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8장 - 건국 기념 무도회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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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것일까.
어째서 제일검이 호국공의 편을 드는 것일까.
원작의 제일검.
그는 왕도에 있지 않았다.
애당초 검의 연회 자체가 열리지 않았기에 왕도에서 몇 가지 용무만 본 뒤 다시 검문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후의 행적.
크게 엮일 일이 없었다.
그는 다프네 왕녀나 디온 왕자가 그런 것처럼 배경설정에 가까운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세일룬 왕국이 사실상 몰락하고, 7대 재앙 가운데 하나인 학살자 게오르그에게 검문이 멸문당할 때 그 역시 목숨을 잃었다- 정도가 알려진 전부였다.
아무리 썩은물인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라 할지라도 원작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들까지는 알 방도가 없었으니까.
레나가 어째서 죽었는지, 지금 이 시기에 벨키안과 프란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지 못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상상조차 하지 못 했다.
원작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 제일검의 행적이 비록 짧다하나 크게 이상한 점은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배신의 이유.’
그 정도 되는 검사가 악마 추종자들 쪽으로 돌아선 이유.
호국공이 배신한 이유는 알고 있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정확히는 살아서 더 오랜 시간을 누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는 썩어문드러진 육신을 가진 언데드 따위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전성기 때의 육신을 되찾고자 하였고, 그런 그의 바람을 이뤄줄 방법은 그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마인화.’
악마와 하나가 되는 것.
그로써 인간을 초월한 불로장생의 존재가 되는 것.
호국공은 평범한 악마가 아닌, 자신의 존재를 저 높은 곳까지 끌어올려줄 대악마와의 합일을 원했고, 악마의 손은 그 대가로 왕족들을 몰살할 것을 요구했다.
유더는 호국공을 이해했다.
그의 생각에 공감한다기보다는, 그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 어째서 그것이 평생 지켜온 나라를 배신할 정도의 동기가 되었는지를 이성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약육강식으로 축약 가능한 호국공의 성장배경.
그로인해 형성된 그의 성격.
삶에 대한 집착.
한때는 강건하였으나 지금은 쇠락하여 십검호 가운데 최약이라 평가받는 처지 등등.
하지만 제일검은 달랐다.
그는 아직 젊었다.
전생의 자신보다도 나이가 많은 그를 어리다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어찌되었든 벌써부터 늙어 죽는 것을 두려워 해 나라를 배신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였다.
대체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는 세일룬 왕국을 배신한 것일까.
막시밀리언과 레온의 재능을 보고 왕국에도 그런 인재가 필요하다며 걱정까지 하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가능성은 두 가지.’
하나는 지난 반년 간의 나비효과로 인해 제일검이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을 경우.
하지만 가능성은 낮았다.
그보다는 다른 쪽의 경우가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애당초 원작에서도 그가 악마 추종자들과 연관된 자일 가능성.
십검호들 가운데는 세일룬 왕국 몰락 이후 악마 추종자들 편으로 돌아선 자들이 몇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과거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으로 자신을 칭하였다.
제일검 역시 그런 경우라면.
검문을 지키다 죽었다는 것은 날조이고, 그날을 경계로 다른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라면.
‘당장은 중요하지 않아.’
한 호흡.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는 조금 더 길지도 모를 시간.
수많은 생각들을 동시 다발적으로 펼치던 유더는 그것을 길게 이어가지 않았다.
“소용없어.”
코델리아가 말했고, 유더는 동의했다.
제일검이 배신한 이유.
제일검과 악마 추종자들 간의 관계.
그것들을 알아내면 제일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은 제안을 해 그의 검이 다시 호국공을 향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무리였다.
지금의 제일검을 보면 유더 자신도 알 수 있었다.
제일검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눈앞에 둔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맡기겠다.”
호국공이 돌아서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더와 코델리아는 물론이고 제일검 역시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앞의 두 사람은 잠시도 방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뒤의 한 사람은 호국공보다는 눈앞의 일에 더 관심이 쏠렸기 때문이다.
“본래는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었단 말이지.”
제일검 자신과 호국공.
과연 동료일까? 제대로 된 동료라 할 수 있는 관계일까?
제일검은 호국공의 계획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호국공도 자존심 때문인지 딱히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악마의 손 역시 강하게는 요구하지 않았다. 제일검과 악마의 손이 나눈 계약은 따로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계속 얌전히 제일검으로 살려고 했는데 말이지.’
세일룬 왕국.
세일룬 왕가.
애당초 제일검은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다른 십검호들과 달리 그는 왕실의 기사가 아닌 검문의 첫 번째 검이었으니 말이다.
‘콘웰은 좀 오해를 하는 것 같지만.’
제국에서 느낀 바를 말해주었더니 제멋대로 왕국에 대한 충정이라 오해를 하였지.
꽤 그럴싸한 오해라 여기저기서 유용하게 활용하기는 했지만.
‘당장 저 아이들에게도.’
진지한 얼굴로 왕국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그대로 믿어준 착한 아이들.
킥킥 웃은 제일검은 다시 유더와 코델리아를 보았다.
열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검의 연회.
그곳에서 마주한 두 사람.
