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3장 - 공훈식 >
제73장 - 공훈식
“아.”
천천히 눈을 뜨며 멍한 목소리를 흘렸다.
실제로 멍했기 때문이다.
“······가······?”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지만 머리가 멍한 탓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흐릿한 시야가 천천히 선명해지는 가운데 코델리아는 몇 번 더 눈을 깜박였다.
“······가씨?”
목소리가 좀 더 또렷해졌다. 동시에 코델리아는 갈증을 느꼈다. 입안이 말라 침을 삼키기도 어려웠다.
“하아.”
신음을 흘리며 다시 숨을 토했다.
여전히 뿌연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럭저럭 앞을 볼 수 있었다.
낯선 천장.
하지만 완전히 낯설진 않았다. 비슷한 것들을 제법 많이 본 느낌이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팍팍 드는 천장.
어디서 보았을까.
스펜서 공작의 저택?
왕궁에 마련된 숙소들?
“아가씨! 들리세요?!”
목소리.
코델리아는 파란 눈동자를 굴렸고, 볼 수 있었다.
두 눈에 눈물이 잔뜩 고인 달리아가 가까이에 있었다.
“다리아······?”
조금 뭉개진 발음으로 말하자 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네, 아가씨. 저예요. 달리아에요. 정신이 좀 드세요? 네?”
격한 반응에 코델리아는 일단 고개를 몇 번 끄덕여주었다. 솔직히 아직도 멍해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달리아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무을······.”
“물이요? 잠시만요, 아가씨. 바로 드릴게요.”
웅얼거리듯 말하자 바로 답한 달리아는 코델리아의 상체를 반쯤 안듯이 해서 일으켜 세운 뒤 빈 손으로 컵을 집었다.
“드세요, 아가씨. 천천히. 천천히요.”
몸에 기운이 없어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코델리아의 입술에 컵을 가져다 댄 뒤 천천히 기울이자 코델리아는 아기처럼 눈을 감고 물을 마셨다.
천천히, 하지만 꾸준하게.
“프하.”
물 한 컵을 전부 마신 코델리는 다시 눈을 떴다. 여전히 몸에 기운이 없긴 했지만 마른 목을 축이자 정신이 좀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아으······.”
“정신이 좀 드세요?”
“으응······.”
“일단 다시 눕혀드릴게요. 천천히.”
상냥하게 속삭인 달리아는 코델리아를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눕혔고, 코델리아는 한 차례 눈을 꽉 감았다 뜬 뒤 입술을 벌렸다.
“아.”
아아아.
후.
새삼 방금 마신 물이 몸속을 도는 기분이었다.
뿌옇기만 하던 시야가 비로소 명료해졌다.
“달리···아?”
“네, 아가씨. 달리아에요.”
달리아가 눈물 어린 얼굴로 웃으며 코델리아의 손을 잡았다.
기사답게 거칠지만 따뜻한 달리아의 손.
코델리아는 어쩐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배시시 웃었고, 이내 깨달았다.
손.
달리아의 손.
그렇다면 유더의 손은?
“유더?!”
번쩍하고 정신이 든 코델리아는 크게 소리치며 상체를 일으켜 세운 뒤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유더와 깍지 껴서 마주 잡았던 손인데 지금은 혼자였다.
“유더.”
생각났다.
기억이 났다.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 상황.
온갖 고생 끝에 호국공을 쓰러트린 뒤 유더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사이좋게 피를 토한 뒤 서로의 손을 맞잡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지금.
유더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코델리아를 몹시 동요케 했다.
“유더는? 유더는 어딨어? 유더는 괜찮아?!”
쏟아내듯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달리아가 급히 손을 뻗어 그런 코델리아의 어깨를 눌렀다.
안심시키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유더 공자도 괜찮아요. 지금 다른 방에서 쉬고 있어요.”
“다른 방?”
“네, 다른 방이요. 마이아 씨가 보살피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마이아.”
유더의 전속 메이드.
유더에게는 단순한 사용인이 아닌, 친누나나 다름없는 사람.
“하아.”
코델리아는 다시 숨을 토했고, 달리아는 그런 코델리아를 조심스럽게 눕히며 물었다.
