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3장 - 키메라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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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이만의 던전이 자리한 플렉스 산은 모두 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을과 가까운 다섯 개의 봉우리에는 크고 작은 갱도들이 여럿 뚫려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 빼고는 모두 폐광된 상태였다.
“옛날에는 은이 많이 났다고 해요.”
집에서 숙제해온 것을 발표하는 어린아이처럼 다리안 왕녀가 씩씩하게 말했고, 유더를 비롯한 모두는 그런 다리안 왕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스펜서 공작가의 영지에도 광산이 몇 개 있는데, 대부분 철광이나 구리광이에요. 은광이나 금광은 무척 드문 편이라고 들었어요.”
사실상 스펜서 공작가에서 나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다리안 왕녀였다.
자연 그녀의 이야기는 언제나 스펜서 공작가의 이야기로 마무리가 되었다.
“거의 다 왔군요.”
가장 높은 봉우리인 일곱 번째 봉우리와 가장 큰 봉우리인 여덟 번째 봉우리 사이의 갈림길.
키메라가 정기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구멍은 일곱 번째 봉우리에 있었고, 아케이만의 던전 입구는 여덟 번째 봉우리에 있었다.
“아.”
지금까지 발랄한 목소리로 아기새처럼 재잘거리던 다리안 왕녀가 순간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이내 다시 씩씩한 얼굴이 된 다리안 왕녀가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인사했다.
“무운을 빌게요. 오라버니, 그리고 언니.”
“감사합니다. 왕녀님에게도 무운이 함께하기를.”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아셨죠?”
유더의 인사에 이어진 코델리아의 당부에 다리안 왕녀는 이번에도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콘웰 경이 계시니까 괜찮아요. 다른 기사 분들도 계시고요. 스펜서 공작가의 기사들은 무척 강한 걸요.”
가슴을 탕탕 두드린 다리안 왕녀가 그렇지 않냐는 듯 기사들을 돌아보았고, 기사들은 다들 똑같이 씩 웃는 것으로 왕녀의 미소에 답해주었다.
“유더 바이엘, 그리고 코델리아 체이스.”
다리안 왕녀 곁을 떠나지 않던 콘웰 경이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다가섰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작전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키메라가 나타나면 그쪽에서 신호를 보내고, 이쪽에서 탐사를 시작한다.”
“예, 가지고 계신 스크롤이 빛을 발하면 바로 돌입해주십시오.”
유더의 말에 새삼 스크롤을 돌아본 콘웰 경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말했다.
“혹시라도 키메라를 놓치거나, 상대할 수 없게 되면 잊지말고 바로 다시 신호를 보내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유더가 다시 시원하게 답하자 콘웰 경은 입을 한 번 꾹 다물더니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들은 아직 젊다. 공을 세우겠다는 마음으로 너무 무리하지 말았으면 한다. 알겠나?”
“네, 콘웰 경,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흠흠.”
코델리아가 부드럽게 응답하니 콘웰 경이 헛기침을 토했고, 문득 체이스 백작이 떠오른 유더는 작게 웃었다.
“아무튼 이제 출발하도록 하죠. 무운을 빕니다.”
“무운을 빌겠다.”
기사들 사이에서 손을 흔드는 다리안 왕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준 유더와 코델리아는 바로 일곱 번째 봉우리를 향했다.
어제 이미 답사를 한 번 나온 터라 두 사람의 발걸음에는 모두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어.”
“어제도 말했지만 다리안 왕녀가 따라가도 되는 걸까?”
“뭐··· 콘웰 경이 괜찮다고 판단했으니 괜찮겠지. 더욱이 다리안 왕녀는 그냥 무력한 소녀가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세일룬 왕가의 피를 잇는 자들- 그것도 직계의 피를 잇는 자들은 보통 인간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피에는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강력한 신성의 힘이 흐르고 있기에 왕가의 아이들은 늦든 빠르든 성인이 되기 전에 몇 가지 초능력을 각성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왕족 몰살 사건이 일어나는 원인이기도 하고.’
