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8장 - 출정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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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나, 신이나. 엣헴, 엣헴, 신이나.”
회의가 끝나고 난 뒤 유더와 코델리아의 천막 안.
바닥에 늘어놓은 칼날노래의 신물들을 보며 코델리아가 재롱(?)을 떨자 모여 있던 모두가 미소를 머금었다.
“모두 여행과 관련된 것들이구나.”
“네, 아무래도 명분이 명분이다 보니.”
하늘지붕 산맥을 넘기 위한 도움을 받는다-가 명분이었으니, 아주 동 떨어진 물건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만약 유더가 그저 뜯어내는 것에만 집중했다면 칼날노래가 허락하고 안 하고를 떠나 애당초 야생신들부터가 협력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도 신물이고, 다 도움이 될 거예요.”
코델리아의 말에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전부 쓸모가 많아 보이네.”
칼날노래가 내어준 신물은 모두 셋.
하나하나 나열하자면 ‘신비한 물통’과 ‘검은 늑대 가죽’, ‘한 평의 아늑함’이었다.
“공간 확장 물통과 변신 가죽,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천막···이라 해석하면 되려나?”
게일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묻자 유더가 동의했다.
“예, 전부 유용한 물건들이죠.”
코델리아의 팔뚝만한 대나무 물통은 생긴 것과 달리 욕조 몇 개 분에 달하는 물을 담을 수 있었고, 검은 늑대 가죽을 뒤집어쓰고 주문을 외우면 커다란 검은 늑대로 변신할 수 있었다.
마지막 한 평의 아늑함은 작은 공이었는데, 던지면 한 평짜리 훌륭한 천막이 되었다.
“일종의 쉘터 생성 주문 같네.”
동그란 가죽 공 모양인 한 평의 아늑함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아델리아가 말했다.
들은 바대로면 여러 가지 부가 기능까지 딸린 훌륭한 마법의 쉘터였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인 고대의 약물.
게일과 아델리아는 딱히 약물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
여행의 편의보다는 유더의 성장에 관련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신난다. 이거 마시면 유더가 더 강해질 거야.”
하지만 코델리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
이전부터 유더의 장비 교체 등등 유더가 강해지는 것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던 그녀였다.
유더는 이런 코델리아의 심리를 ‘게임 캐릭터 키우기’에 가깝다 생각했지만, 아델리아와 게일에게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어휴, 그렇게 좋니?’
‘정말 좋아하는구나.’
유더를 얼마나 좋아하면 저럴까.
유더의 형인 게일의 눈에는 흐뭇함이 가득했고, 아델리아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 미소를 흘렸다.
“아무튼 유더,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니.”
새로 얻은 물건들에 대한 정리가 끝나자 게일이 유더에게 말했다.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 이미 논한 바가 있지만 확실히 하기 위함이었다.
“예, 형님.”
“그럼 잠시 나가서 걷자꾸나.”
거기까지 말한 게일은 아델리아에게 잠시 실례한다 말한 뒤 천막을 나섰고, 유더는 서둘러 그런 게일의 뒤를 따랐다.
“어······?”
그런데 왜 굳이 나가는 걸까.
눈을 깜박이다가 아델리아를 돌아본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아델리아가 뭔가 잔뜩 벼른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어, 언니?”
“우리도 이야기 좀 하자.”
아델리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빼려는 코델리아의 손목을 붙잡더니 그대로 바짝 붙어 앉으며 말을 이었다.
“코델리아, 이미 이야기했지만 나랑 게일 공자는 너희와 따로 움직일 거야.”
“응응, 그런데?”
“너랑 유더 그 녀석은 단 둘이서 하늘지붕 산맥으로 향할 거고.”
“으응.”
하늘지붕 산맥은 야만족들도 다가가기를 꺼리는 험지이니 그걸 걱정하는 것일까?
“코델리아.”
“응, 언니.”
“조심해야 한다.”
“응, 조심할게. 나 이래봬도 산 잘 타. 겨울의 가호 있어서 추위도 별로 안 타고.”
“아니, 산이랑 추위 말고 유더를.”
“···어?”
유더를 조심해? 왜?
코델리아가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자 아델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순하고 착한- 한 마디로 순진한 여동생을 유더처럼 속이 시커먼 녀석에게 맡겨야 한다는 사실에 한탄한 뒤 소리 죽여 말했다.
“그러니까······.”
그리고 속닥속닥.
멍하니 듣던 코델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알겠지? 조심해야 한다? 너희는 분명 약혼한 사이지만, 결국 아직은 약혼일 뿐이야.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고. 거기다 둘 다 미성년자고. 언니 말 알겠지?”
아델리아가 엄중히 경고하듯 말했지만 코델리아에게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아니, 지금 언니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란 말인가.
“아니이.”
나랑 유더가?
