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181화 (181/473)

< 제67장 - 폭풍전야 >

제67장 - 폭풍전야

새벽 5시.

딱히 자명종 시계를 맞춰둔 것도 아니었건만 유더는 번쩍하고 눈을 떴다.

애당초 잠을 그리 길게 자지 않는 편이었는데, 환골탈태한 이후로는 하루에 3시간 남짓만 자도 힘이 넘치는 터라 짧게는 2시간, 길게는 4시간 정도로 수면 시간을 조정하고 있는 유더였다.

‘3시간 30분.’

오늘의 수면 시간.

시간을 확인한 유더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뒤 방 한쪽 구석에 가져다 둔 목욕용 큰 통 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역시 아침에는 샤워를 해야 한단 말이지.’

걷는 동안 허물을 벗듯이 옷을 벗어던진 유더는 통 한 가운데 서서 스크롤을 찢었다.

워터 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미지근한 물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나른해져 있던 몸 역시 바짝 긴장이 되었다.

“후우.”

이 맛에 스크롤 만드는 거지.

제일 좋은 건 그냥 워터 폴을 직접 쓸 수 있게 되는 거지만.

‘그래도 역시 샤워기 같은 걸 연구해보긴 해야겠네.’

샤워용 워터 폴은 전투용 워터 폴에 비해 쏟아지는 물의 양도 적고, 위력 역시 미약한 터라 싸구려 종이로 만든 스크롤로도 사용이 가능하긴 했지만, 역시 샤워할 때마다 스크롤을 사용하는 건 가성비가 영 좋지 못 했다.

한 마디로 사치라고 해야 할까.

‘거기다 좀 불편하기도 하고.’

샤워 시작할 때 한 번, 다 끝나고 나갈 때 한 번 사용하는 식이었으니까.

그 사이에는 첫 워터 폴로 쏟아진 물들을 재활용해서 씻는 수밖에 없었다.

‘뭐, 일단은 이게 어디냐 수준이긴 하지만.’

서구권에서 향수가 발전한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목욕을 안 해서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완전히 그것 때문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수도꼭지 돌리면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지는 환경이 아니니까.’

중세- 아니, 근세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목욕은 매우 사치스러운 일 중 하나였다.

몸을 씻을 정도의 깨끗한 물을 구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걸 또 뜨겁게 끓이기까지 해야 했으니 말이다.

‘연료 값도 무시를 못 하지.’

거기에 드는 수고도.

물을 끓이고, 목욕통에 옮겨 담고, 다시 행구기 위해 물을 또 끓이고······ 시간과 돈, 인력이 모두 소비되는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워터 폴을 이용한 아침 샤워는 오히려 가성비가 좋은 편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마이아 설득하는데 힘들었단 말이지.’

유더의 기상 시간이 빨라지자 제일 고생하게 된 것은 마이아였다.

명색이 전속 메이드인데 주인보다 늦게 일어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아침 세면을 비롯해 각종 시중까지 들어야 했으니, 마이아의 아침은 평소보다 거의 2시간 이상 빨라져야 했고, 해야 할 일들도 늘어났다.

‘그냥 자. 괜찮아. 내가 혼자 알아서 할게.’

‘하지만 도련님!’

설득하는데 걸린 시간은 근 한 달 남짓.

‘아니, 설득이라기 보다는 거의 명령이었나.’

친누나나 다름없는 마이아에게 강제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심리적인 거부감이 상당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마이아의 얼굴에 다크 서클이 눈에 띄게 늘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샴푸와 린스까지 사용해서 샤워를 마친 유더는 다시 한 번 워터 폴을 사용한 뒤 안에 물까지 가득 담긴 큰 통을 번쩍 들고 방을 나섰다.

‘물 버리고··· 운동 시작.’

다시 방에 돌아온 유더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몸을 푼 뒤 아침 운동을 시작했다.

란디우스의 제자가 된 이후 매일 같이 하다 보니 이제는 하루라도 거르면 하루 내내 기분이 찜찜한 아침 운동이었다.

‘가볍게 1시간 30분.’

유더가 매일 아침 운동에 투자하는 시간이었다.

기상 후 15분간 샤워 및 뒷정리, 1시간 30분간 운동, 다시 15분간 샤워 및 뒷정리.

‘좋아, 체중이 좀 불었어.’

유더의 현재 몸무게는 70kg 후반대.

환골탈태로 갑자기 키가 자랐지만, 아무리 환골탈태라 해도 질량보존의 법칙까지는 어찌할 수 없는 법이었다.

