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191화 (191/473)

< 제69장 - 격화 #3 >

&

칼날 같은 날개가 쏟아져 내렸다.

머리 위에서 아래로.

단번에 게일의 머리를 동강낼 기세로.

아델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눈에는 도저히 막거나 피할 수 없는 일격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그렇게까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왕궁을 지키는 근위 기사들이라 한들 작금의 일격 앞에서는 꼼짝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게일은 달랐다.

그가 익힌 바람의 검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막지 않는다. 피하지 않는다.

흘려보낸다.

마치 바람처럼.

질풍이 아닌 산들바람과 같이.

순간적인 위치 변화와 손목의 움직임, 검신이 그리는 교묘한 각도, 힘을 흘려보내는 바람의 검 특유의 검기 운용.

그 모든 것이 조합되어 게일의 목숨을 구했다.

솔루지아의 공격은 게일의 몸을 가르는 대신 지면을 찍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전력을 다해 공격을 비껴낸 게일은 순간이지만 전신의 힘이 빠져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무척이나 짧은 순간이었지만 솔루지아에게는 차고도 넘칠 시간이었다.

솔루지아의 손이 움직였다.

단순히 밀어내는 것이 아닌, 게일의 가슴을 가르고 찢어발길 날카로운 수도였다.

일섬.

피가 튀었다.

이번에도 게일은 죽음을 피했지만 아델리아의 입에서 다시 한 번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게이이이이일!”

끊어져 땅에 떨어졌다. 게일의 왼팔이 뜯겨 바닥을 뒹굴었다.

아델리아가 지면을 박차며 돌진했다.

이성이 증발한 상황이었지만 그녀의 전투 경험이 정답을 내놓았다.

날개로 가르거나 부술 수 있는 마법 대신 다른 마법을 사용하게 했다.

지면이 요동쳤다.

어스 월.

급격히 솟구쳐 올라 솔루지아를 밀어냄과 동시에 오른손을 당겼다. 솔루지아를 공격하는 대신 지면을 움직여 게일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솔루지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솟구쳐 오름과 동시에 날개를 크게 펼쳤고, 게일과 아델리아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마력의 창 수십 개가 형성과 동시에 발사되었다.

콰가가가가가가-!

그야말로 폭격.

게일이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팔이 생으로 뜯겨나간 충격에 몸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었지만 놀라울 만치 빠르고 강한 검격으로 거대한 검기를 내쏘아 잠깐의 시간을 만들었다.

쾅!

검기와 마력의 창들이 충돌했다.

폭발했고, 아델리아가 게일에게 몸을 날림과 동시에 두 팔을 뻗어 쉴드를 펼쳤다.

쾅! 쾅! 쾅!

마력의 창은 두 사람만을 향하지 않았다. 근위마법 병단의 마법사들과 왕도 경비대를 향해 폭격처럼 쏟아져 내리니, 순식간에 전선이 무너져 내렸다.

이것이 상급 마인의 힘.

솔루지아는 네 장의 날개를 다시 한 번 크게 펼쳤다.

박살이 난 쉴드 아래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게일과 아델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하얗게 미소지었다.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으니까.

사사건건 자신을 방해해온 두 애송이의 언니와 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시작이다.’

오늘 밤 호국공이 수호진을 파괴하면 벌어지게 될 일들.

솔루지아 자신과 코로스가 준비한, 세일룬 왕국의 파멸을 야기할 진정한 계획의 시작.

‘우선은 너희부터.’

그 다음에는 너희의 동생들을.

날갯짓과 함께 마력의 창이 쏟아져 내렸다. 쉴드가 파괴된 여파로 마력이 역류한 아델리아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고, 게일은 선택해야 했다.

홀로 피할 것인가, 아델리아를 지켜낼 것인가.

선택하지 않았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남은 여력 전부를 등 뒤에 돌린 게일이 아델리아를 끌어안았다.

“게일.”

아델리아가 말했고, 게일은 아델리아를 보며 옅게 미소지었다. 마력의 창들이 그런 게일의 등 위에 쏟아졌다.

