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7장 - 폭풍전야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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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기념 무도회까지 닷새하고 한나절.
유더와 코델리아의 작위 수여를 축하해주기 위해 행사장에 방문한 루카스는 어느 순간 부드럽게 웃었다.
반가운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스칼렛 양?”
“에?”
부름에 돌아온 것은 깜짝 놀랐다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척을 죽이고 숨어있던 와중이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알아본 걸까.
아니, 알아보는 것이 당연한가.
유더와 코델리아에 묻혀서 그렇지 이쪽도 나름 북부의 기린아였으니까.
앞의 두 사람이 워낙 압도적이라 그렇지, 루카스 역시 또래 중에서는 손에 꼽을- 그것도 세일룬 왕국 한정이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손에 꼽을 강자였으니 말이다.
‘더욱이 뭐··· 내가 아예 안 꾸민 것도 아니고.’
메이드나 집사 같은 사용인이 아니라 행사에 참가한 영애로 분장한 상태였으니까.
날파리처럼 꼬여드는 사내놈들을 쳐내기 위해 기척을 숨기고 있던 것뿐이니, 기감이 날카로운 루카스라면 자신을 찾아낼 만도 했다.
“유더 공자와 코델리아 공녀를 축하하기 위해 오셨군요?”
“뭐··· 그런 셈이죠. 일단은 아는 사이니까요.”
괜히 한 번 튕기듯 말한 스칼렛은 도도한 표정을 유지했고, 루카스는 다시 미소지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제 친구들인 북부의 귀족들을 소개시켜드리겠습니다.”
“제의는 감사하지만 죄송해요. 지금은 좀 조용히 있고 싶어서요.”
살짝 무례할 수도 있는 대답이었지만 루카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입을 꾹 다문 채 정면만 보았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 걸까.
튕겼다고 화내는 건가?
스칼렛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시선을 보내자 루카스는 해맑은 얼굴로 웃으며 작게 답했다.
“그··· 조용히 있고 싶다고 하셔서.”
“아··· 네.”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이었는데 그걸 그렇게 해석을 하네.
이게 소위 말하는 천연이라는 걸까?
‘그냥 눈치가 없는 거겠지만.’
그래도 생긴 게 잘생겨서 그런지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순진하니 귀엽기도 하고.
‘대형견 같다고 해야 하나.’
핑크폭탄 그 계집애는 개냥이고.
도도한 고양이인척 하지만 실상은 강아지였으니까.
‘블랙망토는 속이 시커먼 여우일려나.’
새삼 시작된 연상들이 꽤 재미있었지만 스칼렛은 금방 정신을 수습했다.
행사장에 흐르던 음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슬슬 시작할 것 같네요.”
스칼렛이 말하자 루카스는 얼른 무대를 돌아보았고, 스칼렛은 결국 소리죽인 웃음이나마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루카스가 정말로 대형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꼬리가 없나 저도 모르게 엉덩이 쪽을 쳐다볼 정도로.
“스칼렛 양?”
“아뇨, 아무 것도.”
스칼렛의 도도하면서도 우아한- 그리고 아까보다 좀 더 솔직해진 미소에 루카스는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이내 다시 무대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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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검은 창가에 서서 무대를 바라보았다.
젊고 잘생긴, 거기다 자그마치 검성이기까지 한 그를 흠모하는 여인들이 몇이나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유들유들한 얼굴로 응대하는가 싶다가도 몇 마디 나눈 뒤에는 여인들을 밀어냈다.
평소 검만큼이나 술과 여자 역시 좋아하는 그였지만, 오늘은 향락적인 것들과 다소 거리를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드문 일이네.”
술과 여자를 멀리하고 싶어진 스스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제일검의 시야에 두 사람이 들어왔다.
하나는 호국공이라 불리는 안타리우스 공작.
다른 하나는 검장 바이엘 백작.
두 사람 모두 제일검 자신과 마찬가지로 십검호에 속하는 검의 달인들.
‘여전히 강해.’
십검호였으니까.
세일룬 왕국의 수많은 검사들의 정점에 도달해 있는 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호국공은 늙었고, 바이엘 백작 역시 나이를 먹고 있었다.
육체에 노화에 따른 피할 수 없는 기량의 저하.
과거 제국과 전쟁을 하던 시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호국공.
‘뭐, 여전히 검호이긴 하지만.’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표현은 너무 과하리라.
그는 한때 세일룬 왕국을 대표하던 검호였고, 지금 역시 상당한 기량을 갖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검장 바이엘 백작.’
