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4장 - 생명의 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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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폭탄이 벨키안에게 예고장을 보낸다는 행동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
‘벨키안 쪽에서 먼저 움직였으니까.’
건국 기념회로부터 이틀 뒤.
왕도의 혼란이 어느 정도 혼란이 잦아들자 벨키안은 푸른 달을 찾아가 핑크폭탄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로그 마스터를 만나기 위해 도둑 길드에 간다-는 꽤나 상식적인 발상의 결과였다.
어찌되었든, 난리 통에 빠른 후퇴를 택함으로써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던 푸른 달의 길드 마스터 주페는 유더가 미리 일러주었던 연락망을 통해 벨키안의 소식을 전해왔다.
‘어떻게 할까요?’
‘이쪽에서 연락을 취하겠다고 전해.’
왕도 결전으로부터 나흘째.
주페에게 뜻을 전한 유더는 열심히 요양하며 공훈식을 기다렸고, 공훈식이 끝난 다음날 아침 벨키안에게 핑크폭탄의 예고장을 보냈다.
“유더야, 아직 멀었어?”
“거의 다 왔어.”
귓가에 닿은 코델리아의 숨결에 저도 모르게 움찔한 유더는 반사적으로 답한 뒤 더욱 거칠게 지면을 박찼다.
벨키안과 만나기로 한 곳은 왕도 밖- 정확히는 로그 마스터의 마지막 유산이 숨겨져 있던 언덕 인근이었다.
“있다.”
타고난 시력만이라면 유더 이상인 코델리아였다.
거기다 밤눈까지 비상하게 밝으니, 어두운 밤중에도 야생동물 뺨치는 식별능력을 자랑했다.
‘몰라서 그렇지 야수지체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수인지체라든지.’
잠시 합리적인 의심을 하던 유더는 이내 코델리아를 고쳐 업은 뒤 속도를 조금 늦췄다. 유더의 눈에도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벨키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령술사 벨키안.’
영웅전기1편의 다섯 주인공들 가운데 하나.
1편 시점에서 이미 60대였던 그는 2편 시점인 지금은 70을 넘어 80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정정해보였다.
‘제대로 보이는 것도 별로 없지만.’
검정 일색의 옷으로 마르고 긴 몸을 감싼 그는 역병의사들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 부리가 달린 가면을 쓰고 있었다.
‘거기에 챙이 넓은 모자까지 썼고.’
덕분에 드러난 것이라고는 군데군데 하얗게 샌 곳이 보이는 잿빛 머리칼뿐이었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냐.’
영웅전기2편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들 중에는 누구도 부정 못 할 ‘악인’이 섞여 있었지만 1편의 캐릭터들은 그렇지 않았다.
다섯 모두가 고결한 정신과 순수한 선의를 지닌 진정한 영웅들이었다.
‘당장 이번에도 그랬고.’
왕도의 위급을 발견하자마자 앞뒤 잴 것 없이 전장에 뛰어든 벨키안이었다.
그리고 유더는 장담할 수 있었다.
1편의 주역들 가운데 누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한들 벨키안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저쪽도 우릴 본 거 같아.”
코델리아의 속삭임에 고개를 끄덕인 유더는 언덕 아래에 멈추는 대신 몇 번 더 발을 놀려 벨키안의 정면- 대략 1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안착했다.
“흠흠.”
유더가 멈추자마자 등에서 폴짝 뛰어내린 코델리아는 헛기침을 토하며 앞으로 나섰다.
뭔가 유더에게 업힌 채로 등장한 상황 자체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좀 멀찍이 내릴걸.’
뒤늦은 후회를 하며 나아간 코델리아는 벨키안의 7미터 앞쯤에 멈춰선 뒤 예를 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그 마스터 핑크폭···탄과 그 동료인 블랙망토··· 입니다.”
뭘까. 이 압도적인 민망함은.
그간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았는데 막상 벨키안 앞에서 육성으로 핑크폭탄과 블랙망토를 입에 담으니 절로 얼굴이 빨개진 코델리아였다.
