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134화 (134/473)

< 제50장 - 생명의 신전 >

제50장 - 생명의 신전

생명의 여신 에어리스.

솔라리처럼 대천사는 아니었지만, 바로 밑이라 할 수 있을 치천사의 위를 가지고 있던 강력한 천상의 존재.

그녀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당시의 지상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장소였다.

사방천지에 위험이 넘쳐났고, 지진이나 홍수 같은 재난이 매일 같이 이어졌다.

제대로 된 나라조차 건국하지 못 한 인간들은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마물들에게 매일같이 쫓겨 다니기 바쁜 사냥감에 불과했다.

“자애로운 에어리스는 그런 인간들을 그냥 방치할 수 없었어.”

애당초 그녀가 지상에 온 이유는 인간들을 보살피기 위함이 아니었다.

지상으로 진출하려는 악마들을 저지해 궁극적으로는 천상을 수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인간들을 지키고 보살피는 일에 더 매진하기 시작하였고, 인간들은 자애로운 그녀를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하였다.

“하지만 솔라리와 마찬가지로 에어리스 또한 영원하지 못 했어.”

태양의 여신 솔라리.

지고의 존재.

가장 강력한 인간의 신.

하지만 그녀는 대군주와의 싸움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고, 지상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

에어리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싸운 상대가 대군주가 아닐 뿐, 그녀 역시 인간들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거듭한 끝에 목숨을 잃은 것은 매한가지였으니 말이다.

“에어리스가 사라지고, 구심점이었던 여신을 잃은 교단은 몰락하기 시작했어. 악마들은 그 추종자들을 부려 생명의 교단을 철저하게 파괴했지.”

몰락의 원인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여신이 사라진 이후 에어리스 교단의 성직자들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은 크게 제한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보다 강한 힘을, 자신들을 지켜줄 힘을 찾아 아직 건재한 교단들로 돌아섰다.

“여신의 죽음, 악마들의 집요한 공격, 여기에 이어진 집단적인 배교까지··· 생명의 교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어.”

생명의 교단은 사라졌고, 사람들은 교단의 존재를 잊어갔다.

“하지만 아직 그 명맥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야. 지상의 인간들을 사랑했던 에어리스의 사념··· 아니, 그녀의 사랑 역시 아직은 지상에 남아있어.”

생명의 신전과 그곳에 안치되어 있는 생명의 구가 바로 그 증거였다.

“그러니까··· 듣고 있니? 코델리아야?”

유더가 등 뒤에 물었지만 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저기, 코델리아야? 너님이 물어본 이야기거든?”

다시 물었지만 이번에도 답이 없었다.

‘자는 건 아닌 거 같은데.’

등에 업고 있는 터라 얼굴까지 보긴 어려웠지만, 그 정도는 숨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잠든 사람 특유의 호흡이라는 게 있었으니 말이다.

‘업었을 때 느낌도 있고.’

잠든 사람을 업는 것과, 그래도 깨어서 자기 몸을 가누는 사람을 업었을 때의 차이 역시 명확했다.

‘어··· 설마 아직도?’

마을을 떠나 여기까지.

어림 잡아도 두 시간은 족히 지난 지금 이 시점까지.

그리고 유더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뭐지? 뭘까? 어떤 소원을 빌려는 거지?’

코델리아의 고민은 점점 더 깊어졌고, 망상 역시 마구마구 뻗어나갔다.

‘설마? 설마설마?’

끝없이 뻗어나가던 망상이 코델리아의 머릿속에 앉아있던 델리아에 닿았다.

정확히는 델리아가 해준 말에 닿았다.

‘하고 싶을 걸요? 그것도 엄청나게?’

키스.

입술을 맞추는 것.

마우스 투 마우스.

아델리아 언니가 엄청 좋아하는 거.

‘유더 공자도 사람이에요, 사람.’

맞는 말이었다. 유더도 사람이었다.

거기다 델리아 말처럼 남자였고 말이다.

그리고 코델리아는 한창 꿈 많고 망상 많은 십대 소녀였다.

‘진짜면 어떡하지?’

유더가 소원으로 키스하자고 하면.

정말로 그렇게 나오면.

진짜 키스하자고 하면.

코델리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머리에 피가 쏠렸고, 망상은 더더욱 박차를 가했다.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약혼식날 보았던 아델리아와 게일의 키스씬이 재생되었는데, 소녀의 망상이라는 필터를 거친 탓에 엄청나게 미화된 상태였다.

‘우우웅······.’

부끄럽다. 너무너무 부끄럽다.

하지만.

하지만 어쩐지 모르게······.

‘으악! 안 돼! 생각을 끊어야 해! 유더잖아! 유더라고! 아웃복서009!’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게임 존나 못 한다고 욕하고 도망친 놈!