“진정되셨어요?”
“어? 응. 어어.”
전혀 진정되지 않은 것 같은 대답이었지만 달리아는 일단 만족했다. 그대로 코델리아의 손을 잡아주며 말을 이었다.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으응.”
달리아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더욱이 틈만 나면 자랑하는 것처럼 생명의 구를 삼킨 유더였다. 재생력까지 있는 녀석이니 코델리아 자신보다 멀쩡하면 멀쩡했지 골골거리진 않으리라.
“흐아.”
다행이다.
정말정말 다행이야.
새삼 다시 안도의 숨을 토한 코델리아는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달리아를 보았다.
“달리아는 괜찮아?”
“저요?”
“응.”
달리아도 일단은 대연회장에 있었으니까.
“괜찮아요. 체이스 백작님께서 모두를 지켜주셨거든요.”
“아버지께서?”
“네, 마법으로 무너지는 궁전을 지탱하셨을 뿐만 아니라 좀비들과 배신자들까지 물리치셨는 걸요. 백작님이 안 계셨다면 무너지는 궁전 때문에라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을 거예요.”
달리아의 설명에 코델리아는 작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체이스 백작이 자랑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디 다친 곳은 없지?”
“네, 없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응, 걱정 안 할게.”
코델리아가 배시시 웃자 달리아 역시 빙긋하고 웃었다.
“그런데 달리아.”
“네, 아가씨.”
“나 얼마나 잠들어 있었어?”
“꼬박 이틀이요.”
“응?”
코델리아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이틀?
한나절이나 하루가 아니라 이틀?
“네, 이틀 내내 깨어나지 않으셔서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주변에서는 너무 피곤하셔서 깊은 잠에 빠지신 것뿐이니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내리 이틀을 자는 건 정상이 아니니까요.”
“그러게.”
고개를 끄덕인 코델리아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이렇다 할 모양이 없는, 환자복을 연상시키는 하얗고 편해 보이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잠깐 점검 좀 할게.”
짧게 말한 코델리아는 눈을 감고 스스로를 살폈다.
가볍게 한 바퀴 마력을 순환시키니 대강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있었다.
‘마력 고갈이네.’
아마도 마지막 신벌의 번개를 내쏠 때 몸 안의 마력이 함께 전부 방출되었던 모양이다.
거기에 육체적인 피로까지 더해졌으니, 이틀을 내리 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괜찮으세요?”
“어, 지금은 괜찮아.”
본래라면 이틀 잔다고 회복될 마력 고갈이 아니었지만, 천사 등급이 오른 덕에 어찌어찌 회복이 된 모양이었다.
“달리아, 다른 사람들은?”
유더만 걱정이 아니었다.
걱정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누구를 먼저 물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덕분에 다소 어설퍼진 코델리아의 물음에 달리아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일단 왕족 분들부터 말씀드릴게요.”
“응.”
이번 싸움에서 제일 중요했던 사람들.
“국왕 전하와 세 분 왕비님들은 모두 무사하세요. 다프네 왕세녀님과 디온 왕자님, 다리안 왕녀님도 무사하시고요.”
달리아의 설명에 코델리아는 안도의 숨을 토했다.
사실 오른손목이 날아간 다프네 왕세녀가 정말 무사한지 살짝 의문이 들었지만, 어쨌든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터였으니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왕족이니까 회복 마법 팍팍 써서 회복할 수 있겠지 뭐.’
잘린 손목도 현장에 있었을 테니까.
“아버님은? 아버지랑.”
코델리아의 물음에 달리아는 바로 답하는 대신 우후후 웃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놀리듯이 물었다.
“아가씨, 아버님이요? 아버님?”
“아, 아버님이 아버님이지 왜애.”
코델리아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답하자 달리아는 킥킥 웃었다.
“아가씨.”
“왜.”
“뺨 한 번 꼬집어 봐도 돼요? 너무 귀여워서 꼬집어주고 싶은데.”
“안 돼.”
“왜요? 유더 공자 꺼라서요?”
“응-이 아니라! 여기서 유더가 왜 나와!”
“그야 아버님이니까? 그나저나 무의식 중에 응이라는 대답이 나오는 군요?”