‘그, 그래도 핑크폭탄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겠지?
민망해하지 않아도 되는 거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 표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벨키안은 누가 봐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그러니까 꽤나 민망해하는 것 같은 몸짓을 보이더니 헛기침과 함께 답했다.
“음··· 그래. 나는··· 벨키안이다.”
말을 섞는 것 자체가 괴롭지만 그래도 참고 한다는- 그런 어른의 고뇌가 느껴지는 대답이라고 해야 할까.
예상을 벗어난 벨키안의 대응에 코델리아는 순간 배신감을 느꼈지만 이내 이해할 수 있었다.
‘숨덕이었나 보네.’
숨은 덕후.
숨어서 덕질하는 사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벨키안은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였으니까.
핑크폭탄이란 이름을 쓰는 인물이 나오는 소설을 애독하는 모습 같은 걸 들켰다가는 이래저래 곤란할 터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후, 도저히 못 참겠군.”
돌연 작게 말한 벨키안은 코델리아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오지랖이라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다른 이름은 안 되겠나? 물론 취향일 테니 존중하고 싶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로그 마스터가 핑크폭탄이란 이름을 쓰는 건 좀······.”
상대하는 자신까지 이상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더욱이 로그 마스터의 위신이라는 것도 있고 말이다.
벨키안의 진심어린 말에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잠깐, 잠깐잠깐잠깐.”
저도 모르게 쏟아내듯 말한 코델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이었다.
“핑크폭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누가? 설마 내가 말이냐?”
코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벨키안은 질색하듯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난 널 오늘 처음 본다. 애당초 그날 편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핑크폭탄이란 이름 자체를 몰랐고.”
그야말로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더욱이 내용에도 문제가 있었다.
벨키안은 소설 주인공 핑크폭탄이 아닌, 눈앞의 핑크폭탄- 그러니까 로그 마스터 핑크폭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치 핑크폭탄이란 인물이 나오는 소설 따위는 아예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유더야?”
코델리아는 싸늘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고, 유더는 쓸쓸한 미소를 짓더니 애수에 찬 얼굴로 말했다.
“마침내 이 날이 오고야 말았군.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동안의 나날이 즐거웠으니까.
핑크폭탄이란 이름을 쓸 때마다 부끄러워하는 코델리아는 정말 최고였으니까.
유더는 뿌듯한 얼굴로 시선을 멀리하였고, 코델리아는 그런 유더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어 댔다.
“야! 비장하게 말하면 단 줄 알아? 엉?!”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핑크폭탄이 뭐야, 핑크폭탄이!
벨키안이 변태도 아니고 그런 이름을 좋아할 리가 없잖아!
내가 그동안 얼마나 민망했는지 알아?!
“음··· 잠시 자리라도 피해줄까? 뭔가 둘 사이에 풀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벨키안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코델리아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울상이 되어 말했다.
“으으으··· 아뇨, 괜찮아요.”
일단은, 일단은 벨키안이 우선이었으니까.
다시 한 번 유더를 째려본 코델리아는 아예 가면을 벗어던지고 재차 예를 표했다.
“코델리아 어거스트 체이스입니다.”
“유더 어거스트 바이엘입니다.”
코델리아에 이어 유더까지 본명을 밝히자 벨키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공훈식 때 봐서 이미 알고 있었다.”
벨키안 자신은 사람을 단순히 얼굴로만 보지 않았으니까.
전체적인 육신의 형태뿐만 아니라 생명력의 흐름까지 함께 보았기 때문에 얼굴을 가리는 정도로는 벨키안의 이목을 속일 수 없었다.
사실 벨키안이 결국 참지 못 하고 핑크폭탄에 대해 물은 것도 그래서였다.
공훈식 때는 멀쩡해 보였던 왕국의 새로운 영웅들이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이름을 쓰며 로그 마스터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으으으··· 다 유더 때문이에요.”
몰아가기가 아니라 정말 사실이 그랬으니까.
