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1장 - 입궁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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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유더야······.”
작게 웅얼거린 코델리아는 새근새근 숨을 내쉬다 몸을 한 번 뒤척였다.
시간은 아홉 시나 되었을까.
피곤함을 이유로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든 코델리아는 어느 순간 번쩍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유더?’
아주 작지만 발소리가 들렸다.
문을 등진 상태인 터라 바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살금살금.
연이어 스르륵.
‘스르륵?’
침대에 다가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손을 대는 소리였다.
‘뭐지?’
진짜 유더인가?
그리고 유더면 왜 이러는 거지?
왜 한밤중에 몰래 내 방에 들어오는 건데?
잠자고 있는 침대에 다가오는 이유는 뭐고?
‘그리고.’
나는 왜 가만히 있지?
눈을 뜨고 일어나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오히려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짧은 고민을 하는 사이에도 심장의 고동은 커졌고, 인기척은 가까워졌으며, 스르륵 거리던 소리도 연이어졌다.
작은 발소리.
발을 바닥에서 떼는 소리.
침대 위에 살며시 올라타는 소리.
누굴까.
누구지?
유더인가?
유더 맞지?
근데 왜?
일어나서 물으면 되건만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계속 자는 척을 했고, 마침내 침대 위에 올라온 누군가가 손을 뻗었다. 코델리아의 어깨 위에 살며시 손을 올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타고 올라갔다.
코델리아의 붉은 머리칼로 뒤덮인 목덜미를 지나 귓가에, 거기서 다시 턱 선을 따라 살짝 내려와 보드라운 뺨에.
마치 애무를 하듯 부드러운 그 손길.
어째 점점 몸이 움츠러든 코델리아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고, 그 순간 뺨에 닿은 가늘고 긴 손가락들이 새로운 행동을 하였다. 코델리아의 말랑말랑한 뺨을 넉넉히 붙잡더니 그대로 쭉 잡아당겼다.
무척이나 익숙한 손짓으로 말이다.
“아?”
익숙하다고?
그 순간 눈을 번쩍 뜬 코델리아는 뺨을 붙잡은 손을 낚아챔과 동시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스칼렛?!”
“어머나, 깼니?”
메이드 복 차림의 스칼렛이 능청스럽게 웃었고, 코델리아의 미간에 팍하고 주름이 생겼다.
능청스러운 표정 자체는 ok였지만, 기대했던 건 스칼렛의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뭐라는 거야.’
고개를 흔들어 잡상을 떨쳐낸 코델리아는 다시 스칼렛의 팔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야, 오밤중에 남의 침실에 들어와서 뭐 하는 거야. 엉?”
“뭐하긴, 우리 공주님 뺨 꼬집고 있었지.”
“우리 공주님?”
코델리아가 눈매를 날카롭게 하자 스칼렛은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아, 혹시 애칭이라 유더만 써야 한다든가?”
“오늘로 은퇴하고 싶구나?”
코델리아가 화사하게 웃으며 비어있는 왼손에 마력을 모으자 으스스한 푸른빛이 일었고, 스칼렛은 얼른 팔을 잡아 빼며 말했다.
“좋아, 알았어. 장난질은 이제 그만. 우리 어른의 대화를 해보자고. 블랙망토! 들어와!”
“유더?”
눈을 깜박인 코델리아가 문 쪽을 돌아보자 과연 오래지 않아 벌컥하고 문이 열렸다.
“스칼렛, 조용히 깨운다고 하지 않았어?”
“조용히 깨우긴 했어. 그것도 엄청 부드럽게.”
그렇지 않느냐는 듯 스칼렛이 어깨를 으쓱이며 눈짓을 하자 코델리아는 다시 한 번 째려봐준 뒤 침대 위에 털썩하고 앉았다.
“뭐야, 오밤중에 무슨 일인데?”
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스칼렛은 작게 웃더니 코델리아 옆에 앉으며 말을 받았다.
“이제 겨우 아홉시야. 오밤중이라고 하기에는 좀 이르지 않아? 물론 착한 아이들은 코 잘 시간이지만.”