처음 환골탈태한 직후에는 60kg대였던 터라 무척 마른 편이었는데, 그간 열심히 체중을 불린 덕분에 이제는 키에 어울리는 체중을 손에 넣은 유더였다.

‘키 180 초중반에 70 후반대 몸무게.’

자신의 몸 곳곳을 돌아본 유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동안은 지금 상태를 유지하자.’

일단 원작의 유더는 란디우스를 만나지 않아도 영웅전기 3편쯤 가면 키가 180 후반대까지 성장했다.

애당초 성장 포텐이 있는 몸인데 환골탈태까지 했으니 키가 조금 더 자랄 가능성이 있었다.

‘180 후반이 딱 좋은데 말이지.’

하지만 키라는 것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 하늘에 맡길 따름이었다.

‘좋아, 아무튼 오늘은 복근이다.’

전반적으로 다 할 거지만 아무튼 마지막에는 복근을 조진다.

평소보다 한 세트 씩 더 한다.

코델리아 생각이 언제 바뀔지 모르니까.

“흠흠.”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토한 유더는 다시 운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시간하고도 20분 남짓.

어느새 창 밖에서는 해가 떠올랐고, 저 멀리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한 사람 더.

“유더야. 꺅?!”

달리아와 함께 유더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등장한 코델리아는 순간 비명을 삼키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땀으로 범벅이 된, 열기가 이는 유더의 나신이- 정확히는 상반신만 나신이었지만, 어찌되었든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 미쳤어? 왜 벗고 있는데?]

[아니, 운동하던 거거든?]

급히 보낸 메시지 마법에 유더가 바로 응수하자 코델리아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가락을 슬쩍 벌려 다시 앞을 보았다.

확실히 바지는 제대로 챙겨 입은 유더가 눈앞에 보였다.

노출도만 따지면 오히려 옥외 온천에 놀러갔을 때보다 훨씬 더 적은 유더였다.

저도 모르게 유더의 복근에 시선을 한 번 준 코델리아는 다시 고개를 들며 메시지 마법을 보냈다.

[그냥 하면 되지 왜 꼭 벗고 하는데?]

[땀 흘리니까?]

옷 입고 땀 흘리면 찝찝하잖아.

언제나처럼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유더의 주장에 코델리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빨리 입어. 오늘 오전 중에 다과회 있는 거 알지?]

[알지. 아무튼 이거 한 세트만 마저 할게.]

[뭐?]

[한 세트만.]

짧게 답한 유더는 그대로 다시 드러누운 뒤 복근운동을- 정확히는 소위 말하는 코어 운동을 시작했다.

조각처럼 아름다운 육신이 부드럽게, 하지만 정밀하게 움직였고, 달리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감탄했다.

“아가씨, 공자님 몸이 굉장하네요.”

작게 속삭이듯 말하자 코델리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답했다.

“그치? 유더 몸 좋지?”

“네, 대단하세요.”

“흥흥, 우리 집 유더니까 저 정도는 기본이지.”

어깨를 으쓱인 코델리아는 다시 유더를 돌아보았고, 마이아는 애써 터지려는 웃음을 억눌렀다.

유더를 자랑하며 흥흥 거리는 코델리아의 얼굴이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그리고 30분 여.

마이아를 필두로 한 사용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아침 식사를 마친 유더와 코델리아는 열심히 꾸민 뒤 숙소를 나섰다.

“요즘엔 매일 같이 다과회네.”

“건국 기념회 직전까지가 피크니까.”

300주년 건국 기념회이다 보니 평소에는 올라오지 않던 지방 귀족들까지 죄다 왕도에 집결한 상황이었다.

서로 간의 친목을 쌓고 정보를 교환하고, 이것저것 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 매일같이 다과회가 열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들은 막 사냥 대회 같은 거도 하지?”

“지방이면 그럴 텐데 여긴 왕도니까. 꿩 대신 닭이라고 체스 모임이나 간단한 술자리 같은 게 좀 열리는 모양이야.”

“술자리? 너도 나가?”

“아니, 그건 아버지나 아버님 몫이지.”

근래 바쁜 것은 유더와 코델리아만이 아니었다.

바이엘 백작과 체이스 백작 역시 하루에도 몇 개씩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애당초 이런 오전 중에 다과회를 하는 것부터가 정상이 아니잖아.”

“하긴, 보통은 오후에 하니까.”

식전에 가벼운 티파티를 가지는 일은 흔했지만, 참가자가 열댓 명이나 되는 다과회면 거의 반드시 점심과 저녁 사이- 즉, 오후에 열리는 것이 일종의 국룰이었다.