그리고 그런 코델리아의 말에 유더는 괜한 부정을 하는 대신 늘 그랬던 것처럼 화제 자체를 돌려 버렸다.
“항상 근육이 함께하기를. 철인 란디우스의 제자로서 다시 인사드립니다.”
“과연, 천무지체인가.”
란디우스 특유의 인사말에 흠칫했던 벨키안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 역시 구천구문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점점 더 알 수가 없군. 란디우스가 마침내 찾아낸 구천구문의 적법한 계승자가 생명의 관으로 나를 불러낸 상황인가.”
생명의 관이 들어 있었어야 할 상자에 편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애당초 왕도에 오지 않았을 벨키안이었다.
그리고 그랬다면 왕도에서의 싸움에 역시 끼어들지 않았을 터였다.
“전부 너의 노림수였나?”
“전부는 아닙니다. 절반 정도라 해야겠지요.”
“절반?”
“예, 절반. 일단 저희가 생명의 관이 들어있던 상자에 편지를 남기긴 했지만 벨키안 님을 생각하며 남긴 편지는 아니었습니다. 누가 편지를 발견할지는 저희도 알 수 없었으니까요.”
맞는 말이기는 했다.
유더가 상자에 남긴 편지에는 핑크폭탄이 생명의 관을 가져간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벨키안을 명시한 말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조금 이상한 이야기군. 편지를 발견한 자가 내가 아니었다면··· 오히려 너희를 적대하는 자였다면 어찌할 생각이었던 거지?”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근거는?”
“예언이 있었거든요.”
작게나마 미소를 보인 유더는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생명의 관을 통해 큰 조력을 얻게 될 거란 예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남긴 것이고요.”
“누구의 예언이었지?”
“서쪽 숲의 마녀입니다.”
유더의 말에 벨키안은 순간 흠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영혼이 해방되었다는 이야기를 사령들에게 듣기는 했다만··· 그녀를 풀어준 것이 너희들이었나?”
“예, 우연찮게 연이 닿아 그리하게 되었습니다.”
“우연이라.”
피식 웃은 벨키안은 이내 자세를 바로하며 말했다.
“좋다, 서쪽 숲의 마녀가 자신을 해방시켜준 대가로 해준 예언이라면 믿을 수 있겠지. 비록 악마들과의 계약으로 인해 영락한 그녀지만, 그녀는 우리들 인간의 편이니 말이다.”
물론 마녀의 숲에 봉인되어 있던 서쪽 숲의 마녀는 그런 예언 따위 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벨키안을 납득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강 납득한 것 같고.’
속으로 빙고를 외친 유더는 코델리아에게 눈짓을 보냈고, 코델리아는 챙겨온 생명의 관을 꺼내들었다.
“벨키안 님 덕분에 왕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어요. 감사의 뜻으로 생명의 관을 드릴게요.”
코델리아가 그리 말하며 생명의 관을 조심스럽게 내밀자 벨키안은 바로 받아드는 대신 가면 속에서 미간을 좁혔다.
“나는···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어찌 두고 보기만 한단 말인가.
벨키안의 말에 코델리아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게일 아주버님도 구해주셨고, 그로 말미암아 저희 언니까지 구해주셨어요.”
만약 게일이 그대로 전사했다면.
그랬다면 아델리아는 어찌되었을까. 그녀의 마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건··· 그 게일이란 녀석의 영혼이 강한 덕분이다. 난 오히려 그 아이를 방치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벨키안 님께서 주신 약이 아니었다면 아예 회생의 여지조차 없었겠죠.”
괜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벨키안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후··· 어쩔 수 없군. 하지만 그냥 받지는 않겠다. 잠시 빌려 쓰다가··· 용무가 끝나면 너희에게 돌려주마.”
예상대로의 대답이었다.
벨키안의 성격상 생명의 관 정도 되는 성물을 거저 받으려 할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진 하나.
‘역시 뭔가 특별한 목적이 있는 건가.’
