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8장 - 초대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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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파이커스.
파이커스 백작가의 차녀인 그녀는 예전부터 코델리아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참으로 단순 명료했다.
‘짜증나잖아.’
코델리아의 존재 그 자체가.
인형 같이 예쁜 애가 착하기까지 하다니. 그것도 착한 척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착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올해도 신나게 밟아줘야지.’
사실 말이 좋아 밟는 거지 그냥 약혼자로 창피를 주는 정도가 다였지만, 올해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제 무덤을 아주 열심히 파주었으니까.’
바깥 외출도 잘 못하던 약혼자가 좀 건강해졌다고 신이 난 걸까?
요 두어 달 사이에 알아서 망신당할 일을 잔뜩 준비한 코델리아였으니 말이다.
‘아, 너무 기대된다.’
부르르 몸을 떤 엠마 파이커스는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보았다.
분홍빛 머리칼을 길게 기른 작고 사랑스러운 소녀가 보였다.
사실 엠마 파이커스가 유독 코델리아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머리색에 있었다.
똑같이 붉은 머리이다 보니 어딜 가나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좋아, 좋아. 올해야말로 정말 콱 밟아주겠어.’
사랑스러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음흉한 미소를 지은 엠마 파이커스는 가만히 준비한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아버지를 졸라 마련한 새 드레스와 장신구들, 여기에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한 멋진 약혼자까지.
‘아, 너무너무 기대된다.’
빨리 생일날이 되었으면.
재차 음흉한 미소를 흘린 엠마 파이커스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떨어진 바일룬에서 자신 이상으로 생일날을 고대하고 있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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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뒤, 파이커스 백작령.
북부 12가문 가운데 하나인 크로스벨 백작가의 장녀 실비아 크로스벨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화려한 취미는 여전하네.’
드넓다 못 해 광활하기까지 한 파이커스 백작가의 정원 위에는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진 연회장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연회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싱싱한 생화들과 야외 행사를 가능케 해주는 온도 조정 장치.
이미 저 두 가지만으로도 여간한 귀족가에서는 한 해 예산을 걱정해야 할 수준이었는데, 연회장을 꾸미기 위해 동원된 갖가지 물품들의 수준도 만만치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파이커스라 이건가.’
사실 엠마 파이커스가 이상할 정도로 코델리아에게 집착해서 그렇지, 체이스 백작가와 파이커스 백작가 사이에는 딱히 관계라고 할 것이 없었다.
똑같이 북부12가문에 속해있기는 했지만 활동 분야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마탑을 소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영지가 없는 체이스 백작가는 인재의 힘으로 영향력을 유지했다.
반면 파이커스 백작가는 북부의 젖줄이라 불리는 실리코네스 강의 삼각주를 영지로 가진 덕에 북부 최고의 곡창은 물론이고 최고의 중계무역도시까지 손에 쥐고 있었다.
즉, 막강한 영지의 힘으로 영향력을 유지하는 경우였다.
때문에 파이커스 백작가의 진짜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체이스 백작가가 아닌 크로스벨 백작가였다.
‘북의 크로스벨, 남의 파이커스.’
금융업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크로스벨 백작가와 농업과 상업을 병행해 만만치 않은 수익을 올리고 있는 파이커스 백작가.
북부12가문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재력을 가진 두 가문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파이커스 백작가가 금융업에까지 손을 뻗기 시작하면서였다.
물론 이미 북부의 금융계를 절반 이상 장악한 크로스벨 백작가에 비하면 파이커스 백작가의 금융업은 애들 장난 수준이긴 했지만, 그렇다 하여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짜증나는 사실이긴 하지만, 파이커스 백작가에는 저력이 있으니까.’
지금이야 애들 장난 수준이라지만, 언제 어떤 식으로 세를 불릴지 모르는 게 파이커스 백작가였다.
단순히 재력만 놓고 보자면 크로스벨 백작가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게 파이커스 백작가였으니 말이다.
‘하아··· 진짜 여간하면 오고 싶지 않았는데.’
실비아 입장에서 파이커스 백작가는 적지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사실 크로스벨 백작가든 파이커스 백작가든 서로 마주하는 상황을 꺼리는 편이기는 했다.
당장 북부12가문 자제들의 친목회 때도 참가하지 않은 파이커스 백작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엠마 파이커스의 생일 파티 때만은 늘 빼놓지 않고 초대장을 보내는 파이커스 백작가였다.
편도에만 며칠이나 걸릴 정도로 두 가문 사이의 거리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뭐, 속내는 짐작이 가긴 하는데.’
신경 건들기.