세일룬 왕가에 흐르는 신성한 피.
왕족 몰살 사건은 단순히 세일룬 왕국을 무너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저 신성한 피를 단절시키기 위해 일어난 사건이었다.
‘아니, 일어날 사건인가.’
이곳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일어나지 않게 할 생각이기도 하고.’
새삼 마음을 다잡은 유더는 씩씩하게 앞서가는 코델리아에게 말했다.
“코델리아야.”
“네, 공자님.”
“업어줄까?”
“아이고, 됐거든요?”
어차피 거의 다 오기도 했고.
키메라가 모습을 드러내는 일곱 번째 봉우리.
“어제도 느낀 거지만 멋지긴 정말 멋지다.”
“키메라 때문에 일부러 만든 느낌도 든단 말이지.”
“정말 그런 걸지도?”
봉우리 정상에는 커다란 바위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는데, 생긴 것도 그렇고 마치 키메라를 위해 준비된 왕좌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뚫린 커다란 구멍.
직경이 무려 10미터 가까이 되는 구멍은 거의 수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경사가 가팔랐는데, 정상의 바위는 몰라도 이 구멍만은 아케이만이 일부러 만든 것이 분명했다.
“자, 그럼 오늘도 한 건 해보죠.”
“그런데 공자님. 시간이 얼마나 남았죠?”
“어··· 한 40분 정도?”
다리안 왕녀 일행이 여덟 번째 봉우리에 도착해야 하는 것까지 고려한 터라 시간을 제법 넉넉하게 잡은 유더였다.
앞으로 40분.
유더의 말에 돌연 빙긋 웃은 코델리아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 도시락 먹을래?”
“벌써?”
“싸우기 전에 배를 든든하게 해야지. 그리고 먹고 싶었단 말이야. 아침부터. 이번에는 나도 같이 요리했고.”
“저기, 공주님. 오늘 싼 도시락은 샌드위치거든요?”
“응응, 맛있는 햄에그 샌드위치.”
“빵 사이에 햄이랑 계란 끼워 넣는 게 언제부터 요리였죠?”
“그럼 아니야? 아니냐구. 왜 우리 코델리아 기를 죽이고 그래. 나름 열심히 했단 말이야.”
코델리아가 불만을 표하듯 입술을 삐쭉이자 유더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먹자.”
“흥흥, 분명 맛있을 거야. 정성을 담았으니까.”
“정성을 담아 조립했군요.”
“우씨, 자꾸 그러면 다시는 안 해준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인 거 몰라?”
“하긴, 배우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법이지.”
빙긋 웃은 유더는 준비해온 자리를 편 뒤 바구니를 내려놓았고, 코델리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바구니 안에 담아둔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를 꺼냈다.
“소풍 온 거 같다. 경치도 좋구.”
“그러게.”
일단 가장 높은 봉우리였으니까.
“자, 제일 잘 만들어진 거야.”
코델리아가 선심 쓴다는 듯 건넨 샌드위치- 정확히는 직각 삼각형 모양으로 잘린 샌드위치를 받아든 유더는 순간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코델리아가 별 모양으로 자르겠다고 설치다 결국 망쳐버린 샌드위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왜 웃어?”
“그냥 좋아서.”
“열 있는 건 아니구? 바보가 됐다든가?”
“그럴 리가.”
씩 웃은 유더는 받아든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고, 코델리아도 따라서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음.”
주변 경치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소풍 온 기분이 들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코델리아의 주장대로 정성이 담겼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맛있게 느껴지는 샌드위치에 유더는 미소 지었고, 유더의 반응을 살피던 코델리아는 안심했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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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0여분 뒤, 아케이만의 던전 가장 깊은 곳.
언제나와 같은 시간에 눈을 뜬 키메라는 날개로 크게 한 번 홰를 치더니 그대로 지면을 박차 날아올랐다.
