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7장 - 로그 마스터 #4 >
“커헉!”
피를 왈칵 토한 스칼렛이 뒤로 크게 튕겨져 나갔다. 거의 십여 미터 이상을 날아간 뒤에야 바닥을 뒹굴었다.
“크허억··· 컥······.”
흑룡의 기운에 강타당한 배를 붙잡은 스칼렛은 쓰러진 채로 재차 피를 토했고, 피 웅덩이에 머리를 박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괘, 괜찮아? 쟤 죽은 거 아냐?”
깜짝 놀란 코델리아가 스칼렛에게 호다닥 날아갔지만 유더는 담담히 손을 거두었다.
이 정도로 죽을 스칼렛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좀 놀라긴 했지만.’
피를 너무 토한 터라 순간 움찔하기는 했다.
하지만 적룡의 갑주였다.
단순히 방어력만 강한 것이 아니라 착용자에게 용의 재생력까지 부여하는 물건이었으니, 피를 잔뜩 토하긴 했어도 죽지는 않았으리라.
그리고 유더의 예상대로 되었다.
스칼렛은 초죽음 상태가 되어 골골거릴 뿐, 숨을 거두지는 않았다.
하지만 죽지만 않으면 그만인 것은 유더의 기준이었지 코델리아의 기준이 아니었다.
“야, 야. 괜찮아? 응? 죽지 마. 죽지 말라구.”
저도 모르게 말을 쏟아낸 코델리아는 스칼렛의 입안에 남은 피를 마저 토해내게 한 뒤 그녀를 바로 눕혔다.
“기, 기도 확보하고.”
입을 벌리게 한 뒤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힌다.
그리고 호흡이 있는지 확인한다.
‘으으, 생각해. 코델리아. 기억해내, 코델리아.’
예전에 수업 시간에 구급법 배웠잖아.
소방관 아저씨가 잘한다고 칭찬도 해줬잖아.
코델리아는 스칼렛의 입 근처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가늘지만 숨결이 느껴졌다.
“조, 좋아. 숨 쉬어.”
인공호흡은 일단 패스.
그럼 다음은?
“야, 야. 정신 차려. 야.”
가볍게 뺨을 두드리자 스칼렛이 아주 약간이지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의식이 완전히 끊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오직 하나.
“패스트 힐링!”
고속 회복주문!
로그 마스터의 비보를 얻을 기회라 말하긴 했지만, 그리고 실제로 욕심이 나기도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스칼렛을 죽여서까지 비보를 빼앗을 생각은 조금도 없는 코델리아였다.
스칼렛은 악당이 아니었으니까.
소울 테이커에 홀리지만 않았다면 설사 동료가 되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적은 되지 않았을 인물이니까.
“하악··· 하······.”
회복 마법이 효과가 있었던 건지 스칼렛의 얼굴색이 좋아지며 호흡도 안정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1분 남짓.
겨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한 스칼렛은 몸을 일으켜 세우는 대신 그대로 늘어트렸다.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안도의 숨을 토하는 코델리아에게 던지듯이 말했다.
“그냥 죽여.”
“뭐?”
“그냥 죽이라고.”
스칼렛은 옅은 웃음을 흘렸다.
텅 빈 눈동자로 코델리아를 마주하며 마저 말을 이었다.
“내가졌어. 져 버렸어. 로그 마스터의 명예를 지키지도 못 했고.”
스칼렛의 눈시울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피에 젖은 뺨을 따라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이제··· 이제 로그 마스터의 영예로운 이름에는 핑크폭탄이란 불명예가 영원히 함께하겠지. 그 꼴은 못 보겠으니까··· 그냥 죽여. 죽여줘.”
로그 마스터 핑크폭탄.
아아 로그 마스터.
아아 핑크폭탄.
아버지.
할아버지.
죄송해요.
정말정말 죄송해요.
스칼렛은 로그 마스터가 되지 못 했어요. 로그 마스터의 명예도 지키지 못 했어요.
스칼렛은 아예 엉엉 울기 시작했고, 코델리아는 복잡 미묘한 얼굴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씨, 씨발.’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지?
참으로 극단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스칼렛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 심정이 이해가 가는 코델리아였다.
스칼렛은 스스로가 로그 마스터의 후예라는 사실에 엄청난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유더야, 유더야! 어떡해? 응?’
코델리아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유더를 돌아보았다.
