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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156화 (156/473)

< 제58장 - 공작가의 초대장 >

제58장 - 공작가의 초대장

사람이 둘 이상 모이면 권력 관계가 형성되고, 셋 이상 모이면 정치가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왕도에는 수많은 귀족들이 존재했고, 자연 복잡한 정치 구조가 형성되어 있었다.

‘사람은 어째서 무리를 짓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생존을 위해서일 것이다.

무리를 지음으로써 집단의 힘을 강화하고, 그로 말미암아 위험을 막아내며 필요한 것들을 쟁취한다.

‘왕도의 정치판.’

그곳에 형성된 여러 무리들.

하나의 무리 안에서도 여러 계파가 형성되는 것처럼 무리의 숫자를 하나하나 헤아리면 수십이 넘어갈 터였지만, 크게 보면 두 덩어리로 구분할 수 있었다.

왕당파와 귀족파.

전자는 왕가를 중심으로 뭉친 귀족들의 집단이었고, 후자는 왕권을 견제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대귀족 연합을 중심으로 한 집단이었다.

때문에 양쪽 모두 세일룬 왕국의 귀족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지만, 그 구성을 보면 사뭇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교적 신진 귀족들이 많은 왕당파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귀족들로 구성된 귀족파.’

새로운 귀족들이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서 만들어진 구조가 아니었다.

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숨어 있었다.

‘비빌 언덕이 필요하니까.’

이미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구 귀족들’ 입장에서는 ‘새로운 귀족들’이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나눠가져야 하는 상대들이니 말이다.

때문에 신진 귀족들은 기존 귀족 사회에서 이래저래 배척받는 처지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그들이 생존의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왕가에 대한 충성이었다.

신진 귀족들은 왕가에 의존하고, 왕가는 신진 귀족들을 흡수해 구 귀족들로 구성된 귀족파에 대항할 힘을 기른다.

‘꿈도 낭만도 없는 소리 같지만 이런 게 현실이지.’

물론 개중에는 정말 왕가에 대한 깊은 충성심을 가진 이들도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나쁘지 않아.’

왕당파와 귀족파로 갈려 권력 싸움을 하는 것은 분명 비생산적인 일이었지만, 동시에 생산적인 일이기도 하였다.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하니까.’

어느 한 파벌이 나머지 파벌을 몰아내고 권력을 독점한다면, 그 순간부터 약속된 타락이 시작될 터였다.

때문에 설사 서로를 견제하느라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게 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대립은 반드시 필요했다.

‘어찌되었든 왕당파와 귀족파.’

무리가 있으면 우두머리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자연 왕당파와 귀족파에도 각각의 파벌을 이끄는 수장들이 존재했다.

‘왕당파는 호국공.’

안타리우스 공작.

평민으로 시작해 공작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는 신진 귀족들의 꿈과 희망이었고, 왕족들 입장에서도 비교적 다루기 쉬운 장기 말이었다.

‘그러다 통수를 맞지만.’

왕족 몰살 계획의 추진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호국공이었으니 말이다.

왕족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격이었다.

‘어찌되었든 현재 왕당파를 이끄는 것은 호국공.’

때문에 그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왕당파가 아닌 귀족파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비둘기파가 아닌 매파의 힘을 말이야.’

대귀족 연합이다 보니 귀족파는 머리가 여럿인 다두정 형태로 조직이 구축되어 있었는데, 크게 보면 이쪽도 온건파인 비둘기파와 급진파인 매파로 구분할 수 있었다.

‘비둘기파를 이끄는 건 스펜서 공작. 매파를 이끄는 것은 발로아 공작.’

왕가와 사돈 관계를 맺고 있는 스펜서 공작의 비둘기파는 사실상 중립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호국공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역시 매파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복잡해. 복잡하다구!”

“그냥 발로아 공작 집에 가서 이거 주고 오면 돼.”

“그럼 걍 그렇게 말을 하지 그랬어. 왜 복잡한 설명으로 날 괴롭히는데?”

“흑흑. 아빠는 말이야, 우리 공주님이 생각하는 걸 포기하지 않았으면 해요.”

“생각 평소에 많이 하거든? 오늘 저녁은 뭘까라든지, 어떻게 하면 더 예쁜 폭발을 일으킬 수 있을지 등등.”

“과연 짐승녀······. 오랜만에 으르렁 거리는 건 어떨까요?”

“왈! 왈!”

정말로 개 짖는 소리를 내며 유더의 손을 깨문 코델리아는 괴도 핑크폭탄으로 분장한 뒤 다시 물었다.

“아무튼 발로아 공작 집에 이걸 두고 오면 된다는 거지?”

“어, 의미심장한 이 편지와 함께.”

빙긋 웃으며 말한 유더는 마칸 백작의 집에서 찾아낸 비밀장부에 핑크폭탄의 서명이 들어간 서신을 끼워 넣었다.

“가져다주면 알아서 호국공의 세력들을 때려줄 거야.”

“음··· 약은 약사에게라는 거구나.”

“일은 전문가들에게 맡겨야지.”