아케이만의 키메라는 나름 정석적인 외형을 갖추고 있었다.
사자와 그리폰, 드레이크로 구성된 세 개의 머리와 곰의 몸, 독수리의 날개와 꼬리 대신 달린 강한 독을 품은 뱀.
하지만 한 가지 특이점이라면 아케이만의 키메라는 생명체가 아닌 마도구라는 사실이었다.
평범한 키메라들처럼 실재하는 마수들을 재료로 하긴 했지만, 그 작동 원리는 차라리 좀비나 스켈레톤 같은 언데드 몬스터에 가까웠다.
아케이만이 키메라를 이렇게 만든 것은 그의 전공이 생물학이 아닌 마도구 제작인 것도 있었지만, 오랜 시간 던전을 지키며 딱 정해진 대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생물보다는 기계인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진 아케이만의 생각이 하나.
‘살아있는 생물한테 평생 던전에 틀어박혀 문지기 노릇이라 하라고 하는 건 인간적으로 좀 너무하지 않냐?’
대마법사답게 괴팍한 아케이만은 가끔씩 이상한 곳에서 인간다움을 발휘했다.
어찌되었든 키메라는 그런 아케이만의 의지에 의해 마도구로서 만들어졌고, 기계답게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늘 정해진 시간에 태양열을 흡수하고자 던전 밖으로 나섰다.
수백 번도 넘게 지난 익숙한 길.
중간에 자리한 근거리 공간도약 마법진을 지난 키메라의 눈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머리 위.
항상 어두운 던전과 달리 밝은 태양이 빛나는 장소.
“쿠오오.”
다시 한 번 크게 날갯짓을 한 키메라는 그대로 머리 위의 출구로 향했다.
던전을 벗어나 바람을 쐐기 위해, 다시 한 번 태양을 마주하기 위해!
“쿠오오!”
그렇게 포효하며 출구를 나선 순간이었다.
콰가강!
굉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이 키메라를 덮쳤다.
전혀 예상하지 못 한, 그리고 엄청난 충격에 키메라는 바닥를 뒹굴다 바위에 처박힌 직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 했다.
어떻게 된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빙고.”
키메라가 출구 밖으로 나오기 15분 전.
출구 앞에 선 유더는 주먹을 움켜쥔 채 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란디우스에게 전수받은 구극태양신공의 기술 가운데 하나인 태양심권을 펼치기 위함이었다.
‘기를 모은 시간이 길면 길수록 위력 역시 강해진다.’
참으로 단순한, 하지만 그렇기에 강력한 기술.
눈을 감고 오른손에 기를 모으는 유더의 전신에서 검은 불꽃과도 같은 아우라가 솟구쳐 올랐다.
구극태양신공과 하나 된 구천구문의 기운이었다.
‘검은태양.’
그것이 유더의 구극태양신공.
구천구문에 의해 새로이 정의된 태양의 힘.
“악당 같아.”
코델리아의 비난에 움찔한 유더였지만 애써 태연을 유지하며 의식을 집중하였다.
자연스럽게 란디우스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제자야, 태양심권은 실전에서는 쓰기 어려운 기술이다. 구극태양신공의 막대한 기운을 조정하는 법을 배우는 일종의 연습 기술이지.”
이유는 단순했다.
기를 모으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찰나가 목숨을 좌우하는 실전에서 움직이지 않고 몇 분이나 기를 모으는 것은 절대로 무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키메라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15분.’
현재 유더의 수준에서 태양심권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
그렇기에는 유더는 약간의 오차를 감안하여 14분 30초 전에 출구 앞에 섰다.
‘물론 전자시계가 없으니 전부 감이지만.’
그리고 약 15분.
마도구답게 키메라는 정해진 시간을 지켰고, 유더는 주저 없이 주먹을 내뻗었다.
펼치는 것은 태양심권의 힘이 실린 흑룡십자격.