제발 어떻게든 해달라는 그 눈빛에 유더는 진지하게 고민했고,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오그라들긴 하지만 좋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스칼렛의 성격.
그녀의 성향.
그렇기에 지금 내놓을 수 있는 최적의 답안.
‘아.’
그런데 그때였다. 유더가 무어라 답을 말해주기도 전에 코델리아 역시 무언가 생각났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녀 역시 영웅전기2의 썩은물이었기 때문이다.
‘저기 유더야. 이번만 내 마음대로 할게. 이번 딱 한 번만.’
코델리아의 눈빛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유더 자신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이유를 더 붙이자면-
‘네가 로그 마스터니까.’
유더 자신이 아닌 코델리아가.
유더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코델리아는 다시 스칼렛을 보며 말했다.
“야, 재수땡이.”
“스칼렛이야. 그리고 더 이상 괴롭히지 마. 그냥 죽여줘.”
“그래, 스칼렛. 죽이는 건 일단 뒤로 미루고, 너··· 나랑 승부하자.”
“뭐?”
스칼렛이 무슨 소리냐는 듯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코델리아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로그 마스터잖아. 워리어 마스터가 아니라.”
코델리아의 말에 스칼렛은 눈을 깜박였고, 이내 이해했다. 그렇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 했다.
“너 설마······.”
“나도 로그 마스터의 비보가 있고, 너도 로그 마스터의 비보가 있어. 우리 둘 다 로그 마스터의 후보인 셈이지. 그러니까··· 자웅을 겨루자. 승부를 해서 이긴 쪽이 진짜 로그 마스터가 되자. 어떤 승부일지는··· 너도 알겠지?”
찡긋 윙크하며 빙긋이 미소 짓자 스칼렛의 뺨이 순간 발갛게 달아올랐다. 달빛 아래 드러난 코델리아의 미소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내 말 알겠어?”
“으응··· 아, 알겠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은 스칼렛은 몇 번인가 심호흡을 하더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코델리아는 지금 로그 마스터의 자리를 놓고 로그 마스터다운 승부를 하자고 했다.
그렇다면 로그 마스터다운 승부는 무엇일까.
까놓고 말해 도둑질.
좀 더 우아하게 말하자면 소유권 무단 이전 행위.
“동의하는 거야?”
코델리아가 묻자 스칼렛은 천천히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다른 말을 덧붙였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야, 솔직히 네가 지금 조건 달 상황이야?”
“좀 끝까지 들어봐.”
“뭔데?”
코델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스칼렛은 슬쩍 시선을 피하더니 일단 헛기침을 몇 번 토했다. 얼굴을 더욱 붉히며 유더가 예상한, 그리고 기대한 말을 입에 담았다.
“이 승부는 네가 이겼어. 그런데도 네가 나에게 명예로운 대결을 할 기회를 주었으니··· 나도 은혜를 갚겠어. 뭐가 되었든 네 바람을 하나 이루어줄게.”
“내 바람을?”
“어, 네 바람을.”
“아무거나?”
“아니, 그래도 좀··· 내 능력 범위 내의 일로. 그··· 알잖아. 시키는 일 하나 해준다는 뭐 그런 거.”
“오홍.”
코델리아가 팔짱을 끼며 씩 웃자 스칼렛은 새삼 다시 시선을 피했고, 멀리서 지켜보던 유더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빙고!’
역시 루카스과.
빌트바인 영웅전의 재현에 집착하는 루카스와 마찬가지로 스칼렛 역시 로그 마스터의- 특히 초대 로그 마스터의 일화를 재현하는 것에 집착하는 면이 있었다.
‘초대도 이런 일이 있었지.’
정확히는 초대 로그 마스터와 그 경쟁자였던 시프 마스터 사이에 있었던 일이었다.
아직 스스로를 로그 마스터라 자처하기 이전의 미숙한 도둑이었던 로그 마스터는 시프 마스터의 함정에 빠져 무력적으로 완벽히 패한 적이 있었는데, 로그 마스터의 재능을 높이 산 시프 마스터가 코델리아와 같은 제안을 입에 담았다.
“승부를 하자. 우리들다운 진짜 승부를.”
시프 마스터의 제안에 로그 마스터는 스칼렛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이번 일에 대한 빚은 갚은 뒤에 승부에 나서겠다고 했고, 시프 마스터는 그런 로그 마스터를 명예를 아는 자라며 기꺼이 여겼다.
