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2장- 뜻밖의 만남 #2 >
&
다리안 왕녀.
공식 명칭은 페르다리안느 D 세일룬.
2왕비 소생이기에 1왕비 소생인 다프네 왕녀와 디온 왕자와는 이복남매인 셈이었지만, 세 사람의 사이는 무척이나 양호한 편이었다.
‘나이 차도 많이 나고, 다리안이 왕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은 낮으니까.’
‘뭣보다 다리안은 귀엽고.’
코델리아가 붙인 이유에 유더는 미간을 좁히기는 했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귀여운 아이가 언니 오빠 하며 매달리면 아무래도 날 선 반응을 보이기 힘든 게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다리안 왕녀.’
세일룬 왕실의 귀염둥이라 불리는 그녀가 어째서 지금 이런 산골마을의 여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대충 짐작은 가지만.’
‘짐작이 간다고?’
‘너, 설정 제대로 안 읽지?’
‘아니거든? 코델리아가 아끼는 구두가 몇 개인지도 알거든?’
‘야, 네가 코델리아잖아.’
‘그러네?’
코델리아가 민망함을 감추듯 혀를 살짝 내밀며 웃자 유더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만족했다.
귀여웠으니 말이다.
‘아무튼 짐작은 가.’
‘뭔데?’
‘근데 우리 이거 너무 수준 높은 눈빛 대화 아니야? 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이해는 해?’
‘어··· 대강은?’
아무리 서로 잘 통해도 이 정도로 눈빛 대화를 나누는 게 가능할까?
이 정도면 거의 텔레파시 아니야?
‘스승님 말씀처럼 사랑의 힘인 것인가.’
‘지랄도 자꾸 하면 병이래.’
코델리아가 예쁘게 웃으며 보낸 눈빛에 유더는 허허허 웃더니 테이블 밑에서 슬쩍 스크롤 하나를 찢었다.
거의 텔레파시급 눈빛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정황이나 맥락상 파악할 수 없는 구체적인 정보까지 전달하는 것은 무리였다.
때문에 이럴 때는 그냥 메시지 마법을 쓰는 편이 나았다.
[아마 공작 때문에 왔을 거야.]
[공작이면··· 다리안 왕녀의 외할아버지?]
[빙고, 2왕비의 아버지이자 방계이긴 해도 일단 왕가의 피가 흐르는 스펜서 공작가의 가주인 헨리 스펜서.]
[아파서 골골 거리지 않아?]
[그래서 왔겠지. 할아버지의 병을 치료할 약을 구하러.]
[아, 아아아!]
코델리아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아주 작게 손뼉을 쳤다.
[아케이만의 던전에 있는 약초.]
[이번에도 빙고.]
아케이만의 던전 가장 깊은 곳에는 칠색초라는 약초가 자생하고 있었는데, 태양화초 정도의 물건은 아니었지만 제법 강한 생명력을 품고 있었다.
[아마 여간한 지병 정도는 한 방에 날려버릴걸?]
[그런데 원작에서 계속 골골거리잖아. 공작 할아버지.]
[결국 약초를 구하지 못 했나 보지.]
[하긴, 아케이만의 던전 어려우니까.]
아케이만은 괴팍한 인간이 많은 대마법사들 가운데서도 특히 괴팍한 별종이었다.
본래 마법사의 던전은 함정과 괴물이 가득한 미로라기보다는 방범 대책이 좀 잘 되어 있는 연구실에 가까웠다.
애당초 연구를 하려고 만든 장소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케이만의 던전은 달랐다.
연구보다는 오히려 방범이 목적인 것처럼 강력한 함정과 가디언들이 던전 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던전 보스가 문제고.]
아케이만이 만들어낸 키메라.
각기 다른 마수 셋을 하나로 합쳐 만들어낸 존재로, 저급한 악마 따위는 우습게 해치울 수 있는 괴물이었다.
[아무튼 말 좀 맞춰줘.]
거기까지였다. 유더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고, 코델리아 역시 그러했다.
다리안 왕녀 곁에 서 있던 덩치 큰 이들 가운데 하나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거기, 두 사람.”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그간 유더와의 여행 덕분에 연기 실력이 일취월장한 코델리아는 겁먹은 얼굴로 눈을 깜박였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를 보호하듯 몸을 살짝 앞으로 내밀며 말을 받았다.