우리가 이만큼 잘나간다.
우리가 일단 예의를 차려서 초대장은 보내는데, 올지 말지는 뭐 너희 마음대로 하시든가.
성격이 불같기로 유명한 크로스벨 백작이 이런 파이커스 백작가의 도발을 그냥 넘길 리 만무했으니, 실비아는 매년 치장에 힘을 팍 준 상태로 엠마 파이커스의 생일 파티에 참석해야만 했다.
‘이유가 하나 더 있기는 하지만.’
다름 아닌 코델리아.
엠마 파이커스는 예전부터 이상하리라만치 코델리아에게 못되게 굴었는데, 워낙 바깥출입이 적은 코델리아다보니 친한 영애도 적어 제대로 된 방어를 하지 못 하고 있었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는 신세라고 해야 할까.
‘올해는 작년보다 더 힘이 되어줘야지.’
엠마 파이커스가 늘 팩트로 때리다보니 실비아도 코델리아를 제대로 돕지 못 했지만, 올해는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코델리아를 비호할 생각이었다.
랑게스트에서의 은혜를 갚아야만 했다.
‘그리고··· 올해는 조금 다를 테니까.’
엠마 파이커스의 주 공격수단이었던 코델리아의 약혼자.
잠시 랑게스트에서의 일을 떠올린 실비아는 평소답지 않게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나, 실비아 양. 올해도 정말 아름다우세요.”
“미아 양이야말로 너무 사랑스러우신 걸요?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감각이 참 좋으신 것 같아요. 이번에도 드레스 색을 정말 잘 고르셨어요.”
“정말요?”
“그럼요.”
실비아의 칭찬에 발룬 자작가의 차녀인 미아 발룬이 뺨을 발갛게 붉히며 좋아했지만, 어째 그녀 외에는 실비아에게 다가오는 소녀가 없었다.
‘파이커스 백작가의 파티니까.’
기본적으로 파이커스 백작가의 눈치를 보는 자리였다. 초대받은 가문들도 죄다 파이커스 백작령 근처에 자리하고 있으니, 크로스벨 백작가의 영애인 실비아 곁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미아가 특이한 거고.’
하지만 저만치서 이쪽을 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영애들을 보아하니 내년부터는 미아도 자신 곁에 다가오지 않을 것 같기는 했다.
“와, 엠마 양이에요.”
미아가 눈을 빛내며 말하자 실비아는 그녀를 위해 부드럽게 발걸음을 떼어 거리를 벌렸다.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엠마 파이커스에게 들키면 미아가 곤란해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주인공 행차신가.’
보무도 당당히 연회장에 들어선 엠마 파이커스와 그 약혼자인 다렌 필로프.
짜증나는 일이긴 했지만, 역시 파이커스 백작가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냥 졸부는 또 아니란 말이지.’
졸부 성향이 있긴 했지만, 나름 전통 있는 부자다보니 돈을 제대로 쓸 줄 알았다.
엠마 파이커스는 그녀의 옅은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디자인도 디자인이었지만, 드레스에 붙은 장신구들이 보통이 아니었다.
‘요정.’
체구가 작고 아담한 엠마 파이커스의 약점을 누르고 장점을 부각시키는 사랑스러운 디자인.
엠마 파이커스는 요정 같았고, 금실로 장식된 하얀 예복을 입은 다렌 필로프는 이야기 속의 왕자와 같았다.
‘아주 제대로 컨셉을 잡았다 이거지?’
하지만 제법 잘 어울리기는 했다.
연회장에 자리한 영애들이 다들 진심으로 감탄을 토할 만치 말이다.
“어머나, 코델리아 양은 아직인가요?”
연회장의 영애들가 가볍게 인사를 나눈 엠마 파이커스는 새삼 생각났다는 듯 살짝 호들갑을 떨며 말했고, 주변의 영애들이 바로 말을 받아주었다.
“아무래도 늦는 모양이네요.”
“최근에 사고를 많이 친 모양인데··· 외출 금지라도 당한 건 아닐까요?”
“어쩌면 약혼자 분 때문에 늦는 걸지도······.”
“하긴, 몸이 안 좋으시니까요. 조금 나아지신 것 같긴 하지만··· 최근에 좀··· 무리를 많이 하시기도 했고요. 그렇죠?”
엠마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영애들이 바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아, 진짜.’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는 광경이었지만 실비아는 일단 참기로 했다. 본인도 없는데 여기서 나서봐야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진짜 왜 이렇게 늦지?’
이런 행사에 늦는 일이 없는 코델리아였는데.