“아니거든? 내 뺨은 내 꺼거든? 유더 꺼 아니거든?”
“그럼 꼬집어도 돼요?”
“아니이! 말이 왜 그렇게 되는데!”
코델리아가 짜증을 부리자 달리아는 다시 쿡쿡 웃었다.
“우리 아가씨 너무 귀여우시다.”
“달리아는 하나도 안 귀여워.”
“정말요? 정말로 진짜?”
“우으으··· 나한테 왜 이러는데? 응?”
코델리아가 울상을 지으며 묻자 달리아는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아가씨가 너무 좋아서 그래요. 거기다 너무 귀여우시니까. 이건 제 잘못이라기 보다는 아가씨 잘못이라니까요? 누가 그렇게 귀여우래요?”
“달리아가 이상해졌어어.”
오늘 따라 진짜 왜 이래.
코델리아가 어쩔 줄 몰라하자 달리아는 마지막으로 까르르 웃더니 표정을 정돈했다.
“아무튼 이 정도로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아가씨도 그쪽이 좋으시죠?”
“달리아 미워.”
“전 아가씨 좋아요.”
지난 이틀 동안 정말 많이 걱정했으니까.
이렇게 눈을 떠서 얼마나 기쁜지 모를 지경이었으니까.
달리아는 코델리아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바이엘 백작님과 체이스 백작님 모두 무사하세요. 두 분 모두 이번 싸움에 정말 큰 공을 세우셨고요.”
바이엘 백작은 배신자 중 하나인 제일검을 격퇴했고, 체이스 백작은 대연회장의 모두를 구했다.
둘 중 하나만 없었어도 대참사가 일어났으리라.
“하아··· 다행이다.”
아버님이 무사하셔서.
솔직히 제일검이 상대라 걱정했는데.
“바이엘 백작님은 강하시니까요. 제일검··· 그 찢어죽일 배신자를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달리아의 목소리에는 다양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바이엘 백작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이미 한 식구가 된 것처럼 자부심을 드러냈고, 제일검에 대해 말할 때는 노골적인 증오를 노출했다.
‘얼추 다 알려진 모양이네.’
하기야 벌써 이틀이나 지났으니까.
이미 당사자들끼리 정보를 교환해 대강의 전모를 알아냈을 터였다.
‘그래도 좀··· 충격이긴 해.’
설마 제일검이 배신자일 줄이야.
‘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유더와 코델리아 자신에게 몇 번이나 호의를 드러내기도 했고.
뭣보다 원작에서 딱히 배신자란 이야기가 없었던 점이 컸다.
‘배신자가 아니란 이야기도 없었지만.’
제일검의 행적은 사실상 배경설정 상으로만 존재한 터라 어떻게든 끼워맞출 구석이 많기는 했다.
‘으으음··· 정황상 칠대재앙에게 죽은 게 아니라 죽음을 위장한 걸 수도 있겠네.’
그리고 그 뒤에 다른 배신자 십검호들처럼 마인이 되어 이름을 바꾸었을지도.
“흐아아.”
어느 쪽이든 찝찝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더욱이 달리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황상 제일검은 도망친 것 같았고 말이다.
“언니는? 게일 아주버님은?”
코델리아의 물음에 달리아는 바로 답하는 대신 입술을 움츠리더니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일단··· 아델리아 님은 무사하세요. 많이 지치셨지만 딱히 다치신 곳도 없고요.”
아델리아가 무사하다는 이야기에 일단 안심한 코델리아였지만 이번에는 안도의 숨을 토하지 않았다.
이야기의 흐름상 게일에게는 무언가 문제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일 공자님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세요.”
“생명···에는?”
“네, 좀··· 많이 다치셨어요. 전신에 고루 부상이 심하신데다가··· 왼팔을 잃으셨어요.”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였다.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 왼팔을?”
“예, 재생은 무리고··· 아마 의수를 다셔야 할 것 같아요.”
잘려나간 손목을 확보한데다가 바로 봉합조치까지 할 수 있었던 다프네 왕녀와는 상황이 달랐다.