“아무튼 오늘도 힘내자. 홍보 효과가 꽤 있는 거 같으니까.”

“샴푸랑 린스 말이지? 구매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아?”

“어. 어제도 왕도 쪽 상인들이 셋이나 찾아왔는걸.”

“와웅.”

다프네 왕녀를 비롯한 왕족들과의 만남으로부터 닷새.

지난 오일 동안 일곱 개나 되는 다과회에 참가한 유더와 코델리아는 열심히 샴푸와 린스를 홍보했다.

“걸어 다니는 광고탑 덕을 많이 봤습지요.”

유더가 빙긋 웃으며 코델리아의 머리칼을 가볍게 어루만졌고, 코델리아는 흥흥 거리며 유더를 따라 자기 머리칼을 만져보았다.

부드럽고 매끈하고 찰랑거리며 반짝이는 머리칼.

“좋아, 오늘도 힘내야지.”

“공주님만 믿습니다.”

“응, 내가 팍팍 팔아치워 줄게.”

샴푸와 린스를 변경도시 바일룬의 특산품으로 만든다.

그로 말미암아 상업을 발전시키고 세수를 늘려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를 부유하게 만든다.

유더와 코델리아는 동시에 씩 웃었고, 그런 두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던 마이아와 달리아 역시 빙긋이 웃었다.

‘귀여우셔라.’

‘오늘도 꽁냥꽁냥하시네.’

그리고 십여 분.

목적지에 도착하자 유더와 코델리아는 새삼 다시 옷차림을 정돈한 뒤 마차에서 내렸다.

이번 다과회를 주관하는 것은 남방7가문 가운데 하나인 모리안 백작가.

화려하게 꾸며진 저택 입구를 마주한 유더는 코델리아에게 손을 건네며 말했다.

“자, 그럼 오늘도 잘 해보자구.”

“응!”

씩씩하게 답한 코델리아는 유더의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은 나란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

다과회.

차와 과자를 즐기는 모임.

즉, 기본적으로는 모여앉아 수다를 떠는 모임.

서로 인사를 하고, 어느 정도 차와 과자가 돌고나자 이런 대규모 다과회가 늘 그렇듯이 삼삼오오 뜯어져 저들만의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으으음··· 처음 보는 사람도 조금 있네.’

코델리아는 홍차를 호록호록 마시며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영애들을 돌아보았다.

아는 얼굴이 셋에 모르는 얼굴이 둘.

아는 얼굴은 똑같이 북부12가문에 속하는 실비아와 비올라. 여기에 검의 연회에서 보았던 레이첼.

모르는 얼굴은 왕도의 귀족인 제라드 백작가의 티타니아 양과 바랜 자작가의 애니 양이었다.

‘주최자인 메이브 양은 순회 중이고.’

음, 좋아.

일단 다섯 중에 셋이 아는 얼굴이니 마음이 편해.

‘거기다 실비아 언니는 샴푸와 린스 애호가이고.’

크로스벨 백작가의 이름으로 투자를 하겠다고 벼르는 양반이니 홍보에도 도움을 줄 터였다.

‘좋아, 좋아. 오늘도 신나는 홍보 타임이야.’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티타니아와 애니 모두 샴푸와 린스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계속 샴푸와 린스 이야기만 할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 어느새 이야기는 새로운 화제에 진입하였다.

“저기··· 그래서 결국 어디까지 갔어요?”

“네?”

티타니아의 물음에 코델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고, 티타니아는 우흥흥 미소를 흘렸다.

“아시면서.”

“몇 번이나 같이 가출도 한 사이시니······.”

애니 역시 우흥흥 웃으며 말하는데, 누가 봐도 음란마귀가 가득한 눈빛이었다.

“흠흠, 이런 곳에서 나눌 이야기는 좀 아닌 것 같군요.”

실비아가 적당히 자르고 들어갔지만 왕도와 북부의 문화차이인지,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티타니아와 애니였다.

“그러시지 말구.”

“이야기 하나만 해주세요.”

귀엽게 조르는 두 사람이었지만 코델리아는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슨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유더 등에 업혀서 여기저기 나다닌 이야기를 할 순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흠흠··· 코델리아 양. 제가 검의 연회 때 보았던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레이첼의 제안에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이다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검의 연회 때 한 일이 생각나서였다.

‘그, 그래도 그 정도는 괜찮겠지?’

볼 뽀뽀 정도야 뭘.

응응, 별거 아니지.

약혼한 사인데 그 정도야 뭘.

정작 당시에는 얼굴이 빨개져서 아무 생각도 못 할 지경에 처한 코델리아였지만, 본래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빠르게 잊는 법이었다.

