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9장 - 격화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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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
대피처가 우르르 무너지는 가운데 유더와 코델리아는 다프네 왕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외길로 쭉 이어진 통로에 선 그녀는 한쪽 벽을 짚고 서 있었다.
비밀통로에 자리한 또 다른 비밀통로.
다프네 왕녀가 손을 놀리자 벽이 갈라지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났고, 새까만 어둠 너머로 계단을 내려가는 왕족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서!”
다프네 왕녀의 재촉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계단을 내려갔다.
다프네 왕녀 역시 마른 침을 한 번 삼킨 뒤 바로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계단은 생각보다 훨씬 더 길었다.
거의 수십 미터 이상을 내려가고 나서야 바닥에 닿을 수 있었다.
“아!”
얼결에 계속 유더의 품에 안겨 있던 코델리아는 눈을 크게 뜨며 탄성을 토했다.
자신들이 어디에 도착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수호진의 방!’
왕도를 뒤덮은 결계의 중심.
수호진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장소.
직경이 50미터쯤 되는 넓고 동그란 공간 한 가운데에 파란색 빛의 기둥이 솟구쳐 있었고, 다시 그 주위에 무척이나 복잡한 마법진이 펼쳐져 있었다.
‘그 말은 곧······.’
코델리아는 빛의 기둥을 좀 더 유심히 바라보았다. 푸른빛이 워낙 강해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빛의 기둥 중심에 자리한 아름다운 검의 실루엣을 구분할 수 있었다.
‘성검 클라우솔라스.’
태양신 솔라리의 검.
그녀가 지상에 남긴 천상의 무구.
‘완전 쩔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천상의 대천사가- 무려 태양신 솔라리가 직접 사용하던 검이었으니까.
공격력은 얼마나 될까?
부가 효과는? 필살기도 엄청난 걸로 내장되어 있겠지?
막 장비만 해도 능력치가 쑥쑥 오른다든가?
원작에서는 아예 등장도 하지 않은 무기였지만 상상의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대천사가 직접 사용한 검까지는 아니었지만, 영웅전기2에는 천상의 무구들이 여럿 등장했으니 말이다.
‘갖구싶당.’
저거 하나 인벤토리에 넣어두면 아주 그냥 든든할 텐데.
우리 유더 쥐어주면 진짜 오질 거 같은데.
란디우스도 쓰지 않아서 그렇지 졸라짱센 태양검 솔라 블레이드 들고 다니니까 유더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우리 유더도 좋은 검 하나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게임뇌가 돌아가기 시작한 코델리아의 두 눈이 어느새 탐욕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코델리아야.]
[엉?]
[정신 챙겨.]
[응? 아, 응. 정신.]
유더의 메시지 마법 덕분에 미혹에서 벗어난 코델리아는 눈을 꽉 감고 도리질을 해서 잡념을 떨쳐냈다.
그리고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려줘.]
[응? 아··· 너무 가벼워서 안고 있는 것도 까먹었네?]
[흥.]
아주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니까?
코델리아가 유더를 슬쩍 흘겨보았고, 유더는 능글맞게 웃더니 코델리아를 내려주었다.
“잠깐, 잠깐.”
코델리아의 가슴 위에 앉아 있던 페어리 퀸은 날갯짓을 해 코델리아의 어깨 위로 자리를 옮겼다. 혼자라면 돌아갈 수 있었지만, 이왕 온 거 한동안은 계속 같이 있을 셈인 것 같았다.
그리고 직후.
계단을 내려온 다프네 왕녀가 통로 문을 닫았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한쪽에 모여 있는 왕족들을 돌아보았다.
“바이엘 남작. 그리고 체이스 남작.”
단정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였다.
1왕비 유스티아는 꼿꼿이 선 채 유더와 코델리아를 바라보았다. 디온 왕자는 그런 1왕비의 곁에 서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디온 왕자 뒤에 숨듯이 선 다리안 왕녀는 불안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리고 2왕비와 3왕비.
완전히 의식을 잃고 쓰러진 헨리 2세 곁에 자리한 그녀들은 1왕비와 달리 무척이나 겁먹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나마 헨리 2세를 보살필 여력이 있는 2왕비와 달리 3왕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불안해보였다.
“1왕비 전하.”
유더와 코델리아가 예를 갖추자 다프네 왕녀가 그런 두 사람을 지나쳐 1왕비의 곁에 가 섰다.
그리고 일련의 과정 속에서 유더는 생각했다.
