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173화 (173/473)

< 제63장 - 왕세녀 #2 >

&

“바이엘 백작가의 유더 바이엘입니다.”

“체이스 백작가의 코델리아 체이스입니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차례로 예를 표하자 다프네 왕녀는 옅은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만나서 반갑구나. 다프네 왕세녀다. 이미 말했지만, 다시 한 번 그대들의 방문을 환영하는 바이다.”

다프네 왕녀의 목소리는 분명 미성이었지만 달콤하고 부드럽지 않았다. 힘 있고 강건하여 듣는 이의 마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였다.

‘멋있어.’

예쁘다기보다는 멋있다.

물론 예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영웅전기담에서 디자인 잘 뽑았다고 찬양하는 다프네 왕녀였으니 말이다.

아름답고, 우아한 미인이지만 동시에 고고하다.

드레스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제복을 입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멋이 느껴진다.

‘다프네 왕녀.’

코델리아가 다프네 왕녀의 ‘멋진 분위기’ 같은 감각적인 부분들을 포착하고 있을 때 유더는 조형적인 면모를 살폈다.

키, 몸무게, 체형, 단련된 정도.

‘일단 키가 커.’

거의 170 후반. 어쩌면 180에 육박할지도 모를 키.

거기에 수련으로 다져진 것이 분명한, 꽉 조인 느낌이 드는 단련된 육신은 한 자루 검을 연상케 했다.

‘고양잇과 맹수······.’

코델리아가 우아한 표범을 떠올리게 한다면, 눈앞의 다프네 왕녀는 사자였다.

머리칼을 틀어 올린 덕에 시원하게 드러난 하얗고 긴 목은 가늘지만 단단해 더욱 곧은 느낌을 주었고, 황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밝고 진한 금발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왕관 같았다.

그리고 초록빛 눈동자.

유더 자신의 것과는 종류가 다른, 마치 상대를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강하고 선명한 그 색.

‘타고난 지배자인가.’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무리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수장의 자리에 올라서는 사람들.

다른 이들이 자신의 등을 바라보게 만드는 자들.

물론 왕족으로 태어나 왕족으로서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 역시도 무척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유더는 확신했다.

다프네 왕녀는 애당초 타고난 인간이었다.

설사 왕족이 아닌 평민으로 태어났다 할지라도 지금과 같은 카리스마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았으리라.

“앉도록.”

다프네 왕녀가 말했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자리에 착석했다.

테이블 자체는 원형이었지만 유더와 코델리아가 나란히 앉고, 그 맞은편에 다프네 왕녀가 앉는 형태의 배치였다.

“아레나.”

다프네 왕녀가 작게 부르자 시녀 한 사람이 작은 손수레를 밀며 다가왔다.

손수레 안에는 다과회답게 각종 달콤한 과자들과 예쁜 찻잔들, 커다랗고 우아한 주전자 등이 들어 있었다.

“명색이 다과회니까. 북부의 과자들에 비해 왕도의 과자들은 좀 많이 단 편이니 입에 맞지 않으면 바로 이야기 해라.”

“예, 왕녀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일단 우아하게 답한 코델리아였지만, 속으로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족이- 그것도 왕세녀가 내린 과자에 어찌 불만을 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맛있을 것 같기는 하니까.’

북부의 과자들은 다프네 왕녀의 말마따나 좀 투박한 느낌이 드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현대의 과자들이 설탕을 아낌없이 팍팍 사용하는 것에 비해, 이곳에서는 아직 설탕이 꽤 귀한 품목에 속한 탓이었다.

코델리아가 알록달록한 과자들에 기대어린 시선을 보낼 때 다프네 왕녀는 유더와 코델리아의 잔에 차가 채워지기를 기다리더니 가볍게 손을 뻗어 과자를 한 입 입에 물었다.

음식에 독같이 위험한 물질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주인이 직접 확인시켜주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는데, 귀족들 간의 다과회에서는 무척이나 중요한 절차이기도 했다.

“음··· 역시 너무 달단 말이야.”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린 다프네 왕녀는 쓰게 웃더니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과자와 차를 권했다.