막시밀리언과 레온으로 인해 시작된 생각을 더욱 증폭시킨 아이들.
“유더, 너도 알고 있지? 내가 너랑 코델리아를 좋아한다는 거.”
진심이었다.
제일검은 두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 때문에 왕도에 남았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한 번 보고 싶었으니까.
이 아이들이 무슨 일을 할지.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무도회도 보고 싶었고 말이지.’
그리고 결과는 대만족.
코델리아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두 사람의 풋풋한 사랑은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깨트리고 싶을 정도로.’
새하얀 눈밭을 더럽히고 싶은 욕구와 마찬가지로.
유린하고 싶다.
더럽히고 싶다.
짓밟고 싶다.
‘그래, 이걸 바랐던 거겠지.’
이렇게 적으로서 대면하는 순간을.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갖고 싶었으니까.
두 사람을 마구 유린해주고 싶었으니까.
“죽이진 않을게.”
너희가 좋으니까.
너희를 여기서 죽이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니까.
코델리아는 평소처럼 욕지거리를 토하지 않았다.
유더 또한 달려들거나 도망치는 대신 입을 열어 말을 받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계신 건가요?”
왕족이 모두 죽으면.
그로 인해 결계가 사라지고, 성검 클라우솔라스가 악마 추종자들의 손에 넘어가버리면.
“어, 알아. 대강은.”
“정말요? 정말 알고 계신 건가요? 결계는, 수호진은 단순히 색적용이 아닙니다.”
마인들의 본모습을 드러내게 하고, 사악한 기운이 방출되면 그 위치를 포착할 수 있는 결계.
악마의 힘을 억눌러 왕도에서의 악마 소환은 물론이고 마인 제조조차 저지하는 그것.
하지만 겨우 그 정도가 아니었다.
제대로 가동시킨 결계는 그 이상의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악마 추종자 녀석들도 결계를 없애려는 거겠지. 그리고 이 와중에도 존댓말이라니 역시 마음에 드는데?”
제일검은 빙긋 웃었고, 유더는 마음을 굳혔다.
더 이상 말로 시간을 버는 것은 불가능했다.
“역시 좋아.”
제일검이 말했다. 그리고 빛이 작렬했다.
소리가 없었다.
눈보다 빠른 쾌검이 그저 공간을 가를 뿐이었다.
‘다섯 수.’
검의 연회 때와 같으면서 달랐다.
그때는 단순한 시험이었고, 지금은 실전이었다.
하지만 제일검이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만은 동일했다.
죽이지 않는다.
죽이지 않는 수를 둔다.
예기가 부족해진다.
검격의 빠르기 역시 조금이지만 느려진다.
츠콱!
머리 위 공간이 갈라졌다.
공격을 피한다기 보다는 도망치듯 몸을 날린 유더는 지면에 바짝 몸을 낮춘 채 제일검을 보았다. 그의 두 번째 검이 휘둘러진 순간 지면을 박찼다.
초풍신뢰.
바람을 앞서는 번개.
하지만 제일검의 눈에는 보였다.
노련한 검사인 그는 유더의 계산된 움직임을 읽어낼 수 있었다.
더욱이 유더가 간과한 하나.
‘그래, 분명 평소보다는 못 해.’
죽이지 않기 위한 수니까.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빛의 검성이란 말이지?
펼쳐지던 검격이 순간 급격히 검로를 틀었다.
유더는 그것을 보았다. 궤적을 읽어냈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평소보다 다소 느린 것조차 빨랐으니까.
아니, 단순한 빠르기를 넘어 절대적인 기량에서 차이가 났으니까.
뺨이 베였다.
어깨 끝이 조금 잘려나갔고,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유더는 멈출 수 없었다.
시간을 끌어야 했다.
제일검의 세 번째 검이 코델리아를 향하게 둬서는 아니되었다.
다시 한 번 초풍신뢰.
하지만 늦었다.
유더가 고통에 신음한 그 순간 코델리아가 제일검을 향해 돌진했다.
삼연속 헤이스트.
마법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속도였지만 초풍신뢰조차 읽어내는 제일검이었다.
그가 검을 휘둘렀다.
유더를 상대했을 때와 마찬가지 요령으로 코델리아에게 상처를 주고자 하였다.
그리고 코델리아가 제일검의 검로를 보았다.
읽고 계산하는 과정 따위 없이, 본 순간 이해했다. 유더가 떠올리지 못 했던- 아니, 떠올리긴 했지만 실행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을 본능적으로 행했다.
‘죽이지 않아.’
그 말을 역이용한다.
코델리아는 제일검의 역량을 믿었다. 그렇기에 검로를 피해 몸을 뒤트는 대신 가장 정확한 사로에 자신의 목을 들이밀었다.
“코델리아!”
유더가 비명처럼 외쳤고, 제일검은 코델리아의 돌발행동에 당황했다. 다급히 검의 경로를 바꾸었고, 그 결과 틈을 노출하고 말았다.
그리고 코델리아는 그 순간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짐승.
야수.
본능적으로 전장의 흐름을 읽어내는 괴물.