나, 나랑 유더가?
지금까지 상상도 하지 못 한 일이었다.
아니, 분명 약혼자이긴 한데, 약혼한 사이이기는 한데, 자신이 유더랑 그렇고 그런 일을 할 거라고는··· 뭔가, 뭔가 상상이 안 된다고 해야 할까?
“아니는 뭐가 아닌데?”
“아니이··· 그, 그··· 맞아! 우, 우린 그런 사이 아니거든?”
나랑 유더인데?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쥐어짜낸 변명에 코델리아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지만 아델리아는 전혀 아니었다.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얘 좀 봐라. 그럼 너희 그런 사이 아니면 무슨 사이인데?”
“어?”
“유더 없이는 못 산다며. 네가 유더 꺼고 유더가 네 꺼고.”
직설적인 문장에 코델리아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아, 아니이··· 그, 그건 맞는데······.”
이미 질러놓은 말이 있어서 아니라고 부정은 할 수 없었다.
사실 그냥 알겠다고, 조심하겠다고 말하면 넘어갈 상황이었지만 사고가 정지한 코델리아는 어버버 거렸고, 상황을 넘기기 위해 반격을 선택했다.
“어, 언니도!”
“어?”
그냥 지르기만 했는데 아델리아의 표정이 변했다.
전투의 천재인 코델리아는 본능적으로 그 틈을 파고들었다.
“언니야 말로! 게, 게일 아주버님이랑!”
이번에는 아델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이러나저러나 자매이기에 서로 닮은 코델리아와 아델리아였다.
‘조, 좋아. 반격 성공.’
코델리아가 안도의 숨을 토한 그때였다.
“그··· 우리는······ 흠흠, 일단 둘 다 성인이니까······.”
아델리아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작게 말했고,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였다.
아니, 지금 언니가 무슨 말을 하는 거란 말인가.
둘 다 성인이니까?
성인이니까?
“잠깐, 언니야말로 게일 아주버님이랑 무슨 사이인데?”
분명 둘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있긴 했지만 처음 볼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코델리아가 급히 팔을 당기며 묻자 아델리아는 약간 의뭉을 떨더니 왕도의 부하들은 상상도 하지 못 할, 달달하기 그지없는 얼굴이 되어 말했다.
“어··· 아무 사이도 아닌 사이는 아닌 사이?”
그게 대체 뭔데.
뭐하는 사이인 건데.
아니,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
발갛게 달아오른 언니의 뺨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어.
“흐으응.”
코델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고, 아델리아는 헛기침을 토했다.
그리고 밖.
자매 둘이서 한창 분홍빛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을 때 형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부가 이기든 동부가 이기든 북부는 대비할 필요가 있다.”
평소처럼 온화한 게일의 얼굴이었지만 눈빛이 달랐다.
유더의 형으로서 이 땅에 왔지만, 그는 동시에 북부의 기사였다.
야만의 땅- 아니, 야생의 땅에서 일어나는 분란 그 자체보다는 세일룬 왕국의 안위를 더 우선할 수밖에 없었다.
“서부가 이긴다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거다. 동부가 이긴다 해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겠지. 하나로 모인 힘을 그냥 흩어버리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일 테니까.”
붉은질풍의 사람됨은 잘 알았다.
그는 분명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개인의 인품과 전쟁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였다.
지금껏 세일룬 왕국을 침공한 야생의 땅의 족장들 역시 미치광이나 피에 굶주린 전쟁광 따위가 아니었다.
다들 각자의 부족에게는 존경받는 지도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일어났다.
‘집결된 힘은 전쟁을 부른다.’
더욱이 붉은질풍은 전제정의 왕이 아니었다. 부족 연합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족장들의 생각이 전쟁으로 기울면 그 역시 전쟁을 고려해야만 했다.
‘어느 쪽이 이기든 전쟁은 일어날 수 있다.’
서부가 이기든 동부가 이기든.
그러니 북부는 미리 알고 대비를 해야만 한다.
“어쩌면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악마 추종자들의 손에 떨어진 서부보다는 동부가 이기는 편이 어쨌든 나았으니까.
하지만 설사 돕는다 할지라도 정말 결정적인 순간이 오지 않는다면 나서지 않을 터였다.
북부에게 있어 최선은 서부와 동부가 서로 공멸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비정한 계산이었다.
하지만 유더는 게일을 이해했다. 그는 북부의 수호를 맹세한 북부의 기사였으니 말이다.
“아델리아 누님과 함께 갈까마귀들의 둥지로 가시는 건가요?”
“그래야지. 마음 같아서는 너희도 데려가고 싶지만··· 그건 무리이니 말이다.”
야생신들의 왕인 황금의 용왕에게 수호자로 선택받은 유더와 코델리아였다.
