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190화 (190/473)

< 제69장 - 격화 #2 >

&

공간을 넘는다.

그것도 평범한 페어리가 아닌 섬머 페어리 퀸이.

‘나 거기 알아!’

섬머 페어리들에게 있어 왕궁은 오랜 시간 살아온 거처인 동시에 놀이터였으니까.

섬머 페어리 퀸이 아직 여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 어린 아이 시절에 곧잘 놀러 다니던 장소 중에는 왕족들의 대피처도 있었다.

‘그때는 아직 공사 중이었는데. 이제 공사 다 끝난 거려나?’

페어리 퀸의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기억들이 밀려들어왔다.

지금도 소녀지만 더 어린, 아주 어린 소녀의 모습인 페어리 퀸과 그녀와 대화중인 한 남자.

다프네 왕녀를 닮은 얼굴이었다.

아니, 다프네 왕녀가 그를 닮았다 해야 옳을 터였다.

건국왕 라이온 D 세일룬.

이름 그대로 사자와 같은 용맹함을 갖추었다 하여 사자심왕이라고도 불리었던 자.

왕족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황금빛 머리칼을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풍성하게 기른 그가 이쪽을 보며 웃었다. 무어라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듣고 싶었다.

하지만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독순술로 보았다.

그가 하는 말.

페어리 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건국왕의 이야기.

기억이 흐려졌다.

유더는 눈을 감은 채 숨을 가다듬었다. 자꾸만 흐려지려는 정신을 붙잡고자 오른손에 온 정신을 집중하였다.

깍지 껴 마주잡은 코델리아의 손.

작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가끔씩 꼼지락 거리는 움직임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유더는 다시 숨을 토했다.

코델리아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은 뒤 눈을 떴다.

빛.

그리고 현실.

요정의 발걸음을 사용할 때만 접할 수 있는 아공간을 빠져나왔기에 마주할 수 있게 된 것.

생각 이상으로 넓었다.

마법으로 된 조명 아래 드러난 어두운 방과 그 안에 자리한 이들.

“악? 뭐야? 여기 이상해!”

섬머 페어리 퀸이 말했고, 유더는 다른 목소리들 역시 들을 수 있었다.

“언니랑 오빠?”

“유더 바이엘?”

“체이스 남작?”

다리안 왕녀와 다프네 왕세녀, 거기에 디온 왕자까지.

기다란 소파 위에 앉아 있는 것은 세 사람만이 아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국왕 헨리 2세 양 옆에는 1왕비 유스티아와 다리안 왕녀의 생모인 2왕비 헨리에타가 자리했고, 다시 2왕비 옆에 아직 어려 다프네 왕녀 또래나 됨직한 3왕비가 겁먹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누, 누구냐! 어디서 갑자기?!”

헨리 2세가 놀라 소리치자 1왕비 유스티아가 그를 진정시키듯 손으로 가볍게 어깨를 누른 뒤 유더와 코델리아를 똑바로 보았다.

과연 여걸이란 평판답게 지극히 혼란한 와중에도 명민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녀였다.

“바이엘 남작과 체이스 남작?”

본래라면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때문에 유더는 예를 표하는 대신 상황을 인식했다.

‘앞질렀어.’

호국공보다 먼저 도착했다.

그러니 이제 다음 수순을 둘 때였다.

우선적으로 페어리 퀸의 말을 확인했다.

“이상하다는 게 무슨 소리죠?”

“벽이 있어. 들어오긴 해도 나가긴 어려울 것 같아. 직접 날아가야 해.”

언뜻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유더는 바로 이해했다.

벽.

물리적인 벽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 터였다.

공간 도약이 어렵다.

공간 도약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어 들어올 순 있었지만 나갈 수는 없다.

걸어가야 할 것 같다.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수호진과 너무 가까워.’

대피처는 본궁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고, 수호진은 그보다 좀 더 아래에 위치했다.

아무리 페어리 퀸이라 해도 수호진과 이렇게 가까워서는 공간 도약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아예 불가능합니까?”

“어려워. 나 혼자는 가능해도 너희들 다 데리고는 무리야.”

“알겠습니다.”

유더는 미련을 버렸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다음 일에 착수해야만 했다.

“유더, 코델리아. 이게 무슨 일이죠?”

다프네 왕세녀가 말했고, 무시당한 1왕비 유스티아의 눈에도 약간의 노기가 어렸다.

