야생의 땅 전부가 넘어갈 바에야 서부를 초토화시켜서라도 동부를 지키고 적을 격파하는 쪽이 나았으니 말이다.

“하늘지붕 산맥의 험준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너희 둘이 무사히, 그것도 시간에 맞춰 산맥을 넘을 수는 있겠나?”

칼날노래가 도발하듯 묻자 유더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칼날노래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 도움이?”

“예, 칼날노래 님께서 도와주시면 가능할 것입니다.”

유더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고, 칼날노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놈 봐라?’

할 수 있냐는 물음에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요구하고 나선다?

‘재미있군.’

기나 좀 눌러볼 생각에 던진 질문이었는데 오히려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고운눈바람과 위대한폭풍이 지켜보는 이 마당에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할 수 있느냐 물은 것도 나이고.’

여기서 발을 빼면 칼날노래 자신이 무엇이 되겠는가. 아이들도 지켜보는 마당에.

“배짱이 좋군.”

“감사합니다.”

유더는 부드럽게 응답했고, 칼날노래는 결국 진심에서 우러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배포 크게 나가는 수밖에.’

실제로 유더가 마음에 들기도 하였고.

호전적인 성격답게 겁 없이 용감한 자들을 좋아하는 칼날노래였다.

“말해 보거라, 어떤 도움이 필요한 것이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얼마든지 말해 보거라. 무엇이 필요한 것이냐. 나는 위대한폭풍 같이 쪼잔한 남자가 아니다.”

칼날노래가 킬킬거리며 말하자 위대한폭풍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딱히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미 유더와 나눈 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사람.

코델리아가 얼른 위대한폭풍에게 눈빛을 보냈다.

‘말 맞춰 주실 거죠?’

‘그래, 얼마든지 맞춰주마.’

위대한폭풍은 칼날노래의 성격을 잘 알았다.

그리고 위대한폭풍의 이야기를 들은 유더는 칼날노래가 지금 같은 말을 할 것을 예상했다.

위대한폭풍 같이 쪼잔한 남자가 아니다.

즉, 위대한폭풍보다는 더 도와주마.

그럼 위대한폭풍이 도와준 정도를 부풀리면 어떨까?

그리고 위대한폭풍이 그 도와준 사실을 인정한다면.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사납고 호쾌한 미남인 칼날노래와 자애롭고 아름다운 와일드 페어리 퀸이 겹쳐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코델리아가 예쁘게 웃었고, 유더는 부드럽게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정말이냐?”

“정말이다.”

“저, 정말로?”

“정말로, 진짜.”

칼날노래의 절절한 시선을 받은 위대한폭풍은 시치미를 뚝 뗀 뒤 이를 악 물었다.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제어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크크큭, 아예 다 털리는구나.’

가호는 시작에 불과했다.

칼날노래는 애지중지하던 신기들을 내놓아야 했고, 마지막에는 오랜 시간 숨겨두었던 고대의 약술까지 꺼내 바쳐야만 했다.

‘크흑··· 어, 얼마나 아껴온 것이거늘.’

백 년 묵은 약술.

오래오래 바라만 보아온 그것.

물론 이 정도 되는 물건들을 꺼내야 하니 칼날노래의 심리적 저항감도 상당했지만, 칼날노래는 결국 가진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계획대로.’

아무리 칼날노래가 체면에 죽고 사는 자존심 강한 야생신이라지만 미리 꺼낸 말 한마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때문에 유더는 이상한 일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미리 말을 맞춰두었다.

“오오! 과연 칼날노래님!”

“배포가 크십니다!”

“역시 칼날노래 오라버니세요. 정말 대단하세요.”

“인정할 수밖에 없군, 네가 최고다. 칼날노래.”

“껄껄걸, 역시 대단해. 동부 제일이라해도 과언이 아냐.”

고운눈바람 부족과 위대한폭풍 부족이 호들갑을 떨었고, 고운눈바람과 위대한폭풍, 거친눈사태 역시 한마디씩을 거들었다.

체면을 중시하는 칼날노래로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외통수에 걸린 셈이었다.

“에라이, 샹! 가져가라!”

“감사합니다!”

크게 감사를 표한 유더는 신기들과 고대의 약술을 챙겼다.

등 뒤에서 활짝 웃고 있는 코델리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집 유더 최고! 일등신랑감!’

물론 유더도 마구잡이도 뜯어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칼날노래는 서부와의 싸움에 앞장설 중요한 존재였고, 전쟁에 쓰일 물자를 뜯어내는 것은 아군 전체로 보면 손해가 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유더는 전쟁에는 쓰이기 힘든, 하지만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에게는 유용할 물품들을 집중적으로 뜯어냈다.

‘위대한폭풍님, 고운눈바람님, 거친눈사태님. 모두 감사합니다.’

칼날노래가 가진 각종 신기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줬을 뿐만 아니라 맞장구까지 쳐준 세 야생신들.

칼날노래의 신물들은 하늘지붕 산맥을 넘는데 유용하게 쓰일 터였고, 막대한 생명 에너지가 응축된 고대의 약술은 구천구문의 새로운 문을 여는데 도움이 될 터였다.

‘나 잘했지?’

‘응응, 너무너무 잘했어. 너무 예뻐. 마구 칭찬해주고 싶어.’

눈빛으로나마 유더를 잔뜩 칭찬한 코델리아는 방긋방긋 웃었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 옆에 앉은 뒤 붉은질풍에게 눈짓했다.

다시 회의를 진행하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다시 반시간 남짓.

야생신 하나의 가슴에 쓰라린 상처를 남긴 채 서부 출정을 위한 1차 회의가 마무리 되었다.

&

< 제38장 - 출정 > 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