일단 발견 자체가 늦었고, 훼손된 부분 자체가 커서 봉합이 불가능했다.
“자, 잠깐. 잠깐만. 언니랑 아주버님은 왕궁 밖에 있었잖아. 애당초 다칠 일이······.”
거기까지였다.
말하던 와중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왕도. 왕도도 공격을 받았구나.”
코델리아의 말에 달리아는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왕궁 이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왕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맙소사.”
검은 달의 테러를 막았나 싶었더니 더 큰 사고가 터질 줄이야.
‘잘못···한 걸까?’
차라리 그냥 검은 달이 테러를 저지르도록 놔뒀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악마의 손이 직접 왕도를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섣불리 답을 정할 수 없었다.
“무척 큰 피해가 있었지만 그래도 극복할 수 있었어요. 특히··· 파라곤의 다섯 영웅 중 한 분이신 벨키안 님의 활약이 크셨고요.”
달리아의 말에 코델리아는 다시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베, 벨키안? 사령술사 벨키안?”
“네, 벨키안 님이요.”
“세상에.”
악마의 손의 직접 공격이 예상 밖이었듯, 벨키안의 조력 역시 예상 밖의 일이었다.
설마하니 생명의 신전에 남겨두었던 안배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자, 잠깐. 그럼 핑크폭탄 찾아온 거야?’
애당초 벨키안이 왕도에 올 이유라고는 그것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으··· 머리 아파. 그래도 일단 날뛴 보람은 있다 이거구나.’
왕족 몰살 사건을 막기 위해 많은 일들을 했다.
개중에는 제일검의 배신과 악마의 손의 직접 공격처럼 오히려 해악이 된 경우들도 있었지만, 벨키안과 로그 마스터 건처럼 도움이 되는 경우들도 있었다.
‘결국···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거네.’
노력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으니까.
그저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 모두에 매진할 따름이었다.
‘하아··· 진짜 할 일이 많네.’
어찌어찌 싸움은 끝났지만 뒷정리라고 해야 할까,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벨키안도 만나야 하고, 스칼렛 안부도 살펴야 하고······.’
그러고 보니 루카스는 괜찮을까? 대연회장에 큰 문제가 없었던 것 같으니 아마 괜찮겠지?
“아가씨.”
“어?”
한창 생각을 잇던 코델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며 답하자 달리아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유더 공자 보러 가실래요?”
“유더를?”
“네, 아직 잠들어 계시지만, 그래도 무사하신 모습을 보시면 많이 안심하실 것 같아서요.”
달리아의 말에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보고 싶어.”
대답도 무의식중에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대답에 달리아는 배시시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법 놀려줄 수 있는 건수였지만, 지금은 코델리아의 마음을 우선시했다.
“가요, 아가씨. 바로 옆방이니까 그리 멀지도 않아요.”
코델리아를 일으켜 세운 달리아는 커다란 숄을 꺼내 코델리아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음, 이 정도면 되겠죠?”
“응, 솔직히 옷 챙겨 입을 상황이 아니니까.”
어깨에 두른 숄을 살짝 잡아당긴 코델리아는 달리아의 부축을 받으며 방을 나섰다.
복도의 장식이나 구조를 보니 별궁이 아닌 본궁인 모양이었다.
“이쪽이에요.”
문을 지키고 있던 바이엘 백작가의 기사가 바로 문을 열어주었고, 코델리아는 살짝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방안에 들어섰다.
“아가씨.”
“마이아.”
요 이틀간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이 반쪽이 된 마이아였다.
하지만 그녀는 코델리아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안도한 듯 미소를 머금더니 바로 유더를 가리켰다.
“공자님도 무사하세요. 아직 깨어나지는 못 하셨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셨어요.”
평소 똑 부러진 마이아답지 않게 말투도 내용도 어설픈 구석이 있었지만 코델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내디뎌 유더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이 바보.’
얼굴을 보니 저도 모르게 욕이 먼저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화가 났으니까.
동시에 너무나 마음이 놓였으니까.
“하아아······.”
긴 숨을 토한 코델리아는 무너지듯 침대맡에 주저앉아 유더를 내려다보았다.