하지만 유더는 이번에도 두 사람을 돌아보지 않았다. 완전히 외면한 채 자기 할 일만 하였다.

왕족들의 얼굴에 노기가 번졌다. 다프네 왕녀의 눈매 역시 날카로워졌고, 초조해진 코델리아가 입을 열었다.

“크, 큰일이에요! 호국공이 배신했어요! 그가 왕족들을 죽였어요.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어요!”

일단 되는대로 소리쳤지만 코델리아도 알고 있었다.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란 것을 말이다.

“그 무슨 허튼 소리냐! 호국공이 배신이라니! 왕족들을 죽였다니! 미친 것이냐!”

헨리 2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성을 토했다.

당연했다.

태어난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항상 호국공의 등을 보고 살아온 그였다.

그에게 있어 호국공은 단순한 가신이 아니었다.

믿음직한 왕국의 방패일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온 구국의 영웅이었다.

그런 그가 배신이라니. 왕족들을 죽였다니.

“고얀 것! 내 반드시 너를 엄벌에 처할 것이다!”

“아니이!”

코델리아는 발을 동동 구르며 가슴을 두드렸다.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지만 진짜로 이러니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다프네 왕세녀님! 진짜에요! 제 말을 믿어주세요!”

코델리아의 호소에 다프네 왕세녀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썹을 찡그리더니 디온 왕자를 돌아보았고, 다프네 왕세녀 곁에 꼭 달라붙어 있던 다리안 왕녀는 겁먹은 얼굴로 어른들을 돌아보았다.

“아, 씨발!”

역시 무리였다.

고작 며칠짜리 우정으로 호국공보다 코델리아 자신을 믿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헨리 2세처럼 벌을 주네 마네 설치지 않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할 판국이었다.

“네 이년! 감히 어디라고 더러운 욕을 입에 담느냐! 진정으로 죽고 싶은 것이냐!”

헨리 2세가 다시 소리쳤고, 코델리아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다고, 너 때문에 답답해 죽을 것 같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래도 왕이었다.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상황만 악화될 것이 분명했다.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작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유더!’

그래, 유더.

본래 이런 상황을 담당하는 건 유더이지 않던가.

코델리아는 약간의 원망과 기대로 날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유더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였다.

“유더야?”

지금 뭐하는 거야?

왕족들과 코델리아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유더는 아예 대화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의미 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대화가 될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승리 조건.’

왕족들을 살려 결계를 유지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그것 하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단절한다.

왕족들과 호국공을 단절하여 위험한 상황 자체를 제거한다.

코델리아가 헨리 2세와 설전을 시작했을 때 유더는 섬머 페어리 퀸이 깔고 앉은, 미리 맡겨놓았던 상자를 열었다.

필요한 장비 등을 챙긴 뒤 상자 안 공간의 팔 할 이상을 채우고 있던 물건들 가운데 일부를 꺼내 하나뿐인 입구에 척척 설치하기 시작했다.

분홍색 다이너마이트.

도폭선.

시험 개발한 유사 C4.

“유더야?”

코델리아가 유더를 돌아보았고, 코델리아에게 집중되어 있던 왕족들의 시선 역시 유더에게 향했다.

그리고 유더는 대답하는 대신 행동했다.

점화.

기초적인 불꽃 마법.

도화선이 불타올랐다.

도폭선에 불이 붙은 순간 폭발음이 울렸고, 다이너마이트들과 유사 C4가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쾅! 쾅! 쾅!

콰가가가가강!

굉음과 함께 입구가 폭발했다. 입구와 연결된 비밀통로의 일부 역시 폭발했고, 벽과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낙석들이 입구를 완전히 봉쇄했다.

길을 끊는다.

호국공이 대피처에 아예 도달할 수 없게 만든다.

유더는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모처럼의 폭발이었지만 그녀는 활짝 웃는 대신 눈을 껌벅였고, 왕과 왕족들은 다들 경악하여 무어라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여간한 일에는 꿈쩍도 않을 다프네 왕세녀와 1왕비 유스티아까지도 멍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네, 네 이놈!”

헨리 2세가 소리쳤고, 유더는 무시했다. 기계적으로 생각했다.

통로를 무너트렸지만 안심할 수 없다.

상대는 호국공.

비록 약해졌다하나 십검호에 속한 자.

무너진 통로 따위 강맹한 검격으로 뚫어버릴 수 있다.

그러니 아예 대피처를 빠져나가야 한다. 호국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만 한다.