“자꾸 시비 틀래?”
코델리아가 다시 눈을 부라리자 스칼렛은 입을 꾹 다물었고, 유더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침대로 다가섰다.
“스칼렛, 딴 소리하지 말고 본론부터 말해. 코델리아는 자다 깨서 지금 기분이 안 좋다고.”
타이르듯 말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코델리아에게 내밀었다.
평소에 즐겨 마시는 따뜻한 꿀물이었다.
“아, 고마워.”
“별말씀을.”
빙긋 웃으며 답한 유더는 그대로 코델리아 옆에 앉은 뒤 스칼렛에게 다시 눈짓을 했다.
빨리 이야기나 하라는 신호였다.
“쳇, 하여간 염장커플이라니까. 잠깐이라도 염장질을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지?”
“야, 다 들리거든? 오, 맛있다. 역시 우리 집 유더야.”
“마님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군요.”
“응응, 우리 유더 칭찬해.”
유더가 연극조로 답하자 코델리아가 생글생글 웃었고, 그 모습에 스칼렛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짜증내다 말고 다시 염장질이라니. 내가 더러워서라도 본론으로 넘어간다.
“야, 핑크폭탄.”
“왜 샹년아.”
너무나 자연스러운 욕설에 순간 멍해진 스칼렛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스칼렛 자신이 아는 핑크폭탄은 욕쟁이였으니 말이다.
“음, 자연스럽군.”
“말장난 그만하고 빨리 본론이나 말해봐. 잘 자던 사람 깨울만한 용건 아니면 혼 날줄 알고. 알았어?”
“알았어. 이미 블랙망토한테는 말했는데, 일감이 있어서 그래.”
“일감? 도둑질 하자고?”
“아니, 도둑질 말고. 로그 마스터의 일감이 어디 도둑질뿐인 줄 알아?”
“음, 하긴. 로그니까 강도, 폭행, 테러 등등 할 거 많구나.”
코델리아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스칼렛은 인상을 구겼다.
맞는 말이긴 한데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다.
“흥흥, 이게 바로 팩트 폭력이라는 거야. 알겠어?”
“폭력이라는 건 알겠네. 아무튼 일을 하나 같이 하고 싶어서 그래. 사실 어제 온 것도 조사의 일환이었고 말이야.”
스칼렛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하자 코델리아는 고개을 갸웃하다가 유더를 돌아본 뒤 눈빛으로 물었다.
‘얘 왜 이래?’
일 같이 하자면서 왜 시선을 피하는데? 얼굴도 붉히고.
잘 모르겠다는 코델리아의 눈빛에 유더는 쓰게 웃더니 눈빛으로 답했다.
‘아직 너랑 결판이 안 났잖아. 그런데도 같이 일하자고 하는 게 쑥스러운 거겠지. 민망하기도 하고.’
유더의 해설에 코델리아는 ‘아’하고 작게 탄성을 토하더니 짓궂게 웃으며 스칼렛을 돌아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짜증의 결정체였던 스칼렛이 무척이나 귀엽게 보인 탓이었다.
“으유, 귀여워라.”
코델리아가 대뜸 뺨을 꼬집자 깜짝 놀란 스칼렛이었지만, 지금까지 한 짓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부탁하는 처지라 그런지 딱히 반항은 하지 않았다.
‘아, 이 맛이구나.’
도도해 보이는 미녀가 얼굴을 붉힌 채 얌전히 뺨을 꼬집히는 상황이라니.
거기다 쫀득쫀득하니 볼 살의 감촉도 무척이나 좋았다.
절로 얼굴이 풀린 코델리아는 계속해서 스칼렛의 뺨을 쪼물딱 거렸고,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 대화에 한숨을 내쉰 유더가 대신 입을 열었다.
“코델리아, 스칼렛의 제안은 던전 탐사야. 정확히는 붉은 장미 성 지하에 잠들어 있는 석판형 던전 북에 같이 들어가자는 거지.”
“던전 북?”
