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5장 - 바람의 늑대 >
제75장 - 바람의 늑대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코델리아는 어찌 보면 사소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으으으··· 어쩌지?’
고민거리는 체벌이었다.
핑크폭탄이란 이름을 쓰기 위해 유더가 한 거짓말에 대한 체벌 말이다.
‘딱히 막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니니까 그냥 짓궂은 장난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안 될 말이었다.
악의가 있든 없든 이런 걸 한두 번 받아줘 버릇하면 소위 말하는 나쁜 버릇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아니, 용법이 좀 다른가?’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맞아, 예전에 남만고양이 언니도 그랬잖아. 여, 연애는 기 싸움이 중요하다구. 초장에 밀리면 끝이라구.’
같이 놀던 채팅방 멤버들 중에서 유일하게 코델리아 자신의 나이와 성별을 모두 알고 있던 옆집 언니의 조언을 떠올린 코델리아는 다시 골똘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떤 체벌을 줘야 할까.
막 때려줘야 할까?
‘그건 좀 너무 폭력적이구······.’
유더가 지금 코델리아의 말을 들었다면 ‘옛날에는?’이라며 코델리아에게 얻어맞은 일들을 하나하나 언급할 터였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이었다.
예전과 달리 유더를 때린다는 행동 자체에 묘한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유더는 전부터 그랬지?’
야생의 땅에서 엔디미온 지하를 헤매고 당시에 있었던 일.
코델리아로 변신한 괴물을 차마 때리지 못 해 고전에 고전을 거듭했던 유더를 떠올린 코델리아는 배시시 미소를 그렸다.
‘그때부터 좋아했다 이거지? 흥흥.’
티 안내려고 어떻게 참았나 몰라?
그리고 뭐랄까, 기특하다고 해야 할까?
‘그냥 용서해줄까?’
마음이 좀 누그러진 코델리아는 입술을 움츠리며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될 말이지. 응응.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혼낼 건 혼내야지.
화낼 건 화내고.
“아가씨?”
으··· 그럼 대체 어떤 벌을 줘야 하지? 무릎 꿇고 손들고 있으라고 하면 진짜 하려나?
뭔가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일 거 같은데.
“아가씨?”
엉덩이라도 때려줄까?
창피하라고 바지까지 깐 다음에 찰싹찰싹?
‘으으음··· 그건 좀 아닌 것 같구······.’
뭔가 때리는 쪽이 더 창피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누가 봐도 문제였고 말이다.
그러니까 뭔가 다른, 뭔가 좀 더 벌이 되면서도 이상하지 않고··· 유더 버릇도 고쳐줄 수 있는······.
“아가씨!”
“어?!”
깜짝 놀란 코델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묘한 소리를 토하자 바로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던 달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죠?”
“응? 아, 아니. 아무 일도 없었는데?”
“있었군요. 있었어. 설마 선을 넘었다든가?”
“무, 무슨 선.”
“그렇고 그런 선.”
달리아의 말에 코델리아는 두 손을 마구 허우적거리다 다시 자리에- 정확히는 소파 위에 털썩하고 앉았다.
“그,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좀 고민할 일이 있어서 그래.”
“뭔데요? 저한테 말씀해 보세요.”
“응?”
“제가 아가씨보다 나이도 많고 사회 경험도 많고 연애 경험도··· 아무튼 많지 않겠어요?”
“마지막 말은 살짝 신뢰가 안 되는데······?”
“사람을 어떻게 보시고.”
“하긴, 달리아는 미인이니까. 성격도 좋구.”
코델리아가 납득한다는 듯 담담히 말하자 달리아는 오히려 뺨을 살짝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흠흠. 아무튼 제게 말씀해 보세요.”
“음··· 그러니까 이건 내 친구 이야기인데······.”
“그렇군요, 친구 이야기군요.”
“응, 친구 이야기야.”
코델리아의 말에 달리아는 살짝이지만 고민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일단 들어보자.’
우리 순진한 아가씨가 입을 열게 하려면 일단 장단을 맞춰줘야겠지.
쓰게 웃은 달리아는 계속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추임세를 넣었다.
“친구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응? 어. 문제가 하나 있다더라고. 참고로 그 친구 이름은 스칼렛이야. 가공의 인물 같은 게 아니라구. 알았지?”
“그렇군요. 스칼렛. 알겠습니다.”
제가 모르는 아가씨 친구가 있을지 의문이지만 일단 그렇게 알도록 하죠.
뒷말은 생략한 달리아가 계속 해보라는 듯 눈짓을 보내자 코델리아는 흠흠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그러니까······.”