충격.

피.

빛을 잃어가는 게일의 눈동자.

“안 돼.”

아델리아가 말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게일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마력의 창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서 피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게일의 등을 더듬는 아델리아의 손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의 눈에서 끝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직 숨이 붙어있긴 했지만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중상이었다.

“으아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아델리아가 비명처럼 외치며 마력을 폭발시켰다. 보이지 않는 힘들이 거센 광풍의 칼날이 되어 솔루지아를 향해 휘몰아쳤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분명 대단한 힘이었지만 제대로 제어하고 있을 때조차 어찌하지 못 했던 솔루지아였다.

마구잡이로 발산하는 힘 따위에 당할 솔루지아가 아니었다.

네 장의 날개가 아델리아로부터 방출된 마력의 파장들을 모조리 분쇄했다.

그렇게 몇 초.

모든 힘을 다 소진해버린 아델리아가 털썩하고 무릎을 꿇었다. 떨리는 두 손을 더 이상 들지도 못 한 채 게일 위에 무너져 내렸다.

솔루지아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미소지었다. 두 사람의 모습에서 유더와 코델리아의 미래를 상상했다.

“자비를 베푸마.”

최소한 고통 없이, 함께 갈 수 있게 해주마.

솔루지아가 손을 놀렸다. 가늘게 몸을 떨 뿐 움직이지 못 하는 아델리아를 향해 마지막으로 마력의 창 한 자루를 쏘아 보냈다.

그리고 그 순간.

마력의 창이 솔루지아의 곁을 떠난 바로 그때.

밤하늘이 요동쳤다.

지면이 뒤흔들렸다.

공간 전체가- 아니, 그야말로 세상이 진감했다.

순간이지만 일대에서 발현되던 모든 마력들이 무효화되었다.

그렇게 만든 자.

그 정도의 힘을 발할 수 있는 자.

솔루지아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성벽 위.

밤하늘 아래.

강대한 마력이 요동쳤다.

아니, 단순히 강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본능적인 공포를 야기하는 힘.

모든 것에 종언을 고하는 죽음과도 같은 마력.

“악마 추종자.”

증오 섞인 목소리가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녹색 안광을 발하는 팬텀 스티드 위에 올라탄 자.

그가 솔루지아를 보았다.

그녀 아래 신음하는 아델리아와 온기를 잃어가는 게일을 보았고, 근위마법 병단과 왕도 경비대를 보았다. 미쳐 날뛰는 악마 추종자들과 불타는 왕도를 눈에 담았다.

용서할 수 없다.

용납하지 않는다.

차가운 분노가 모두를 얼어붙게 만든 그때.

벨키안이 힘을 발했다.

녹색의 죽음이 밤하늘을 뒤덮었다.

&

코로스는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발산된 무지막지한 마력이 그렇게 만들었다.

방향은 북서쪽.

솔루지아가 있는 방향.

녹색으로 물드는 서쪽 하늘에서 코로스는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해냈다. 그렇기에 두려움과 초조함을 동시에 느꼈다.

“소니.”

솔루지아.

상급 마인인 그녀조차 위협할 수 있는 존재.

코로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솔루지아가 있는 곳으로 향하기 위에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틈.

오로지 코로스와의 싸움에만 집중했기에 서쪽 하늘이 뒤흔들리는 와중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던 여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칠살검.

일곱 개의 살인기.

세류의 검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

“하아··· 하아··· 학······.”

스칼렛은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온몸이 땀투성이였고, 숨은 거칠었다. 검을 든 팔이 자꾸만 아래로 쳐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당초 체력과 지구력이 약점인 그녀였으니까.

그녀의 몸은 하나인데 반해 지켜야 할 사람들과 싸워야 할 적들의 숫자는 너무나 많았으니까.

스칼렛의 등 뒤에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들이 울먹이거나 비명을 삼켰다.

개중에는 제법 건장한 남자들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맨손으로 좀비 떼에게 덤비라 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숨을 쉬었다.