“네, 괜찮아요.”

“흠흠, 그럼······.”

레이첼이 검의 연회 때 보았던 유더와 루시안의 대립과 그 사이에 있었던 코델리아와의 일을 이야기하자 실비아와 비올라 역시 크게 관심을 보였다.

코델리아도 제3자의 눈으로 자신과 유더의 이야기를 들으니 무척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랬다구?’

유더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는 코델리아와, 그런 코델리아의 허리를 안으며 뜨거운 시선을 보내는 유더.

“당신을 위해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다치지만 마세요, 내 사랑.”

목소리까지 바꿔가며 두 사람 분의 연기를 펼친 레이첼은 그대로 자기 손등에 입술을 맞추었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한 영애들은 작게 꺅꺅 거리며 손뼉을 쳐댔다.

“너무 멋져요.”

“사랑 이야기 같아요.”

티타니아와 애니가 말했고, 비올라는 동경에 찬 눈으로 코델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실비아는.

“우리 코델리아가 어른이 되었구나.”

흐뭇하기 짝이 없는 눈빛.

‘아, 아닌데. 이게 아닌데.’

뭔가 많이 왜곡된 거 같은데.

나는 그냥 뺨에 쪽 한 거지 막 그 이상 나간 거 아닌데.

하지만 무어라 말을 꺼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잘못했다가는 괜히 오해만 더 커질 것 같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유더 공자는 꼭 코델리아 양이랑 함께 다니시죠?”

“그뿐인줄 아세요? 늘 에스코트를 해주신다니까요?”

“아, 맞아요. 검의 연회 때도 항상 에스코트를 해주셔서 모두들 부러워했어요. 눈에도 띄었고요.”

차례대로 티타니아, 애니, 레이첼.

비올라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코델리아를 바라보았고, 실비아는 작게 웃더니 적당히 하라는 눈빛이 되었다.

‘왜, 왜. 이상한 거야?’

약혼자가 약혼녀 에스코트 해주는 게?

그냥 당연한 거 아니었어?

코델리아가 실비아에게 작게 묻자 실비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아니지. 어디 입장할 때면 모를까. 너희처럼 항상 어딜 가든 그렇게 손잡고 다니는 애들이 흔한 줄 알아?”

“왕도에도 없어요.”

“나중에 다른 커플들 다니는 거 한 번 관찰해 보세요. 차이를 바로 아실 거예요.”

이번에는 차례대로 실비아, 티타니아, 레이첼.

“그, 그런 거예요?”

“그런 거예요.”

코델리아의 물음에 티타니아와 애니와 레이첼은 확고한 얼굴로 답했다.

“그러고 보니 항상 그렇게만 손을 잡으세요?”

“네?”

“아니, 손잡는 방법이요. 연인끼리는 좀 더 이렇게······.”

말끝을 살짝 흐린 티타니아는 오른손과 왼손을 서로 깍지 껴 잡았다.

“평범하게 손잡는 거랑은 좀 달라 보이죠?”

그야말로 완전히 맞물리는 느낌이었으니까.

코델리아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티타니아는 까르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 한 번 해보세요. 느낌이 다를 테니까. 아셨죠?”

손깍지.

맞물린 티타니아의 양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코델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손깍지.’

손깍지.

별 거 아닌 거.

그냥 손이랑 손이 서로 잡는 거.

‘그래도······.’

손깍지.

아니, 딱히 유더랑 손깍지 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냥··· 남들이 이상하게 볼지도 모르니까.

약혼한 사이인데 손깍지도 안 껴봤다고요?

진짜 약혼한 사이 맞아요?

‘마, 맞아. 위장이 깨질 수도 있어!’

그러니까 이건 필요한 일이야.

응응, 서로 너무 사랑해서 죽고 못 사는 환상의 커플이란 위장은 지속되어야 하니까.

‘손깍지, 손깍지.’

기회는 많으니까.

이따 퇴장할 때도 유더가 에스코트 해줄 테니까.

그때 슬쩍.

그래, 슬쩍 해봐야지.

‘손깍지, 손깍지.’

마음을 굳게 먹은 코델리아는 두근두근 거리는 가슴을 살짝 누르며 퇴장의 순간을 기다렸고, 마침내 유더와 다시 마주할 때가 되었다.

“재미있었어?”

“어, 새로 사귄 영애들도 좋은 사람들이었어.”

적당히 답한 코델리아는 유더의 손을 슬쩍 바라보았고, 유더는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코델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코델리아는 깨달았다.

에스코트를 위한 손잡기.

