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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196화 (196/473)

< 제72장 - 왕도 >

제72장 - 왕도

코로스의 가슴이 갈라졌다. 대각선으로 길게, 쇄골이 끊어졌고 검은 피가 솟구쳤다.

갑옷처럼 단단한 코로스의 근육이었지만 칠살검 세류의 검이었다.

은은한 달빛을 닮은 은빛의 검기는 코로스의 육신을 가르기에 충분히 날카로웠다.

하지만 검은 피가 솟구친 그때 세류 역시 피를 토했다. 뒤로 크게 밀려나며 비틀거렸다.

“크하.”

세류의 검이 코로스의 몸을 가른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코로스의 주먹이 세류를 강타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크흐.”

은빛의 검이 자신의 가슴을 헤집는 그 순간 코로스는 물러나는 대신 오히려 전진했다.

세류의 검이 자신의 쇄골을 가르고 지난 그때 주먹을 내뻗었다.

생각하고 한 것이 아니었다. 저돌맹진 그 자체라 해도 좋을 코로스의 본능이 절로 반응한 것이었다.

그리고 효과는 충분했다.

똑같이 일격을 상대에게 날렸고, 그 위력 역시 강대했지만 서로의 맷집이 달랐다. 체격이 달랐고 체중이 달랐으며 종족이 달랐다.

3미터가 넘는 거한인 코로스의 주먹 크기는 과장 조금 보태 거의 세류의 상반신에 육박했다. 공격받는 순간 몸을 뒤로 날려 위력을 감소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세류가 받은 타격은 어마어마했다.

“쿠헉··· 큭······.”

재차 피를 토한 세류는 비틀거렸고, 코로스는 이를 악물며 그런 세류를 노려보았다.

여기서 일격만 더 적중시키면 작고 가냘픈 세류 따위 뭉개버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선뜻 발걸음을 내디딜 수 없었다.

아예 몸을 빼내 솔루지아에게 향하는 것도 무리였다.

간격.

피를 토하며 비틀거리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위태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세류는 아직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코로스 자신은 세류의 간격 안에 있었다.

‘과연 십검호.’

세일룬 왕국이 자랑하는 열 명의 검사들 가운데 하나.

가슴을 당해 코로스 자신도 약해졌다. 지금 여기서 돌진하면 속도도 위력도 일격을 허용하기 전보다 부족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정도로는 당하고 만다.

세류의 공격을 봉쇄했던 연격은 더 이상 펼칠 수 없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된다.’

세류는 필사적으로 숨을 가다듬고 있었지만 회복이 더뎠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인간. 피를 저렇게나 토했다는 건 내장이 상했다는 것이니 쉬이 회복하지 못 하는 것이 당연했다.

반면 코로스 자신은 천천히지만 가슴의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악마와 합일한 마인이기 때문이었다.

코로스에게는 인간의 자연치유력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재생력이 있었다.

그러니 시간을 끌면 된다.

충분히 회복될 때까지.

코로스 자신은 기량을 회복한 반면 세류는 여전히 빌빌거리는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인내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코로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소니.’

솔루지아.

북서쪽의 하늘이 녹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죽음의 마력이 방출되었다.

서둘러야 했다. 이 싸움을 길게 끌어서는 아니되었다.

“간다.”

코로스가 선언하듯 말했고, 세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애당초 그녀는 처음 싸움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코로스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하아.”

세류가 숨을 토했다. 호흡으로 몸을 다스렸고, 강한 의지로 몸을 지배했다. 몸을 웅크리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쾅!

코로스가 지면을 박차며 돌진했다. 거대한 맹진에 맞서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으로 보였다.

하지만 세류는 물러서지 않았다. 코로스를 보았고, 그가 당기는 주먹을 보았으며, 숨을 멈춤과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일권과 일검.

마인과 검호의 한 수가 교차했다.

&

솔루지아는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신화적인 존재들이었으니 말이다.

‘데몬프린스를 꺾은 자들.’

작위를 가진 악마들 가운데서도 손에 꼽히는, 지옥의 대군주들 바로 아래에 위치한 대악마들.

데몬프린스와 인간의 격차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들에 비하면 인간은 그저 꿈틀거리는 벌레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파라곤의 영웅들은 인간의 몸으로 데몬프린스를 꺾었다.

그것도 그냥 꺾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데몬프린스의 영역에서 싸웠다.

데몬프린스뿐만 아니라 그들의 군대와도 동시에 싸워 결국에는 데몬프린스를 거꾸러트렸다.

철인 란디우스.

검귀 카마엘.

성천사 레나.

세 사람이 데몬프린스를 꺾었다.

기적에 기적이 더해진 결과라지만 겨우 세 사람의 힘으로 전력을 다한 데몬프린스를 격파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

사령술사 벨키안과 드루이드 프란.

그들이 데몬프린스의 군대를 막아냈다.

