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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145화 (145/473)

< 제54장 - 아케이만의 비보 >

제54장 - 아케이만의 비보

일곱 번째 봉우리와 여덟 번째 봉우리 사이의 갈림길.

코델리아와 나란히 앉아 여덟 번째 봉우리 쪽을 주시하던 유더가 돌연 목소리를 내었다.

“슬슬 온다.”

눈으로 본 것이 아니었다. 기척으로 느끼고 소리로 확인한 것이었다.

오문을 연 이후 오감뿐만 아니라 기감 역시 놀라울 만치 발전한 유더였기에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이라면 수십 미터 밖에서의 접근도 감지할 수 있었다.

‘물론 어느 방향에서 올지 미리 알고 대기타고 있어서 그런 거지만.’

더욱이 보다 명확하게 소리를 듣고자 다리안 왕녀 일행이 오는 길목에 나뭇가지를 좀 뿌려두기도 하였다. 밟으면 소리가 날 터이니 말이다.

‘어찌되었든.’

다리안 왕녀 일행이 온다.

유더의 말에 똑같이 귀를 쫑긋 세운 코델리아는 약간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안 이상해?”

“어, 안 이상해. 완전 자연스러워.”

“으으음.”

이상하지 않냐고 묻긴 했지만, 정말 안 이상하다고 하니 기분이 묘한 코델리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부상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해야지.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단순히 격전이었음을 어필하기 위함만은 아니야.”

“알아, 전력을 속여야 한다는 거지?”

“그래, 다리안 왕녀 일행이 아니라··· 왕도에 기다리고 있을 적들에게 말이야.”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의 전력을 적들이 잘못 파악하면 할수록 왕도에서의 싸움이 유리해질 터였다.

“싫든 좋든 다리안 왕녀 일행을 통해 우리의 전력이 어느 정도 알려질 거야. 거대한 키메라를 부상 하나 없이 잡을 정도의 실력자라는 식으로 알려지면 곤란해.”

“으음··· 알겠어.”

PVP 할 때도 아이템이나 비장의 수 같은 게 알려지면 엄청 불리해졌으니까.

적들이 이쪽의 전력을 잘못 파악할 수 있도록 거짓 정보를 흘릴 필요도 있었다.

“안 보이니까 뭔가 불안해.”

“괜찮아. 내가 옆에 있잖아?”

“그래서 불안해.”

코델리아는 지금 붕대로 눈을 가린 상태였다.

마력을 너무 써서 시력이 잠시 상실되었다는 설정이었는데, 어찌되었든 앞이 보이지 않으니 불편한데다 불안하기도 했다.

‘이러면 다리안 왕녀 일행 반응을 알 수가 없잖아.’

하지만 유더는 다르게 생각했는지 코델리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걱정 마. 내가 이렇게 손잡고 있을 테니까 넘어지거나 어디 부딪히진 않을 거야.”

“아니이, 그게 아니라······.”

“진짜 온다. 쉿!”

“읍!”

바로 입을 꾹 다문 코델리아는 나름 열심히 아픈 시늉을 했고, 유더 역시 기운 없는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그렇게 몇 초.

“유더 오라버니? 코델리아 언니!”

저만치서 나타난 다리안 왕녀가 깜짝 놀란 목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도도도 달려왔다.

“왕녀님. 오셨··· 읏.”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던 유더는 눈살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고, 다리안 왕녀는 더욱 놀란 눈이 되어 물었다.

“많이 다치셨어요? 어, 언니 눈은 왜 그래요?! 네?!”

유더는 팔과 다리 등등에 피가 묻은 붕대를 감고 있었고, 코델리아는 두 눈을 가려 제대로 앞도 못 보고 있는 상태였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진 다리안 왕녀의 반응에 유더는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 연기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간다.’

마음을 다 잡은 유더는 능숙한 연기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까지 걱정하실 부상은 아닙니다. 이미 치료도 했고요.”

“하··· 하지만······.”

“괜찮아요, 왕녀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코델리아가 유더에 이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다리안 왕녀의 얼굴은 더욱 울상이 되었다.

코델리아가 자신을 찾듯 허공을 더듬는 모습이 새삼 마음 아팠기 때문이다.

“어, 언니··· 눈이······.”

“아, 괜찮아요. 일시적인 현상이에요. 마력을 너무 쓰기도 했고··· 키메라의 독에 살짝, 정말 살짝 당했거든요.”

