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6장 - 섬머 페스티발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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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진짜 요정 나라 가는 거예요?”
“네, 왕녀님. 요정 나라 가는 거예요.”
다리안 왕녀의 물음에 코델리아는 예쁘게 답했고, 다프네 왕녀는 흐뭇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짐이 많구나.”
애당초 온천에서 쉬러 온 왕녀 일행에게는 이렇다 할 짐이 없었다.
하지만 유더와 코델리아는 달랐다.
정말로 섬머 페어리가 나타났을 경우를 대비해 특별한 선물들을- 아니, 거래물자를 준비해 왔기 때문이다.
“페어리들과의 만남이 몇 번 반복되다보니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유더가 공손히 답하자 다프네 왕녀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왕래가 잦아지면 물건이 오가는 법이지. 우리 쪽도 선물을 준비하는 게 좋겠구나.”
우리 쪽.
의미심장한 단어에 유더는 안도와 위기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러나저러나 유더와 코델리아는 세일룬 왕국의 귀족이었고, 다프네 왕녀는 왕족이었으니 그녀가 원한다면 유더와 코델리아가 준비한 물자들을 ‘징발’하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놓고 징발할 가능성은 낮지만.’
그냥 내놓으라고 뺏는 것은 폭군들이나 하는 짓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셈을 치르겠다며 돈을 제시하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한 일이었다.
페어리들에게 돈은 그리 의미 있는 물건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돈도 포장해서 넘기는 법이 있기는 했지만.’
어찌되었든 돈보다는 물건이 나은 상황이다 보니 걱정했는데 굳이 ‘우리 쪽’이란 표현을 쓴 걸 보니 딱히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가 준비한 물건들을 빼앗을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선물이 많아지면 이쪽 선물의 희소성이 낮아진다는 건데.’
물론 비장의 카드로 준비한 물건이 있는 터라 ‘가장 중요한 거래’는 어떻게든 성립시킬 수 있을 터였지만······.
“초콜릿을 준비했다지? 그렇다면 이쪽도 과자를 준비하도록 하마.”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다프네 왕녀의 말에 유더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지만 이내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예, 전하. 페어리들은 달콤한 음식들을 무척 좋아합니다.”
“과연, 취향이 그럴 것 같았다.”
다프네 왕녀가 살짝 코웃음을 치며 말하는데 뭔가 맺힌 게 있어 보였다.
페어리들의 취향.
페어리들이 좋아하는 외모.
‘음, 물론 그것도 있겠지만······.’
거기까지.
다프네 왕녀의 명예를 위해 생각하기를 멈춘 유더는 다시 선물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과자라니 그나마 다행인가.’
아예 종류가 다르면 비교 우위를 밀어붙이면 되었으니까.
‘그리고.’
아무리 왕궁이라 해도 급히 준비할 수 있는 과자에는 한계가 있을 터였다.
시간을 약간만 주면 요리장이 갓 구운 훌륭한 과자들을 제공할 터였지만-
‘페어리들이 그걸 기다려줄 리가 없지.’
당장도 대체 언제 가는 거냐며 앙탈들을 부리고 있었으니까.
언제 봐도 어린애 같은 페어리들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어린애 같은 면모가 도움이 되는 상황이었다.
“빨리 가자. 빨리 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여왕님은 일찍 주무신다구.”
“맞아, 맞아. 자꾸 지체하면 코 주무실지도 몰라.”
페어리들이 목소리를 높이자 흠칫한 다프네 왕녀는 왕궁 시녀들을 돌아보았고, 혹여 있을지 모를 다과회에 대비해 준비해둔 과자들을 챙겨온 왕궁 시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장까지는 무리겠군.’
그래도 일단 물건이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한 다프네 왕녀는 다시 유더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쪽은 준비가 되었다.”
“알겠습니다. 뜻을 전하겠습니다.”
예를 표한 유더가 페어리들을 돌아보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으아 이제 다 된 거야?”
“그럼 간다?”
“가자구~”
요정들이 성화를 부리며 소리친 순간이었다.
유더와 코델리아에게는 익숙한, 하지만 왕족들에게는 낯선 페어리들 특유의 공간 이동 마법이 펼쳐졌다.
“자, 잠깐! 호위를!”
“왕세녀 전하!”
궁내부원들과 왕궁 시녀들이 급히 외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눈을 한 번 깜박이고 나니 이미 이동한 후였기 때문이다.
공간 저 너머에 자리한 섬머 페어리들의 세계.
요정의 마을.
“우와아.”
갑자기 나타난 반짝이는 숲에 다리안 왕녀는 눈을 크게 뜨며 탄성을 토했고, 다프네 왕녀와 디온 왕자 역시 장성한 왕족답게 금방 억누르긴 했지만, 순간적으로 감탄과 놀라움을 드러냈다.