그 뒤로도 맨날맨날 놀려먹던 못된 놈!

‘맞아!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소원을 빌 리가 없어! 분명 다른 소원을 빌 거야!’

차라리 코델리아 자신에게 망신을 줄만한 소원을 빌리라.

‘응응, 논리적이야.’

그치만.

그치만 만약에.

만약에의 만약에.

‘가능성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 코델리아는 열심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이씨 몰라! 일단, 일단 난 약속을 지키는 여자니까!’

까짓 거 하자고 하면 한다!

해주지 뭐!

키스 좀 한다고 입술이 닳는 것도 아니고!

남도 아니고 유던데 뭘!

‘그래, 코델리아. 호방하게 가자!’

승부를 했고, 졌으니까 승복한다. 찌질하게 굴지 말고 결과를 받아들인다!

‘할 수 있어!’

망상이 계속된 결과 이렇다 할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키스로 소원권을 확정시킨 코델리아였다.

그리고 그랬기에 새로운 생각들이 마구마구 생겨났다.

‘나 입술··· 괜찮겠지?’

트거나 하지 않았지?

슬쩍 만져보니 괜찮았다. 부드러웠고, 촉촉했다.

‘잠깐, 냄새나면 어떡하지?’

생각해보니 이를 닦은 게 언제였더라? 저녁 먹고 닦았던가?

‘오늘 저녁 메뉴가 뭐였지?’

분명 하얀 비둘기 관에서 먹었는데.

감자랑 당근을 넣은 돼지고기 찜이랑 빵이랑··· 닭고기 스프!

코델리아는 얼른 입을 가린 뒤 하-하고 숨을 토해보았다.

재빨리 코를 킁킁거리니, 살짝이지만 돼지고기 냄새가 나는 기분이 들었다.

‘아, 안 돼. 이대로면 내 첫 키스가 돼지고기 찜 맛 키스가 되어버··· 잠깐, 잠깐 잠깐 잠깐!’

너무나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돼지고기 찜 맛 키스보다 더 중요한 것!

‘처, 첫 키스!’

처음이다.

최초. 퍼스트. 1등.

그런데 그 상대가 유더라고?

‘잠깐, 그럼 유더가 내 첫 키스 업적을 따가는 거야? 1등으로? 이것도 1등이야? 이걸 유더가 1등 하게 해줘야 해? 이것마저?’

아주 약간이지만 머리가 차가워졌다. 하지만 애당초 헛소리가 마구 뻗어나간 결과였기에 그리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코델리아. 심호흡을 하는 거야. 소수도 좀 세고. 응응, 소수를 세자.’

2, 3, 5, 7, 11······.

‘소수는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지는 고독한 숫자.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지.’

도움이 되었다. 만화 대사까지 떠올린 결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코델리아야, 코델리아야. 마음을 단단히 먹어. 약속했잖아?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그러니까 승부사답게 약속을 지키는 거야!’

아직 유더는 키스해달라는 말을 꺼낸 적이 없지만, ㅋ자 조차 언급한 적이 없지만 아무튼 이미 코델리아의 머릿속에서는 확정사항이었다.

‘좋아, 일단 이를 닦자.’

깨끗하게.

얼마 전에 구입한 민트로 입안도 맑게 하고.

코델리아는 천천히 눈을 감은 뒤 숨을 길게 토했다.

이미 유더가 코델리아 자신을 몇 번이나 불렀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더야.”

“코델리아?”

“응, 유더야. 나, 이를 닦고 싶어.”

“응?”

갑자기 이는 왜?

“중요한 일이야. 꼭 닦고 싶어.”

코델리아가 어쩐지 모르게 경건한 느낌까지 드는 목소리로 다시 말하자 유더는 미간을 좁혔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생뚱맞기는 하지만······.’

코델리아가 이러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거기다 저녁 먹고 제대로 씻을 틈이 없기는 했으니까. 입안이 텁텁해진 모양이었다.

‘어차피 자기 전에는 닦아야 하고.’

고개를 끄덕인 유더는 시선을 멀리하며 답했다.

“조금만 참아. 한··· 10분 남짓만 더 가면 야영할 장소가 나올 거니까.”

“10분?”

“어, 10분.”

유더의 말에 코델리아의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10분.

앞으로 10분.

10분 뒤에는.

지금으로부터 10분 뒤에는.

“코델리아?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어? 어. 괜찮아. 완전 괜찮아.”

“숨이··· 거친데?”

“아니야. 응, 아니야.”

코델리아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고, 유더는 더 묻는 대신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일단 내려놓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정말로 10분 뒤.

유더의 등에서 내린 코델리아는 열심히 이를 닦았다.