코델리아는 미소로 이야기를 마무리했지만 다리안 왕녀는 그런 코델리아의 모습에 더욱 마음이 울적해졌다.

독에 당해 눈이 안 보일 정도인데 다리안 왕녀 자신을 걱정하느라 괜찮다고 말하는 코델리아의 모습이 너무나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언니······.”

“괜찮아요, 왕녀님. 왕녀님은 무사하신 거죠?”

코델리아의 물음에 다리안 왕녀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다시 소리 내어 말했다.

“네, 전 하나도 안 다쳤어요.”

“다행이네요. 기사님들은······.”

코델리아가 말끝을 흐리자 다리안 왕녀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고, 때를 맞추듯 콘웰 경과 기사들이 세 사람 곁으로 다가섰다.

“경상자가 다소 있을 뿐 크게 다친 이는 없다. 모두 그대들이 준 정보 덕분이다.”

“하아··· 다행이에요.”

페어리퀸에게 들은 정보라는 식으로 던전의 각종 정보들을 전달한 보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코델리아가 가슴을 누르며 안도의 숨을 토하자 기사들 역시 무척이나 감동한 표정이 되었다.

‘천사다.’

‘성녀야, 성녀.’

일시적이라고는 해도 시력을 상실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는데 저렇게 진심으로 타인을 걱정할 수 있다니.

얼굴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마음씨도 정말 비단 같은 소녀였다.

아무튼 그렇게 모두가 코델리아에게 집중하고 있을 때.

어쩐지 모르게 쓸쓸해진 유더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부상자 연기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가신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칠색초는 찾았니?

유더의 물음에 콘웰 경을 비롯한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고, 다리안 왕녀는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예상한대로 말이다.

‘역시.’

그리고 이어진 콘웰 경의 목소리.

“칠색초는 찾았다. 다만··· 제대로 효용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자란 것은 오직 하나뿐··· 나머지는 아직 어린 새싹들뿐이었다.”

“그럼······.”

“한 뿌리밖에 캐지 못 했다.”

무겁게 답한 콘웰 경은 착잡한 얼굴로 유더를 마주하였고, 기사들은 슬쩍 고개를 돌려 유더를 외면했다.

칠색초를 나누기로 했는데 한 뿌리 밖에 캐지 못 했으니까.

겨우 한 뿌리를 둘로 나눌 수는 없었으니까.

“유더 바이엘.”

한 차례 눈을 감았다 뜬 콘웰 경은 그대로 말을 이으려 했지만 그 순간 다리안 왕녀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뇨, 콘웰 경. 이건··· 제가 해야 할 말이에요.”

“왕녀님······.”

금방이라도 또르르 눈물을 흘릴 것처럼 눈시울이 붉은 다리안 왕녀였지만 표정은 단호했다.

왕족의 일원으로서, 일행의 대표로서 자신이 말해야 한다.

아직 어리지만 똑부러진 행동에 콘웰 경은 안타까움과 기꺼움을 동시에 느꼈다.

“알겠습니다.”

콘웰 경이 한 걸음 물러서자 다리안 왕녀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뒤 유더를 마주하였다.

“오라버니.”

“네, 왕녀님.”

“콘웰 경의 말대로 칠색초는 한 뿌리 밖에 구하지 못 했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다음에 이어져야 하는 말.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칠색초를 나눠줄 수 없다는 말.

하지만 도저히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리안 왕녀는 결국 진짜로 울먹이기 시작했고, 그녀의 울음소리에 코델리아가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왕녀님?”

다시 허공을 더듬는 코델리아의 모습에 다리안 왕녀가 결국 눈물을 보였다. 기사들 가운데 훈트처럼 마음이 약한 자들은 똑같이 울상이 되었고 말이다.

그리고 유더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다리안 왕녀와 시선을 맞춘 뒤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괜찮습니다, 왕녀님.”

“유더 오라버니?”

“한 뿌리뿐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다리안 왕녀님의 잘못이 아닌 걸요. 그러니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지고 가세요. 저랑 코델리아는 정말 괜찮습니다.”

유더가 다정하게 말하자 다리안 왕녀는 입술을 깨물었고, 콘웰 경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까지 유더에게 제법 딱딱하게 행동한 콘웰 경이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유더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호위자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경계심을 유지한 것뿐이었다.

