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7장 - 로그 마스터 >
제57장 - 로그 마스터
십검호.
세일룬 왕국이 자랑하는 열 명의 검호들.
그들 하나하나는 단순히 검사 한 명으로 규정지을 수 없었다.
그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선택받은 자들.
하늘로부터 검의 재능을 부여받은 천재들 가운데서도 다시 한줌밖에 되지 않는, 무던한 노력 끝에 인간의 벽을 넘어 마침내 초인의 경지에 오른 이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하나가 전설이었고, 살아있는 검의 화신이었으며, 검의 길을 걷는 모든 이들의 지향점이었다.
안타리우스 공작.
십검호 가운데 최연장자인 동시에 아르곤 제국과의 전쟁에서 세일룬 왕국을 구한 구국의 영웅.
호국공이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그는 본래 귀족 출신이 아니었다.
아마도 평민의 자식.
부모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 하는 전쟁고아.
때문에 그는 밑바닥에서부터 인생을 시작하였다.
철이 들기 전에는 소매치기 같은 일을 하며 뒷골목을 전전하였고, 조금 더 자란 뒤에는 강제로 징집되어 병사가 되어야 했다.
그것도 제대로 된 병사가 아니라 형벌부대 사이에 낀 화살받이로 말이다.
하지만 그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
조잡한 창 대신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누군가가 흘린 검을 주워들었을 때, 그는 검이 마치 손에 달라붙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살아남았다.
실전 속에서 자기만의 검술을 갈고 닦았고, 전쟁이 끝나있을 때 그는 더 이상 형벌부대에 징집된 범죄자가 아닌 작위를 가진 귀족이 되어 있었다.
‘입지전적인 존재.’
전쟁영웅.
평민으로 시작하였으나 자신의 실력만으로 귀족의 자리에 오른 선망의 대상.
병사들은 그를 사랑하였고, 자신들의 자랑으로 여겼다.
그리고 당대 국왕이 막 즉위하였을 때 벌어진 아르곤 제국과의 전쟁에서 그는 전설이 되었다.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국왕의 목숨을 구하였고, 급기야는 적의 실질적인 총대장이었던 제국의 검호 카를로스 원수를 참해 전쟁을 종결지었다.
아르곤 제국의 침공을 저지한 자.
대륙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이라는 실라테스 평원을 지켜낸 자.
‘그렇기에 호국공.’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
그는 고개를 들었다.
예순을 넘어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그는 여전히 정정하기만 하였다.
허리는 무척이나 곧았고, 전신의 근육은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호국공을 마주한 로한 백작은 허리를 숙인 채 두려움을 삼켰다.
“로그 마스터라 했나?”
“예, 그렇게 자칭하는 이가 베누스 자작의 저택에서 녹색 신의 눈물을 비롯한 여러 보물들을 훔쳐갔다 합니다.”
“그래서?”
“예?”
“그래서라고 물었다.”
로한 백작을 내려다보는 호국공의 두 눈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킨 로한 백작은 깨달았다.
호국공은 로그 마스터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무관심과 아주 약간의 노여움.
고작 베누스 자작 따위가 도둑질 당한 일이 무에 중요하기에 자신에게까지 이야기하는 것인가.
자신이 그렇게 사소한 일에까지 신경을 써야하는가?
“일에 지장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로한 백작이 빠르게 말하자 호국공은 부드럽게 돌아섰다.
그리고 그 동작에 더욱 조바심을 느낀 로한 백작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어 말했다.
“베누스 자작과 별개로 거사를 위한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한 달 남짓 밖에 남지 않은 세일룬 왕국의 건국 300주년 기념회.
호국공과 그를 모시는 이들에게 있어 그 날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였다.
‘새로운 왕가.’
재편되는 정계의 구조.
로한 백작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희열이 번졌다.
그에게 있어 건국 기념회는 기존의 왕가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왕가를 세우는, 로한 백작 자신이 권력의 중심부에 서게 되는 쿠데타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호국공은 로한 백작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굳이 그런 로한 백작의 착각을 정정해주지 않았다. 애당초 호국공 자신이 심어준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로한 백작이 바라는 것과 호국공이 바라는 것.
서로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다른 그것.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철저히 준비하도록.”
“그리 하겠습니다.”
예를 표한 로한 백작은 서둘러 호국공의 방을 나섰다.
호국공 본인이 말한 것처럼 도둑질 따위로 그의 심기를 어지럽힐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검은 달에게 맡기는 수밖에.’
로그 마스터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베누스 자작 때문이 아니었다.
어젯밤에 도착한 두 번째 예고장 때문이었다.