여자 쪽이 손을 가볍게 들면 남자가 여자의 손을 받치듯 가볍게 들어올린다.

즉, 한 마디로 말해.

‘에스코트식으로는 깍지를 못 끼잖아!’

이게 뭐야. 이게 뭐냐구.

얼마나 기대했는데!

아니, 그리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냥 해볼까? 한 정도지만 아무튼!

[코델리아? 무슨 문제라도 있어?]

바로 그 순간 유더의 메시지 마법이 날아왔고, 코델리아는 잠시 끙끙 앓더니 이내 휙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손깍지 껴보고 싶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눈 보면 다 읽어낼 거구.’

그러니 그냥 고개를 돌려버리자.

[아무 것도 아니야. 빨리 가자.]

[코델리아?]

하지만 코델리아는 더 이상 답하지 않았고, 유더는 심란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

혹시 실수라도 한 건가?

그냥 평소처럼 한 건데. 딱히 이상할 건 없었는데.

[안 가?]

[어, 갈게. 가야지.]

살짝 퉁명스러운 느낌의 메시지를 받은 유더는 얼른 답한 뒤 일단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30분 남짓.

여전히 살짝 토라진 느낌을 팍팍 풍기는 코델리아 때문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유더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전개를 맞이하였다.

“왔구나.”

게일과 아델리아.

게일은 평소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반면 아델리아는 눈밑에 다크 서클이 어린 것이 무척 피곤해 보였다.

‘역시, 바빠진 건가.’

코델리아의 활약 덕분에 검은 달의 계획이 왕도 전역에 알려 졌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건국 기념회 때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왕도 경비대는 검은 달을 확실하게 조지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발견된 새로운 증거들 덕분에 사태는 나날이 커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근위마법병단도 결국엔 왕도의 치안을 위해 존재하니까.’

자연 왕도 경비대와 함께 바빠진 근위마법병단이었고, 아델리아는 그런 근위마법병단의 단장들 가운데 하나였으니 과로를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다.

“힘드러, 힘드러······ 벌써 며칠 째 밤샘이야.”

작게 중얼거린 아델리아는 그대로 게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코델리아는 그런 두 사람의 머리와 어깨 대신 손에 시선을 주었다.

보란 듯이 손깍지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깍지.’

꽉 맞물린 두 손.

[코델리아.]

손깍지.

[코델리아.]

딱히 해보고 싶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냥 위장을 위해.

[코델리아?]

“어?!”

세 번째 부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코델리아가 깜짝 놀라 되묻자 유더는 얼른 다시 메시지 마법을 보냈다.

[괜찮아? 다과회 때 진짜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냐?]

[아냐, 아무 일도. 그보다 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좀 있어서. 정확히는 부탁하고 싶은 거라고 해야 하나?]

[응?]

부탁?

무슨 부탁?

유더는 일단 코델리아를 데리고 방으로 향한 뒤 마주 앉아 다시 메시지 마법을 보냈다.

[요 닷새 동안 너도 느꼈겠지만 원작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

야만족의 북부 대침공을 조기에 저지한 덕분에 본래는 건국기념회에 참여하지 않았을 귀족들이 대거 왕도에 오게 되었다.

바이엘 백작과 체이스 백작.

북부사강에 속하는 강자들.

[로그 마스터의 활약 덕분에 바뀌게 된 것들도 많아.]

호국공의 입지가 조금이지만 줄어들었고, 그의 손발이 될 귀족들 가운데 적잖은 수가 이번 건국 기념회에서 손을 떼야만 했다.

여기에 더해진 것이 검은 달의 어려움.

이번 일 하나로 검은 달이 망하거나 몰락하지는 않을 터였지만, 적어도 본래 계획했던 테러를 그대로 속행하는 것은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역사를 많이 비틀었어. 그러니 그 리스크 역시 감수해야만 해.]

상황이 바뀌었다.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가 아는 원작과는 이제 너무나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적들의 대응 역시 달라지리라.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어. 하지만··· 계산만으로 부족할 때가 있으니까.]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직감.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것.

[코델리아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아니, 적들이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 거 같아?

코델리아의 천재적인 전투 감각은 전투 중에 발동하는 것이었다.

분위기, 호흡, 눈빛 등등 모든 변수들로부터 의식하지 않고 단서를 모아 전장의 흐름을 간파하는 능력.

때문에 아직 전투가 시작되지 않은 지금은 그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 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코델리아의 맹수와 같은 직감이라면.

“나는······.”

코델리아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고,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계산과 코델리아의 직감을 하나로 모아 보다 명확한 계획을 만들었다.

&

< 제67장 - 폭풍전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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