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5장 - 검은 달 >
제65장 - 검은 달
검은 달.
왕도의 어둠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대 길드.
작게는 소매치기부터 크게는 매춘과 마약, 살인 청부까지.
돈만 된다면 온갖 더러운 일을 가리지 않고 수행하는 왕도의 하이에나들.
그렇기에 호국공은 검은 달을 눈 여겨 보았고, 그들을 자신의 사냥개로 삼았다.
사냥개.
사냥하는 개.
사냥감을 잡을 능력이 있을 때에만 존재를 허락받는 것.
“절대로 막아야 한다.”
검은 달의 길드 마스터인 카라드 본은 다시 한 번 나직이 말했다.
골목의 싸움꾼 출신인 그의 거칠고 투박한 손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 카드가 쥐어져 있었다.
나쁜 아이들, 벌 받을 시간이에요?
내일 밤 아홉 시에 찾아갈 테니 혼날 준비들 하고 있어요.
커다란 금고에 숨겨둔 것들을 가지러 갈테니까요. 네?
- 로그 마스터 핑크폭탄
둥글둥글 귀여운 필체로 쓰인 글씨와 그 밑에 자리한 유려한 필체의 서명.
어린애 장난 같은 내용이었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이미 두 번의 사례가 존재했으니 말이다.
남들보다 덩치가 두 배는 큰 카라드 본 앞에는 다섯 명의 남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검은 달의 자랑이자 왕도의 어둠을 주름잡는 ‘다섯 손가락’들이었다.
저마다 전문 분야나 사용하는 무기는 달랐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한 이들로, 사실상 검은 달의 최정예 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다섯 손가락들과 길드 마스터인 카라드 본 스스로가 지키는 중심 방.
검은 달의 온간 중요한 정보들이 모여 있는 거대한 금고.
“밖을 지키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다섯 손가락 중 하나인 맹인 검객 필리아의 물음에 카라드 본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붉은 색 천으로 눈을 가린 금발 미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그녀는 앞을 보지 못 했지만, 눈이 멀쩡한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초월적으로 발달한 청각과 촉각을 활용해서 말이다.
단순 무력만이라면 검은 달 내에서도 첫 손 꼽힐 그녀는 다섯 손가락 가운데서도 두 번째 손가락인 검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즉, 길드 마스터에게 얼마든지 의문을 제시할 수 있는 입장이란 소리였다.
“밖은 부하들과 왕도 경비병들에게 맡긴다. 어차피 핑크··· 아니, 로그 마스터는 이 금고방의 보물을 노릴 터이니, 결국 이곳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괜히 병력을 분산시키지 않고 금고방 하나를 완벽하게 지켜낸다.
누가 오든 막아낼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마스터의 뜻이 그러시다면 따르겠습니다.”
단아한 목소리로 답한 필리아는 그대로 입술을 닫았고, 카라드 본은 다른 다섯 손가락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들도 알겠나?”
“알겠습니다.”
“마스터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좋아요.”
“박살을 내놓겠소.”
차례대로 들려온 다섯 손가락들의 대답에 만족한 카라드 본은 마지막으로 말한 사내- 마치 카라드 본 자신의 젊었을 때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거구의 청년 폰에게 시선을 두었다.
거칠고 순수한, 싸움 그 자체를 좋아하는 타고난 싸움꾼.
서른은 되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어린 나이인 터라 이 방에 있는 자들 가운데서 가장 약한 그였지만, 앞으로 10년- 아니, 단 5년만 지나면 이야기가 달라질 터였다.
‘아마도 최강은 폰 저 놈이 되겠지.’
마치 체스에서 최약의 기물인 폰이 최강의 기물인 퀸으로 거듭나는 것처럼.
‘그래, 그저 지나가는 해프닝일 뿐이다.’
이제 보름 남짓 남은 거사를 위한 액땜 정도의 사건.
‘하지만 방심하지 않는다.’
뒷골목 싸움에서 순간의 방심은 바로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혹여라도 로그 마스터에게 당하게 된다면 호국공에게 사냥개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 할 수도 있었다.
‘아니, 그 전에 왕도의 어둠을 지배하는··· 그 입장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겠지.’
자기보다 강한 자들이 틈을 보이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는 잡것들이 넘쳐나는 바닥이니.
‘로그 마스터.’
부끄럽기 짝이 없는, 그야말로 파렴치한 이름을 사용하는 천둥벌거숭이.
하지만 그 실력은 진짜였고, 카라드 역시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올 테면 와 봐라.’
네가 무엇을 준비했든 막아줄 터이니.
아니, 오히려 네년을 붙잡아 창관의 에이스로 만들어줄 터이니.
뒷골목 건달패다운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카라드는 돌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창문 하나 없는 금고방에까지 들릴 정도로 커다란 소란이 건물 밖에서 들려온 탓이었다.
“로그 마스터.”
새삼 전의를 다신 그는 예고장과 함께 주먹을 움켜쥐었고, 다섯 손가락들은 저마다의 자세를 유지한 채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같은 시각.