베누스 자작과 마찬가지로 돈 세탁을 비롯한 여러 궂은일들을 맡고 있는 마칸 백작의 집에 내일 밤 로그 마스터가 방문한다.
‘도둑놈은 도둑놈으로 막는 것이 제격이겠지.’
애당초 이런 일에 써먹기 위해 부리는 것들이기도 하니.
스스로에게 말한 로한 백작은 서둘러 발걸음을 떼었다.
호국공이 말한 것처럼 거사까지는 앞으로 한 달이 채 남지 않았으니, 사소한 일에 발목이 잡혀서는 아니 되었다.
“로한 후작··· 아니, 로한 공작인가.”
제법 멋지게 기른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래의 자신을 그려 본 로한 백작은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즐겁게 웃으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
그리고 다음 날 저녁.
큰마음 먹고 반년 치 봉급을 털어서 산 고급 식탁의 상석에 앉은 아델리아는 식사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뚱한 표정을 지은 채 턱을 괴고 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 때문이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다.”
“그러게, 소스가 아주 제대로인데?”
“공자님, 공자님도 이거 할 수 있죠?”
“아마도?”
“우왕, 역시 우리 공자님이에요.”
“왜? 나중에 또 먹고 싶어서?”
“네네, 코델리아는 다음에 또 먹고 싶어요.”
“우리 공주님이 원하신다면야. 그런데 공주님, 편식은 나쁜 거라고 했죠? 당근도 먹어야죠.”
“공자님이 있는데 굳이 제가 삶은 당근을 먹어야 할까요? 대신 좀 먹어줘. 자.”
코델리아는 당근을 포크로 찍어 유더에게 내밀자 유더는 재주 좋게 포크를 뺏어들더니 그대로 다시 코델리아에게 내밀었다.
“자, 아 해봐. 아.”
“야, 아는 무슨. 그냥 먹을 테니까 줘.”
“그러니 말고 아 해봐 아. 응?”
“우씨. 아. 됐어? 아~.”
코델리아가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자 유더는 삶은 당근을 그 안에 쏙 집어넣었고, 아델리아는 참고 참았던 한 마디를 입 밖에 내었다.
“아주 지랄을 한다, 지랄을.”
나는 보이지도 않냐?
아주 둘만의 세계에 퐁당 빠졌지?
게일 공자님 보고 싶다.
나도 저것들보다 훨씬 더 달달한 염장질 할 수 있는데.
“흠흠흠.”
새삼 아델리아의 존재를 깨달은 코델리아는 얼른 유더에게서 포크를 뺏어 쥐었고, 유더는 애써 웃음을 삼킨 뒤 다시 식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델리아는 그런 둘과 식사를 계속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동생들, 러브러브한 건 좋은데 때와 장소를 조금은 가리자. 알았지?”
“러브러브 아닌데.”
소심하게 반박하던 코델리아는 아델리아가 눈을 부라리자 얼른 입술을 닫았고, 유더는 아델리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슬슬 때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버지랑 아버님이 오실 거야.”
“게일 아주버님도?”
“게일 공자님도 오시고말고. 아, 오빠도 올 거야.”
“에드워드 오빠?”
“어, 아무래도 300주년 건국 기념회니까.”
보통 아무리 큰 행사가 있어도 집안에 사람 하나쯤은 남겨두기 마련이었는데, 이번에는 행사가 행사다보니 집안사람들 모두가 남김없이 출동하게 되었다.
“언제쯤 도착하실 예정인지 알 수 있을까요?”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모레 오후쯤에 도착하실 거야.”
게일을 본다는 생각에 신이 났는지 아델리아의 얼굴에 자꾸만 미소가 번졌다.
“그런데 언니.”
“그래, 동생아.”
“전부 언니 저택에 머무는 거야?”
“그건 무리겠지.”
아델리아의 저택이 아주 작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백작가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머물 정도로 큰 것은 아니었다.
‘하긴, 따라오는 사람도 많을 테니.’
아마 마이아와 델리아도 따라올 터이니, 이래저래 스무 명 가까이 되는 대인원일 터였다.
“왕실에서 왕도에 저택이 없는 귀족들에게는 왕궁의 일부를 거처로 제공하기로 했어. 외곽에 있는 궁들이지만 여간한 고급 숙소보다도 훨씬 나을 거야.”
“어, 잠깐. 그럼 우리도 옮겨?”
“너희도 옮겨야지. 나도 갈 거고.”
코델리아의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 답한 아델리아는 포크를 고쳐쥔 뒤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밤놀이는 오늘까지야. 알았지?”
밤놀이.
