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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166화 (166/473)

< 제61장 - 입궁 >

제61장 - 입궁

플레이아데스의 악마 추종자 집단은 크게 다섯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음욕의 대군주 아스모데우스를 모시는 악마의 손.

타락의 대군주 벨리알을 모시는 악마의 눈.

애증의 대군주 릴리스를 모시는 악마의 입.

잔학의 대군주 벨케고르를 모시는 악마의 귀.

폭력의 대군주 베헤모스를 모시는 악마의 뿔.

지옥에서는 사실상 대등한 다섯 대군주들이었지만, 지상에 자리한 그들의 추종자들까지 모두 균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성십자수호단과의 격렬한 충돌 끝에 악마의 귀는 사실상 궤멸한 상태였고, 악마의 뿔 역시 ‘베헤모스의 아바타’라 불리는 마인 자바워크가 남아있긴 했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마인 전부가 전멸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남은 셋은 아직도 제법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지.”

특히 악마의 손은 세일룬 왕국뿐만 아니라 아르곤 제국에서도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드넓은 세력권을 자랑했고,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마인들의 숫자도 가장 많았다.

“악마의 손의 총수.”

푸른 머리칼을 길게 기른 정체불명의 여인.

아스모데우스의 아바타로 추정되는 그녀는 영웅전기2편은 물론이고 3편에서도 그 정체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신비인이었다.

“어쩌면 악마 추종자들 가운데서 가장 강한 것은 그녀일지도 몰라.”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직접 전선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 장막 뒤에 앉아 지켜볼 따름이었으니 말이다.

“악마의 눈은 아르곤 제국 서부에, 악마의 입은 저 먼 동방에.”

때문에 서쪽 대륙을 무대로 한 영웅전기2편에서 실질적인 적이 되는 악마추종자 집단은 악마의 손과 악마의 눈뿐이었다.

“그중 세일룬 왕국의 주적은 악마의 손.”

악마의 손의 여섯 지부 가운데 셋이 세일룬 왕국에 존재했고, 총본산 역시 세일룬 왕국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결계 때문에 왕도 인근에 있지 못 하고 외곽부에 빠진 모양새이긴 하지만.”

정확히는 아르곤 제국과의 국경선 부근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중앙을 담당하는 마인은 악마의 손의 여섯 지부장들 가운데서도 호전적인 코로스였다.

다른 지부장들과 마찬가지로 총수의 총애를 갈망하는 그는 중앙의 결계를 무너트리기 위한 대업인 ‘세일룬 왕가 절멸 계획’에 심혈을 기울였다.

평소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은 북부 지부장 솔루지아에게까지 도움을 청할 정도로 말이다.

&

“솔루지아.”

코로스의 부름에 솔루지아는 깊이 눌러 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무척이나 검어 흑단 같은 머리칼 사이에 자리한 하얀 얼굴과 보랏빛 눈동자는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 더욱 인상적인 느낌을 주었다.

“코로스.”

하얀 로브를 입은 솔루지아는 한 차례 숨을 길게 토하더니 어깨를 조금 늘어트렸다.

평소에는 총수의 총애를 다투는, 사실상 경쟁자나 다름없는 지부장들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사석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기 때문이다.

“예쁜 얼굴이 반쪽이 됐구만.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지?”

음욕의 아스모데우스를 모시는 악마 추종자들은 대체로 외모가 빼어난 편이었다.

코로스 역시 다르지 않아 무척 잘생긴 얼굴이었는데, 선이 굵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과는 별개로 눈빛이 워낙 강렬한 터라 가만히 웃고만 있어도 사나운 느낌을 주었다.

반면 보랏빛 눈동자가 강렬하긴 해도 기본적으론 선이 가늘고 고운, 단아한 느낌의 미녀상인 솔루지아는 무어라 답하는 대신 주변을 둘러보더니 적당해 보이는 의자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들이 나타난 뒤로 일이 꼬이고 있어.”

솔루지아가 낮게 말하자 코로스는 누굴 말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유더 바이엘과 코델리아 체이스말이군.”

솔루지아를 몇 번이나 물 먹인, 이제는 세일룬 왕국 전체가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세기의 커플.

“지금 왕도에 있는 모양이더군.”

“알아.”

왕도로 가던 둘을 납치하려 했으니 말이다.

“이제는 건들기 힘들어졌지?”

코로스의 물음에- 아니, 반쯤은 도발에 가까운 말에 솔루지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말마따나 유더와 코델리아를 건드리기 힘들어진 것은 둘째치고, 코로스의 지금 같은 태도가 거슬렸기 때문이다.

