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186화 (186/473)

< 제68장 - 건국 기념 무도회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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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누구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유더와 코델리아가 춤추었다.

음악이 없었기에 어떤 곡을 추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애당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눈빛만 마주하여도 서로의 속내를 알 수 있는 두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가볍게 한 걸음.

형식을 지키기 보다는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한 춤사위.

넋을 놓고 바라보던 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침묵이 그러했던 것처럼 감탄과 기쁨 역시 빠르게 번져나갔다.

그리고 다시 음악이 더해졌다.

사람들이 물러나 자리를 만들어주었고, 음유시인은 노래하는 대신 눈앞의 광경을 뇌리에 담기 위해 노력하였다.

바이엘 백작이 웃었다.

체이스 백작은 서둘러 품을 뒤졌다. 영상 기록용 마석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서로를 보았다.

어느새 주변의 시선도 잊고 서로에게만 집중하였다.

자꾸만 번지는 미소를 굳이 억누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이네?’

‘뭐가?’

‘이렇게 춤추는 거.’

‘랑게스트 때는 타이밍이 안 좋았으니까.’

북부12가문 자제들의 친목회 때.

분명 무도회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춤을 출 새도 없이 공격을 받고 말았다.

‘엠마 생일 때는 춤을 출 분위기가 아니었고.’

‘확실히 그랬지.’

코델리아 때문에 완전히 초토화가 되었으니까.

‘사실 지금도 아니지 않을까?’

늦어도 몇 시간 뒤에는 왕도에 큰 일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그럴지도. 하지만 인상 쓰고 있는다고 달라질 건 없잖아?’

‘그것도 그러네.’

피식 웃은 코델리아는 조금 더 유더에게 몸을 기댔다. 허리를 안은 팔이 무척이나 단단해 의지가 되었다.

‘바이엘 가문 유더 씨.’

‘왜요, 체이스 가문 코델리아 씨.’

장난스러운 응대에 킥킥 웃은 코델리아는 다시 유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 춤 좀 춘다?’

‘천무지체니까.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한다고 하지 않았나?’

‘잘났어요 아주.’

하루라도 자랑질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지?

하지만 밉지 않았다. 미워할 수 없었다.

코델리아는 슬쩍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보았다.

갑자기 얼굴을 마주하기 민망해서가 아니었다.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불과 몇 분 전.

유더가 자신을 향해 돌아섰을 때.

‘흥흥, 아주 넋이 나갔더라?’

입까지 멍하니 벌려서는. 어떻게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놨어야 하는데.

천하의 유더가 그런 바보 같은 얼굴을 할 줄이야.

‘그리고······.’

그런 얼굴을 하게 된 이유가 코델리아 자신 때문이라니.

이상하게 얼굴이 빨개졌다.

부끄러운 짓을 한 건 유더인데 왜 코델리아 자신의 뺨이 달아오르는 것일까.

살짝 입술을 움츠린 코델리아는 슬쩍 시선을 돌려 다시 유더를 보았다. 초록색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도망이라도 치듯 파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 다시 다른 곳을 보았다.

“흥흥흥.”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알 수 없었다.

아니, 당장은 알고 싶지 않았다.

‘단단하네.’

유더의 팔.

아니, 유더의 품.

야생의 땅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듬직하게 변한 것일까.

‘키도 많이 컸구.’

이렇게 정면에서 마주하니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코델리아 자신이 쏙하고 들어갈 정도로 크고 넉넉해진 유더의 품을 말이다.

‘손도 커다래.’

손가락도 길고.

손바닥 마주 대면 막 마디 하나 이상 차이날 것 같아.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고, 그 순간 유더 역시 손을 움직였다.

마주한 두 손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마치 톱니가 맞물리듯 제자리를 찾았다.

서로의 손가락 사이.

그 뒤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마치 처음부터 이래야 했던 것처럼 서로의 틈을 파고들어 하나가 되었다.

손깍지.

평소보다 훨씬 더 꽉 맞물린 서로의 손.

코델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릴 것만 같아서였다.

왜일까.

이게 뭐라고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일까.

‘기분 이상해.’

평범하게 손을 잡을 때랑은 너무 달랐다.

코델리아 자신이 유더를 구속하고, 유더가 다시 코델리아 자신을 구속하는 느낌.

하지만 그렇게 서로를 구속한다는 느낌이 좋았다.

답답하기는 커녕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 빨개졌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으니까. 뺨이 뜨겁게 달아오른 게 느껴졌으니까.