코델리아의 새하얀 목줄기를 따라 핏물이 흘러내렸다. 코델리아가 제일검의 품에 파고들었고, 그가 미처 다음 동작을 취하기 전에 순수한 마력을 발산했다.
쾅!
제일검을 밀어낸다.
벽에 충돌시킨 뒤 계속해서 밀어붙인다.
유더가 그것을 바랐으니까.
유더가 시간을 원했으니까.
“아아아!”
더블 캐스팅, 주문의 메아리, 고속 영창.
아케이만의 비보는 사용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만들어낸 마법들을 제일검을 향해 쏟아 부었다.
“죽어!”
무리인 건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진심이었다.
그리고 유더가 몸을 날렸다. 코델리아의 허리를 낚아채듯 안은 뒤 바닥을 굴렀다.
검기.
빛의 연격이 마법들을 베었다.
방금까지 코델리아가 서 있던 장소를 순백의 빛이 가르고 지났다.
“쉴드!”
코델리아가 소리쳤고, 빛의 검격이 반투명한 막에 몰아쳤다.
막을 수 없다.
쉴드 마법 따위로 막아낼 수 있는 제일검의 검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코델리아는 소리쳤다.
아주 약간의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서.
쉴드가 갈라진다.
아주 조금이지만 검격의 예기를 둔하게 한다. 검격의 속도를 늦춘다.
그리고 그 순간 유더가 오문을 열었다.
폭발적인 내력의 방출로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다.
쾅! 쾅! 쾅!
검기가 비틀렸다. 유더가 제일검을 향해 돌진했고, 코델리아는 마법을 난사했다. 제일검의 얼굴에 순간이지만 미소가 지워졌다.
검격이 공간을 가른다.
아니, 뒤덮는다.
유더는 공격 대신 방어를 위해 흑룡의 기운을 방출했고, 구천구문 제오문은 유더에게 제일검의 검격을 막아낼 힘을 주었다.
하지만 제일검도 가만히 서서 검을 휘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검문 특유의 보법으로 유더와의 거리를 좁혔고, 예상한 유더는 주먹을 내질렀다.
진정한 의미의 뇌격권.
빠르고 강력했지만 제일검의 손이 유더의 주먹을 밀쳐냈다. 제일검은 아예 유더의 손목을 붙잡았고, 바짝 당겨 유더의 균형을 무너트렸다.
하지만 아니었다.
유더는 당겨지는 힘에 순응했다. 저항하는 대신 몸을 맡겨 제일검의 예상보다 더 빠르게, 더 깊이까지 접근하였고, 스스로의 가슴에 태양전심격을 펼쳤다.
스칼렛에게 이미 사용한 바가 있는, 본래는 갑옷 너머에 자리한 적의 육신에 직접 태양의 기운을 때려 박는 일종의 관통기.
응용하였다.
유더 자신의 가슴 너머로 태양의 힘을 방출하였다!
“큿?!”
완전한 사각에서 가해진 공격에는 제일검조차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유더의 손목을 놓음과 동시에 몸을 뒤틀어 태양전심격을 스쳐 보낸 제일검이 재차 검을 휘둘렀다.
“빛이여!”
그 순간 코델리아가 소리쳤다.
일전 유더가 사용했던 태양권과 같이 무지막지한 빛으로 제일검의 시력을 빼앗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제일검의 반응이 더 빨랐다.
그는 눈을 감음과 동시에 유더의 기척을 따라 검을 휘둘렀다.
죽이진 않는다.
하지만 팔 다리 하나 정도는 아끼지 않는다.
유더의 팔이 크게 베였다.
빗맞았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부상이었지만 유더는 고통을 토하는 대신 지면을 박차 비밀통로 쪽으로 몸을 던졌다. 코델리아가 그런 유더에게 마주 몸을 날려 공중에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제일검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요정의 발걸음으로 제일검의 검을 한 번 무효화 시킨 유더와 코델리아가 바닥에 떨어졌고, 제일검이 그런 두 사람을 향해 다시 한 번 몸을 날렸다.
그리고 유더는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산했으니까.
코델리아는 직감했으니까.
시간을 끈 이유.
하필이면 비밀통로 쪽으로 몸을 던진 이유.
그리고 하나.
제일검과 달리 미리 부탁은 물론이고 모종의 물건까지 전달할 수 있었던 상대.
제일검의 검이 튕겨져 나갔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했던 것처럼 우격다짐이 아니었다.
비밀통로 쪽에서 쏘아져 나온 검기.
연이어 불어 닥친 바람!
카캉!
검과 검이 충돌했다.
빛과 바람이 휘몰아쳤고, 제일검은 희열 속에 정면을 보았다.
마주 끌어안고 쓰러진 유더와 코델리아 앞에 버티고 선 남자를 마주하였다.
“바이엘 백작.”
십검호의 일인.
북부의 검장.
그런 그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이름.
과거의 패배 이후 스스로 반납하였지만, 한 때는 분명 그의 것이었던 칭호.
“바람의 검성.”
바이엘 백작은 굳이 말로써 답하지 않았다.
바람의 검을 보여주었다.
< 제68장 - 건국 기념 무도회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