비밀장부가 있다한들 유더와 코델리아가 직접 호국공의 치부를 찌르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평소에도 어디 찌를 구석이 없나 열심히 왕당파를 살피던 귀족파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신이 나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닐 게 분명했다.

“알았어. 거기에 이 보물들도 정해진 곳에 뿌리면 되는 거지?”

“어, 왕당파가 부패했다는 증거들이니까.”

단순한 보물이었다면 그냥 열심히 돈 모은 게 죄냐! 하겠지만 문제는 이 보물들이 전부 장물들이란 사실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왕실의 물건들이지.”

“왕실 입장에서는 도둑놈들을 키운 꼴이 되겠네?”

“그렇겠지. 읍참마속을 좀 해야 할지도?”

유더가 살짝 사악한 미소를 짓자 코델리아는 순간 화색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읍참마속. 참 좋은 말이지.”

“오, 알아?”

“흥, 당연히 알지. 이런 것도 모를까봐?”

코델리아가 잰체하며 말하자 유더는 짝짝짝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삼국지 좋아해?”

“어, 제갈공명 좋아해.”

머리 좋은 남자 좋아하거든.

어쩐지 모르게 뒷말을 삼킨 코델리아는 탁탁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무튼 이제 가자.”

“그래, 귀족파의 건투를 기원하자고.”

그리고 다음 날 오후.

귀족파는 은밀하면서도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유더는 코델리아의 활약이 실린 호외를 읽으며 숫자를 헤아렸다.

‘건국 기념회 전까지는 어떻게든 될 것 같네.’

겨우 비밀 장부 하나로 호국공의 왕당파가 무너지길 바라는 건 그야말로 도둑놈 심보였다.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마칸 백작을 비롯한 실무진 몇의 실각과 검은 달이 사업장 몇 개를 접는 정도의 타격.

약간 미묘한 감도 있었지만, 사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호국공의 완벽한 계획을 어그러트리는데는 말이다.

‘물론 후속 조치들도 계속 취할 생각이지만.’

“또또 사악한 생각한다.”

옆에서 들려온 핀잔에 유더는 빙긋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남문 앞.

며칠 전 아델리아가 유더와 코델리아를 반겨줬던 그 장소에서 이번에는 유더와 코델리아가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다.

물론 아델리아는 그때나 지금이나 기다리는 입장이었지만 말이다.

“아냐, 아냐. 온도차가 엄청난 걸.”

“그러게.”

벤치에 앉아 얌전히 기다리는 유더와 코델리아와 달리 아델리아는 아까부터 안절부절 못 한 채 남문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저러다 목 빠지겠다.”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까치발까지 세워가며 최대한 멀리 보기 위해 노력하는 저 모습.

아델리아가 이렇게까지 안달이 난 이유는 단순했다.

“온다!”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의 마차가.

정확히는 그 안에 타고 있을 아델리아의 사랑이!

잔뜩 신이 난 아델리아는 당장이라도 마차를 향해 달려갈 기세였지만, 돌연 주먹을 꽉 쥐더니 스스로를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

아무리 좋아도 마차를 향해 달려가는 경박한 여인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게일 앞에서는 말이다.

“좋아, 좋아. 참을 수 있어. 참을 수 있어, 아델리아. 응응, 할 수 있고말고.”

“언니, 그러지 말고 소수를 외워봐. 효과가 있을 거야.”

코델리아가 옆에서 조언했지만 아예 들리지도 않는지 아델리아는 가슴을 누른 채 열심히 심호흡만 반복했다.

그리고 몇 분.

아델리아에게는 영원같이 느껴진 그 시간이 지나 마침내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의 마차가 남문에 도착했다.

&

“게일 공자님.”

“아델리아 양.”

“게일 공자님.”

“아델리아 양.”

“게일 공자님!”

“아델리아 양!”

아델리아의 저택 정원.

왕실에서 마련해준 숙소로 이동하기 전에 잠시 여독을 풀고자 들른 그곳에서 게일과 아델리아는 서로를 마주한 채 목소리를 나누었고, 눈빛을 나누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키스를 나누니,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에 참으로 다양한 표정들이 떠올랐다.

“보기 좋군요.”

“그러게 말이다.”

흐뭇한 미소를 짓는 마이아와 바이엘 백작.

“아델리아 아가씨가 저렇게 되실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죠.”

“나도나도.”

기쁘긴 하지만 당혹스럽기도 한 달리아와 코델리아.

‘공공장소인 걸 잊지 않으면 좋을 텐데.’

왜 커플들은 저렇게 공공장소에서 염장을 지르지 못 해 안달인 것일까.

끌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젓는 유더.

“말세야, 말세인 게 분명해.”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더불어 어쩐지 모르게 모두에게 잊힌 것 같은 체이스 백작가의 장남이자 계승자인 에드워드.

“음.”

그리고 입꼬리만 아주 살짝 올린 채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체이스 백작.

‘뭐, 본인들은 아예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지만.’