“내 입맛이 까다로울 뿐 둘 모두 왕실이 자랑하는 최고급품들이다. 부디 즐겨주도록.”

“감사합니다, 왕녀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무난히 답한 유더와 코델리아는 각자 차와 과자에 손을 대었고, 양쪽 모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은데?’

‘맛있어!’

사실 홍차 계열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유더였지만, 확실히 왕실의 자신작이라 할만 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향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코델리아는 코델리아대로 과자에 만족했다.

정말 오랜만에 먹어보는 진짜 단맛이었기 때문이다.

‘달아, 달아. 완전 달아.’

막 이가 녹아내릴 것 같아서 여러 개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일종의 죄악감까지 드는 단 맛.

코델리아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오르자 쿡쿡 작게 웃은 다프네 왕녀는 마치 감상이라도 하듯 코델리아를 바라보다 말했다.

“무척 사랑스럽구나.”

“네?”

“왕도에서 많은 아이들을 보았지만··· 너처럼 예쁜 아이는 처음이다.”

“화, 황송합니다.”

직설적인 칭찬에 코델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고, 유더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만족감과 흐뭇함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과연 코델리아.’

비록 수많은 귀족들 앞에서 코델리아를 자랑한다는 당초의 목적은 이룰 수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가장 중요한 인물이 코델리아의 미모를 인정하지 않았던가.

‘마이아와 달리아도 이 이야기를 들었어야 하는데.’

평범한 다과회였다면 보통 사용인이나 호위를 한 명씩 대동하기 마련이었지만 다프네 왕녀가 ‘세 사람만의 다과회’라 천명한 터라 화원 안에 들어서지도 못 한 두 사람이었다. 아마 지금쯤 대기실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아무튼 그렇게 잠시뿐이지만 유더가 팔불출의 기분에 빠져들었을 때, 다프네 왕녀는 여전히 코델리아를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세 사람만의 다과회를 하자고 해서 많이 놀랐나?”

“네? 그··· 조금···은요?”

코델리아가 약간은 소심하게 답하자 다프네 왕녀는 오히려 그 소심함이 마음에 든다는 듯 입가의 미소를 더 짙게 하며 말했다.

“가까운 곳에서, 처음 이야기한 것처럼 집중해서 만나보고 싶었다. 일단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작위를 수여할 인물들이니 말이다.”

“작위요?”

코델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다프네 왕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두 사람 모두에게 남작 위가 수여될 예정이다. 따로 영지는 배부되지 않겠지만, 단순한 기사 작위 이상의 의미를 갖겠지.”

어찌되었든 남작이었으니까.

오작위의 말미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기사보다는 높은 지위임에 분명했다.

‘신난다!’

코델리아는 유더를 돌아보았고, 유더는 눈빛으로 답한 뒤 다프네 왕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프네 왕녀가 꺼내든 명분.

태어나 처음으로 하는 작위 수여식.

다프네 왕녀의 나이는 이제 딱 스무살이었다. 지난 달에 성인식을 치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일까.’

왕족으로서 첫 공무를 수행하는 셈이니 분명 신경이 많이 쓰이기는 할 터였다.

하지만 정말 그것 때문에 굳이 다과회 일정을 바꿔가면서까지 세 사람의 자리를 만든 것일까?

마치 유더의 의문에 답하듯 다프네 왕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워낙에 유명한 두 사람이니까.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어떤 아이들인지도 알아두고 싶었고. 분명··· 어떤 식으로든 세일룬 왕국에 이름을 날릴 인물들이니 말이다. 뭐, 이미 꽤 날린 것 같다만.”

약간은 짓궂게 말한 다프네 왕녀는 코델리아에게 그렇지 않냐는 듯 눈빛을 보냈고, 코델리아는 입술을 움츠리다 작게 ‘네’라고 답했다.

“사실 처음에는 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들려온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고, 개중에는 황당한 것들도 섞여 있었으니까.

더욱이 다프네 왕녀에게 전해진 것은 다리안 왕녀가 접한 것 같은 ‘소문’ 따위가 아니었다.