‘유더 바이엘······.’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딱딱하게 굴 수 없을 것 같았다.

과연 콘웰 경 자신이라면 저렇게 사심 없는 얼굴로 괜찮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칠색초를 가져가라고, 자신은 괜찮다고 웃을 수 있을까?

“하, 하지만 오라버니랑 언니랑··· 많이 다치셨고······.”

유더의 팔과 다리에 감긴 붕대들을 재차 돌아본 다리안 왕녀는 고개를 들어 코델리아도 보았다.

두 눈을 붕대로 가린 채 곤란하다는 듯 처연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결국 다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두 분도, 두 분도 칠색초가······.”

“왕녀님,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얼른 자세를 낮춘 코델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두 팔을 벌렸고, 다리안 왕녀는 그런 코델리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언니이.”

“괜찮아요. 많이 안 다쳤어요.”

거기까지 말한 코델리아는 다리안 왕녀를 마주 안았고, 유더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왕녀님, 칠색초는 스펜서 공작님께 드릴 생각이시죠?”

“흑··· 네, 오라버니.”

코델리아의 품에 안긴 채로 다리안 왕녀가 답하자 유더는 계속해서 말했다.

“네, 그러니 더욱 더 왕녀님이 칠색초를 가져가셔야 합니다. 스펜서 공작님은 왕도를··· 나아가 세일룬 왕국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 같은 분이시니까요. 더욱이······.”

말씀을 살짝 흐린 유더는 누군가를 떠올리듯 시선을 멀리하더니 이내 다시 다리안 왕녀를 보며 말했다.

“스펜서 공작님은 다리안 왕녀님의 가족이시니까요. 저도 고향에는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제 목숨처럼 아끼는 이들이요. 다리안 왕녀님에게 스펜서 공작님은 그런 분이시겠죠?”

“네에.”

“그러니 가져가세요. 다리안 왕녀님의 가족을 지켜주세요.”

유더는 다정하게 웃었고, 다리안 왕녀는 다시 울상이 되었다.

콘웰 경을 비롯한 기사들은 무척 감동한 얼굴로 유더를 보았고 말이다.

‘기사의 귀감이로다.’

‘역시 검장 바이엘 백작의 자식인가······.’

왕가에 충성하고 국가를 생각한다.

더욱이 다리안 왕녀의 마음까지 걱정한다.

“오, 오라버니는 정말 괜찮으세요? 칠색초로 치료해야 하는 분이······.”

“저입니다.”

“네?”

“저요. 제 병이 아직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라··· 칠색초의 도움을 받아볼까 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죠.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병이 아직 안 나으셨다고요?”

“아, 그러니까··· 그냥 아직 가끔 불편할 뿐입니다. 평소에는 괜찮고요. 지금도 무척 건강해 보이죠?”

유더가 빙긋 웃으며 건강을 어필하듯 팔을 당겨 근육을 보였지만 다리안 왕녀와 콘웰 경, 기사들의 눈에 근육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왕족을 위해, 레이디를 위해 스스로의 병환조차도 뒤로 미루는 기사의 귀감이 보일 뿐이었다.

‘아아, 어찌 이럴 수가.’

키메라를 유인한다는 가장 위험한 임무를 자처하였고, 던전에 대한 정보도 가장 많이 제공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리 선선히 칠색초를 포기하다니.

‘인정할 수밖에 없군.’

‘천사님과 맺어질만 해.’

‘선남선녀로다.’

기사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유더를 바라보았고, 콘웰 경은 마음을 굳히듯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유더 바이엘. 그대의 충훈은 내가 꼭 스펜서 공작님께 전하도록 하겠다.”

“네? 아니, 그러실 것 까지는······.”

유더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리 말하자 콘웰 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리안 왕녀 역시 주먹을 꼭 쥐며 말을 이었다.

“아뇨, 꼭 전해야 해요. 다프네 언니랑 디온 오라버니께도 두 분에 대해 전해드릴게요. 그리고··· 이걸 받아주세요.”

다리안 왕녀가 품에서 꺼낸 것은 옥으로 만들어진 작은 인장이었다.

“그건······.”

“네, 제 인장이에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인장의 소유자를 돕겠다는 맹약의 증표.”

사실 다리안도 왕가의 전통에 따라 가지고만 다닐 뿐 실제로 쓸 일이 있을지 의문이었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지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하였다.