여기에 철인 란디우스와 성십자수호단까지 얽혀 있으니 철없는 아이들의 가출은 이미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임무에 어울리는 힘 역시 갖추었고.’
불과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병약하기 짝이 없던 유더였거늘, 지금은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해졌다.
더욱이 유더만이 아니었다. 코델리아 역시 랑게스트에서 보았을 때보다 몇 배는 더 강해져 있었다.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도.’
두 사람에게 잇달아 일어난 기연들.
사실 태양의 목걸이부터 시작하여 전부 유더와 코델리아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기적들이었지만 그런 사실을 알 길이 없는 게일이었다.
하나하나가 놀라운 일들인데 이것들이 연속해서 일어나니 게일의 눈에는 하늘의 뜻이 두 사람과 함께하는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게일은 순순히 인정했다.
두 사람에게는 두 사람만의 임무가 있다.
그 임무를 방해하지 않는다.
“그래도 금방 돌아올 거다. 내가 여기까지 온 목적은 너희 두 사람의 밀월여행을 끝내는 것도 있지만, 동시에 너희 두 사람을 보호하는 것도 있었으니 말이다.”
“기사 게일 바이엘 개인은 야생의 땅을 돕는다는 건가요?”
“조금 거창하지만 그런 거겠지.”
“아델리아 누님은 떼어놓고?”
“그러고 싶다만··· 가능할지 모르겠구나.”
말린다하여 들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게일이 빙긋 웃으며 말하자 유더는 숨을 한 번 깊이 삼켰다. 게일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지나가듯 물었다.
“이제··· 괜찮아지신 건가요?”
게일이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은 이유.
과거에 있었던 사건.
이제 괜찮아진 것일까. 그때의 아픔을 극복한 것일까.
“잘 모르겠구나. 다만··· 시간이 벌써 10년 가까이 흘렀으니까. 어쩌면 내게는 그저 계기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리고 정말 그러한 것이라면, 유더와 코델리아 덕분에 그 계기를 맞이한 것일 테고.
“고맙다, 가출해줘서.”
불쑥 튀어나온 게일의 말에 유더는 눈을 껌벅였고, 게일은 다시 미소 지었다.
마치 아무 말도 한 적 없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유더를 돌아보며 말했다.
“코델리아 양을 잘 지켜주렴.”
“네, 형님. 제 목숨보다 소중히 하겠습니다.”
“그러려무나.”
유더의 어깨를 두드려준 게일은 새삼 남쪽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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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더와 게일 모두 괜히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그날 바로 짐을 꾸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조심하렴.”
“코델리아, 언니 말 기억하지? 조심해야 한다? 응? 알았지?”
담백한 게일의 인사와 길게길게 이어지는 아델리아의 인사를 끝으로 두 사람은 남쪽으로 향했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북쪽으로 향했다.
“코델리아.”
“응?!”
별 것 아닌 부름에 코델리아가 흠칫하며 답하자 유더는 미간을 좁히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괜찮아? 아델리아 누님이랑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응, 아무 일도. 응응응, 눈이 참 하얗네. 하얀 색이야. 눈은 왜 이렇게 하얀 걸까?”
수상하기 짝이 없는 말 돌리기에 유더의 눈이 조금 더 가늘어졌다.
‘당황해서 버벅이는 걸 보니 분명 뭔가 있긴 있었는데.’
뭘까.
아델리아와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걸까.
“코델리아.”
“응?”
슬쩍슬쩍 앞장서서 걷던 코델리아가 조금은 과장스럽게 돌아섰다.
유더는 평범을 가장한 채 물었다.
“갈 길이 먼데 업어줄까?”
평소라면 바로 ok를 외치며 달려들 코델리아였다.
하지만 오늘은 순간 혹 한 듯 눈을 반짝이는가 싶더니 이내 도리질을 했다.
“아냐, 괜찮아. 오늘은 그냥 걸을래. 응응.”
부끄러웠으니까.
지금까지는 유더에게 업히든 안기든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아델리아 언니 때문에 갑자기 부끄러워졌으니까.
“빨리 가자, 빨리.”
코델리아는 빨개진 뺨을 감추기 위해 더욱 서둘러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고, 유더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딱히 추궁하지는 않았다.
하늘지붕 산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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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렀다.
동부 연맹의 1차 회의로부터 사흘 뒤.
서부 정벌을 마친 성난뿔소 부족의 본대가 동부로 향했다. 서부의 전력들 역시 한 곳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동부는 이런 서부의 움직임을 지켜만 보지 않았다.
이미 1차 회의에서 확인한 것처럼 서부를 전쟁터로 삼기 위해 원정을 개시했다.
그리고 다시 사흘 뒤.
동부와 서부의 직접 대결이 시작되려는 순간.
국경을 향해 나아가던 게일과 아델리아에게 사건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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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8장 - 출정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