“코로스, 도움을 청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일 텐데?”

“물론 그렇긴 하지. 그냥 동기끼리 걱정해주는 거라고 해야 할까?”

코로스가 어깨를 으쓱이자 솔루지아는 다시 한숨을 토했지만 무어라 더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코로스의 말마따나 동기인 것도 사실이었고, 애당초 지금 이렇게 협조하는 것은 총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함도 위함이었지만, 코로스와의 관계 때문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코로스가 내게 도움을 청한 것도··· 이번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것도 있지만 최근 실패를 거듭한 날 돕기 위해서이기도 하니.’

그야말로 상부상조라고 해야 할까.

코로스와 솔루지아의 인연은 제법 깊고 또 길었다.

코로스가 말하는 ‘동기’는 악마의 손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고아원 동기.’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꼬맹이 시절.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지은 솔루지아는 카노스를 비롯한 수하 마인들 앞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코니, 뭔가 더 큰 도움이라도 바라는 거야?”

“그래, 소니. 아무래도 일을 키워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오랜만에 꺼낸 고아원 시절의 애칭에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지만, 두 사람 모두 악마추종자였다. 당장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 역시 무고한 이들의 희생을 야기할 끔찍한 음모였고 말이다.

“호국공의 팔다리가 잘리고 있어.”

검은 달과 수하 귀족들이 타격을 받고 있었다.

이대로 귀족파의 공세가 계속된다면 결사 당일에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지 못 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일을 키우자는 건가?”

“조금 더 크게. 이왕 할 거 좀 더 대담하게.”

코로스는 두 팔을 벌리며 솔루지아를 바라보았고, 솔루지아는 코로스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어깨를 늘어트렸다.

“코니, 사활을 걸자는 거야?”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

왕도의 결계는.

그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성검 클라우솔라스는.

“덤으로 그 세기의 커플도 조지면 좋고 말이야.”

“···그건 좀 매력적이군.”

솔루지아가 솔직하게 말하자 코로스는 호탕하게 웃었다.

“총수님께서는 허락하셨다.”

중앙과 북부 지부의 전력을 쏟아 붓는 것을.

“내가 수락한다는 조건을 붙이셨겠지?”

“그래, 그래서 지금 이렇게 네게 애걸복걸 빌고 있는 것이고.”

코로스의 말에 솔루지아는 모처럼 소리내어 웃은 뒤 말했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넌 부탁이란 걸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는 거 같아, 코니.”

“뜻만 통하면 되는 게 아닐까? 일단 넌 알아보잖아, 소니.”

“나밖에 알아보지 못 하겠지.”

“그래서 너한테만 이래. 어때? 기쁘지 않아?”

“정신줄을 제대로 놨군.”

빈정거린 솔루지아였지만 나쁘진 않은 기분이었다.

아니, 애당초 그간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이번 왕족 절멸 계획을 코로스와 함께 멋지게 성공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덮어놓고 허락할 수는 없어.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봐.”

어떤 식으로, 얼마나 더 일을 키울 것인지.

솔루지아의 물음에 코로스는 빙긋 웃더니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제일검과의 대련이 마무리 된 오후.

긴 의자에 앉은 코델리아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검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 봐도봐도 예쁘다 열쇠검.”

어쩜 이렇게 색이 고울까.

손잡이에 박힌 보석은 또 얼마나 영롱하고.

황홀한 얼굴이 된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옆에 앉아 그 모습을 흡족히 바라보던 유더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코델리아, 나의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 몸 바쳐 구해온 것이라오.”

연극풍의 대사에- 그것도 사랑 운운하는 대사에 코델리아는 당황하기는 커녕 씩 웃더니 한 손으로 유더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응응, 잘했어. 앞으로도 지금처럼 몸 바쳐 충성을 다해. 분골쇄신하라고. 알았어?”

“아니, 공주님. 지금은 감사하다며 뭔가 상이라도 내리거나 해야 하는 타이밍이 아닐까요?”

“안 돼, 자꾸 잘해주면 기어올라. 당근과 채찍은 비율이 중요하다는 거 몰라?”

코델리아는 장난기 섞인 얼굴로 흥흥 거리며 말했고, 유더는 그 모습에 다시 웃고 말았다.

“뭐, 당근이라면 아까 이미 받았으니까.”

당근.

너무나 달고 달아 이가 녹아내릴 것 같은 그것.

유더가 무엇을 말하는지 단박에 알아들은 코델리아는 다시 움찔했지만 바로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여, 역시 나 좋아하나?’

그러니까 그런 짓도 하고.

나한테 그런 짓도 해달라고 하고.