아델리아의 말에 코델리아는 흠칫했고, 유더 역시 놀란 얼굴이 되었다.
“왜들 이래. 내가 말했지? 여긴 내 집이고,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내 손바닥 안에 있다고. 언니가 너희 둘이 밤마다 놀러 나가는 거 몰랐을 거 같아?”
아델리아는 평범한 귀족가 영애가 아니었다.
근위마법병단을 이끄는 일곱 단장 가운데 하나였다.
‘어, 어떡하지?’
‘걱정하지 마. 뉘앙스를 보아하니 네가 핑크폭탄이라는 것까지는······.’
‘로그 마스터. 로그 마스터. 로그 마스터!’
‘그래, 로그 마스터라는 것까지는 모르는 모양이니까.’
아마 말 그대로 밤놀이를 나간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마어마한 대도시인 왕도에는 밤을 잊은 거리가 몇 개나 있었으니 말이다.
“언니 말 알았어?”
“으응, 알았어.”
코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델리아는 피식 웃더니 유더에게 말했다.
“너네 둘 다 강한 건 아는데, 그렇다고 굳이 위험한 곳에 가진 말고. 사람 많은 곳으로 안전하게 다녀. 으슥한 곳에 들어가서 막 그렇고 그런 일 하려고 하면 나한테 뒈질 줄 알고. 알았지?”
“어··· 예.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믿겠어.”
입술로는 웃어도 눈으로는 웃지 않은 아델리아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튼 그럼 재미나게들 놀다 와. 너무 늦지는 말고.”
“응, 언니. 고마워.”
“고맙기는.”
빙긋 웃은 아델리아는 그대로 돌아서서 식당을 나섰고, 둘만 남은 유더와 코델리아는 다시 서로를 보았다.
‘오늘은 그렇다 치고, 다음은 어떡하지?’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야지. 일단은 오늘의 일에 집중하자.’
로그 마스터의 두 번째 활약.
고개를 끄덕인 코델리아는 다시 식사를 재개했고, 유더는 코델리아가 은근슬쩍 밀어내는 삶은 당근들을 다시 접시 중앙으로 밀어 넣었다.
&
“달의 여신들이시여,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것을 허락해주세요.”
셀레네와 헬레네의 이름으로.
꼭 필요한 의식이라는 유더의 주장대로 기도를 마친 코델리아는 호다닥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뭔가 마법 소녀 같은 변신은 없구나.”
“야, 이쪽 보지 말고 너나 빨리 갈아입어.”
사실상 망토를 두르고 가면만 쓰면 되는 유더와 달리 코델리아는 이것저것 갈아입을 것이 많았다.
겨우 토끼 귀와 꼬리까지 장착한 코델리아는 마지막으로 머리칼을 분홍색으로 물들인 뒤 유더를 돌아보았다.
“가자.”
“예, 마님.”
코델리아는 유더 등에 얼른 업혔고, 유더는 검은질풍이 되어 왕도의 밤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30여분.
지붕 위에 바짝 웅크린 채 저 너머의 대저택을 바라본 코델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수십 개에 달하는 조명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림 세어도 백 명은 되어 보이는 인원들이 저택 담벼락은 물론이고 정원까지 빈틈없이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로그 마스터는 미친 거 같아.”
도둑질하러 가는 주제에 뭐 하러 예고장을 뿌린단 말인가.
코델리아의 주장에 적극 동감하는 유더였지만 그렇다고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로그 마스터가 도둑들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예고장 때문이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진정 자유로운 도둑.’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그 어떤 방해도 뛰어넘을 수 있는 도둑의 왕.
“저거 절반은 검은 달이겠지?”
“아마 그렇겠지. 저택 안에도 잔뜩 들어있을 테고.”
절로 한숨이 나오는 구성이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로그 마스터가 되기로 한 이상 돌파하는 수밖에.
“블랙망토, 물건은 준비되었겠지?”
“물론입니다, 핑크폭탄님.”
연극 풍으로 답한 유더는 준비해온 가방을 열어보였고, 코델리아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신나게 터트려 볼까?”
“원하시는 만큼 얼마든지. 그런데 이러면 도둑이 아니라 강도가 아닐까?”
“그래서 로그 마스터잖아. 시프 마스터가 아니라.”
코델리아의 주장에 유더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설득력이 있어.”
“그렇지? 아무튼 시작하자.”
분홍색 다이너마이트가 가득 든 가방을 한 손에 든 코델리아는 다른 손으로 문 크리스탈을 꺼내들었고, 유더는 자연스럽게 코델리아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 발동하는 문 크리스탈.
분홍빛 폭발천사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
< 제57장 - 로그 마스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