반사적으로 되물은 코델리아는 스칼렛의 뺨에서 손을 떼더니 다시 눈빛으로 물었다.
‘거울의 궁전 이야기하는 거야?’
‘어, 그거 맞아.’
‘과연, 그래서구나.’
거울의 궁전은 혼자서는 들어갈 수 없는 던전 북이었으니까.
최소 입장 인원이 정해져 있는 인스턴트 던전인 셈이었다.
‘나랑 유더랑 안 들어가고 있던 이유도 그거고.’
원작에서야 거울의 궁전에 들어갈 때쯤이면 이미 스펜서 공작가는 물론이고 세일룬 왕국까지 망한 상태라 붉은 장미의 성 역시 폐허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성이 멀쩡한 것은 물론이고 상주하는 인원까지 상당했으니, 군식구까지 데리고 숨어드는 것은 무리였다.
‘아니, 잠입하는 것까지야 가능하겠지만 믿을 수 있는 군식구 확보가 어렵다고 해야 하나.’
당장 같이 가자고 할 수 있는 건 게일이나 아델리아였지만, 두 사람에게는 말 꺼내자마자 미쳤냐고 혼부터 날 것이 뻔했다.
‘유망주들은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니 무리고.’
어디 한적한 숲에 있는 던전이라면 어찌어찌 설득이 가능하겠지만, 스펜서 공작가의 지하면 이야기가 달랐다. 같이 가자고 말하는 순간 난색을 표할 것이 분명했다.
‘거울의 궁전이 분명 4인 던전이었지?’
‘맞아, 그래서 너나 나나 들어갈 생각을 일단 접고 있었던 거고.’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스칼렛이 먼저 먹이를 물고 나타났다.
코델리아 자신에 유더를 더하고, 여기에 다시 스칼렛을 더하면 3인이었으니, 한 명만 더 구하면 거울의 궁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딱 한 명.
마지막 한 명.
‘지금 나랑 같은 생각하는 거 맞지?’
‘어, 맞아.’
실력은 물론이고 인품도 믿을 수 있는 한 사람.
여기에 더불어 한 번쯤 성장의 기회를 줘야만 하는 소년.
‘꼬시기도 쉬울 것 같고.’
코델리아의 눈빛에 유더는 부정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이내 음흉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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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이쪽은 스칼렛이야. 스칼렛, 이쪽은 루카스.”
유더와 코델리아의 방 안.
오밤중에 불려나온 처지였지만 역시 반듯하니 잘 자란 루카스였다. 코델리아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스칼렛에게 정중이 예를 표하였다.
“루카스 흐레스벨그입니다.”
“스칼렛···이에요.”
처음에는 적당히 던지듯 답하려했지만 결국 똑같이 예를 표한 스칼렛이었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루카스의 눈빛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다.
‘역시! 이런 거에 약할 줄 알았어!’
루카스만큼이나 영웅전기를- 그중에서도 특히 로그 마스터의 영웅전기를 좋아하는 스칼렛이었으니까.
속으로 쾌재를 지른 코델리아는 얼른 유더를 돌아보았다.
‘유더야, 유더야. 둘이 잘 어울리는 거 같지 않아?’
기대로 반짝반짝거리는 눈빛이 무척이나 귀여웠지만 유더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야, 언제는 붉은바람이랑 맺어줘야 한다며.’
‘그치만 붉은바람은 야생의 땅에 있는걸. 태양노래랑 잘 되가는 거 같기도 했고.’
그러니까 루카스는 스칼렛이랑 맺어주자.
영웅전기 매니아들끼리 잘 통할 거야. 천생연분이지 않을까?
‘명문가의 도련님과 도도한 미인 도둑 조합이라니. 거기다 연상연하 커플이야. 음음, 그림이 나온다, 나와.’
코델리아가 망상전개를 이어나가자 유더는 눈빛 대화를 잠시 접어둔 뒤 두 사람- 정확히는 루카스에게 대강의 사정을 설명했다.
“어, 그러니까··· 이곳 붉은 장미의 성 지하에 던전 북이 숨겨져 있다는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스칼렛 양은 유더 공자와 코델리아 양의 모험 동료시고요.”