정황상 벨키안은 우연히 생명의 관을 손에 넣은 것이 아니었다. 생명의 관을 찾아 헤맨 끝에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곧 벨키안이 생명의 관이 필요한 어떤 일을 준비 중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빌려 쓰다가 용무가 끝나면 돌려주겠다는 것도 그렇고.’
과연 무엇일까.
벨키안은 생명의 관을 어떤 일에 쓰려는 것일까.
그리고 어쩌면 그 일이 벨키안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유더가 애당초 벨키안을 왕도로 불러낸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운 좋게 타이밍이 잘 맞으면 왕도에서의 결전에서 벨키안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였고, 다른 하나는 역사를 뒤틀어 벨키안의 죽음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본래 원작에서는 이 시기에 벨키안이 왕도에 있지 않았다.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되었든 왕도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왕도에 있었다.
원작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생긴 셈이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죽음을 피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이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지만.’
원작에서 벨키안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죽었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때문에 유더는 벨키안이 죽음을 피할 절대적인 방안 같은 것은 만들어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안전 장치 정도는 마련할 수 있었다.
‘벨키안의 성격이라면······.’
1편에서의 행적 등을 조합해본다면 그냥 이대로 생명의 관을 받고 나중을 기약하며 떠날 리가 없었다.
사령술사이기 이전에 벨키안은 마법사였고,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일을 막연하게 처리하지 않았다.
“대신이라 하기는 뭐하지만 이걸 받아라.”
생명의 관을 받아든 벨키안은 코델리아에게 투명한 보석이 박힌 장신구를 하나 내밀었다.
“나를 소환할 수 있는 마법구다.”
“네? 어, 잠깐. 벨키안 님을 소환하는 마법구라고요?”
“그래, 그 마법구를 사용하면 단 한 번이지만 나를 소환할 수 있다.”
코델리아에게 답한 벨키안은 장신구의 한쪽 끝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나는 생명의 관을 사용한 모종의 작업에 착수할 거다. 그리고 그 작업이 끝나면 이 보석에 황금빛이 어릴 거다.”
“그때부터··· 소환이 가능한 건가요?”
“그래, 마법사답게 이해가 빠르구나.”
벨키안의 칭찬에 코델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유더를 돌아보더니 눈빛을 보냈다.
‘우리 예상대로 된 거 같지?’
‘어, 이게 있으면 여차 할 때 벨키안을 소환해서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거야.’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가 아닌 벨키안의 목숨을 말이다.
물론 생명의 관을 사용한 모종의 작업을 진행 중일 때는 소환이 불가능한 터라 그 사이에 무언가 일이 생긴다면 도리가 없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상쇄할 방법이 있었다.
“왕도에 남으실 생각이십니까?”
“일단은 그럴 생각이다. 그러니 어쩌면 너희도 막상 그 마법구를 쓸 일이 없을지 모르겠구나.”
“그럴지도요.”
부드럽게 웃으며 답한 유더는 코델리아에게 눈빛을 보냈고, 코델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벨키안이 하려는 모종의 작업이 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그가 왕도에 머물고, 왕실의 지원을 받는다면 적어도 그 작업이 끝나기 전까지는 혼자 어딘지 모를 곳을 방황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안전할 터였다.
“어찌되었든 잘 챙겨둬라. 일단 날 불러내면 소환수답게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 도울 터이니.”
“예, 감사합니다.”
약간이지만 장난기 섞인 대답에 마주 미소 지은 유더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애당초 게일과 왕도를 구해준 벨키안에게 이것저것 따져가며 거래를 할 생각이 없던 유더인 터라 이 정도면 얼추 일이 잘 마무리 된 셈이었다.
‘그렇지?’
‘응응.’
코델리아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그럼··· 일단 오늘은 이 정도로 할까?’
벨키안이 왕도에 남기로 했으니 남부로 떠나기 전에는 몇 번 더 만날 기회가 있을 터였다.
일단의 목표를 이뤘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날 것 같았다.
‘그러자.’