오늘은 왜 늦는 것일까.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저치들 말처럼 유더에게 무언가 문제라도?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늦는 이유는 유더 때문이 맞았지만, 문제가 생겨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더가 일부러 늦게 참석한 이유.
모든 영애들이 다 모이고, 오늘의 주인공인 엠마 파이커스 역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린 이유.
“체이스 백작가의 코델리아 양 입장하십니다.”
집사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코델리아 외에는 모든 영애들이 모인 상태였으니 말이다.
“이제야 겨우 왔나보네요.”
“역시 약혼자 때문일까요?”
엠마 파이커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몇몇 영애가 험담하듯 입을 열었지만 잠깐 뿐이었다.
코델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지 못 했다.
시선을 빼앗겼으니까.
연이어 넋을 놓고 말았으니까.
“와아······.”
미아 발룬이 멍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녀만이 아니라 연회장에 참석한 영애들 모두가 멍한 얼굴이 되었다.
코델리아 체이스.
그녀의 미모는 예전부터 유명하기는 했다.
같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멍하니 바라보게 될 만치 아름다운 소녀인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눈앞의 광경을 묘사할 수 없었다.
“코델···리아?”
실비아조차도 넋을 잃고 말았다.
멍청한 목소리를 흘리며 눈을 깜박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신.
인외의 존재.
옅은 분홍빛이 감도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코델리아가 우아한 미소를 머금은 채 연회장 안에 들어섰다.
선홍빛 머리칼에서는 마치 빛이 나는 것 같았고, 곳곳에 두른 장신구들 역시 과하지 않게 존재감을 드러내며 코델리아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내주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아름다움.
‘뭐, 뭐야.’
그나마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실비아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다.
본래 예쁜 애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였나?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나니 보이는 것이 있었다.
‘똑같다?’
코델리아가 입고 있는 드레스의 디자인.
정말로 똑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디자인의 경향이 엠마 파이커스의 드레스와 같았다.
‘색도 비슷하네?’
비슷한 옷.
그렇기에 비교하기 싫어도 비교할 수밖에 없는 그것.
하나 둘 정신을 차린 영애들 역시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저도 모르게 엠마 파이커스를 돌아보았고, 다시 코델리아를 보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압도적이라고 밖에 표현 못 할 두 사람 사이의 격차.
엠마 파이커스도 사랑스러운 소녀이기는 했지만, 지금의 코델리아는 그냥 여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키도 더 컸고, 몸매도 훨씬 더 좋았다.
그나마 옷이라도 달랐으면 몰랐을 터인데, 옷까지 같으니 사랑스러운 소녀였던 엠마 파이커스는 순식간에 구겨진 오징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옷만이 아냐.’
실비아의 날카로운 안목에 다른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코델리아가 두른 장신구들.
모두 보통이 아니었다. 더욱이 무서운 것은 장신구들의 위치와 숫자가 엠마 파이커스의 것과 같다는 사실이었다.
‘거기다 전부 상위호환?’
황금을 썼다고? 응, 우린 백금이야.
다이아몬드? 응, 우리께 더 크고 아름다워.
-라는 느낌이랄까?
‘작정을 했구나.’
엠마 파이커스를 짓뭉개기로.
이 연회장에서 엠마 파이커스의 존재감을 완전히 지워버리기로.
그리고 이 같은 음모를 꾸민 것은 역시-
‘계획대로.’
완전히 압도된 연회장을 보며 유더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고, 코델리아는 당황한 얼굴로 유더를 돌아보았다.
‘유더야, 유더야. 이거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응, 그냥 계획대로야.’
엠마 파이커스가 무슨 옷을 입고 나오는지, 어떤 장신구를 사용할 것인지 이미 모두 파악해둔 유더였다.
서브 퀘스트로 한 번 나오고 마는 캐릭터였지만, 유더 위키에는 그녀에 대한 정보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염탐도 좀 했고.’
파이커스 백작가가 오늘을 위해 쓴 돈은 참으로 많았다.
자연 어떤 드레스를 입는지, 어떤 장신구를 쓰는지 업계에는 소문이 돌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지식에 염탐한 정보를 덧붙여 완벽을 기한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드레스를 들고 폴 페어리 퀸을 만나고 온 유더였다.
요정의 축복을 마구 퍼부은 드레스와 마젤란의 장신구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진 또 하나의 무기.
‘보아라, 저 반짝이며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코델리아의 머리칼은 평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이유는 단순했는데, 샴프와 린스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샴프랑 린스가 없더라고.’
문명이 꽤 발달한 세계인만큼 비누를 비롯한 기본적인 세척제는 있었지만, 샴푸와 린스까지는 없었다.