흐레스벨그 백작이 변경백으로서 직접 작성한 경위 보고서를 비롯해 각지의 정보원들이 직접 수집하여 왕실에 보고한 진짜배기 정보들이었다.

‘데몬 슬레이어.’

왕실의 정보원들이 유더와 코델리아를 부르는 코드 네임이었다.

이름 그대로 악마추종자들과 마인들을 벌써 몇이나 해치운 ‘악마 사냥꾼’들이었으니 말이다.

로버스트에서 북부12가문의 자제들을 납치하려던 마인을 격파.

연이어 마녀의 숲에서 마수를 격파.

노던 자작령에서 마인들을 격파.

프로스트 앤빌에서 마인들뿐만 아니라 악마를 격퇴.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일반적인 귀족가의 자제들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업적들이었거늘, 여기에 국경 너머에서의 활약이 추가되었다.

‘야생의 땅의 수호자.’

타락한 야만족들과 제국의 마인들을 격파한 끝에 ‘악마의 눈’이 기획한 대규모 동란을 저지한 인물들.

물론 흐레스벨그 백작의 보고서에는 유더와 코델리아의 활약이 완벽하게 실려 있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결전이 된 평원의 전투만으로도 두 사람의 공적은 차고 넘칠 수준이었다.

‘그런데 전공만이 아니야.’

유더와 코델리아가 환상의 커플이라 불리는 것은 환상적인 공훈들을 세워서가 아니었다.

철딱서니 없는 커플.

이미 약혼 상태인데도 사랑의 야반도주를 감행한 못 말리는 아이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남긴 파렴치한 편지들.

도저히 앞에 나열된 공적들을 세운 인물들과 동일인물인 것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이것들 또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다리안의 이야기.’

다리안은 애당초 착한 아이였다.

정이 많고, 거기에 해맑기까지 한, 아직 세상의 무서움은 물론이고 사람의 더러움도 잘 모르는 순수한 아이.

하지만 그렇다고 바보인 것은 아니었다.

다리안에게도 사람을 보는 눈이라는 것이 있었다.

더욱이 다리안이 왕족으로서 각성한 능력은 눈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다리안이 유더와 코델리아를 극찬했다.

서슴없이 언니, 오빠라는 호칭까지 사용해가며 말이다.

‘마지막 결정타.’

검의 연회에서의 활약.

빛의 검성과의 대련은 유더의 현재 무력이 얼마나 강맹한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너무 강해.’

또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실력이었다.

일찍이 북부의 기린아라 알려진 루카스 흐레스벨그를 압도하는 강함이었으니 말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기분이 드는 아이들.’

정말로 이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같은 사람인 것이냐고 몇 번이나 되묻게 되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들.

물론 여기에 정말 가장 중요한 이유 하나가 추가되었지만, 설사 그 이유가 아니었더라도 지금 같은 자리를 마련했을 다프네 왕녀였다.

“아무튼··· 자리를 만들기 잘한 것 같구나. 적어도 한 가지는 바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무슨 이야기인 것일까.

유더와 코델리아 자신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그 소문을 말하는 것일까?

저도 모르게 긴장한 코델리아가 허벅지 근처에서 허공을 더듬었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두 사람 모두 장갑을 끼고 있는 터라 온기가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손을 마주 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훨씬 기분이 나아진 코델리아였다.

‘든든해.’

안정감이 든다고 해야 할까.

유더의 단단한 손에 위안을 얻은 코델리아는 다시 다프네 왕녀를 마주하였고, 다프네 왕녀는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코델리아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정말 아름답구나, 코델리아.”

속삭이듯 말한 그녀는 가만히 손을 뻗어 코델리아의 옆 머리를 어루만지더니 그대로 목을 따라 천천히 손을 내렸다. 바짝 긴장해 꼼짝도 못 하는 코델리아의 가슴께에 가만히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스카프가 삐뚤어졌구나.”

분홍색 드레스의 가슴 부분에 달린 하얀 스카프.

다프네 왕녀는 손수 스카프를 손봐주었고,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뭐, 뭐지? 왜 두근거리는데?’

같은 여자가, 그것도 드레스 입은 여자가 스카프 고쳐주는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걸까.