왕도의 온갖 음습한 가게들이 모여 있는 홍등가의 지붕 위에서 화려하게 날뛰는 자가 있었다.
“룰루피! 룰루팡! 룰루~ 얍!”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주문을 외우며 사방으로 분홍색 다이너마이트를 던진 그녀는 다시 한 번 지붕을 박차 높이 뛰어올랐다.
“핑크폭탄이다!”
“잡아! 잡으라고!”
“포위망을 형성해!”
검은 달의 조직원들만이 아니었다. 이미 핑크폭탄 때문에 자존심을 두 번이나 구긴 꼴이 된 왕도 경비대 역시 합류해 촘촘하기 짝이 없는 그물같은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하! 그 정도로 되겠어? 이 핑크폭탄을 붙잡는데 말이야!”
코웃음을 친 토끼 귀의 여인- 로그 마스터 핑크폭탄은 요망한 토끼 꼬리를 흔들며 지붕 위를 달리고 또 달렸다.
“계속 몰아! 이대로 쫓아내면 우리의 승리다!”
“우오오!”
거의 백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함께 달리며 소리치니 그 기백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유더는 미소지었다.
‘빙고.’
지붕 위를 달리며 요망한 웃음을 흘리는 여인.
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키가 조금 더 컸고, 허리가 살짝 더 굵었으며, 미모는 애당초 비교가 되지 않았다.
눈앞의 핑크폭탄은 가짜였으니 말이다.
[야야, 그게 뭐야. 그게. 좀 더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게 몰라? 코델리아처럼!]
유더의 요구에 지붕을 박차던 가짜 핑크폭탄은- 스칼렛은 노성을 터트렸다.
[자꾸 지랄할래? 안 그래도 창피해 죽을 것 같구만!]
[에헤이, 그런 것 치고는 목소리에 희열이 섞여 있는데? 즐기는 거 아냐?]
[즐기긴 뭘 즐겨! 이 미친 놈아!]
[솔직하지 못 하긴.]
[아오, 짜증나!]
질색을 한 스칼렛이었지만 사실 유더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기는 했다.
하기 싫어 죽겠다는 말과 달리 스칼렛의 목소리에는 정말 희열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또 저래보겠니.’
나름 일탈의 맛이 있지 않을까?
그 왜 놀이공원 가면 안 하던 사람들도 머리에 동물 귀 머리 띠 같은 거 하나씩 꼭 껴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 그래. 다 이해할게. 이해해.]
[이해하긴 뭘 이해해!]
[코델리아보다 허리는 굵고 가슴은 작고 미모는 너무나 딸리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더욱이 가면 쓰고 있어서 미모 딸리는 건 어떻게든 숨길 수 있을 테고.]
[야! 너 뭐라고 했어? 어? 뭐가 어쩌고 어째?]
[오디오 끊긴다. 빨리 핑크폭탄이라고 외쳐. 임무 완수해야지!]
[아오, 씨발놈.]
마치 코델리아처럼 욕지거리를 토한 스칼렛은 다시 허공에서 빙그르 공중제비를 돈 뒤 희열과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나는! 핑크폭탄이다!”
쩌렁쩌렁 밤공기를 울리는 외침이 사자후처럼 퍼져나갔고, 스칼렛의 얼굴은 완전히 발갛게 달아올랐다.
[진짜! 진짜! 진짜! 야! 대체 왜 핑크폭탄인데! 어?! 왜냐고!]
차라리 핑크붐이나 핑크봄버라고 할 것이지.
아니, 애당초 왜 핑크란 말인가.
레드나, 블루나, 그린이나 아무튼 덜 부끄러운 색이 얼마든지 있는데!
스칼렛의 항의에 커다란 굴뚝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유더는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거야 핑크폭탄이라고 하면 코델리아가 부끄러워 할 테니까.]
[뭐?]
[부끄러워 하는 코델리아는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유더의 대꾸에 스칼렛은 순간 발을 헛디뎌 지붕에서 떨어질 뻔 했다.
신속의 날개를 전개해 간신히 추락을 면한 스칼렛은 소름이 돋다 못 해 닭살이 된 팔을 어루만지며 메시지 마법을 보냈다.
[야,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코델리아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핑크폭탄이라고 지었다고? 그게 귀여우니까?]
[귀엽지 않아?]
[물론 귀엽긴 하··· 아니! 젠장! 이게 아니고!]
스칼렛은 일단 손에 잡히는대로 분홍색 다이나마이트들을 사방으로 뿌린 뒤 화려한 폭발 속에서 생각했다.
‘이 자식,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코델리아가 위험해!
이 자식 진짜 위험한 놈이야!
‘잠깐, 그러고 보니 분노할 포인트는 이게 아니지.’
영예롭기 짝이 없는 로그 마스터의 이름이 핑크폭탄이 된 이유가 고작 ‘부끄러워하는 코델리아는 귀여우니까.’라니.
로그 마스터의 후예로서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너너너, 내가 핑크폭탄한테 그대로 다 폭로할 거야.]
[허허, 어디서 거짓 유언비어를 퍼트리려 하시나이까. 증거는 있으신지?]