코델리아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스칼렛의 애인이 스칼렛에게 거짓말을 하나 했다. 막 나쁜 거짓말은 아니고, 스칼렛의 귀여운 모습이 보고 싶어서 한 장난꾸러기 같은 거짓말이었는데, 아무튼 거짓말은 거짓말이니 혼을 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떻게 혼을 내줘야 할지, 어떤 벌을 줘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흠. 그랬군요. 그렇게 안 봤는데 거짓말도 한다 이거군요.”
“응? 이, 이거 내 친구 이야기거든? 달리아는 그 친구랑 그 친구 애인 모르지 않아?”
“음, 그렇죠. 아무튼 중요한 건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다. 그럼 아가씨 말대로 벌을 주는 게 맞겠죠. 그냥 방치하면 정말 나쁜 버릇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아니, 스칼렛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어!”
그럴 때는 그냥 친구로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게 덜 의심스럽답니다.
마음속으로만 살짝 조언한 달리아는 다시 턱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
“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 친구의 애인도 좋아하는 일 같은 게 있겠죠?”
“좋아하는 일?”
“예, 가능하면 그 친구 분이랑 같이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요.”
“어······.”
코델리아는 달리아처럼 턱을 만지며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내 한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유더가 정말 좋아하는 것.
요즘 들어 시도 때도 없이 하려고 하는 것.
거기다 달리아 말마따나 유더 혼자서는 할 수 없고, 코델리아 자신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
“이, 있어!”
“그럼 그걸 못 하게 하죠.”
“어?”
“좋아하는 일을 못 하게 하는 겁니다. 기간 한정으로?”
거기까지 말한 달리아는 팔짱을 끼더니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체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싫어하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 하게 하는 거죠.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애인에 대한 체벌이라면 후자가 더 날 겁니다. 반성하게 하는 효과도 있을 거고요.”
“오오오······.”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싫어하는 일을 하게 하는 것과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 하게 하는 것.
그렇다면 역시 후자가 날 것 같았다.
‘나도 게임 못 하게 하면 미칠 것 같았으니까.’
잠시 전생의 일을 떠올린 코델리아는 좋은 해결책을 찾았다며 활짝 웃었지만 이내 다시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유더가 요즘 한창 빠져든 일.
그러니까 툭하면 코델리아 자신의 이마나 뺨에 가벼운 키스를 하는 걸 못 하게 하면-
‘나, 나도 싫은데.’
아니, 그 막 좋은 건 아닌데, 그렇다고 아예 못 한다고 생각하면 으으음······.
코델리아는 빨개진 얼굴로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고, 달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가씨?”
“으으으··· 좋아. 어쩔 수 없지. 버릇을 고치는 게 더 중요해.”
그냥 아예 한동안 스킨십을 전면 금지 시키자. 손도 잡지 말아야지. 에스코트도 못 하게 해야지.
코델리아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결심하자 달리아는 턱을 괴며 말했다.
“그래서, 정하셨어요? 유더 공자한테 금지하실 일은?”
“어, 정했어. 확 추진해버릴 거야.”
“예, 잘하셨어요. 스칼렛 양에게도 인사 전해주시고요.”
“응? 어··· 응. 그래야지. 어, 스칼렛 고민이니까.”
얼굴이 빨개져서 우물쭈물 말하는 코델리아의 모습에 결국 미소를 흘리고 만 달리아는 작게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걱정 된다, 걱정 돼.’
우리 아가씨 마법 잘 쓰시는 거 보면 분명 똑똑하신 걸 텐데 이런 쪽으로는 왜 이렇게 어두우실까.
뭐··· 이렇게 순진하신 것도 아가씨의 매력이기는 하지만.
“달리아?”
“아뇨, 아무튼 곧 유더 공자가 오실 텐데 준비하셔야죠.”
“응!”
강하게 답한 코델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약 한 시간 뒤.
“전면··· 금지?”
“어, 앞으로 일주일간은 전면 금지야. 왜인지는 알지?”
“흠······.”
코델리아의 엄포에 유더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응?”
“그렇게 할게.”
“어··· 응.”
뭐지, 이 드라이한 반응은?
좀 더 막 울상이라도 지을 줄 알았는데?
당황한 코델리아는 슬쩍 달리아 쪽을 돌아보았고, 달리아는 눈짓으로 답했다.
‘괜히 센 척 하는 거예요.’
유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코델리아와 어느 정도 마음이 통하는 달리아였다.