“무슨 일이신지요.”
“여행객인가?”
“네, 여행객입니다.”
유더가 바로 답하자 덩치 큰 사내는 다시 말을 잇는 대신 미간을 찌푸렸다.
‘서툴구나.’
‘서투네.’
아마 윗사람이 시켜서 보낸 것일 텐데, 이런 일 자체가 처음인 모양이었다.
‘공작가의 기사겠지?’
‘애당초 이런 잠행 자체가 처음인 거 같아.’
이런 자리에서 여행객이라 물으면 뭐라 하겠는가 당연히 여행객이라 하겠지.
잠시 주춤하던 사내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고, 그런 사내의 시선을 받은 남자- 다리안 왕녀의 곁에 앉아있던 매서운 눈빛의 중년남은 문자 그대로 눈을 부라렸다.
‘똑바로 안 해?! 라는 거 같아.’
‘나도 알아.’
유더와 코델리아가 눈빛을 교환한 직후, 재차 움찔한 사내는 유더와 코델리아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말했다.
“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던 거냐.”
“어른들 사이에 아이 혼자 있는 게 신기해서요. 로브로 얼굴도 가리고 있고.”
코델리아가 자연스럽게 말하자 사내는 이번에도 당황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덩치 큰 사내들 사이에 작은 아이가 혼자 있다. 그것도 로브로 몸이며 얼굴이며 가린 채.
‘나라도 쳐다보겠네.’
스펜서 공작가의 젊은 기사- 훈트는 곤란함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다시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단장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미 들을 것 같지만 흑흑.’
사실 훈트는 억울했다.
함께 온 기사들 가운데 누구든 자신 정도의 대응 밖에는 하지 못 했을 터이니 말이다.
“저기··· 뭔가 곤란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코델리아가 조심스럽게 묻자 훈트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다시 우물쭈물 했다.
어찌 대응해야 할지 막막한 것도 있었지만, 주된 원인은 코델리아의 미모에 있었다.
‘완전 예쁘네.’
멀리서 봤을 때도 예뻤는데, 가까이서 보니 훨씬 더 예뻤다.
“훈트!”
등 뒤에서 들려온 노성에 흠칫한 훈트는 도리질을 쳐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된 이상 죽이 되든 밥이 되는 뭔가를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너희 둘, 너무 수상하다. 정체를 밝혀라. 단순한 여행객이 아니지?”
스스로가 말해놓고도 한심한 대사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한심한 대사에 유더는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코델리아를 돌아보았고, 눈빛을 보냈다.
‘그냥 우리가 선수 치자.’
‘끼어들게?’
‘다리안 왕녀랑 친해지면 이래저래 좋을 테니까.’
당장 왕도에 가서 어떤 식으로 다프네 왕녀와 만남을 가질지 고민이었는데, 다리안 왕녀와 친해지면 단번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유더는 일단 숨을 한 번 고른 뒤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기사님.”
“왜 그··· 헉? 아, 아니. 난 기사 같은 게 아니다. 그냥 여행 중인 베테랑 용병이다.”
“괜찮습니다. 스펜서 공작가의 기사님이시죠?”
유더가 말한 직후.
여관 내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다리안 왕녀 주변에 있던 사내들이 일시에 몸을 일으켜 세웠고, 어리바리하던 훈트 조차도 날카로운 기세를 뿜으며 허리춤의 검을 움켜쥐었다. 여차하면 바로 뽑아들 기세였다.
그리고 한 사람이 움직였다.
다리안 왕녀의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던 중년의 남자.
스펜서 공작가의 검이라 불리는 붉은장미 기사단의 단장인 콘웰 경이었다.
“너희는 누구냐. 대답하는 태도에 따라 너희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훈트처럼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지 않았다.
다른 이들처럼 무기를 손에 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위압감의 질이 달랐다.
마치 찍어 누르는 것 같은 시선을 마주한 유더는 숨을 한 번 깊이 삼킨 뒤 발걸음을 내디뎠다. 콘웰 경과 모두로부터 코델리아를 지키듯 그녀 앞에 선 뒤 입을 열었다.