때문에 유더는 라이제강으로부터 태양의 목걸이를 탈취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연구를 거듭하였고, 마침내 상업용으로 사용해도 좋을 정도의 샴푸와 린스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미용에 관심 없는 여자는 없는 법.’
아니, 적어도 상류층 여인이라면 관심을 가지기 싫어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유더가 기를 쓰고 샴프와 린스를 개발한 이유는 단순했는데, 왕도 편에서 왕족이나 고위 귀족들과 접선할 때 교섭 재료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효과가 있어.’
실비아를 비롯해 안목 높은 영애들이 코델리아의 머리칼에 일어난 이변을 눈치 챘다.
저들에게 다가가 당신들도 똑같이 될 수 있다며 샴푸와 린스를 내밀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아무나 주지 않고, 코델리아의 친구들에게만 특별히 주는 것이라며 선별해서 준다면.
‘연회를 장악해주마.’
시작은 엠마 파이커스의 생일잔치였을지 몰라도, 끝은 신생 코델리아의 환상적인 데뷔 무대로 만들어주마.
그리고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유더가 준비한 것들은 아직도 많았다.
일단은 유더 자신.
“유더 바이엘입니다. 여러 영애분들께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유더가 앞으로 나서 예를 표하자 영애들 사이에서 작게나마 신음과 비명이 번졌다.
유더 바이엘.
영웅전기2의 얼짱사대장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는 남자.
그런 유더가 작정하고 꾸몄으니 여인들 사이에서 비명이 번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나도 맞췄거든.’
엠마 파이커스의 약혼자와 의상과 장신구를. 심지어는 머리 스타일까지.
유더의 의도는 이번에도 먹혀들었고, 다렌 필로프 역시 엠마 파이커스와 마찬가지로 구겨진 오징어가 되는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 정도로 뻗으면 곤란하지.’
아직이야. 아직 준비한 게 많으니까 이대로 찌그러지지 말아줘.
유더의 염원이 닿기라도 한 것인지, 엠마 파이커스가 이를 악 문채 앞으로 나섰다.
억지로나마 표정을 유지한 채 코델리아를 환대했다.
“어머나, 역시 멋진 분이시네요. 코델리아 양께서 그런 편지를 남기실 만도 해요.”
그런 편지.
몇 번이나 반복된 코델리아의 야반도주.
순간 코델리아의 얼굴이 빨개졌고, 영애들 사이에서 작은 수군거림이 번졌다. 엠마 파이커스의 얼굴에도 아주 약간이나마 생기가 돌아왔고 말이다.
하지만 유더는 여전히 사악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당연히 예상한 수순이었기 때문이다.
‘올 때가 되었는데.’
오늘을 위해 수배한 자들.
유더는 속으로 숫자를 헤아렸고, 딱 예상한 시간에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성십자 수호단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당황한 집사의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순백의 성의를 입은 성십자 수호단의 정예들이 연회장 안에 들어섰다.
“성십자 수호단이?”
“어머나, 설마 엠마 양의 생일을 축하하러?”
악마들로부터 대륙을 수호하는 성십자 수호단.
그들의 위명은 결코 낮지 않았다. 어떤 의미로는 왕실 이상 가는 권위를 가진 집단이었으니 말이다.
단순한 전투복이 아닌, 예장용 성의를 입은 성십자 수호단의 등장에 다시 한 번 모두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었고, 그 시선의 주인이 된 성십자 수호단의 성기사- 근엄함의 현신이라 해도 좋을 아인돌프 경은 흔들림 없는 자세로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어머나, 정말 엠마 양의 생일을 축하하러?”
“성십자 수호단이요?”
영애들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번졌고, 엠마 파이커스의 얼굴에 당혹감과 기대감이 함께 번졌다.
그리고 아인돌프 경이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엠마 파이커스가 아닌 코델리아의 앞에 말이다.
“성십자 수호단이 단의 은인을 뵙습니다.”
“은인을 뵙습니다.”
아인돌프 경의 뒤에 자리하고 있던 수호단원들이 일시에 예를 표하니 마치 한 폭의 성화와 같은 광경이 만들어졌다.
코델리아는 당황해서 유더를 돌아보았고, 유더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아인돌프 경,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일어나주세요. 코델리아도 그러길 바랄 겁니다.”
유더의 말에 아인돌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동시에 영애들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호기심, 참을 수 없는 궁금함이 퍼져 나갔다.
왜지?
왜 성십자 수호단이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예를 표하는 거지?
하지만 놀랄 일은 아직 남아 있었다.