망상에 절여진 뇌와 너무 뛰어 이제는 살짝 아픈 기분까지 드는 심장을 어찌어찌 진정시키고자 심호흡도 계속했다.

‘좋아, 좋아. 괜찮아.’

이만하면 달빛도 좋고.

분위기도 좀 있는 것 같고.

‘하자. 하자꾸나.’

칫솔을 챙긴 코델리아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뒤 유더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유더가 말했다.

“잠자리 깔아놨으니까 자자. 알람 마법이랑 경계 마법 걸었으니까 불침번은 딱히 안 서도 될 거야.”

“응?”

“자자구. 피곤하잖아.”

전투도 한 번 했고, 2시간 넘게 달리기까지 했다.

코델리아의 경우엔 달리지 않고 업히기만 했지만, 고속으로 이동하는 유더의 등에 업혀있는 것도 이래저래 힘든 일이기는 했다.

말을 타고 오래 달리면 지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럼 잘 자, 내 꿈꾸고.”

“어, 그래 잘···자가 아니라!”

“코델리아?”

유더가 눈을 깜박이자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답했다.

“아니이! 야! 그냥 자자구?”

“그럼?”

“소, 소원! 소원권 써야지!”

“나중에 하면 안 돼?”

“안 돼! 나중가면 안 해줄 거야!”

코델리아가 앙탈부리듯 외치자 유더는 눈을 껌벅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지금 빌지 뭐.”

유더의 말에 코델리아는 흠칫하더니 새삼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떨려 아예 눈까지 감아버렸다.

그리고 1초, 다시 2초.

유더가 소원을 말했다.

&

“야.”

“어.”

“진짜 이게 소원이야?”

“그럼 뭐 대단한 거라도 빌어야 해?”

“그건 아니지만.”

유더는 코델리아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있었고, 코델리아는 그런 유더의 귀를 파주고 있었다.

‘뭔가 이게 아닌데.’

그··· 선을 넘지 않은 건 좋은데. 좋은 거 같긴 한데.

뭘까, 이 맥 빠지는 기분은.

묘한 아쉬움은.

“내가 너한테 뭘 시키겠니. 이 정도면 딱이지. 거기다 좋기도 하고. 남이 귀 파주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르겠다.”

“으음.”

틀린 말 같지는 않은 것도 같았다.

코델리아 자신도 아주 어릴 때 말고는 남이 귀를 파준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유더야. 정말로 좋아?”

“어, 좋아.”

“으음··· 그럼 가끔씩 파줄게.”

“응? 그냥?”

“어, 그냥.”

사실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유더에게 이래저래 부채감이 있는 코델리아였다.

‘유더는 늘 밥을 해줬어.’

어디 밥뿐인가.

다리 아프면 업어줬고, 잠자리도 거의 항상 유더가 준비했다.

솔직히 신세를 너무 져서 어떻게든 갚을 방법이 없나 고민하던 코델리아였다.

“앞으로 귀 간지러우면 말해. 내가 파줄 테니까.”

코델리아의 선언에 유더는 무척이나 감동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공주님, 다 컸군요?”

“네네, 다 컸어요. 어른인걸요. 그러니까 돌아누우시죠. 반대쪽 파게.”

“예, 마님.”

유더가 돌아눕자 코델리아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긴 뒤 다시 유더의 귀에 의식을 집중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산 깊은 곳에 숨겨진 생명의 신전 입구에 선 유더와 코델리아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원작 기억하지?”

“응, 기억해.”

원작에서 생명의 신전을 방문할 수 있는 것은 코델리아 루트를 기준으로 8개월 뒤였으니, 지금은 원작보다 거의 4개월 가까이 이른 시기라 할 수 있었다.

“라이제강이 봉인된 솔라리의 봉인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별일 없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유더와 코델리아가 알고 있는 생명의 신전은 지금으로부터 4개월 뒤의 것이었다.

때문에 두 사람이 아는 것과 다른 상황이 신전 안에서 벌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유더야.”

“어, 코델리아야.”

“자꾸 그러니까 오히려 불길하잖아. 말이 씨가 된다는 거 몰라?”

“음, 그렇긴 하지.”

그리고 사실 원작으로부터 4개월 뒤가 아닌 4개월 전이니 상황이 다를 가능성은 낮았다.

“좋아, 그럼 가보자.”

“응, 가자.”

유더가 전열, 코델리아가 후열.

단 둘이지만 대열을 이룬 두 사람은 신전의 입구라 할 수 있을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약 30분 뒤.

“야! 내가 말이 씨가 된댔지!”

“온다!”

“익스플로젼!”

기억 속과 완전히 달라진 신전 속에서 코델리아의 마법이 폭발했다.

&

< 제50장 - 생명의 신전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