[아오, 짜증나. 핑크폭탄은 이런 놈팽이를 대체 왜 좋아하는 거야?]
[듣기 좋은 말이지만 아무튼 다시 집중해. 잘못하단 골로 가니까. 검은 달이고 왕도 경비대고 지금 다 진심이라고.]
[알고 있어. 그보다 핑크폭탄은 지금 작전대로 잘 하고 있어?]
[어, 잘하고 있을 거야.]
[거야? 확실한 게 아냐? 뭐 확인할 수단 없어? 다른 누구도 아닌 너잖아!]
직접 만나 대화한 숫자 자체가 겨우 손에 꼽을 정도인 블랙망토였지만 성격파악은 이미 완벽히 된 상태였다.
계획적이고 계산적이며 철두철미한 성격.
‘거기에 변태고!’
사심이 담긴 마지막 줄을 추가한 스칼렛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비를 피하기 위해 허공에서 크게 몸을 튼 뒤 거의 바닥을 기듯이 몸을 낮춘 채로 질주했다.
[그런데 확인할 수단이 없다고?]
[코델리아가 먼저 연락하기 전까지는 없어. 그리고 딱히 필요하지도 않고.]
[왜?]
[코델리아라면 당연히 잘 할 테니까.]
[이런 미친. 여기서 콩깍지냐?]
그렇게 계산적인 녀석이?
하지만 스칼렛의 항의에 유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코델리아 한정으로 콩깍지가 쓰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래서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코델리아니까.]
유더 자신의 전생과 현생에 마주한 수많은 이들 가운데서 최고의 천재인 그녀였으니까.
[우리 집 짐승은 할 수 있어.]
[거기서 짐승이냐.]
[진짜 짐승이니까. 고고하고 아름다운··· 한 마리 맹수와 같으니까.]
유더의 표현에 스칼렛은 다시 몸서리를 친 뒤 지붕을 박찼다.
짐승이든 맹수든 뭐든지 간에.
‘빨리 와! 핑크폭탄!’
와서 저 녀석 좀 어떻게 해줘!
소리 없는 절규를 내지른 그녀는 다시 지붕을 달렸다.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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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렛이 부끄러움과 오글거림을 상대로 분투하는 그때.
진짜 핑크폭탄인 코델리아는 이미 건물 안에 침투한 상태였다.
기존의 도둑질 장소였던 대저택과는 다른 거대한 상가 건물.
하지만 그래도 결국엔 건물이었고, 벽과 천장과 바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
‘좋아, 밖은 충분히 소란스럽고.’
잠시 건물 밖으로 귀를 기울여 본 코델리아는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하필이면 스칼렛이 핑크폭탄을 부르짖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핑-크-폭-탄-이-다아아아!”
아련히 들려오는, 실로 절규와 같은 외침.
그리고 멀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갛게 달아오르는 코델리아의 말캉말캉한 뺨.
“우그으······.”
잠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부끄러움을 만끽한 코델리아는 심호흡으로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어쩔 수 없어. 그래. 벨키안이 제일 좋아하는 소설 주인공 이름이 핑크폭탄이라잖아. 그럼 어쩔 수 없지. 핑크폭탄이란 이름을 쓴 건 벨키안을 낚기 위해서니까.’
타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니 괜찮다.
그냥 부끄러운 수치 플레이 같은 게 아니다.
‘근데 벨키안은 대체 무슨 소설을 보길래 주인공 이름이 핑크폭탄인 거지?’
그 아저씨 그렇게 안 봤는데 취미가 이상한 건가?
옆길로 새는 딴 생각은 언제나와 같이 효과적이었다.
덕분에 달라올랐던 얼굴을 어느 정도 원상태로 되돌린 코델리아는 재빨리 작전을 개시했다.
‘유더가 말해준 대로야.’
사전에 푸른 달을 통해 건물의 청사진을 손에 넣은 유더였다.
‘지형을 보면 어떤 식으로 병력이 배치될지 역시 대강은 알 수 있어. 효율적인 배치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유더는 검은 달의 조직원 수와 구성 등을 참고로 하여 가상의 병력 배치도를 만들어냈고, 언제나 그랬듯이 높은 정확도를 보여주었다.
‘역시 우리 집 유더.’
믿고 있었다니까?
지형을 알고 배치된 병력도 대강은 안다.
‘전술도 대강은 알겠고.’
금고방에 최정예를 집중시켜 핀 포인트 방어를 한다.
‘그럼 그에 맞춰 놀아드려야지.’
약간은 유더 같은 미소를 지은 코델리아는 그대로 숨을 크게 고르더니 마녀화를 감행했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마력을 바탕삼아 수많은 환영들을 만들어냈다.
‘환영분신술.’
건물 안을 혼란에 빠트릴 더미들.
코델리아는 가볍게 박수를 쳤고, 열댓 명에 달하는 코델리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혼란을 야기했다.
‘그리고 진짜인 내가 할 일은······.’
코델리아는 스스로의 허리춤을 돌아보았고, 커다란 벨트에 가지런히 꽂힌 다이너마이트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
< 제65장 - 검은 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