‘이쪽의 말을 들을 의사가 있어.’
한 발 앞서간 왕족들이었다.
따돌릴 마음이 있었다면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 몰래 이곳에 숨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다프네 왕녀가 남아 길을 알려주었다.
유더와 코델리아를 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그렇다고 완전히 아군으로 보는 것도 아니겠지만.’
하지만 대화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더욱이 1왕비 유스티아는 헨리 2세와 달랐다. 호국공에 대한 믿음이 너무나 깊어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그와 달리, 그녀는 냉정하게 작금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설득할 수 있어.’
대피처에 있을 때처럼 시간이 촉박한 상황도 아니었다.
아무리 호국공이라 한들 비밀 통로에 또 다른 비밀 통로가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 가능성이 낮았으니 말이다.
‘알고 있다면 이리로 오지 않았겠지.’
호국공을 적으로 지목한 와중에 그가 알만한 장소에 몸을 숨길 1왕비와 다프네 왕녀가 아니었다.
‘됐어, 이제 시간만 끌면 돼.’
호국공이 일을 크게 벌이기는 했지만 그렇다하여 왕궁 자체를 뒤엎은 것은 아니었다. 근위 기사단이 곧 상황을 종식시킬 터였고, 아버님과 아버지께서 자신들을 찾아오실 터였다.
유일한 변수라면 제일검.
그가 혹여라도 아버지를 꺾었다면-
유더는 이를 악물었다.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가정해보았고, 이내 결론을 내렸다.
‘괜찮아.’
아무리 제일검이라 한들 혼자서 왕궁을 점령할 수는 없었다.
호국공과 그 제자들이 있다고는 해도 결국 왕궁에서 발을 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칠살검이 있으니까.’
그녀 외에도 왕도에는 근위마법 병단의 단장들을 비롯해 제일검이라 한들 쉽게 볼 수 없는 강자들이 많았으니까.
그리고 어디까지나 최악을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어쩌면 아버지께서 제일검을 꺾으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람의 검성.’
마른침을 삼킨 유더는 생각을 끊었다. 다시 현실을 보았고, 1왕비의 목소리를 들었다.
“해명해 보거라. 너희가 했던 이야기와 행동들을.”
나직한 명령에 코델리아는 유더를 돌아보았고, 유더는 천천히 입을 열어 답했다.
“코델리아가 말씀드린 것처럼 호국공이 이번 사태의 주모자입니다. 그는 왕족들을 몰살하기 위해 이번 일을 꾸몄고, 이미 왕족들을 여럿 해쳤습니다.”
유더는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했다.
왕족들을 대피처에 집결시킨 뒤 몰살하려던 호국공의 계획과 그가 이미 살해한 왕족들에 대해 밝혔고, 증거로 마석에 기록한 음성을 들려주었다.
“호국공, 이 반역자.”
“당신의 계획은 모두 알고 있어! 왕족들의 피를 끊어 왕도의 결계를 무력화할 생각이잖아!”
“그들의 말대로인가.”
“끝이군.”
유더와 코델리아의 목소리에 이어 호국공의 나직한 목소리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코델리아는 깜짝 놀라 유더가 손에 쥔 마석을 돌아보았고, 유더는 슬쩍 눈짓을 보냈다.
‘일부러 그랬던 거야.’
단순히 호국공을 격앙시키기 위해서 반역자란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왕족들을 설득할 수단을 확보하는 것 역시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유더 똑똑해.’
코델리아는 감탄한 얼굴이 되어 칭찬의 눈빛을 보냈고, 유더는 작게 미소 지은 뒤 계속해서 음성을 재생했다.
자신의 범죄를 부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인정하는 것 같은 호국공의 말과 연이어진 제일검의 목소리.
마석의 재생이 끝나자 1왕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프네 왕녀와 디온 왕자 역시 노한 얼굴로 이를 악 물었다.
십검호 가운데 둘이, 그것도 구국의 영웅인 호국공과 검문의 첫 번째 검인 제일검이 왕족들을 배신한 상황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좋다, 너희의 이야기는 잘 알겠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확인 작업을 거쳐야겠구나. 다프네.”
“예, 어마마마.”
1왕비의 부름에 나직이 답한 다프네 왕녀는 코델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체이스 남작, 이리 가까이 오거라. 진실을 확인해야 하니.”
“왕세녀··· 전하?”