눈빛으로 답한 코델리아는 벨키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벨키안 님,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코델리아가 예를 표하자 벨키안은 잠시 고민하듯 턱을 어루만지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헤어지기 전에 너희에게 주고 싶은 게 하나 더 있다. 부디 사양하지 말고 받아주었으면 한다.”
“네?”
코델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벨키안은 쿡쿡 웃더니 가볍게 손을 놀렸다.
그러자 허공에서 커다란 팬텀 스티드 두 마리가 나타나 벨키안의 양 옆에 자리했다.
“내가 직접 만든 팬텀 스티드들이다. 하늘도 날 수 있고, 속도도 빠른데다가 지치지도 않지.”
“와아.”
이전에 유더와 말의 지구력에 대해 나눈 이야기가 생각난 코델리아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자 벨키안이 기분 좋게 말을 이었다.
“너희에게 주도록 하마.”
“정말요?”
“그래, 업고 다니는 모습이 보기는 좋다만··· 아무래도 이쪽이 더 효율적일 터이니 말이다.”
가면 속에서 미소 지은 벨키안은 코델리아에게 팬텀 스티드들을 소환할 수 있는 반지를 넘겨주었다.
“각자 하나씩 타면 될 거다.”
훈훈하기 짝이 없는, 그야말로 어르신다운 벨키안의 통 큰 배려였다.
벨키안이 넘겨준 팬텀 스티드들은 일반적인 팬텀 스티드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들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더는 어쩐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런 게 생기면 앞으로 코델리아를 업고 다닐 일이 없어질 터이니 말이다.
‘음··· 뭐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사실 지금까지 내내 업고 다닌 게 더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더욱이 기동성 면에서나 전술적인 면에서나 업고 다니는 것보다는 각자 팬텀 스티드를 타고 다니는 쪽이 훨씬 더 나았으니, 받아들여야만 하는 변화였다.
‘그래도 살짝 섭섭하기는 하네.’
유더 자신과 달리 희희낙락하기만 하는 코델리아가.
‘하긴, 예전부터 저렇게 커다란 탑승물에 환장했으니까.’
코델리아가 기뻐한다면 그걸로 된 거겠지.
마음을 정리한 유더는 기쁜 마음으로 반지를 받아들었고, 벨키안은 시범을 보이듯 자기 몫의 팬텀 스티드를 올라타더니 그대로 왕도의 밤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어··· 설마 저러고 그냥 가는 거야?”
뒤 한 번 안 돌아보고?
코델리아의 말에 유더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어떤 의미로는 란디우스 스승님보다도 호탕한 양반이니까.”
“뭐··· 그렇긴 하지.”
고개를 몇 번 끄덕인 코델리아는 벨키안이 사라진 밤하늘을 바라보는 대신 팬텀 스티드들을 향해 돌아섰다.
티 하나 없이 새카만 갈기와 털, 그 사이에서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
“유더 닮았어.”
“어디가?”
“속이 까만 거랑 눈동자 색이?”
코델리아의 대답에 유더는 미간을 한 번 좁히더니 이내 자기 몫의 팬텀 스티드에 올라타며 말했다.
“우리도 슬슬 가자.”
“응, 그런데 유더야.”
“어?”
유더의 되물음에 코델리아는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이더니 슬쩍 자기 몫의 팬텀 스티드를 반지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꼬며 말했다.
“팬텀 스티드 유지하는 것도 결국엔 마력이니까··· 굳이 둘 다 마력을 쓸 필요는 없겠지?”
그 말이 의미하는 것.
코델리아는 굳이 입에 담지 않았고, 유더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쇤네가 모시지요. 앞이랑 뒤 중에 어디가 좋으신지요.”
“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유더는 언제나처럼 손을 내밀어 코델리아가 팬텀 스티드에 올라타는 것을 도와준 뒤 고삐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코델리아는 대답하는 대신 유더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고, 유더는 결국 작게나마 웃음을 터트렸다.
팬텀 스티드를 몰아 왕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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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4장 - 생명의 관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