코델리아는 다시 슬쩍 눈동자를 굴려 유더를 보았고, 재차 입술을 깨물었다. 최선을 다해 웃음을 억눌렀지만, 그래도 결국엔 환하게 웃고 말았다.

유더의 얼굴이 빨갰으니까.

아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으니까.

‘신난다, 신나.’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유더가.

수치심이라는 것과는 어린 시절 생이별한 게 아닐까 싶은, 사랑한다느니, 소중하다느니 남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던 그 유더가.

잔뜩 빨개진 얼굴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귓불까지 빨개진 거 보라지.

‘우흥흥.’

이 기분은 뭐라고 해야 할까.

성취감?

만족감?

업적 따낸 기분?

어때, 너도 부끄럽지? 얼굴 막 빨개지니까 내 마음을 알겠지?

‘야, 너도 완전 빨갛거든?’

‘유치하게 왜 이래. 얼굴 빨개져서 부끄러워요?’

‘너도 빨갛다니까?’

‘응응, 나야 뭐 평소에도 자주 빨개지니까. 근데 넌 아니잖아? 응?’

코델리아는 요망하게 웃었고, 유더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해맑게 웃는 코델리아가 너무나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유더와 코델리아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즉흥으로 시작한 춤사위였지만 둘 모두 몸 쓰는 게 특기다보니 어느새 박자를 맞추게 된 뒤 오래였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알 수 있었다.

이제 곧 곡이 끝난다는 사실을.

두 사람의 춤 역시 마무리 지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때문에 코델리아는 눈을 감는 대신 유더를 보았다.

유더 역시 코델리아를 마주하였다.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는 대신 그저 서로의 눈을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찾아온 종막.

유더와 코델리아의 발이 멈추었고, 차오른 숨이 토해졌다.

하지만 둘 모두 깍지 낀 손을 쉬이 풀지 못 했다. 아쉬움을 표하듯 그저 꼼지락 거릴 뿐이었다.

가능하면 이대로 계속.

하지만 무리라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끝나버린 음악의 빈자리를 채우듯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대연회장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12시가 되어버렸네.’

피식 웃은 코델리아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그대로 유더의 품을 빠져나왔다. 깍지 꼈던 손으로 치맛단을 살짝 들어 올리며 모두에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다시 터진 박수 소리와, 새로이 시작된 음악.

탄력을 받아 춤추기 시작한 여러 사람들.

“후아.”

대연회장의 발코니.

잠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커튼 뒤에 숨은 코델리아는 몇 번이나 숨을 골랐다.

“이제 좀 살겠네.”

찬바람 쐬니까.

얼굴도 좀 진정되는 거 같고.

지친 듯 헐떡이던 코델리아는 유더를 돌아보았고, 이내 다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유더 역시 코델리아 자신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빨간데다 숨까지 헐떡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후후훗. 이겼당.”

“아니, 아까부터 자꾸 뭘 이겼다는 건데?”

“이겼다, 이겼어. 내가 이겼어. 내가 이겼다구?”

히히 웃은 코델리아는 발코니 난간에 두 팔을 얹고 다시 웃음을 흘렸다.

“하, 지친다.”

“괜찮아? 포션이라도 줄까?”

“됐거든요? 그러는 너는?”

“나야 생명의 구까지 흡수했으니까. 가만있어도 HP랑 스테미너가 팍팍 차오른다 이 말씀이지.”

“그래, 좋겠다. 캡틴 아메리카라 좋겠어. 아주 하루 종일도 하시겠어요?”

“춤추는 정도야 몇날 며칠도 할 수 있을 걸?”

“으휴, 자랑도 1절만이지 뇌절치는 것 좀 봐.”

코델리아가 끌끌끌 혀를 차자 머쓱해진 유더는 흠흠 헛기침을 토했다.

“아무튼 그래서 괜찮아?”

“어, 괜찮아.”

“찬바람 쐬면 안 되는 거 아냐? 그거 엄청 얇아 보이는데. 어깨도 다 드러나고. 감기 걸릴라.”

유더가 하늘하늘한 요정의 드레스를 보며 말하자 코델리아는 송곳니를 빛내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아, 이게 성능이 얼마나 좋은데. 거기다 잊었어? 겨울의 가호 있는 거?”

“하긴. 그래도 보기에 추우니까 뭐라도 좀 걸치자.”

그렇게 말한 유더는 상의를 벗어 코델리아의 어깨에 걸쳐주었고, 코델리아는 다시 입술을 움츠렸다.