얼굴을 붉힌 코델리아는 약간은 홀린 듯 다프네 왕녀를 바라보았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의 손을 조금이지만 세게 쥐어 정신을 차리게 했다.

“후훗, 귀엽구나.”

코델리아가.

아니, 유더까지 포함하여.

두 사람을 보며 작게 웃은 다프네 왕녀는 다시 자리에 앉는 대신 코델리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유더를 내려다보았다.

“유더 바이엘. 검장 바이엘 백작의 차남.”

프로필만 보면 강한 것이 당연했다.

어린 시절부터 부단히 무예 수련을 했을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다프네 왕녀는 이미 유더의 기록을 몇 번이나 검토한 상태였다.

유더가 구음절맥을 타고났다는 것도, 그렇기에 불과 반 년 전까지만 해도 무공은커녕 기초적인 체력 단련조차 할 수 없던 몸이라는 것도 모두 알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고작 반년이 지났을 뿐인데.

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들을 겪었기에 지금처럼 강해진 것일까.

다프네 왕녀는 코델리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자신과 색은 같지만 종류는 다른, 유더의 초록빛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물었다.

“무엇이 그대를 이토록 강하게 만든 것인지, 설명할 수 있겠나?”

다프네 왕녀의 눈은 차갑고 서늘했다.

때문에 유더는 담백하게 답했다.

“여러 기연들을 얻었습니다.”

솔라리의 힘이 어린 태양의 목걸이.

페어리 퀸과의 만남.

태양화초의 섭취 등등.

유더는 굳이 하나하나 나열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 정도의 기연들을 단시간 내에 한 사람이 모두 겪었다는 것은 무척 이상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기연.”

다프네 왕녀가 빙긋 웃었다. 코델리아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혹시 악마와의 계약 같은 것은 아니고?”

무척 짧은 시간 만에 강자가 될 수 있는 방법.

악마와의 계약.

지옥의 대군주에게 영혼을 바쳐 마인으로 거듭나는 것.

갑작스러운 의심에 코델리아는 고개를 번쩍 들어 무어라 입을 열려 했지만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를 만류하듯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눈을 마주하고 있기에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프네 왕녀의 방금 말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뭐,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그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저 파라곤의 영웅 철인 란디우스의 제자이니까.”

다프네 왕녀가 그렇지 않느냐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고, 유더는 작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합니다.”

딱히 큰 비밀도 아닌 이야기였으니까.

당장 노던 자작령에 함께 묵었던 바이엘 백작가의 기사들과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기사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감안한다 해도··· 너무 강한 것은 사실이지. 그래서 좋은 거지만.”

알 듯 모를 듯 한 말을 한 다프네 왕녀는 부드럽게 미소 짓더니 의자를 끌어다 코델리아 옆에 앉았다.

“그래서 코델리아, 페어리 이야기도 진짜인 거니?”

“네? 어··· 네. 진짜에요.”

다른 건 몰라도 폴 페어리들을 만난 이야기는 유명했으니까.

코델리아가 여기에 윈터 페어리들과 야생의 땅에서 만난 와일드 페어리들의 이야기까지 곁들이자 다프네 왕녀는 가만히 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흠··· 그렇단 말이지. 뭔가 특별한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왕녀님?”

“사실, 왕궁에도 그런 곳이 하나 있거든. 페어리들이 나온다는 전설이 있는··· 하지만 나는 거기서 한 번도 페어리를 만나 본 적이 없었는데, 그건 내 미모가 부족했던 탓이려나?”

짓궂게 말을 맺은 다프네 왕녀가 짓궂은 시선까지 보내자 코델리아는 순간 말문이 막혀 어버버 거렸고, 다프네 왕녀는 그런 코델리아가 귀엽다는 듯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좋아, 결정했다. 코델리아로 실험을 해봐야겠어.”

“실험이요?”

“그래, 실험. 이틀 뒤 밤에 다시 찾아오렴. 같이 목욕을 하자꾸나.”

“그··· 페어리가 나온다는 그곳에서요?”