앞의 세 사람이 데몬프린스를 격파할 때까지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솔루지아는 알게 되었다. 정답의 일부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오라, 나의 군대여.”

녹색의 마력이 하늘을 뒤덮었다.

팬텀스티드 위에 올라탄 벨키안이 지상을 향해 손을 뻗은 그때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아-!”

녹색의 하늘로부터 망령들이 소환되었다. 울부짖으며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고, 순식간에 성벽 위를 뒤덮었다.

그리고 불꽃의 비가 내렸다.

녹색의 불꽃에 뒤덮인 유성우가 녹색의 하늘로부터 쏟아져 솔루지아의 군대를 맹습했다.

쾅! 쾅! 쾅!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다. 지면을 강타한 유성이 녹염과 함께 일어서 거인의 형상을 갖추었다.

열이 넘는 거대한 골렘들이 일어서며 포효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지는 하나.

힘을 아끼는 짓 따위 하지 않는 벨키안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는 한 수.

“오라.”

벨키안이 수인을 맺었다. 주문을 읊조렸고, 그로써 세상을 뒤틀었다.

최강의 사역마를 이 땅에 강림시켰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

공간이 찢어졌다.

녹색의 불꽃이 지상에서 크게 피어올랐고, 그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죽음의 기사.

아니, 그 이상의 존재.

사령술사 벨키안이 탄생시킨 최강의 역작.

등장과 동시에 세상이 진감했다.

하늘과 땅이 요동쳤다.

녹색의 불꽃이 거칠게 흩어지며 칠흑의 존재를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나이트 로드.

기사들의 왕.

그것이 칠흑의 마갑 속에서 녹색의 안광을 번뜩였다. 거대한 팬텀스티드 위에서 솔루지아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런 왕의 곁으로 강대한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용아병들.

블랙 드래곤 타라크스의 이빨로 만든 최정예 기사단.

솔루지아는 눈앞에서 소환되는 군대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반사적으로 벨키안의 이명을 떠올렸다.

일인군단.

언제나 홀로 움직이지만 언제 어디서고 수천의 군세를 불러낼 수 있는 이.

“가라.”

벨키안이 고고히 명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수백을 넘어 일천에 달할 망령들이 성벽 아래로 돌진하는 광경은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귀곡성이 하늘을 뒤덮었다. 녹염의 노도가 지상을 휩쓸었다.

“키아아아아아아아아-!”

귀곡성이 모든 소리를 지워버렸다.

그렇기에 악마 추종자들의 공포에 찬 비명 따위 울려퍼지지 않았다. 압도적인 소음이 만들어낸 침묵 속에서 악마 추종자들은 최후의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기사들의 왕이 맹진했다.

용아병들로 구성된 죽음의 기사들이 그런 왕의 뒤를 따랐다.

이번에도 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 존재감만으로 세상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으아아!”

솔루지아가 악에 바쳐 소리쳤다. 포효하며 네 장의 날개를 모두 펼쳤고, 기사들의 왕이 칠흑의 마갑 속에서 녹색의 안광을 번뜩였다. 거대한 칠흑의 검을 휘둘렀다.

쾅! 쾅! 쾅!

뇌성이 터졌다.

왕의 검과 솔루지아의 날개들이 몇 번이나 충돌하였고, 마인들과 용아병들이 격돌했다.

그리고 솔루지아는 생각했다.

도망쳐야 한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사령술사 벨키안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대였다.

어떤 의미로는 란디우스나 카마엘보다도 질이 나빴다.

‘코니!’

혼자로는 무리였다.

기사들의 왕까지는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었지만, 여기에 다른 무언가가 가세하면 아무리 솔루지아 자신이라 해도 버틸 수 없었다.

휘하의 중급 마인들이 용아병들을 막아주고 있을 때 도망쳐야만 했다.

“으아아!”

솔루지아는 힘을 고의로 폭주시켰다. 마인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억누르고 있던 악마의 힘을 해방시켰다.

그로써 보다 악마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물론 대가가 필요한 일이었다.

영혼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 정도는 별 것도 아니었다.

‘솔루지아.’

악마의 목소리.

허상이었다.

악마는 이미 솔루지아 자신과 하나가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솔루지아는 알고 있었다.

악마에 보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솔루지아 자신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이미 마인이 된 순간 변질된 자신이었지만, 그런 자신조차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을.

하지만 앞뒤 가릴 때가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보다 강한 힘이 필요했다.

“아아아!”

솔루지아의 등 뒤에서 새로운 날개들이 돋아났다.

두 쌍이던 날개는 이제 네 쌍이 되었고, 솔루지아는 새로이 돋아난 날개들을 휘둘러 기사들의 왕을 공격했다. 그를 물러나게 한 직후 다시 한 번 날갯짓을 해 엄습해오는 죽음의 마력을 떨쳐냈다.

“크아아!”