“바이엘 가문의 차남 유더 바이엘이 붉은장미의 기사 콘웰 경을 뵙습니다.”
부드러운, 하지만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는 유더의 말에 콘웰 경은 눈을 조금 더 가늘게 떴고, 훈트를 비롯한 기사들은 당황을 감추지 못 했다.
“어, 어떻게.”
“바이엘 가?”
아주 작은 목소리들이 산발적으로 튀어나왔지만 이내 사그라졌다.
콘웰 경이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기 시작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그만해요, 콘웰 경.”
작금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소녀의 목소리가 거북한 침묵을 갈라놓았다.
콘웰 경은 미간을 한 차례 좁히는가 싶더니 다리안 왕녀를 돌아보았고, 그녀는 빙긋 웃으며 유더와 코델리아 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콘웰 경이 옆에 있잖아요?”
다리안 왕녀의 말에 콘웰 경은 결국 한숨을 내쉬더니 옆으로 한 걸음을 비켜섰다.
“헤헤헤, 고마워요. 역시 콘웰 경이 최고에요.”
애교있게 말한 다리안 왕녀는 그대로 머리끝까지 눌러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왕가의 상징이라 불리는 황금빛 머리칼과 인형처럼 예쁜 얼굴이 드러났다.
“후, 이제야 좀 살겠네. 답답해서 혼났단 말이죠?”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녀는 숨을 한 번 크게 고르더니 유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잘생긴 오빠, 저도 한 번 맞춰보세요.”
내가 누구인지.
도발적인 물음에 유더는 빙긋이 웃었고, 다리안 왕녀는 살짝이지만 뺨을 붉혔다.
코델리아에게 묻혀서 그렇지, 그녀와 마찬가지로 얼짱 사대장의 일원인 유더였으니 말이다.
미녀의 미소가 사내들에게 효과적이듯, 미남의 미소는 소녀들에게 효과적이었다.
더욱이 유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내딛기까지 하였다.
“감히 인사드리겠습니다.”
나직이 말한 유더는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더니 다리안 왕녀의 손을 가볍게 잡아든 뒤 그 손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바이엘 백작가의 유더 바이엘이 페르다리안느 왕녀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다시 화사한 미소.
다리안 왕녀는 저도 모르게 헉하고 숨을 삼켰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코델리아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쩐지 모르게 심사가 뒤틀렸기 때문이다.
‘야, 야. 적당히 해라? 응?’
순진한 소녀 유혹하지 말고?
열심히 눈빛을 쏴댔지만 뒤통수에 쏴서 그런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지 유더는 다리안 왕녀의 손을 잡은 채 반짝반짝 미소를 유지했다.
그렇게 몇 초.
겨우 정신을 차린 다리안 왕녀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대단하시네요. 정말 바이엘 백작가의··· 유더 바이엘 공자님이신가요?”
“예, 왕녀님. 제가 유더 바이엘입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콘웰 경이 다시 앞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증거를 대라. 아니, 그보다 일단 질문에 답해라. 어째서 우리가 스펜서 공작가의 사람들이라 생각하는 것이지?”
콘웰 경이 다시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자 눈살을 살짝 찌푸린 다리안 왕녀였지만 딱히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애당초 콘웰 경의 일인데다가 왕녀 역시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안 것일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부드럽게 답한 유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콘웰 경을 마주한 뒤 설명을 이었다.
“일단 용병이라고 하기에는 복장이 너무 부자연스러웠습니다.”
유더의 말에 콘웰 경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이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망토와 가죽 갑옷 등등 제법 용병다운 복장들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질이 좋습니다. 대부분 새것들이고요. 특히 신발이.”
용병은 사방을 떠돌며 일거리를, 그것도 칼 쓰는 일을 구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신발은 거친 여행길에 언제나 지쳐있기 마련이었다.
‘아마 용병들이 입을 법한 옷을 구해 오라 했겠지.’
하지만 공작가- 그것도 중앙에 자리한 스펜서 공작가의 기사들이 용병들 따위가 입던 중고품을 입을 리 만무했다. 전부 새로 구입했으리라.