“뭐야, 뭐야?”
“밖에서 온 애들이야?”
“인간들이네.”
“올~ 제법 예쁜데?”
“귀여워.”
“쟤는 무섭게 생겼어.”
“그러게, 사자 같아.”
“와! 쟤 좀 봐! 완전 예뻐!”
“우와앙! 만져봐야지!”
역시나 페어리들.
제멋대로 떠들며 순식간에 수십 명 이상이 모여들었는데, 유더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음, 과연. 과연 코델리아.’
페어리들 가운데 거의 절반 이상이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 쪽에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빨리 진행하자.’
지금이야 페어리들의 등장 자체에 정신이 팔린 왕족들이었지만, 이 차이를 깨닫고 나면 불쾌함을 표할 수도 있었으니까.
유더는 페어리들 사이에서 한창 거들먹거리고 있는- 그러니까 유더 자신과 일행들을 데려온 페어리에게 다가가 빠르게 말했다.
“여왕님에게 안내해 주지 않을래? 내가 약속했던 특별한 선물도 받아야지.”
“정말 특별한 거야. 그래서 너한테만 주고 싶어.”
근묵자흑이라 했으니.
어느새 유더화가 진행된 코델리아가 생긋 웃으며 효과적인 말을 하였고, ‘너한테만’이란 말에 빠져든 페어리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내가 안내해 줄게!”
“고마워.”
다시 빙긋 웃은 코델리아는 슬쩍 유더를 돌아보았고, 유더는 흐뭇한 미소로 답했다.
‘코델리아, 성장했구나.’
‘스승님이 워낙 훌륭하시다보니.’
부창부수.
그 남편에 그 아내였으니.
물론 아직 약혼한 사이지 결혼한 사이까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유더와 코델리아가 눈빛을 나누는 그때 다프네 왕녀가 다가왔다.
“유더 바이엘, 코델리아 체이스. 이대로 페어리들의 여왕을 만나러 가는 것인가?”
“예, 그럴 예정입니다.”
“그렇군. 디온! 다리안! 이리 오거라.”
“예, 누님.”
“네, 언니.”
왕궁 시녀에게 받은 과자를 저마다 챙겨든 디온 왕자와 다리안 왕녀가 다가오자 유더는 코델리아를 돌아보았고, 어느새 초콜릿 상자들을 모두 챙겨든 코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준비만반.
“그럼 출발할게!”
페어리가 신이 나서 외친 직후였다.
다시 한 번 주변 일대의 광경이 바뀌었고, 숲 대신 드넓은 꽃밭이 눈에 들어왔다.
“끄으윽······.”
그리고 눈앞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픽하고 쓰러지는 페어리.
여럿이서 다 같이 해야 하는 일을 혼자서 하다보니 기력이 딸린 모양이었다.
“저기, 저기 꽃밭에 여왕님······.”
“응, 알았어. 정말정말 고마워. 넌 정말 특별한 페어리야. 여기 선물.”
“흐헤헤······.”
코델리아가 품에 안겨준 반지함 크기의 초콜릿에 만족한 페어리는 헤헤헤 웃으며 눈을 감았고, 다리안 왕녀는 흠칫해서 물었다.
“주, 죽은 건 아니죠?”
“그냥 잠든 거예요.”
유더는 바로 답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페어리의 숨을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무척 지쳤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그럼 마저 가자꾸나.”
다프네 왕녀가 꽃밭의 중심을 보며 말한 순간이었다.
“인간들이라니.”
“무척.”
“오랜만이네.”
“오랜만이야.”
발밑에 자리한 꽃들이 일시에 목소리를 내었다.
저마다 음색과 높낮이가 달랐지만,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각자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말을 여럿이 나눠서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라면.
“반갑구나, 인간의 아이들아.”
정면.
어느새 나타난 커다랗고 화려한 왕좌 위에 페어리 하나가 도도한 미소를 지은 채 앉아 있었다.
꽃으로 만들어진 왕좌와 장미를 연상시키는 붉은 드레스, 등 뒤에 자리한 나비의 날개. 검고 탐스러운 머리칼과 매력적인 갈색 피부.
“섬머 페어리 퀸을 뵙습니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예를 표하자 페어리 퀸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다프네 왕녀 쪽에 시선을 주었다.
“너희는 인사 안 해?”
바로 튀어나온 반말에 다프네 왕녀는 쓰게 웃었고, 그녀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유더가 얼른 입을 열었다.
“페어리 퀸이시여, 이쪽에 계신 분은 세일룬 왕국의 왕세녀이신 다프네 왕녀 전하이십니다.”