‘음··· 그런 짓이라고 하니까 뭔가 많이 이상하네.’

하지만 뭔가 직설적인 단어로 고치자니 그것 역시 좀 그런 코델리아였다.

‘아, 아무튼!’

진짜라면.

정말 유더가 코델리아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라면-

코델리아는 힐끔 유더를 돌아보았고, 유더는 언제나처럼 능글맞은 얼굴로 그런 코델리아를 마주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스펜서 공작 각하께서 들라 하십니다.”

지금 자리하고 있는 곳은 스펜서 공작가의 대기실이었으니까.

집사의 이데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 멋들어진 노집사의 안내를 받은 유더와 코델리아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복도를 지나 스펜서 공작가의 응접실에 도달했다.

“유더 바이엘 공자와 코델리아 체이스 공녀가 도착했습니다.”

노집사가 다시 중후한 목소리로 말하자 이내 안쪽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렸고, 노집사는 무척이나 정중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

유리로 된 아름다운 응접실 안에는 꽃향기가 가득했고, 중앙에 놓인 멋들어진 소파 위에는 두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스펜서 공작과 다리안 왕녀.’

키가 크고 마른 노인인 스펜서 공작은 보랏빛 의복을 걸친 채 편히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자리한 다리안 왕녀는 손까지 살짝 흔들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바이엘 백작가의 유더 바이엘입니다.”

“체이스 백작가의 코델리아 체이스입니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함께 예를 표하니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다리안 왕녀가 활짝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두 사람 모두 반가워요. 이쪽은 우리 할아버지이신 스펜서 공작님이세요.”

예법따윈 저 멀리 밀어낸 것 같은 친근한 소개에 스펜서 공작은 작게 헛기침을 했지만 무어라 토를 다는 대신 유더와 코델리아를 마주하며 말했다.

“스펜서 공작이다. 자리에 앉도록.”

착석 허가에 재차 예를 표한 유더는 코델리아를 에스코트하여 소파에 도달했고, 그 모습을 기쁘게 바라보는 다리안 왕녀 앞에서 다시 천천히 예를 갖춰 착석하였다.

귀족가 자제들로는 부족함이 없는 행동거지였고, 스펜서 공작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과연 북부12가문의 자제들답구나. 하지만 왕녀님께서 편한 자리를 원하시니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알겠나?”

“그리하겠습니다.”

“예, 공작 각하.”

유더와 코델리아가 다시 다소곳이 답하자 스펜서 공작은 재차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다리안 왕녀는 그런 스펜서 공작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할아버지도 참, 자꾸 그러시면 언니랑 오빠가 딱딱해질 수밖에 없잖아요.”

높은 사람이 편히 있으라고 정말 편히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오히려 자꾸 부담만 주는 셈이었다.

“언니, 오빠. 정말 괜찮아요. 할아버지는 그렇게 깐깐하신 분이 아니시거든요. 편히 대하세요.”

“하하··· 예, 알겠습니다.”

“네, 왕녀님.”

하지만 높은 사람인 건 다리안 왕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사실상 의례적인 말인 터라 적당히 듣고 적당히 따라주는 척을 하면 되는 스펜서 공작의 말과 달리 다리안 왕녀는 유더와 코델리아가 정말 편하게 행동하길 바란다는 게 문제였다.

곤란한 걸 따지자면 다리안 왕녀 쪽이 더 위라고 해야 할까?

때문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다소곳이 답하긴 했지만 딱히 자세를 흐트러트리진 않았다.

그리고 다행히 스펜서 공작은 다리안 왕녀의 말처럼 그렇게 깐깐한 사람이 아니었다.

유더와 코델리아의 곤란함을 충분히 이해해줄 정도로 말이다.

“허허, 왕녀님의 고집이 세셔서 원. 내가 대신 사과하도록 하지. 그대들이 이해해 주게나.”

“할아버지?”

다리안 왕녀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스펜서 공작은 그저 찡긋 윙크만 했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아주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좋은 사람이네.’

‘응, 다리안 왕녀를 정말 아끼는 것도 같고.’

원작에서는 와병 중이라 제대로 등장한 적이 없는 스펜서 공작이었다.

물론 여러 가지 간접적인 정보로 어느 정도 인품을 짐작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 대면하여 좋은 사람임을 확인하고 나니 한시름 놓은 기분이 들었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서. 일단 감사를 표해야겠지. 고맙다. 너희가 칠색초를 구해준 덕분에 오랜 지병을 떨쳐내고 이렇게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해요.”