“그래, 그곳에서. 이 멋진 머리칼의 비밀도 궁금하고 말이야.”

코델리아의 찰랑찰랑한 머리칼을 바라보며 말한 다프네 왕녀는 다시 유더에게 시선을 주었다.

“유더 바이엘, 약혼녀를 빌려줄 수 있겠나?”

“코델리아가 수락한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라는데?”

다프네 왕녀가 다시 코델리아를 보았고, 코델리아는 유더와 맞잡은 손을 꼼지락 거리다 답했다.

“그··· 갈게요.”

“후훗, 응해줘서 고맙구나. 그날을 기대하도록 하지.”

코델리아와 얼굴을 가까이 했던 다프네 왕녀는 다시 자세를 바로하더니 돌연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머리에 무언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은데··· 비결을 알려줄 수 있을까?”

“이틀 뒤의 궁금함으로 남겨두시는 것이 어떨까요.”

유더가 부드럽게 응대하자 다프네 왕녀는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틀 뒤 밤이 더욱 기대되겠군.”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야생의 땅에서 있었던 일들에 이어 몇 가지 더 소소한 잡담으로 시간을 보낸 다프네 왕녀는 손수 코델리아가 일어나는 것을 도운 뒤 작별의 말을 고했다.

“그럼, 이틀 뒤의 만남을 고대하겠다. 물론 오늘의 만남 역시 즐거웠고 말이다.”

“저희도 무척 즐거웠어요.”

“시간을 내주셔서 영광입니다.”

코델리아와 유더가 차례로 답하자 다프네 왕녀는 두 사람에게 퇴장을 허하였고, 유더와 코델리아가 화원을 나서는 것으로 다과회가 일단락 되었다.

그리고 십여 초 남짓.

유더와 코델리아가 화원을 나가고도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다프네 왕녀는 의자에 털썩 앉은 뒤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보기엔 어때?”

유더와 코델리아를 대할 때보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에 단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쁘지 않아.”

꽃과 나무의 배치로 일종의 결계를 형성한 화원 구석에서 무척이나 잘생긴 금발의 청년이 걸어나왔다.

다프네 왕녀의 가장 강력한 동맹이자 믿음직한 동료인 디온 왕자.

그의 평가에 다프네 왕녀는 어깨를 늘어트리며 다시 물었다.

“나쁘지 않은 정도야?”

“일단은. 좋은 녀석들 같기는 하지만 마주한 시간이 너무 짧았으니까. 다만··· 능력만은 확실한 것 같아.”

“이유는?”

“날 눈치챘어.”

“란디우스의 제자가?”

“란디우스의 제자도.”

디온 왕자의 대답에 다프네 왕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코델리아도 널 눈치 챘다는 말이야?”

“어, 오히려 란디우스의 제자보다도 빨리.”

처음 코델리아가 다프네 왕녀를 마주했을 때 당황했던 이유는 단순히 다프네 왕녀의 카리스마에 눌려서만이 아니었다.

구석에 숨어 있는 디온 왕자의 존재를 눈치 챘기 때문이다.

다프네 왕녀가 미간을 좁히며 다시 물었다.

“마법사라서?”

“탐색 마법 같은 건 쓰지 않았어. 더욱이 이 화원은 내 마법적 영지라 할 수 있고. 어설픈 수작 따위는 바로 티가 날 수밖에 없어.”

“그럼?”

“감이 좋아.”

거의 야생동물 수준으로.

사람보다는 맹수에 가까울만치.

“그냥 너까지 나와서 만나볼 걸 그랬나?”

“아니, 숨어서 관찰한 덕분에 얻은 것들도 있으니까. 더욱이··· 신중하면 신중할수록 좋은 거 아니겠어? 우리의 운명을··· 나아가 세일룬 왕국의 운명을 좌우할지도 모를 두 사람이니.”

운명의 두 사람.

디온 왕자의 말에 다프네 왕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나선 화원의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화원 밖.

궁내부원의 안내를 받으며 복도에 나온 코델리아는 바로 유더에게 눈빛을 보냈다.

‘야! 허락하면 어떡해!’

‘뭐가? 목욕?’