“세일룬 왕가의 직계는 특별한 능력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나는 나와 접촉한 이가 진실을 말하는지, 아니면 거짓을 말하는지 구분할 수 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다프네 왕녀는 배경 설정에 가까운 인물인 터라 원작에서는 왕가의 능력을 발휘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애당초 진실을 이야기한 것이기에 꺼릴 것은 없었다.
담담히 답한 코델리아는 유더를 한 차례 돌아본 뒤 다프네 왕녀를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좀 더 가까이 오거라.”
“네, 왕세녀 전하.”
코델리아가 다소곳이 다가서자 다프네 왕녀는 코델리아와 이마를 맞댄 뒤 눈을 감고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해보거라. 호국공이 이번 사태의 주범인가? 너희는 그를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던 것이고?”
“예, 그렇습니다.”
“그가 왕족들을 살해한 것은? 실제로 왕족들의 시신을 본 것인가?”
“네······ 전부 사실입니다.”
얼굴이 너무 가까운 터라 다소 당황한 코델리아였지만 침착하게 답했고, 다프네 왕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코델리아의 말이 모두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운명의 두 사람······.”
무척이나 작게 읊조린 다프네 왕녀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확인한 바를 1왕비에게 전하기 위해 돌아섰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고 있어.”
코델리아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페어리 퀸이 돌연 말했고, 방안의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특히 그녀가 평범한 페어리가 아닌, 섬머 페어리들의 여왕이라는 사실을 아는 다프네 왕녀와 디온 왕자는 바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앞뒤를 모두 자른 페어리 퀸의 말이었지만, 오고 있다는 말 하나만으로도 유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똑바로 오고 있어. 엄청 화를 내고 있어. 살기가 엄청나.”
마지막에 가서는 완전히 겁먹은 얼굴이 된 페어리 퀸이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유더와 코델리아도 들을 수 있었다.
계단 너머.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무너진 대피처를 뚫고 온 것까지는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었지만 곧바로, 그것도 숨겨진 통로를 통해 접근해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원작에서 클라우솔라스를 회수한 건 악마 추종자들이야.’
호국공이 아니었다. 그는 이 방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 했다.
‘아니, 설사 안다고 해도.’
어떻게 바로 이곳으로 질러 온 것일까.
설사 숨겨진 통로를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왕궁 밖으로 이어진 출구와 이곳이라는 이지선다였을 터인데.
그리고 바로 그 때였다.
1왕비가 돌연 기절한 헨리 2세의 품을 뒤지더니 파란 보석이 박힌 작은 장신구 하나를 꺼내 디온 왕자에게 내밀었다.
디온 왕자의 얼굴에 낭패감이 번졌다.
“추적기입니다.”
유더가 바이엘 백작과 체이스 백작에게 준 것과 비슷한 종류의 물건이었다.
아마도 헨리 2세가 호국공에게 반대쪽 추적기를 직접 넘겨줬을 터였다.
그에게 있어 호국공은 언제 어느 때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영웅이었으니 말이다.
“오고 있어.”
이번에는 코델리아가 말했다. 문 너머에서 발걸음 소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 따위 없었다.
유더가 1왕비를 돌아보며 다급히 외쳤다.
“저희가 막겠습니다! 도망치십시오!”
왕족들을 살린다. 이곳에서 호국공의 발을 붙잡아 왕족들이 도망칠 시간을 만든다.
약해졌다한들 십검호였다.
버거운 상대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싸워야만 했다.
유더가 클라우솔라스와 수호진을 돌아보았다. 구천구문의 오문을 개방하였고 구극태양신공의 운용을 시작했다. 코델리아 역시 천사와 마녀의 힘을 동시에 발해 타천사로 화하였다.
“가세한다!”
날카롭게 외친 다프네 왕녀가 치마 속에 숨겨두었던 검을 뽑아들었다.
디온 왕자는 그런 다프네 왕녀에게 갖가지 보조 마법을 연속해서 걸어주었고, 1왕비는 주저하지 않았다. 기절한 헨리 2세를 다시 들쳐 업고 반대쪽 출구를 향해 달렸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왕의 목숨이었다. 이곳에 남아봐야 국왕과 다른 왕비들은 네 사람의 방해만 될 뿐이었다.
쿵! 쿵! 쿵!
계단이 울렸다. 2왕비가 다리안 왕녀를 끌어안고 달렸고, 3왕비가 울며 두 왕비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직후.
암청빛 검기가 문을 갈랐다.
호국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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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9장 - 격화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