벨키안이 이를 악물며 마력의 반발을 흘려보냈다. 기사들의 왕이 재차 솔루지아를 향해 돌진했지만 그때는 이미 솔루지아가 다시 한 번 날갯짓을 한 이후였다.

“인간들을 죽여!”

솔루지아가 명령했다.

그리고 그 명령에 악마 추종자들은 이지를 잃었다. 두려움에 빠진 상태로 망령들과 싸우는 대신 아직 남아있던 근위마법 병단과 왕도 경비대를 공격했다.

“노오옴!”

벨키안이 노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솔루지아는 미소를 보였다.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이 어떤 자들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하하하하!”

솔루지아의 날갯짓이 거대한 마력의 칼날이 되어 생존자들을 덮쳤다. 기사들의 왕이 칠흑의 검을 휘둘러 그들을 지켜냈고, 솔루지아는 그 틈에 보다 먼 곳까지 나아갔다. 왕도의 하늘 높은 곳으로 솟구쳐 올랐다.

벨키안은 그것을 보았지만 바로 쫓지 못 했다.

망령들을 통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악마 추종자들을 멸하라!”

벨키안은 노여움을 억누르며 소리쳤고, 망령들은 솔루지아에게 버림받은 악마 추종자들을 공격해 생존자들을 보호했다.

벨키안은 눈을 감고 마력의 흐름을 읽어냈다.

왕성에서 거대한 힘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남문 쪽에서도 강력한 마인의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왕도 전역.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죽지도 살지도 않은 좀비들이 미쳐 날뛰며 죽음을 양산했다.

서둘러야 했다.

도주한 마인을 잡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벨키안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먼 곳에 집중했던 의식을 가까운 곳으로 돌렸다.

생존자들.

얼마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저버릴 순 없었다.

“생명의 비여.”

나직이 말하며 힘을 발했다. 생명의 마법을 발하니 하늘에서 회복의 힘을 가진 비가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미 죽음에 임박한 이에게는 평온한 죽음을, 어차피 살아날 이에게는 보다 빠른 회복을.

그저 약간의 도움에 불과했다. 결코 기적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벨키안은 판단해야만 했다.

“쿠오오-.”

팬텀스티드가 낮게 울며 지상으로 향했다.

솔루지아가 서 있던 곳 근처에 쓰러져 있는 두 사람.

나이에 비해 무척 강한 힘을 쌓은 이들이었다.

여자 쪽은 회복의 비를 맞고 조금씩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지만 남자 쪽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벨키안은 생각했다.

남자를 살리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살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소진해야만 한다.

‘그럴 시간은 없다.’

남자에게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십 초 남짓에 불과했다.

겨우 그 정도 시간으로는 남자를 살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망령의 군대가 근방의 악마 추종자들을 말살하면 바로 왕도의 중심으로 이동해 사람들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 스스로에게 맡기겠다.’

벨키안은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를 열어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환약을 꺼냈다.

은은한 달빛을 연상시키는 은색 환약에 약간의 마력을 불어넣은 벨키안은 그대로 남자의- 게일의 입을 벌렸다.

‘은빛 달의 정수.’

드루이드 프란에게서 받은 물건이었다.

‘견뎌낸다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그저 과거의 힘을 되찾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강력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프란의 말대로라면 살 수 있는 것은 백에 하나 정도.

눈앞의 남자는 상당한 수련을 쌓은 인물 같으니 생존 확률이 보다 높을 것 같긴 했지만, 그래봐야 열에 하나에서 둘 정도 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평소라면 사용하지 않겠지만······.’

생존 확률이 너무 낮아 여간해서는 사용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약이었다. 애당초 프란에게서 받은 것도 구급용이 아닌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것 외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어쩐지 모를 직감.

프란이라면 운명이라고 말했을 그것.

달의 정수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달에 한 번, 셀레네와 헬레네의 힘이 최고조에 달한 날 뿐이었다.

그런데 마침 오늘이 그 날이었으니, 어쩌면 정말로 운명이 작용한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만약 정말로 살아난다면······.’

벨키안은 더 이상 생각을 잊지 않았다. 게일의 입 안에 달의 정수를 밀어 넣은 뒤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라.”

게일에게 쓸 수 있는 시간은 모두 사용하였다.

다시 팬텀스티드 위에 올라탄 벨키안은 망령 군대와 함께 왕도의 중심부로 향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하늘에서 쏟아지던 회복의 비가 가늘어졌고, 망령 군대의 귀곡성이 멀어져갔다.

아델리아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왔다. 의식을 회복하지는 못 했지만 그 숨결이 조금씩 안정세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런 아델리아의 곁에서 게일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육신은 여전히 차갑게 식어만 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왕도를 뒤덮고 있던 수호진이 순간이지만 급격히 약해진 그때.

게일의 영혼 깊은 곳에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

< 제72장 - 왕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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