스펜서 공작이 시원하게 감사를 표하자 다리안 왕녀 역시 활짝 웃으며 새삼 다시 감사했고, 코델리아는 미리 준비한 인사말을 예쁘게 읊조렸다.

“왕녀 저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과 이렇게 정정하신 공작 각하를 뵈니 저희도 무척 기뻐요. 좋은 일을 할 기회를 주셔서 고마워요, 다리안 왕녀님.”

화사한 미소로 마무리를 짓자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힌 다리안 왕녀는 그대로 헤헤헤 웃더니 스펜서 공작의 소맷자락을 당기며 말했다.

“봐요, 코델리아 언니는 정말 예쁘죠? 얼굴도 예쁜데 마음도 예뻐요.”

“과연. 소문 이상인 것 같군.”

스펜서 공작이 흡족한 얼굴로 말하자 코델리아는 기쁨과 동시에 약간의 의문을 동시에 품었다.

‘무슨 소문 말하는 거지?’

‘천사처럼 예쁘다는 소문이겠지. 엠마 파이커스 양에게 감사하자구.’

덕분에 완전 무장한 코델리아를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으니까.

‘물론 진짜는 건국 기념 무도회날이겠지만.’

비장의 한 수인 요정의 드레스까지 동원하여 코델리아의 미모를 세일룬 왕국을 넘어 세계에 알리리라.

‘야, 너 또 뭔가 음흉한 생각하는 거 맞지?’

‘아니거든? 바르고 고운 생각 중이거든?’

언제나처럼 눈빛 대화가 길어질 기미가 보인 두 사람이었지만 양쪽 모두 시선을 거두었다.

스펜서 공작이 다시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했으면 상을 받아야겠지. 하물며 스펜서 공작가의 은인을 허투루 대할 수는 없는 법.”

거기까지 말한 스펜서 공작이 가볍게 종을 울리자 문가에 대기하고 있던 노집사가 테이블 위에 은쟁반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대들 두 사람은 우리 스펜서 공작가의 은인이니, 언제 어디서고 우리의 이름을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와 달리 진지한 어조로 말한 스펜서 공작은 은쟁반을- 정확히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스펜서 공작가의 장미 문장에 시선을 두었다.

사실상 두 사람을 스펜서 공작가의 사람으로 대우하겠다는 증표였다.

‘빙고.’

귀족파의 거두인 스펜서 공작가의 위세를 등에 업은 셈이니, 이 문장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했다.

칠색초의 답례로는 차고 넘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스펜서 공작은 여기서 그칠 생각이 아니었다.

“뭐, 내 입으로 하긴 뭐한 말이지만··· 사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이득을 챙길 수 있겠지. 하지만 역시 상은 물질적인 형태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무얼 주면 좋아할까 고민했는데, 역시 이게 제일 낫겠더군.”

스펜서 공작이 다시 종을 울리자 노집사가 새로운 은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부릅떴다.

“거절은 허락하지 않겠다. 받도록.”

은쟁반에 놓인 것은 하얗고 네모난 종이였다.

안에 0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적혀 있는 종이 말이다.

‘우와앙.’

왕립 은행의 수표.

한 마디로 말해 현찰.

더욱이 액수가 어마어마했다. 바이엘 백작가의 1년 총수입과 대등한 금액이었으니 말이다.

‘과연 귀족파의 거두.’

재력만이라면 세일룬 왕국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부다운 씀씀이였다.

“그대들에게는 이것저것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여기 왕녀 저하께 들은 이야기가 워낙 많다보니 정말 궁금했거든. 두 사람은 실제로 어떠할까. 정말 왕녀 저하의 이야기대로의 인물들일까 하고 말이야. 하지만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걸 먼저 전해줘야 할 것 같군. 우리 왕녀님께서 얼른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나신 것 같으니 말이야.”

스펜서 공작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다리안 왕녀는 입술을 삐쭉였지만 잠깐뿐이었다.

이내 아이다운 맑은 미소를 짓더니 종을 울려 새로운 은쟁반을 가져오게 하였다.

“받으세요.”

다리안 왕녀가 준비해온 것.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주고 싶어한 것.

“언니랑 오빠도 언니랑 오빠를 보고 싶어 해요. 두 사람에게 두 사람을 자랑할 기회를 주실 거죠?”

반복되는 말.

하지만 지칭하는 이는 전혀 달랐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누굴 말하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다프네 왕녀와 디온 왕자.’

세일룬 왕국의 제1왕위 계승권자인 차기 여왕과 그녀의 동생.

은쟁반에 담긴 것은 다프네 왕녀가 주관하는 다과회의 초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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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1장 - 입궁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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