유더는 코델리아에게 신호를 보냈고, 코델리아는 우물쭈물하면서도 일단 약속한 대로 계획을 진행했다.
날개를 꺼내지 않는 천사화.
순간 코델리아의 분위기가 변했다.
그렇지 않아도 여신 같던 그녀에게 이제는 정말 성스러움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제일 민감하게 포착한 것은 성십자 수호단이었다.
아인돌프 경은 저도 모르게 눈을 껌벅이며 감탄을 토했다.
“처, 천사님?”
살짝 유치한 연출이긴 했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성십자 수호단의 성기사가 천사로 착각한 여인이란 타이틀이 코델리아에게 붙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 아뇨. 처, 천사라니요.”
코델리아는 완전히 빨개진 얼굴로 어버버 거렸고, 유더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다.
성십자 수호단을 하필 이 자리에 부른 이유.
앞으로의 협조를 약속하고 오늘 이 자리에 성십자 수호단을 파견해 달라 한 이유.
유더와 코델리아에 대해 퍼져 있는 이런저런 소문들을 일소한다.
단순히 사랑에 빠져 가출을 반복한 비행청소년에서 성십자 수호단이 직접 예를 표할 정도의 큰 공을 세운- 북부를 위해 악마 추종자들과 싸운 영웅들로 새로이 포장한다.
‘완벽해.’
유더의 눈빛을 받은 아인돌프 경은 북부에서 있었던 유더와 코델리아의 활약상을 모두의 앞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야생의 땅의 이야기는 많이 생략한, 여기저기 각색된 부분이 많은 이야기였지만 여론을 반전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좋구나.’
진한 미소를 머금은 유더는 엠마 파이커스 쪽을 돌아보았다.
넋이 나간 얼굴로 눈만 껌벅이고 있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제 더 손을 쓸 필요도 없겠군.’
나머지는 그저 흐름에 맡기면 될 터이니.
그리고 정말 유더의 생각대로 되었다.
아인돌프 경을 필두로 한 성십자 수호단이 물러가자 실비아가 코델리아에게 말을 걸었고, 유더는 실비아에게 샴푸와 린스를 광고했다.
“언니도 사용해 보세요.”
코델리아가 작은 단지를 실비아에게 넘긴 순간 다시 한 번 변화가 일어났다.
쭈뼛쭈뼛 이쪽을 쳐다보기만 하던 영애들이 접근을 시작한 것이었다.
엠마 파이커스에서 코델리아 체이스로.
연회의 주인공은 완전히 바뀌었고, 한 번 바뀐 분위기는 연회가 끝날 때까지 쭉 유지가 되었다.
그리고 늦은 오후.
예정보다 훨씬 일찍 끝난 연회장을 바라보던 유더는 코델리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무쪼록 만족하셨는지요?”
능청스러운 물음에 코델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일단 유더의 정강이부터 걷어찼다.
“아야! 왜?!”
“왜긴 왜야! 내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알아?”
특히나 아인돌프 경이 천사님?!하고 놀랐을 때는.
새삼 얼굴이 빨개진 코델리아는 다시 앙증맞은 주먹으로 유더의 가슴을 때렸다.
“맨날 부끄러움은 내 몫이고!”
미리 말이라도 해주든가!
“허허, 그래도 잘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더 짜증나는 거거든?”
코델리아의 말에 유더는 키득 웃더니 재빨리 발을 놀렸다. 순식간에 코델리아의 옆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가느다란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서, 싫어?”
“아니, 너무 좋아!”
사실 좀 불쌍할 정도이긴 했지만.
아무튼 그간 쌓인 짜증이 한 번에 다 풀렸으니까.
“역시 우리집 유더지요?”
“응응, 우리집 유더야.”
기분 좋게 웃은 코델리아는 이내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런데 유더야.”
“어.”
“샴푸랑 린스 시제품 아직 남은 거 있지? 왕도 가져갈 거 말고도.”
“있는데?”
“그럼 엠마한테도 좀 주자. 엠마 기분 상하지 않는 방식으로 잘 생각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좀 너무한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오늘이 생일인데.
코델리아의 말에 유더는 다시 미소를 지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신다면야.”
역시 괜히 천사의 피를 이은 것이 아니라니까.
코델리아의 마음 씀씀이에 만족한 유더는 에스코트를 위해 손을 내밀었고, 코델리아는 유더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남짓.
북부의 영애들 사이로 샴푸와 린스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갈 때.
왕도편의 시작을 알리는 건국 기념회 초대장이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에 도착했다.
&
< 제48장 - 초대장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