얼굴빛이 창백한 것이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숨결이 고른 걸 보니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너무 무리를 하신 터라 기력이 쇠했다고 백작님이 그러셨어요. 그,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 금방 일어나실 거라고도 하셨고요.”
마이아의 설명에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에 있던 그녀였기에 유더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깨어나지 못 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육문······.’
단순히 무리한 것 때문에 이렇게 몸져누운 것이 아니었다.
억지로 육문을 연 여파 때문에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보 멍청이.’
체력 좋다고 맨날매날 자랑하더니.
천무지체라고 잘난척하더니.
코델리아는 다시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나 때문이야.’
육문을 연다는 아이디어를 낸 것은 코델리아 자신이었으니까.
유더에게 억지를 밀어붙인 것 역시 코델리아 자신이었으니까.
“괘, 괜찮아요, 아가씨. 금방 깨어나실 거예요.”
“네, 아가씨. 바이엘 백작님께서도 그러셨어요.”
코델리아가 뚝뚝 눈물을 흘리자 당황한 달리아와 마이가가 급히 말을 붙였다.
코델리아는 무어라 답하는 대신 입술을 깨문 채 훌쩍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유더가 지금 깨어있다면 무슨 말을 할지, 코델리아 자신에게 뭐라고 할지 자연스레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가씨, 시장하지 않으세요?”
“네, 아가씨. 이틀 만에 깨어나셨잖아요.”
코델리아가 여전히 훌쩍이긴 해도 조금 진정된 모습을 보이자 마이아와 달리아가 다시 말을 붙였다.
그리고 코델리아는 깨달았다.
정말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말이다.
새삼 깨달았기 때문인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배가 고팠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틀 만에 깨어나셨으니 부드러운 것들로 준비해드릴게요.”
빙긋 웃으며 말한 마이아는 코델리아를 테이블로 안내한 뒤 방을 나섰고, 이내 쟁반에 몇 가지 요깃거리를 담아서 돌아왔다.
스프와 빵과 과즙을 섞은 물.
평소에 먹던 것들에 비해 무척이나 간소한 상차림이었지만, 공복이라 그런지 절로 군침이 돌았다.
“드세요.”
“잘 먹겠습니다.”
바로 말한 코델리아는 수저를 들더니 유더를 한 차례 돌아보았다.
막상 먹자니 유더가 마음에 걸려서였다.
‘빨리 일어나. 응?’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조금은 아이 같은 바람을 중얼거린 코델리아는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그리고 몇 분.
스프를 깨끗이 비운 코델리아가 과즙 섞인 물을 꿀꺽꿀꺽 삼킬 즈음이었다.
“코델리아, 여기 있었구나.”
방문을 열고 잘생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서 많이 본, 체이스 백작은 물론이고 아델리아와도 닮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코델리아는 깨달았다.
눈앞의 사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
“아?”
에드워드 체이스.
체이스 백작의 장남인 동시에 코델리아 체이스 자신의 오라버니.
대연회장에도 있었고, 무도회에도 참가했지만 어쩐지 모르게 떠올리지 못하고 있던 남자.
“어쩐지 뭔가 굉장히 섭섭한 기분이 드는 것 같은데?”
“그, 그럴 리가. 오빠도 무사했구나. 응응. 다행이야. 우리 오빠도 무사했어.”
코델리아가 얼른 에헤헤 웃으며 말하자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에드워드였지만 다행히 잠깐 뿐이었다.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 코델리아 앞에 앉은 그는 유더를 한 차례 돌아보더니 다시 코델리아를 보며 말했다.
“일단 체이스 백작가의 피를 나눈 오라버니로서 말하마. 무사히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다. 많이 걱정했다.”
“응, 고마워 오빠.”
까맣게 잊어버려서 정말정말 미안해.
코델리아가 어설프게 웃자 다시 한 번 눈을 가늘게 뜬 에드워드였지만 이번에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그리고··· 세일룬 왕국의 귀족으로서 감사를 표하마. 너와 유더가 이 나라를 지켜냈다. 정말 큰 공을 세웠어.”
거기까지 말한 에드워드는 아예 고개까지 숙여 보였다.
“오, 오빠?”
“네가 내 동생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구나.”