사십대 후반이지만 절정의 고수답게 외양은 그보다 훨씬 젊었다.
애당초 워낙에 잘생긴 양반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의 검은 어떨까.
게일을 통해 견식해본 바이엘 백작가의 검은 말 그대로 바람이었는데.
자유롭고 또 자유로운, 그렇기에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바람.
‘음, 역시. 제일 좋아하는 건 검인가.’
술도 좋고 여자도 좋지만 역시나 검.
검문에서 나고 자란 첫 번째 검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날 때부터 검을 보았고, 이날 이때까지 매일 검을 휘두르고 살았으니까.
‘질리지도 않는단 말이지.’
강자를 보면 겨루고 싶고, 자신의 검을 갈고 닦아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
조금 더 높이.
조금 더 강하게.
‘란디우스나 카마엘과도 한 번쯤은 겨루고 싶단 말이지.’
철인과 검귀.
파라곤 왕국의 영웅들인 동시에 세계 최강의 검사라 불리는 두 사람.
그 둘은 어떤 검을 사용할까.
과연 제일검 자신에 비해 얼마나 강한 것일까.
아니, 과연 제일검 자신보다 강하긴 한 것일까?
‘아, 시작한다.’
빙긋빙긋 웃으며 상상을 이어가던 제일검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그대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음악의 변화.
좌중의 침묵.
‘그리고.’
주인공의 등장.
황금빛 드레스를 입은 다프네 왕녀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박수갈채가 터졌고, 제일검은 가볍게 손뼉을 치며 무대 아래를 보았다.
잔뜩 흥분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는 하얀 드레스 차림의 코델리아와 그 옆에서 담담한 척을 하고 있는 유더.
“귀엽네.”
제일검은 작게 말했고, 마치 그 말이 신호라도 되듯 행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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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러. 저 나이에 남작이라니. 좀 더 경험을 쌓아야지.”
“그래서 싫은가?”
체이스 백작의 말에 바이엘 백작이 가볍게 물었고, 체이스 백작은 언제나와 같은 반응을 보여주었다.
“흠.”
“솔직하지 못 한 양반 같으니.”
작게 웃은 바이엘 백작은 무대를 바라보았다.
왕도의 보석이라 불리는 다프네 왕녀가 젊은 여인 하나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고 있었다.
“이제 곧이군.”
“흥, 이제 겨우 남작위일 뿐이네. 그래도 자작 정도는 받아야지.”
“아까는 남작위도 너무 이르다며.”
“현재에 안주하면 안 된다는 거네.”
“하여간 참 어려운 성격이야. 그냥 기뻐하지 그러나.”
“흥, 어림도 없지.”
코웃음을 체이스 백작이었지만, 역시나 그의 손은 솔직했다. 영상 기록을 위한 마석을 손에 꼭 쥐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거 소리도 기록되나?”
“당연하지. 그러니 조용히 하게. 잡음 들어가니까.”
체이스 백작의 타박에 바이엘 백작은 웃으며 침묵했고, 체이스 백작은 마법을 발동시켰다.
무대 위에 오르는 유더와 코델리아.
두 사람의 모습.
‘감개무량하구나.’
불과 일년 전만 하더라도 바깥출입도 잘 못하던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저렇게 건강해져서 커다란 공까지 세우다니.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힌 바이엘 백작은 체이스 백작을 슬쩍 돌아보았고,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언제나 솔직하지 못 한 친구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달랐기 때문이다.
‘사람하고는.’
평소에도 그렇게 웃으면 얼마나 좋아.
체이스 백작의 얼굴에 그려진 환한 미소.
바이엘 백작은 못 본 척 무대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고, 체이스 백작은 영상 기록에 집중하고 또 집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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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더 바이엘, 코델리아 체이스. 세일룬 왕국을 위해 큰 공을 세운 두 사람에게 왕국을 대표하여 남작위를 수여하는 바이니, 그대들은 지금 이시간부로 세일룬 왕국의 남작이다.”
아직 왕세녀이지만, 위엄 하나는 실로 사자의 여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다프네 왕녀였다.
엄숙히 선언하며 검을 들어 올리자 유더와 코델리아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얌전히 고개를 숙였고, 이내 다프네 왕녀의 검이 두 사람의 어깨를 가벼이 두드렸다.
바이엘 남작과 체이스 남작.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자력으로 남작위를 얻어낸 1대 남작들.
코델리아는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이내 결국 그냥 웃기로 마음먹었다.
너무나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작위 때문만이 아니야.’