이렇게라도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더는 기쁘게 인장을 받는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오라버니?”

유더는 바로 답하는 대신 코델리아를 보았고, 코델리아는 허공을 더듬어 다리안의 작은 손을 찾더니 그대로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괜찮아요, 왕녀님. 이런 것을 바란 것이 아닌 걸요. 왕녀님께 너무 과한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인장 대신 가지고 싶은 것이 있는 걸요?”

“네?”

갑작스러운 선회에 다리안 왕녀는 눈을 크게 떴고, 콘웰 경 역시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와서 물욕을 드러내는 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코델리아가?

물론 당연히 요구할 만한 일을 하기는 했지만······.

하지만 아직이었다.

아직 코델리아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왕녀님, 마리 이야기를 아시나요?”

“네? 어··· 동화 말씀하시는 거죠?”

“네, 마리와 애니는 우정의 증표로 서로 가지고 있던 동전을 교환했죠.”

“아!”

다리안 왕녀가 활짝 웃었고, 콘웰 경과 기사들의 얼굴 역시 다시 밝아졌다.

“그거면 될 것 같아요. 음··· 너무 무례한 부탁일까요?”

“아뇨, 오히려 제가 드리고 싶어요. 절 친구로 여겨주시는 거죠?”

“허락해주신 다면요.”

코델리아가 부드럽게 미소 짓자 다리안 왕녀는 저도 모르게 뺨을 붉혔다.

코델리아가 정말 천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콘웰 경 역시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아아··· 귀족의 귀감이로다.’

어찌 두 사람 모두가 이토록 고결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것일까.

‘진짜 환상의 커플이네.’

‘너무 잘 어울려.’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코델리아 양 진짜 천사.’

기사들의 얼굴에 훈훈함이 번졌고, 다리안 왕녀는 눈물을 닦아낸 뒤 수줍게 웃으며 코델리아를 끌어안았다.

“숙소에 가면 제일 예쁜 동전을 드릴게요.”

“저도요, 왕녀님.”

이야기 속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운 광경.

유더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

“후후후, 후후후후.”

숙소- 정확히는 2층에 자리한 방에 들어선 순간 유더는 연극조로 웃었고, 에스코트를 받기 위해 유더의 손을 잡고 있던 코델리아는 끌끌끌 혀를 찼다.

“아유, 우리 사기꾼. 그렇게 좋아요?”

“에이, 사기라뇨. 전부 진짜였는데.”

가장 위험한 미끼 역할을 하기 위해 나섰는가?

정말로 나섰다. 무척 쉽게 잡기는 했지만.

칠색초가 필요했는데 양보한 것인가?

이것 역시 사실이다.

칠색초가 생명의 힘을 품은 신비한 약초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바로 먹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들고 다니든 도움이 될 것을 깨끗이 포기했으니 양보가 맞았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다프네 왕녀와 디온 왕자와 어떻게 안면을 틀지 걱정할 필요 따위 이제 없었다.

더욱이 왕실의 실력자인 스펜서 공작 역시 자신들을 허투루 대하지 않으리라.

“뭣보다 제일검으로의 길이 열렸어.”

빛의 검성 룬 프라우드.

십검호 가운데 최강이라 하여 제일검의 칭호를 가진 자.

“스펜서 공작이랑 친하지?”

“어, 거의 양아들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당장 제일검의 아버지부터가 스펜서 공작가의 기사단인 붉은 장미 기사단의 단장 출신이었다.

제일검 역시 젊은 시절에는 붉은 장미 기사단의 단원으로 활동했고 말이다.

“좋아, 좋아. 이 기세로 왕도의 모두를 팍팍 구하는 거야!”

악마의 손과 호국공의 음모를 무너트려 왕족들을 구한다.

유더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자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왜?”

“아니, 그냥 웃겨서.”

모두를 구하기 위해 열심히 사기를 치는 사기꾼이라니.

‘역시 우리 집 유더야.’

새삼 배시시 웃은 코델리아는 얼굴의 안대를 푼 뒤 한쪽 손에 꼭 쥐고 있던 동전을 돌아보았다.

다리안 왕녀가 고르고 고른 끝에 내민 제일 예쁜 은화였다.

“참 착해.”

“누구? 우리 공주님이?”

“다리안 왕녀 말이야.”

진심으로 미안해서 눈물까지 보였으니까.