에드워드의 말에 코델리아는 당황 대신 부끄러움과 기쁨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커다란 만족감이 이는 것을 느꼈다.
야생의 땅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해냈구나.
이번에도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을 했구나.
“에헤헤.”
코델리아가 수줍게 웃자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다는 듯 쿡쿡 웃은 에드워드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코델리아, 좋은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다. 어느 쪽부터 듣고 싶으냐?”
“어?”
좋은 소식과 좋은 소식? 그 중에서 고르라고?
코델리아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박이자 에드워드가 재차 말했다.
“좋은 소식과 좋은 소식이다. 어느 쪽을 먼저 들을지는 네게 맡기마.”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일까.
하지만 생각해보니 에드워드는 본래 이런 캐릭터이기는 했다.
“어··· 그럼 앞에 좋은 소식부터 들을래.”
“음, 탁월한 선택이다.”
“으응.”
대체 뭘 고른 걸지도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코델리아가 어설프게 웃자 에드워드는 괜히 시간을 끄는 대신 바로 이야기했다.
“게일의 상태가 급격히 좋아지고 있다. 아마 오늘 밤이나 늦어도 내일 오전 중에는 눈을 뜨지 않을까 한다.”
“정말?!”
“어, 정말. 그러니 너무 걱정 말아라. 의수도 내가 아주 쌈박한 걸로 구해줄 생각이니.”
아델리아가 실전 전투형 마법사라면 에드워드는 마도구 제작이 특기인 연구형 마법사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에드워드가 만든 의수라면 믿을 만 했다.
“하아··· 정말 다행이다.”
“그래, 다행이지.”
흐뭇하게 웃은 에드워드는 그대로 잠시 기다렸다. 코델리아가 두 번째 좋은 소식에 관심을 온전히 쏟을 수 있게 말이다.
“이제 들을 준비가 되었나?”
“어? 응. 듣고 싶어.”
두 번째 좋은 소식.
코델리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기대 섞인 눈빛을 보내자 에드워드는 돌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코델리아에게 예를 표했다.
“체이스 백작가의 에드워드 체이스가 체이스 자작님을 뵙습니다.”
“어?”
코델리아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고,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체이스 자작?”
“어, 체이스 자작. 큰 공을 세웠으니까. 작위가 오르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
맞는 말이었다.
정말정말 큰 공을 세웠으니 작위가 오를만도 하였다.
“와, 자작.”
체이스 자작.
체이스 남작이 아니라 자작.
“헤헤헷.”
코델리아는 행복한 얼굴로 빙긋빙긋 웃었고, 에드워드는 킥킥킥 웃더니 코델리아의 손을 슬쩍 들어올려 손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체이스 백작님, 다프네 왕세녀께서 직접 작위 수여식을 진행하실 거라 이미 언질을 주셨습니다.”
“그래요?”
“예, 그렇고 말고요.”
에드워드가 연극조로 나오자 코델리아 역시 연극을 하듯 응답해주었다.
그리고 몇 초.
코델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자, 잠깐. 체이스 백작?”
“네, 백작님. 남작에서 자작으로 승급하신 뒤에는 다시 백작으로 승급하실 예정입니다.”
국왕과 왕비들을 물론이고 그 자식들의 목숨까지 모두 구하였으니까.
그야말로 구국의 영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백작위 승급 정도는 당연했다.
“와, 백작. 그럼 유더두?”
“어, 바이엘 백작님이시지.”
체이스 백작과 바이엘 백작.
백작 부부.
“세상에.”
다시 자리에 앉은 코델리아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헤실헤실 웃었고, 에드워드는 그럼 코델리아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스칼렛도 인정한 말캉말캉함에 살짝 놀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체이스 백작님.”
“네, 에드워드 체이스 공자님.”
“더 좋은 소식이 있답니다.”
“어?”
여기서 더 좋은 소식이 있다고?
코델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에드워드는 악동같이 웃더니 얼굴을 가까이했다.
마치 유더라도 된 것처럼 코델리아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주었다.
세 번째 좋은 소식.
코델리아의 얼굴에 놀람과 기쁨이 동시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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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3장 - 공훈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