“예, 왕도에 오기 직전에 함께 모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유더가 빙긋 웃으며 답하자 코델리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고, 스칼렛은 마뜩찮은 얼굴로나마 긍정을 표했다.
“다시 정리하면, 던전 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네 명이 필요하고, 그래서 제게 오셨다는 거죠? 함께 던전 북에 들어가기 위해서요.”
“예, 함께 모험을 하기 위해서요.”
유더가 특정 단어를 강조하자 루카스는 순간 움찔했고, 야생의 본능이 살아있는 코델리아는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루카스, 정말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붉은 장미 성의 숨겨진 비밀에 접근하는 거야. 그것도 수수께끼의 신비로운 미녀와 함께.”
“누구? 나?”
스칼렛이 순간 반문하든 말든 코델리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거기다 던전 북이니까 스펜서 공작가에 피해를 줄 일도 없어. 우리도 죽을 일은 없고 말이야. 말 그대로 모험만 즐길 수 있는 거지. 멋진 모험을 말이야.”
코델리아는 계속해서 모험을 강조했고, 그때마다 루카스는 움찔움찔 거렸다.
근래 검술 수련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잠시 잊고 있었던 모험에 대한 갈망이 새삼 용솟음 쳤기 때문이다.
“루카스 공자,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제 호적수이신 루카스 공자이기에 드리는 제안입니다.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저 혼자 독식할 수는 없으니까요.”
사실 4인 제한이라 사람이 한 명 꼭 필요해서였지만, 굳이 그런 것을 밝힐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루카스를 꼬드기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유더 공자······.”
“루카스 공자, 함께 성장하는 겁니다.”
아련한 시선에 답하듯 유더는 루카스의 손을 꽉 잡으며 강조했고, 효과는 굉장했다.
루카스가 무척이나 가슴 벅찬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으니 말이다.
‘와, 우리 집 유더지만 언제 봐도 사기꾼이란 말이지.’
남의 집 유더였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코델리아는 안도의 숨을 토했고, 옆에서 지켜보던 스칼렛은 오글거려 죽겠다는 듯 손발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몇 초.
마침내 마음을 굳힌 루카스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부족한 실력이나마 돕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성장하기 위해, 보다 나아지기 위해!”
“와아.”
유더와 코델리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를 쳤고, 코델리아에게 발등을 밟힌 스칼렛 역시 억지로나마 박수를 보탰다.
“자, 그럼 출발하기 전에 구체적인 사항들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던전 북의 정확한 위치와 안에서 마주하게 될 적에 관한 것까지.
유더가 늘어놓는 지식들에 깜짝 놀란 스칼렛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코델리아에게 계속 눈짓을 보냈지만 코델리아는 흥흥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답해주지 않았다. 루카스는 진지한 얼굴로 유더의 말을 듣기 바빴고 말이다.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만큼 성취했을 때의 기쁨 역시 크겠지요.”
모두에게 말한 유더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루카스는 얼른 그런 유더를 따라 일어서며 눈을 빛냈다.
“말씀하신대로라면 지금의 제게 꼭 필요한 시련이라 생각합니다. 역시 유더 공자. 정말 감사합니다.”
“호적수를 위해서니까요.”
“유더 공자······.”
“루카스 공자.”
유더와 루카스가 찐한 눈빛을 나누기 시작하자 스칼렛은 차게 식은 눈이 되었고, 코델리아는 까르르 웃더니 그대로 유더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아무튼 그럼 가자.”
거울의 궁전에서 마주하게 될 특별한 적에 대해서는 코델리아 역시 관심이 많았으니까.
“예, 공주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유더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창문을 열었고, 평소 여행을 할 때처럼 바지를 챙겨 입은 코델리아는 재빨리 창문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먼저 가시지요.”
“어··· 네.”
그리고 진지한 루카스와 어색한 스칼렛까지.
네 사람의 청춘남녀는 야반도주라도 하듯 조심스럽게, 그리고 은밀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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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1장 - 입궁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