유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강의 일격!
콰가강-!
유더의 주먹에서 뻗어나간 흑룡의 기운이 키메라의 복부를 강타했다.
사실상 제로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거리에서 가해진 엄청난 충격에 하늘로 솟구치던 키메라의 거체가 직각으로 꺾였고, 그대로 지면과 충돌했다.
콰가강-!
키메라의 거체가 지면을 부쉈다. 거의 10미터 이상을 밀려나더니 그대로 일곱 번째 봉우리의 정상을 이루는 바위 더미와 충돌했고, 막대한 충격에 일곱 번째 봉우리 전체가 뒤흔들렸다.
“와우.”
작게 감탄한 코델리아는 헉헉 거리는 유더를 지나 키메라에게 빠르게 접근하더니 여전히 의식불명인 놈의 목과 날개에 도폭선을 감았다.
“좋아.”
다음은 스크롤.
코델리아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커다란 가죽 주머니 세 개를 차례대로 꺼내 도폭선과 연결했다.
어젯밤 내내 유더와 함께 만든 스크롤 수십 장이 들어있는 주머니들이었다.
‘다음은 쏙.’
주머니를 하나씩 키메라의 입 속에 밀어 넣었다.
코델리아의 주먹보다야 훨씬 커도 키메라의 목구멍보다는 작은 주머니들이었던 터라 쏙쏙 잘도 들어갔다.
“좋아! 준비 됐어!”
코델리아의 외침에 유더는 바로 손을 들어 귀를 막았고, 키메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코델리아는 손가락을 튕겨 도폭선에 불꽃을 붙였다.
그리고 이어진 광경.
일곱 번째 봉우리는 물론이고 플렉스 산 전체를 뒤흔들 것 같은 굉음!
콰가가가가가가가강!
가죽 주머니 안에 가득 들어있던 수십 개의 스크롤들이 일시에 폭발했다.
즉, 키메라를 내부에서부터 파괴했다.
더욱이 날개와 목에 감아둔 도폭선들도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도 막대한 타격을 입혔으니 말이다.
그렇게 몇 초.
엄청나게 일어난 흙먼지 속에서 콜록 거리던 코델리아는 손부채질로 먼지를 밀어낸 뒤 정면을 보았고,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문제 해결.”
그리고 가슴 근처에 떠오르는 새하얀 빛의 고리.
막타를 친 것은 코델리아였지만, 애당초 레벨 차이가 있기 때문인지 유더와 코델리아 모두 하나씩 빛의 고리가 떠올랐다.
“완전 날로 먹었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뻔히 아는데 정면 승부를 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유더야! 괜찮아?”
“커헉, 쿨럭. 컥. 흙먼지만, 커흑, 없으면.”
기운이 다 빠진 터라 흙먼지 속에서 어찌하지도 못 하고 얌전히 앉아만 있어야 했던 유더였다.
다 죽어가는 얼굴로 겨우겨우 꺼낸 고통 섞인 대답에 코델리아는 끌끌끌 혀를 차더니 바람 마법으로 흙먼지를 거둬주었다.
“후, 아무튼 끝났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지?”
“어, 다리안 왕녀 일행이 칠색초를 구할 때까지 기다리자.”
쉽게 잡았지만, 쉽게 잡았다는 티를 낼 필요는 없었으니까.
엄청난 격전 끝에 겨우겨우 쓰러트린 것이 가장 모양새가 좋았다.
“흠흠. 역시 악당 같단 말이지?”
하지만 말하는 것과 달리 입꼬리를 몇 번이나 끌어올린 코델리아는 그대로 유더의 곁에 털썩하고 앉더니 구멍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유더야.”
“네, 공주님.”
“우리 생각대로 될까?”
“아마도?”
유더의 생각.
그리고 세 시간 남짓이 지나 다리안 왕녀 일행이 돌아왔을 때.
유더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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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3장 - 키메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