“더욱이 대부분의 용병들은 그렇게 완벽한 풀세트를 맞춰 입지 못 합니다. 색 배합까지 신경 쓰면서요.”
유더의 지적에 기사들이 재차 자신들의 옷을 돌아보았고, 콘웰 경의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한 줄 생겨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검. 제일 처음 저희에게 말을 거신 분의 허리춤에 자리한 검은··· 스펜서 가문의 검이었으니까요. 손잡이에 새겨진 문장을 보고 알았습니다.”
유더의 말에 콘웰 경은 급히 훈트를 돌아보았고, 이내 눈을 부라렸다.
멍청하게 공작가의 검을 그대로 들고 온 것이냐고 눈빛으로 호통 치는 것 같았다.
‘무기는 바꾸기 힘드니까.’
검사에게 있어 검은 자신의 생명과도 같았다.
애당초 잠행이란 것에 익숙하지 못 한 기사라면 무의식 중에라도 자신의 검을 챙겼을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몇 명 더 그런 거 같고.’
훈트가 혼나는 것을 본 기사 몇이 흠칫하며 망토로 자기 검을 가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용병이라 하기에는 다들 너무 잘생기셨으니까요.”
유더의 말에 잔뜩 움츠러든 훈트를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이 헛기침들을 토했다.
무척이나 민망했지만 동시에 기분들이 좋아서였다.
‘물론 진짜 잘생겼다기 보다는 부티가 난다는 거겠지만.’
어찌되었든 유더의 이야기에 기사들 대부분은 납득한 표정들이 되었다.
얼추 맞는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진실은 그냥 대충 가져다 붙인 이야기라는 거지만.’
아무리 용병이라도 늘 오래된 물건만 쓰겠는가?
가끔은 새것도 쓰겠지.
더욱이 호위를 전문으로 하는 고급 용병이라면 갑옷이든 뭐든 소위 말하는 깔맞춤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고객인 호위 대상들이 보기 좋은 호위를 원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결국 냉정히 생각하면 하나하나 논파가 가능한 근거들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분위기였다.
아, 말이 되는 것 같아.
맞는 말 같은데?
일단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면 그 뒤에는 너무 큰 무리수만 두지 않으면 여간한 말은 다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역시 우리 집 사기꾼.’
등 뒤에서 느껴진 코델리아의 눈빛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유더는 다시 다리안 왕녀를 돌아보았고, 어느새 유더의 설명에 푹 빠져든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콘웰 경이랑 제 이름은요?”
“그건 훨씬 더 쉬웠습니다.”
다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유더는 다리안 왕녀와 눈을 맞춘 채 말을 이었다.
“스펜서 가문에 이토록 훌륭한 체격과 멋진 수염을 가지신 분은 콘웰 경 뿐이니까요.”
유더의 말에 다리안 왕녀는 까르르 웃으며 손뼉을 쳤다.
“맞아요, 콘웰 경의 수염은 정말 멋져요. 왕도에서 제일 멋진 수염일 거예요.”
“아가씨······.”
콘웰 경이 곤란하다는 듯 억누른 목소리를 내었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보니 기쁘긴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왕녀님은··· 어찌 몰라볼 수가 있을까요. 이토록 사랑스러운 왕녀님을.”
유더의 달콤한 속삭임에 다리안 왕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건드리면 톡 터질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한 사람.
‘야, 야. 적당히 안 해? 야!’
어쩐지 모르게 화가 난 코델리아가 날카로운 눈빛을 날려댔지만 유더는 요지부동이었다.
계속해서 반짝이는 눈빛을 다리안 왕녀에게 보냈고, 다리안 왕녀는 몸을 비비 꼬더니 이내 소리 높여 말했다.
“환상의 커플!”
갑자기 무슨 소리일까.
하지만 유더와 코델리아는 반사적으로 반응했고, 다리안 왕녀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저도 소문을 들었어요. 이미 사랑하는 사이지만 더더욱 사랑해서, 사랑하고 싶어서 야반도주를 한 환상의 커플!”
여간한 유더조차도 주춤하게 만드는 한 방이었다.
아니, 기정사실이 되는 것 까지는 좋은데.