코델리아의 말에 유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을 통해 다리안 왕녀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던 유더였지만, 그래도 다리안 왕녀가 눈물을 보였을 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왕족답지 않은 모습이니까.’

타인의 희생과 양보를 당연하게 여기는 무리들.

애당초 타고난 인성들이 쓰레기라 그런 자들도 있었지만, 왕족들의 경우엔 상황이 조금 달랐다.

‘말 그대로 왕족이니까.’

태어났을 때부터 타인의 희생과 양보를 숨 쉬듯이 받아왔으니, 그쪽으로 무감각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마치 사람들이 평소에는 공기나 물의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 2왕비 소생인 것도 있겠지. 어릴 때 왕가보다는 사실상 공작가에서 자란 것도 있고.”

“근데 공작가만 해도 사실상 왕가 아냐?”

“그러네. 그냥 타고난 인성이 천사인 거구나. 우리 공주님처럼.”

“또, 또, 또 지랄한다.”

코델리아가 으르렁 거리자 유더는 키득 웃더니 침대 위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아무튼 잘 됐네. 다리안 왕녀도 우리 공주님이랑 친구 되어서 기쁜 것 같고.”

“그러고 보니 괜찮지?”

“뭐가?”

“인장 안 받은 거.”

사실 인장 대신 친구의 증표를 교환한 것은 코델리아의 애드립이었다.

정말로 다리안 왕녀에게 큰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이제 와서 걱정돼?”

“그··· 조금?”

아무래도 상의 없이 독단으로 저지른 일이었으니까.

물론 평소에 상의 없이 일 저지르는 건 유더의 장기나 다름이 없었으니 딱히 미안해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달랐다.

어떻게 보면 크게 이용해먹을 수 있는 건수 하나를 코델리아 자기 마음대로 튕겨낸 것이었으니 말이다.

“괜찮아. 일단 거절한 건 내가 먼저였잖아.”

“뭐야, 진짜 거절이었어? 괜히 한 번 튕긴 게 아니라?”

“야, 날 어떻게 보고 그러니. 내가 다리안 왕녀한테서 인장 뺏을 사람으로 보여?”

“응.”

코델리아가 고민할 여지 따위 없다는 듯 바로 답하자 유더의 얼굴이 구겨졌고, 코델리아는 까르르 웃었다.

“뭐, 하긴. 우리 집 유더가 사기꾼이긴 해도 악당은 아니지.”

“아니, 애당초 사기꾼도 아니거든?”

“네, 아빠. 그렇게 생각할게요.”

영혼 없이 답한 코델리아는 다시 킥킥 웃더니 유더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아무튼 이제 기다리면 되나?”

“어, 조금 쉬었다가 밤이 되면 이동하자.”

아케이만의 던전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진 아케이만의 비보를 손에 넣기 위해.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더 공자, 코델리아 양. 아래층에서 왕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 밖에서 정중하게 들려온 기사의 목소리에 유더가 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예! 곧 나가겠습니다!”

아마 같이 식사하자는 이야기일 터였다.

“으, 다시 붕대로 눈 가려야겠네.”

“걱정 마시죠, 공주님. 제가 완벽하게 에스코트해 드릴 터이니. 밥도 떠먹여 드리겠습니다. 아기 새처럼 ‘아’만 잘해주시면 됩니다.”

“그냥 눈이 다 나았다고 하자.”

“허허, 말도 안 되는 소리. 왕녀님이 기다시릴 터이니 어서 가시지요.”

“네네.”

붕대로 다시 눈을 가린 코델리아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고, 유더는 빙긋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내미는 쪽이나 잡는 쪽이나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

“음, 좋구나.”

“응? 뭐가?”

“아니, 그냥.”

어깨를 으쓱인 유더는 고개를 갸웃하는 코델리아를 이끌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밤이 깊어 모두가 잠들었을 때.

“좀 더 꽉 잡아.”

“더?”

“어, 더.”

검은 옷을 입은 코델리아는 똑같이 검은 옷을 입은 유더의 목을 좀 더 꽉 끌어안았고, 유더는 숨을 크게 골랐다.

구천구문에 의해 진보한 질풍이십사보.

이제는 완성 단계에 도달한 그것.

“가자, 아케이만의 던전으로.”

작게 말한 유더는 지면을 박찼다.

검은 질풍이 되어 어둔 밤을 가로질렀다.

&

< 제54장 - 아케이만의 비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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