‘그리고 결국 승리한 로그 마스터가 시프 마스터에게 신속의 날개를 받았고··· 이후에도 두 사람은 돈독한 우정을 이어나갔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지.’
스칼렛의 얼굴이 빨개진 것도 반쯤은 그래서일 터였다.
자신이 초대 로그 마스터와 똑같은 포지션에서 그때의 일화를 재현하고 있으니 얼마나 설레고 기쁘겠는가.
‘물론 마지막까지 일화를 따라갈 생각은 없지만.’
더욱이 지금 중요한 것은 스칼렛과의 승부가 아닌, 스칼렛의 약속이었다.
무엇이든 한 가지 바람을 이루어준다.
즉, 이번 왕도에서의 싸움에서 스칼렛을 무척이나 유용하게 부려먹을 방법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이번 기회에 친해지면 더 좋고.’
스칼렛이 악역으로 전향하는 것은 모두 소울 테이커 때문이었다.
애당초 친해져서 소울 테이커에 손을 못 대게 하면 끝까지 아군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았다.
‘과연 코델리아.’
유더 자신처럼 계산해서 꺼낸 말이 아니었다.
스칼렛의 성격상 승부에 응할 거라는 것까지는 생각했을지언정, 지금처럼 조건을 끌어낼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코델리아는 지금처럼 말했다.
로그 마스터의 명예를 위해 싸우는 스칼렛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원작에서는 늘 적이 되어야만 했던 그녀와 다시 한 번 죽고 죽이는 사이가 되기보다는 친구가 되고 싶었으니까.
‘나는 못 해.’
저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행동하는 것은 유더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 어때? 내 조건은?”
스칼렛이 소심하게 묻자 코델리아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이내 송곳니를 빛내며 말했다.
“좋아, 계약 성립이야.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악수하자.”
“어?”
“악수하자고.”
코델리아가 손을 내밀자 스칼렛은 우물쭈물 그 손을 잡았고, 이내 다시 뺨을 붉혔다.
어째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럼 일단 돌아가 있어. 나중에 내 바람을 이야기해줄 테니까. 그··· 푸른 달 알아?”
“알아.”
“길드 마스터는?”
“주페 아저씨 말하는 거지?”
“잘 아네. 그 아저씨 통해서 연락할게. 알았지?”
“알았어.”
“아유, 우리 스칼렛 대답 잘하는 것 좀 봐.”
까르르 웃은 코델리아가 스칼렛을 일으켜 세우자 스칼렛은 입술을 삐쭉이다 말했다.
“야, 그런데 너···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아?”
스스로 밝히기 전부터 자신을 스칼렛이라고 명확하게 부른 유더와 코델리아였으니까.
제법 예리한 질문에 코델리아는 허둥거리며 답했다.
“어? 어··· 그··· 아! 로그 마스터의 길을 걷는 자니까. 경쟁자 정도는 이미 파악해뒀다 이 말씀이야.”
코델리아가 가슴을 탕탕 치며 말하자 스칼렛은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코델리아의 이야기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역시 루카스과.’
은근 순진하단 말이지.
유더가 홀로 사악하게 웃는 가운데 스칼렛은 코델리아의 손을 괜히 한 번 흔들더니 이내 신속의 날개를 펼쳐 저만치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야! 핑크폭탄!”
“왜, 빨간머리.”
“지는 분홍머리면서.”
“아무튼 왜?”
“너무··· 기다리게 하지는 마. 알았지?”
“어, 알았어. 가능한 빨리 부를게.”
코델리아가 귀엽다는 듯 킥킥 웃으며 답하자 스칼렛은 다시 얼굴을 붉히더니 신속의 날개를 펼쳐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뒷모습.
어째 멋있기보다는 귀여운 그 모습에 빙긋 웃은 코델리아는 유더를 향해 돌아서더니 브이 자를 그린 손을 당당히 내밀었다.
“문제해결.”
도둑질도 성공했고, 스칼렛과 연결고리도 만들었으니까.
엣헴엣헴 헛기침까지 하며 으스대는 코델리아의 모습에 유더는 가볍게 박수를 쳐주었다.
그리고 이틀 뒤 오전.
로그 마스터 핑크폭탄의 두 번째 활약이 왕도 전역에 널리 알려진 그때.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의 마차가 나란히 왕도에 도착했다.
&
< 제57장 - 로그 마스터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