열렬한 키스를 나누는 게일과 아델리아를 보던 유더는 다시 고개를 내저으며 시선을 돌렸고, 두 손으로 뺨과 입술을 감싼 채 흥미진진한 얼굴로 시청각 교육을 받고 있는 코델리아를 바라보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유더,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겠지?”

“···예, 아버지.”

바이엘 백작은 딱히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눈빛이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도행에 오른 유더가 이번에도 또 주간도주- 아니, 가출을 했으니 말이다.

“아델리아의 편지에 사정이 얼추 담겨 있기는 했다만··· 그래도 본인에게 이야기를 들어 봐야하겠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유더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바이엘 백작은 어쩔 수 없다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많이 변했구나. 아니, 이번에도 많이 강해졌구나.”

집을 나선지 이제 겨우 삼주 남짓이었는데 그 사이에 또 실력이 일취월장한 유더였다.

정확히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직접 대련을 해봐야 알겠지만, 이렇게 마주하기만 해도 이전의 유더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강해졌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키도 많이 자랐고.”

불과 몇 달 전만해도 코델리아 보다도 작았던 유더였는데 지금은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 것 같았다.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 나중에 마저 이야기하도록 하자꾸나. 일단은 저쪽이 더 급한 것 같으니.”

“네?”

“저쪽 말이다, 저쪽.”

놀리듯 말한 바이엘 백작은 껄껄 웃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고, 유더는 언제나와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체이스 백작을 볼 수 있었다.

“아버님.”

“여전히 작구나.”

“네?”

“여전히 작아.”

많이 자라기는 했지만, 아직 체이스 백작의 기준으로는 작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유더는 180 초반인 반면 게일은 180 후반대였고, 아예 체이스 백작은 2미터에 가까운 거한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유더가 살짝 기대하며 말끝을 흐리자 체이스 백작은 돌연 아델리아 쪽을 돌아보았고, 그녀가 여전히 열렬한 키스에 정신이 팔렸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유더에게 불쑥 다가서며 말했다.

“조잡한 물건이다.”

작은 가죽 주머니를 유더의 품 안에 찌르듯이 집어넣은 체이스 백작은 그대로 아델리아를 주시한 채 작게 말했다.

“몰래 먹어라.”

아델리아 몰래.

혼자서만.

들키지 말구.

“예, 아버님.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감동한 유더가 물건을 확인하지도 않고 말하자 체이스 백작은 늘 그랬던 것처럼 흥하고 코웃음을 친 뒤 자리를 이탈하려 하였다.

하지만.

“아.”

발걸음을 떼려던 체이스 백작은 다시 슬쩍 돌아오더니 그대로 유더를 바라보았다.

“아버님?”

혹시 또 뭔가 주시려고?

유더가 살짝 기대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체이스 백작은 그대로 무언가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시선을 멀리하며 지나가듯 말했다.

“무언가··· 변화는 없나?”

“변화··· 말씀이십니까?”

“아니다, 음, 아니야.”

오히려 변화가 있으면 안 되지. 지금이 딱 좋지.

아직 성인식도 안 치른 아이들이니까.

“아버님?”

유더가 다시 한 번 물었지만 체이스 백작은 무어라 답하는 대신 근엄한 표정을 짓더니 아델리아와 게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덕분에 게일은 흠칫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야 했다.

‘음··· 멋진 표정이군.’

게일의 얼굴에 작게 미소 지은 유더는 빨개진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무언가 생각에 빠져든 코델리아에게 다가서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서신이 온 것 같습니다.”

정문 쪽을 돌아보며 말한 마이아는 그대로 발걸음을 떼었고, 유더는 금속 울타리 너머에 서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사내를 보았다.

딱 귀족가의 전령 같은 복장이었다.

“누구지?”

“스펜서 공작가의 사람이야.”

혼잣말처럼 꺼낸 물음에 유더가 답하자 코델리아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아?”

“스펜서 가문의 사용인임을 드러내는 문장이 겉옷에 새겨져 있으니까. 아마··· 너랑 나를 초대하는 거겠지.”

슬슬 다리안 왕녀가 가져간 칠색초가 효험을 보일 때도 되었으니까.

그리고 유더의 예상대로 정문 앞에 나타난 이는 스펜서 공작가의 사람이었다.

다만 한 가지 예상과 다른 것이 있었으니,

“이거··· 우리만 부른 것 같지가 않은데?”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초대장.

“뭐, 어쨌든 초대장이니까 문제없지 않을까?”

코델리아는 빙긋 웃으며 말했고, 유더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하긴, 그렇겠네.’

‘응응, 그럴 거야.’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어쨌든 스펜서 공작가에 가서 빛의 검성- 룬 프라우드를 만나기만 하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걱정 말고 보무도 당당히 가보자구.’

‘그래.’

코델리아의 눈빛에 응답한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고, 코델리아는 다시 환한 미소를 그려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코델리아는 알지 못 했으니까.

아니, 유더 역시 예상하지 못 했으니까.

이 초대장으로 말미암아 자신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진짜 연인 같은 일을 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진짜 연인 같은 일을.

&

< 제58장 - 공작가의 초대장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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