왕도에서도 그렇게 생각해주는 건 좋은데.
유더는 슬쩍 코델리아 쪽을 돌아보았고, 터지기 직전의 홍시처럼 얼굴을 붉힌 코델리아를 볼 수 있었다.
‘어, 어떻게든 해줘!’
마구 헤매기 시작한 코델리아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인 유더는 다시 다리안 왕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일단 저희가 그 환상의 커플이 맞긴 합니다만······.”
“역시!”
짝하고 다시 손뼉을 친 다리안 왕녀는 코델리아를 돌아보았고, 흠칫 한 코델리아는 뒤늦게나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하였다.
“체이스 백작가의 코델리아 체이스가 페르다리안느 왕녀님을 뵙습니다.”
코델리아의 인사에 다리안 왕녀가 다시 뺨을 붉히며 좋아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증명해라.”
콘웰 경이 커다란 손을 들어 다리안 왕녀와 유더, 코델리아 사이를 가로막더니 그대로 유더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가 우리를 알아본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너희가 북부12가문의 자제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너희의 신분을 증명해라.”
콘웰 경의 날카로운 지적에 여관 안의 분위기가 다시 날카롭게 변했다.
‘과연, 붉은장미의 기사.’
기사단장 자리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닐 지어니.
유더는 당황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품안에 감춰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바이엘 백작가의 적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가문의 문장입니다.”
뜨내기 가문도 아니고 북부12가문 중 무력 하나만은 최상위 권에 속하는 바이엘 백작가의 문장이었다.
문장을 받아든 콘웰 경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엘 백작가의 자식이 맞군. 그렇다면 그쪽은?”
콘웰 경의 시선이 코델리아에게 향하자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이다가 유더를 돌아보았다.
유더와 달리 딱히 문장 같은 것을 챙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걱정 마. 내가 해결할게.’
‘어떻게?’
‘다 수가 있어.’
씩 웃은 유더는 다시 자세를 낮춘 뒤 다리안 왕녀를 마주하며 말했다.
“왕녀님, 아쉽게도 제 약혼녀는 현재 가문의 문장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딱히 증명이 필요할까요?”
유더의 물음에 다리안 왕녀는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표했고, 콘웰 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유더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 약혼녀인 코델리아 체이스 양은 북부 최고의 미녀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저희에 대한 소문을 들으셨다면··· 다리안 왕녀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네, 그렇게 들었어요. 선명한 붉은 머리칼과 보석처럼 반짝이는 푸른 눈을 가진, 천사처럼 아름다운 소녀라고요.”
다리안 왕녀의 묘사에 코델리아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리고 유더가 박차를 가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북부에서 제일 아름다운 소녀. 실로 지상에 강림한 천사와 같은 소녀.”
연극조로 말하자 기사들 가운데 몇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카운터에 앉아있던 한스 역시 그러했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어여쁜, 바라보고 있어도 바라보고 싶어지는 한 송이 꽃과 같은 여인.”
‘씨, 씨발. 그만해. 그만하라고! 야!’
코델리아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든 말든 유더는 계속해서 말했고, 다리안 왕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꽃피었다.
“과연, 그녀의 미모 자체가 신분 증명이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현명하신 왕녀님.”
유더의 말에 까르르 웃은 다리안 왕녀는 콘웰 경을 올려다보았고, 콘웰 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바이엘 가의 문장을 보았을 때 이미 신분 확인 작업은 모두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굳이 체이스 가의 문장까지 제시하라 요구한 것은 사실 트집에 가까웠다.
“소문 그대로인 것 같아요. 두 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들려주실 수 있나요? 아, 혹시 지금도 사랑의 가출 중이신가요? 네?”
목소리를 살짝 낮추며 묻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코델리아는 무어라 답하는 대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고, 유더는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왕녀님. 사랑의 가출은 이미 끝났답니다.”
“그럼요?”
“지금은 사랑의 여행 중이죠.”
유더는 뻔뻔히 말했고, 다리안 왕녀는 꿈꾸는 소녀 같은 얼굴이 되었으며, 코델리아는 얼굴에서 손을 치우지 못 했다.
&
< 제52장- 뜻밖의 만남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