의식적으로 숨을 뱉으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당장 눈앞에 자리한 좀비만 서른 남짓.

몇이나 막을 수 있을까.

그리고 저것들을 막다가 자신이 쓰러지고 나면 남은 이들은 어떻게 될까.

죽겠지.

죄다 좀비가 되어버리겠지.

그렇다면 굳이 자신이 여기서 목숨 바쳐 싸울 필요가 있는 것일까?

어차피 늦든 빠르든 좀비가 될 터인데?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다. 혼자라면 몸을 뺄 수 있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 따위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씨발.”

스칼렛이 웃었다.

힘들어 죽겠지만 그렇게 했다.

여기서 몸을 빼는 짓 따위 죽어도 할 수 없었으니까. 딱히 정의감이 넘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여기서 도망치는 자신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로그 마스터.’

그래, 로그 마스터.

천하의 로그 마스터가 고작 좀비 떼가 무서워 도망칠 수는 없지.

씩하고 웃은 스칼렛은 억지로 힘을 내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좀비 떼 전체를 시야에 담았다.

‘여섯 수.’

사복검의 특징을 살려 최대한 다수에게 타격을 입힌다면 가능하다.

그 뒤에 더 많은 놈들이 밀려오면 그때는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눈앞의 놈들을 일소하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일해라 왕도 경비대.’

마지막 푸념을 삼킨 스칼렛은 눈매를 날카로이 했다. 숨을 멈춤과 동시에 지면을 박차 돌진했다.

첫 수로 사복검을 크게 휘둘렀다. 주황색 검기가 실린 사복검이 매섭게 몰아치며 선두에 있던 좀비들의 목을 찢어발겼고, 스칼렛은 그치지 않았다. 그대로 좀비들 사이로 파고들어 춤추듯 몸을 회전시켰다.

연이어 세 번째 수, 네 번째 수.

사복검이 몰아칠 때마다 적어도 대여섯 마리씩 좀비들의 숨통이 끊어졌다. 놈들의 머리가 바닥을 뒹굴었고, 검붉은 피가 허공을 뒤덮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다섯 번째 수에서 사복검의 연격이 끊어졌다. 숨이 막혔다. 다리에 순간 힘이 풀려 무릎을 꿇고 말았다. 사복검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체력의 한계.

정신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영역.

하지만 아직 좀비들이 남아있었다. 놈들이 스칼렛을 향해 달려들었고, 스칼렛은 거칠게 숨을 토했다. 어떻게든 사복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무리였다.

‘씨발.’

이렇게 가나. 왜 하필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게 핑크폭탄의 얼굴일까. 이왕이면 잘생긴 남자 얼굴이면 좋을 텐데. 그렇다고 유더 얼굴이 떠오르면 화가 나겠지만.

정말로 죽을 때가 된 것인지 머릿속에 마구 떠오르는 잡상을 지우며 스칼렛은 좀비들을 노려보았다. 어느새 꾸역꾸역 모여든 놈들의 숫자가 수십을 헤아렸지만 두려움에 눈을 감는 일 따위 하지 않았다.

로그 마스터로서 당당히 죽음과 대면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랬기에 그녀는 볼 수 있었다.

황금빛 검기가 휘몰아치는 것을.

태양처럼 빛나는 검을 든 남자가 좀비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 다가오는 것을.

빛이 작렬했다.

검술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남자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주변에 있던 좀비들이 일소되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거친 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마치 산보라도 하듯 너무나 가볍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내디딜 따름이었다.

바닥에 털썩하고 주저앉은 스칼렛은 어느새 자신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지나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잘생긴 남자였다. 황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화려한 금발과 하얀 얼굴. 보석을 연상케 하는 푸른 눈동자. 마치 사람이 아닌 태양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존재감.

스칼렛은 남자를 처음 보았다. 하지만 남자의 이름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막시밀리언 데 어비스.’

너무나 완벽하기에 신의 실수라 불리는 남자.

그가 스칼렛을 보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

< 제69장 - 격화 #3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