그렇다며 어떻게.

페어리 퀸의 힘으로 왕족들을 강제로 이동시킨다는 계획은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차선으로 왕족들을 설득할 것인가?

‘아니, 그딴 건 차선이 아냐.’

다프네 왕세녀와 디온 왕자, 다리안 왕녀만이라면 설득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헨리 2세가 있었고, 왕비들 역시 있었다.

설득이 가능할지 여부는 둘째 치고, 상당한 시간을 낭비해야 할 터였다.

그러니 설득은 차선이 아니었다.

진정한 차선은 따로 있었다.

유더는 헨리 2세를 철저히 무시했다. 그가 재차 노성을 터트렸고, 1왕비 유스티아마저도 이쪽을 향해 매서운 시선을 보냈지만 담담히 해야 할 일을 수행했다.

접착물과 다이너마이트, 도폭선들을 결합한 뒤 벽과 천장을 향해 던졌다.

탁탁탁.

깔끔하고 정확하게 폭발물들이 부착되었다.

천장과 벽.

최소한의 타격만으로 대피처를 완벽히 무너트릴 수 있는 배치.

유더는 길게 늘어진 도화선들에 불을 붙였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왕족들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30초 내에 폭발할 겁니다.”

그러니 살고 싶으면 도망치시죠.

유더는 침착한 얼굴로 부드러운 미소까지 그리며 말했고, 그 광기어린 모습에 왕족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싫어어!”

연이은 사태로 인해 패닉 상태에 빠진 3왕비가 비명을 질렀다. 헨리 2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어라 소리치려 했다.

그리고 1왕비가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헨리 2세의 복부를 주먹으로 강하게 강타했다.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의식을 잃은 그를 한 팔로 안으며 명령했다.

“출구로!”

대피처에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하나는 왕궁에서 대피처로 이어진 문.

다른 하나는 대피처에서 왕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

단숨에 헨리 2세를 들쳐 업은 1왕비의 명령에 왕족 모두가 반사적으로 행동했다.

출구를 향해 서둘러 달렸다.

그리고 유더는 코델리아를 보았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유더를 보더니 예쁜 입술을 열어 말했다.

“완전 미쳤어.”

“그래서 싫어?”

“완전 좋아!”

쾌활하게 외친 그녀는 폴짝 뛰어 유더의 목을 안았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를 품에 안아들었다. 소위 말하는 공주님 안기를 한 두 사람의 모습에 활짝 웃은 섬머 페어리 퀸은 코델리아의 가슴팍에 안착했다.

그리고 일어나는 황금의 바람.

유더가 출구에 몸을 밀어 넣은 순간 코델리아는 유더의 어깨 너머로 대피처를 보았다. 아직 타들어가고 있는 도화선을 기다리는 대신 예쁘게 윙크하며 마법을 발동시켰다.

“씨발 쾅♥”

그리고 폭발.

무지막지한 굉음과 함께 대피처가 폭발했다.

&

지하에서 일어난 폭발이 본궁 전체를 뒤흔들었다.

비밀 통로에 막 몸을 밀어 넣으려던 호국공은 본능적으로 진원지가 어디인지를 깨달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호국공은 몸을 날리는 대신 두 가지를 확인했다.

결계의 유무.

그리고 다른 하나.

일이 꼬이고 있었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계획이 어긋나고 있었다.

누구의 짓인 것일까.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지체할 시간 역시 없었다.

호국공은 다시 정면을 보았다. 대피처를 향해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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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엘 백작과 제일검의 격전이 이어졌다.

루카스는 마지막 좀비의 목을 끊어낸 뒤 거친 숨을 토했고, 근위 기사들은 본궁 밖의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체이스 백작은 다시 마법을 연속해서 시전 했다. 완전히 무너지려는 본궁을 강대한 마력으로 지탱하는 한편 연속해서 돌기둥들을 솟구치게 해 무너진 벽을 대신하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저 너머에서 바이엘 백작이 격전을 펼치고 있는 것을. 유더와 코델리아가 계속해서 위급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 더.

그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왕도.’

거친 마력의 흐름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사달이 난 것은 왕궁만이 아니었다.

왕궁 밖에서도 큰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체이스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생각을 끊어내고 왕궁의 붕괴를 막는 일에만 집중했다.

서두른다.

하지만 순서를 지킨다.

체이스 백작의 입에서 새로운 마법의 주문이 쏟아져 나왔다.

&

< 제69장 - 격화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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