‘어, 목욕. 뭔가 무섭단 말이야!’

다프네 왕녀.

분명 미인에 멋지고 카리스마 있는 왕언니였지만 어쩐지 모르게 무서운 느낌도 드는 사람.

‘별 일 있겠어? 그리고 기회잖아.’

‘왕녀랑 친해질 기회?’

‘샴푸랑 린스를 적극적으로 어필할 기회.’

유더의 대답에 코델리아는 눈을 흘겼고, 유더는 다시 헛기침을 토한 후 메시지 마법으로 말했다.

[거기다 잘하면 페어리도 만날 수 있을지 모르잖아? 왕실에 있을지 모를 페어리라면··· 섬머 페어리일 가능성이 높지?]

[어, 아마도. 잠깐, 너 지금 스크롤 안 찢었지? 그냥 마법 쓴 거지?]

[메시지 마법이야 간단하니까.]

유더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자 코델리아는 얼굴을 구겼다.

[하여간 재능충들은 이래서 재수가 없어.]

[야, 너도 질풍보에 뇌성박 순식간에 마스터 했거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여전히 양심엔 털이 났구나. 그래서 따뜻하다고 했나?]

[응, 완전 따뜻해. 너무 좋아.]

[좋겠다. 아무튼 너도 눈치 챘지?]

[디온 왕자?]

[어, 숨어서 우리 관찰하던 거.]

[으으··· 우리 뭔가 밉보인 걸까?]

[그건 아닌 것 같고··· 뭔가 신중을 기하는 이유가 더 있는 기분이야.]

유더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

어쩌면 다프네 왕녀만 가지고 있을 정보.

[하아··· 아무튼 이틀 뒤에 다시 와야 하는구나.]

[걱정 마, 그때도 제대로 꾸며줄 테니.]

유더가 씩 웃으며 눈빛을 보내자 코델리아는 바로 그게 걱정이라는 눈빛으로 응답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유더와 코델리아는 돌연 자세를 바로해 정면을 보았다.

이쪽을 향해- 정확히는 다프네 왕녀의 화원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를 드러내는 반백의 머리칼.

하지만 정정하기 짝이 없는 육신과 매서운 눈빛.

유더와 코델리아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호국공.’

왕족 몰살 사건의 주범이자, 이번 왕도에서의 싸움에서 반드시 저지해야만 하는 실질적인 최종보스.

본래 신분이 높은 자가 말을 걸기 전에는 신분이 낮은 자가 먼저 인사를 건넬 수 없는 법이었다.

때문에 궁내부원은 호국공의 말을 기다리고자 발걸음을 멈추었고, 유더와 코델리아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호국공은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서늘한 눈으로 두 사람을 한 번 바라본 뒤 그대로 지나쳐 화원으로 나아갔다.

[아무 일··· 없겠지?]

왕족 몰살 사건의 주범이 다프네 왕녀를 만나러 가는 상황이었으니까.

코델리아의 걱정 섞인 물음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직 건국 기념회 날이 아니니까.]

호국공은 왕당파의 거두였고, 그렇기에 차기 국왕인 다프네 왕녀와는 평소에도 왕래가 잦은 인물이었다.

아마 오늘의 회동도 그렇게까지 큰 의미를 가진 만남은 아닐 터였다.

[그럼 다행이지만······.]

코델리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다과회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꼭 붙잡고 있던 유더의 손을 새삼 고쳐 잡았다.

십검호의 하나인 호국공.

앞으로 보름 남짓 후에는 직접 맞서 싸워야만 하는 상대.

[괜찮을 거야. 제일검이 있으니까.]

유더가 말했고, 코델리아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불길한 예감을 억누른 채 발걸음을 내디뎠다.

&

같은 시각,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

중앙과 북부의 경계선에 위치한 오래된 신전에서 한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했다.

“핑크···폭탄?”

기묘하기 짝이 없는, 그렇기에 한 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

그리고 이제는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네 글자.

남자는- 사령술사 벨키안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편지를 접은 뒤 고개를 들어 북동쪽을 보았다.

왕도가 자리한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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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3장 - 왕세녀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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