‘이게 아닌데.’

본래는 오올~하면서 장난을 칠 생각이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쩐지 모르게 입술이 꾹 닫히고 말았다.

‘유더 냄새.’

물론 따지고 보면 그냥 땀 냄새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래도 유더 냄새.

코델리아가 코를 살짝 실룩거리자 유더는 눈에 띄게 당황하더니 축 늘어진 상의 소매를 당겨 냄새를 맡았다.

“그··· 혹시 냄새나?”

“응, 나. 많이 나. 엄~청 많이 나.”

자타공인 짐승인 코델리아의 말에 유더는 다시 상의를 회수하려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코델리아는 두 손으로 상의를 사수한 뒤 다시 흥흥 거렸다.

“어딜 줬던 걸 뺏으려구 그래.”

“냄새 난다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그거랑 이게 뭔데?”

“글쎄?”

얼굴이 하도 빨개져서 그런가, 정신줄을 살짝 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든 코델리아였지만,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무튼 신난다.”

“나도 신나. 이제 세상 모두가 알겠지. 코델리아의 미모를.”

“아휴, 진짜. 야, 내 미모거든? 네 미모가 아니라?”

“에헤이, 왜 이러실까. 다 아시는 분이.”

“뭘 알아요? 코델리아는 하나도 모르겠어요.”

옆에서 누가 보았다면 아주 지랄을 한다며 죽창을 꺼내들었을 광경이었지만, 이 자리에는 두 사람 뿐이었고, 두 사람 모두가 유치한 말장난에 만족하고 있으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 유더야. 생각해보니 이거 좀 문제 되지 않을까?”

“뭐가?”

“아니, 그··· 엠마 생일 때 내가 너무 튀었잖아?”

“그랬지.”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오늘은··· 우리 세일룬 왕국의 생일이잖아?”

“그런데?”

“그럼 그··· 왕족들이 주인공 아냐?”

제법 그럴싸한 논리 전개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너야 옷 갈아입느라 몰랐겠지만··· 너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다프네 왕세녀가 개회식도 하고 사실상 주인공 역할이었거든.”

“역시 그랬구나. 그럴 것 같··· 잠깐, 뭐라고? 다프네 왕녀가 주인공이었다고?”

“어, 1왕비 전하가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고 계시긴 하지만 그래도 미혼에 한창 때인 다프네 왕녀가 연회의 주인공이 되는 게 당연하잖아? 차기 국왕 자리가 확정된 왕세녀이기도 하고.”

정론.

하지만 그렇기에 코델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야, 이 미친놈아! 그걸 아는 놈이 그래? 어?”

이제 어떡할 거야!

다프네 왕녀가 화내면 어떡할 거냐구!

코델리아가 주먹으로 어깨며 가슴을 마구 때리자 유더는 아픈 시늉도 하지 않고 답했다.

“괜찮아, 생일이랑은 좀 의미가 다르니까. 이게 무슨 결혼식도 아니고. 거기다 넌 타국 사람이 아니라 세일룬 왕국 사람이잖아? 문제 될 게 뭐가 있겠어.”

“진짜루?”

“어, 진짜루.”

“책임질 수 있고?”

“물론이지요, 공주님. 제가 꼭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흐응. 좋아, 그럼 용서해 줄게.”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유더는 연극풍으로 답했고, 코델리아는 별꼴이라며 비난하면서도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 보니······.’

손깍지.

새삼 손가락을 꼼지락 거린 코델리아는 살포시 웃었다.

‘나중에 다시 해 봐야지.’

오늘 말고 나중에.

사실 지금도 좀 하고 싶지만 그래도 나중에.

‘아니지. 그냥 지금 해볼까?’

까짓 거 뭐 별거라고.

해보니까 대단할 것도 없더만.

스스로에게 허세를 부린 코델리아는 다시 슬쩍 유더를 돌아보았고, 살며시 유더 쪽으로 손을 내밀어 보았다.

그리고 그 동작에 속이 까만 유더가 조금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을 때.

코델리아가 돌연 고개를 들었다.

거칠게 손을 뻗어 유더의 멱살을 잡더니 자신 쪽으로 당기며 소리쳤다.

“쉴드!”

반투명한 막.

그리고 그 순간 유더 또한 깨달았다.

아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빛.

그리고 폭발.

엄청난 굉음과 함께 대연회장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

< 제68장 - 건국 기념 무도회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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