야생의 땅에서의 공을 모두가 알아줬기 때문만도 아니야.
가슴을 채우는 벅찬 감정의 정체.
얼굴 가득 만족감이 떠오르는 이유.
‘바꿨어.’
코델리아 자신과 유더가.
본래라면 지금쯤 야만족의 북부 공습이 시작되었을 터였으니까.
바이엘 백작과 체이스 백작은 급히 북부로 돌아갔을 터였고, 스펜서 공작 역시 와병 중이라 일어나지 못 했을 터였다.
제일검도 이곳에 없었으리라.
게일과 아델리아가 맺어지는 일도 없었을 터이고 말이다.
그리고 스칼렛과 루카스.
코델리아 자신까지도.
‘더 바꿀 거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완벽한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도록.
코델리아가 슬쩍 유더를 돌아보았고, 유더 역시 그런 코델리아를 보았다.
거짓말처럼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미소를 머금었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완벽한 해피엔딩을 위해.’
유더가 눈빛으로 말했고, 코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다프네 왕녀를 마주하였다.
“축하한다, 바이엘 남작, 체이스 남작.”
다프네 왕녀가 친근한 미소와 함께 말했고, 사방에서 다시 한 번 박수 갈채가 터져나왔다.
누가 뭐래도 부정할 수 없는, 오늘 하루 중 제일 커다란 박수 갈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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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기념 무도회까지 나흘.
푸른 달을 비롯한 군소 길드들의 검은 달 공격이 본격화되었다.
왕도 경비대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조직이 반토막난 상태였던 검은 달은 연이은 파상 공세에 적극적으로 반격하지 못 했고, 결국 전황은 일방적으로 때리는 푸른 달과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검은 달이라는 구조로 재편되었다.
“역시 핑크폭탄 님한테 걸길 잘했지?”
“딱히 우리가 걸었다기 보다는 선택을 받은 거지만요.”
“흐흐, 아무렴 어떨까. 아무튼 이기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겠지. 그래서 반지는 언제 받아줄 거야?”
“이번 싸움이 끝나면?”
“오, 진짜로?”
푸른 달의 길드 마스터 주페는 히죽 웃었고, 재니퍼는 언제나와 같은 포커 페이스로 일관하는 대신 작은 미소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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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기념 무도회까지 사흘.
솔루지아는 코로스와 나란히 서서 바라보았다.
악마의 손 북부 지부와 중앙 지부의 전력.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병력들.
“한 건 해보자고. 소니.”
코로스가 말했고, 솔루지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건국 기념회.
솔루지아 자신과 코로스의 운명이 결정될 하루.
그리고 이 순간 떠오르는 두 사람의 이름.
‘유더 바이엘.’
그리고 코델리아 체이스.
솔루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왕도를 향해 사나운 시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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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기념 무도회까지 이틀.
호국공은 성벽 위에 서서 왕궁을 바라보았다.
제일검은 연무장 위에 서서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다프네 왕녀는 디온 왕자와 밀담을 나누다 시선을 돌렸다. 해맑은 얼굴로 승마를 배우는 다리안 왕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루카스와 스칼렛이 길거리에서 마주쳤다.
몇 번이나 반복된 우연한 만남에 루카스는 빌트바인 영웅전에서 주인공 빌트바인과 여주인공 엘레나가 약속도 없이 세 번이나 우연히 만났던 일을 떠올렸고, 스칼렛은 초대 로그 마스터와 그 연인이었던 바네사의 우연한 만남을 떠올렸다.
바이엘 백작은 검을 보았다.
가만히 바라보다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체이스 백작은 영상을 반복해서 시청했고, 문득 유더의 구두가 살짝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좀 더 색이 진하고 가죽이 좋은 구두··· 메모.’
유더와 게일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찬 수첩에 한 줄을 추가한 체이스 백작은 다시 영상에 집중했다.
그리고 다시 하루.
건국 기념 무도회 전날.
“이곳이 세일룬 왕국의 왕도.”
황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태양과도 같은 금발을 길게 기른 청년이 언덕 위에 서서 왕도를 바라보았다.
훤칠한 키와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잘생긴 얼굴.
하얀 얼굴 사이에 자리한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
청년의 이름은 막시밀리언 데 아비스.
영웅전기2의 진주인공이라 불리는 남자.
제일검이 인정한 제국의 괴물.
막시밀리언은 숨을 깊이 삼킨 뒤 허리춤에 찬 검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가슴의 두근거림을 느끼며 왕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 제67장 - 폭풍전야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