“인간들의 왕녀야?”
“예, 그러합니다.”
유더의 대답에 페어리 퀸은 다시 다프네 왕녀를 보았고, 다프네 왕녀는 언제나와 같은 위엄을 두른 채 페어리 퀸을 마주하는가 싶더니 이내 예를 표했다.
“세일룬 왕국의 왕세녀 다프네 D 세일룬이 페어리들의 여왕을 뵙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저쪽은 여왕이고 이쪽은 왕세녀였으니까.
다프네 왕녀 쪽이 먼저 예의를 차려주자 페어리 퀸 역시 만족한 얼굴이 되어 인사를 받아주었다.
“응, 반가워. 난 섬머 페어리 퀸인 카르멘이야.”
이제까지 만난 페어리 퀸들보다 살짝 어려보이는, 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외모의 페어리 퀸은 왕좌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손님은 많은데 나는 하나니까 잠시 여럿이 될게. 각자 이야기를 나누자.”
“예?”
디온 왕자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은 순간이었다.
공간이 나뉘었다.
아니, 복사되어 나열되었다.
아까와 같은 꽃밭.
하지만 분명 달라진 꽃밭.
“이제 좀 집중이 되겠네. 그렇지 않아?”
왕좌에 털썩하고 앉은 페어리 퀸이 씩 웃으며 묻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도 동의였지만, 그녀가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눈앞의 페어리 퀸은 더 이상 단수가 아니었다.
공간과 함께 스스로를 복사했다.
아마 지금쯤 다프네 왕녀와 디온 왕자와 다리안 왕녀는 페어리 퀸을 각자 ‘독대’하고 있을 터였다.
“어, 그런데 우리는?”
유더에 이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은 코델리아가 저도 모르게 말하자 페어리 퀸이 다시 킥킥 웃으며 말했다.
“너희는 세트니까. 갈라놓으면 안 될 거 같더라고.”
“세, 세트요?”
“어. 인간들은 운명의 붉은 실이라고 하나? 아무튼 막 너희 둘 사이에는 엄청 진하고 굵은 선이 파파팍 연결되어 있어. 내 눈에는 그게 보이거든.”
페어리 퀸의 설명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서로를 돌아보았고, 코델리아는 납득했다.
운명의 붉은 실이라는 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더와 코델리아 자신이 질긴 인연으로 묶인 것 하나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자, 아무튼 그럼 이야기를 하자. 나도 빨리 초콜릿이라는 걸 먹고 싶다구.”
페어리 퀸의 재촉에 유더의 눈이 순간 빛났다.
많은 것들을 유추할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소문을 들으셨군요?”
“어, 아예 직접 만나서 듣기까지 했어. 폴 페어리 퀸··· 로렐라이 언니가 엄청 자랑했단 말이야. 치사하게 별로 나눠주지도 않고.”
랑게스트 인근과 이곳 왕도 사이에는 참으로 많고 많은 산과 들과 마을들이 있었지만, 공간을 뛰어넘는 페어리들이었다.
하물며 양쪽 모두 여왕이라면 그 정도 거리쯤은 우습게 뛰어넘어 만남을 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치사하게 자랑만 엄청하고 한 조각 밖에 안 줬어. 더 먹고 싶으면 직접 구하라면서 말이야.”
페어리 퀸은 정말 분하다는 듯 입술을 삐쭉이며 투덜거렸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재빨리 눈빛을 교환했다.
‘좋아, 이미 작업이 된 상태네.’
‘이야기가 잘 풀리겠는데?’
이미 초콜릿을 맛보았고, 초콜릿을 원하기까지 하니까.
더욱이 폴 페어리 퀸 로렐라이와 아는 사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아는 사람과 비교하면 부추기기 훨씬 쉬우니까.’
유더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고, 코델리아의 눈에도 살짝 잔망스러운 빛이 어렸다.
“고급 초콜릿 상자 두 개랑 요정의 드레스를 교환했다고 들었지만··· 나는 호락호락하지 않아. 로렐라이 언니도 친교의 뜻으로 퍼준 거라고 했고. 그러니 거래 조건을 다시 생각해야 할 거야.”
가격 정도는 이미 알아뒀다는 듯 페어리 퀸이 씩 웃으며 말하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른 조건으로 진행해야겠죠.”
왜냐하면 훨씬 더 뜯어낼- 아니, 보다 좋은 거래를 할 생각이니까요.
“그렇지? 코델리아?”
“그럼요, 공자님.”
어느새 까맣게 물들어 버린 코델리아가 예쁘게 웃었고, 그렇게 모두가 웃는 가운데 거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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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6장 - 섬머 페스티발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