코델리아는 바로 고개를 끄덕인 뒤 턱을 치켜세웠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아, 그런데 어떡하지?”
“뭐가?”
“잊었어? 오늘 북부 귀족들 간의 송별회가 있잖아.”
“어? 아, 맞다. 오늘이었지?”
건국 기념일로부터 벌써 이레가 지난 지금이었다.
왕도 자체가 어수선하여 예정보다 일정을 늦추기는 했지만, 애당초 건국 기념회를 보기 위해 모였던 귀족들이라면 슬슬 귀향길에 올라야 할 시점이었다.
전생 때와 달리 이곳 플레이아데스에서는 지역적으로 가깝거나 정말 절친한 사이가 아니면 다른 지역의 친지들을 만나는 건 정말 요원한 일이었다.
때문에 북부 귀족들은 귀향길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 같이 모이는 회합을 가지기로 하였는데,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거기 가려면··· 에스코트를 해야 할 텐데······.”
유더가 슬쩍 말꼬리를 흐리며 코델리아를 보았고, 코델리아는 입술을 삐쭉이더니 이내 흥 소리를 내며 말했다.
“좋아, 그럼 에스코트는 허락할게. 하지만 딱 에스코트까지만이야?”
“알겠습니다. 허락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공주님.”
유더는 능글맞게 웃더니 코델리아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고, 코델리아는 다시 한 번 마음깊이 다짐했다.
‘에스코트까지만이야! 에스코트까지만!’
그 이상은 무조건 아웃!
코델리아는 몇 번이나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달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지금도 유더가 코델리아의 손등에 입술을 맞춘 마당이었으니 말이다.
‘뭐··· 알아서 잘 하시겠지.’
한숨을 내쉰 달리아는 어깨를 늘어트렸고, 반대쪽에서 지켜보던 마이아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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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귀족들의 송별 모임은 크로스벨 백작가가 왕도에 소유한 저택에서 개최되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실비아네 저택이 제일 크거든.’
이러나저러나 북부12가문 가운데 가장 부자인 건 크로스벨 백작가였으니까.
어찌되었든 으리으리한 크로스벨 가문의 저택에 입장한 유더와 코델리아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 날의 코델리아 양은··· 아니, 어거스트 체이스 백작님은 정말 천사 같으셨답니다.”
“그렇게 아름다우셨어요?”
“물론이죠! 단순히 아름다운 게 아니라 성스럽기까지 했으니까요!”
호들갑을 떨며 코델리아를 찬양하고 있는 소녀가 하나.
그런데 그 소녀가 참으로 낯이 익었다.
‘엠마 파이커스?’
코델리아가 깜짝 놀라 유더를 돌아보자 유더는 의외로 놀라기는커녕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이제야 세상의 진리에 눈을 뜬 모양이군.’
유더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뭐, 뭐라는 거야.’
‘아니, 왜. 너 천사 맞잖아. 엄청 예쁜 것도 맞고. 아니야?’
유더의 직설적인 눈빛에 코델리아는 뺨을 붉히며 허둥거렸다.
전부 사실이긴 했지만, 사실이라 하여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한다니, 상상만으로도 수치사 할 것 같은 코델리아였다.
‘어찌되었든 인사나 좀 해주자.’
‘어? 그, 그냥 모른 척 하면 안 될까?’
지금 보면 좀 많이 민망할 거 같은데?
하지만 코델리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미 인기척을 낸 유더였다.
유더의 기운에 등을 맞은 엠마 파이커스는 무심코 돌아섰고, 그대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코, 코델리아 양?”
“에, 엠마 양.”
코델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고, 엠마 파이커스는 빨개진 얼굴로 다시 허둥거리기 시작했는데, 어째 코델리아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른 반응이었다.
정확히는 얼굴을 붉힌 이유가 말이다.
‘기뻐하고 있군.’
유더의 분석은 언제나와 같이 정확했다.
엠마 파이커스는 지금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는 게 아니었다.
마치 선망하던 아이돌 가수를 만난 팬처럼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정말 감사했어요.”
“네? 어··· 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어쩜··· 저는 그렇게 못되게 굴었었는데······.”
코델리아의 한 마디에 크게 감동한 엠마 파이커스는 눈시울을 붉혔고, 주변에 있던 영애들은 다들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엠마 파이커스와 코델리아를 보았다.
그리고 그렇기에 코델리아는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아니 왜 이러는데!’
목숨 한 번 구해줬다고 사람이 이렇게 바뀌어도 되는 거야?!
묘하게 인명경시스러운 발언이었지만, 다행히 간파할 수 있는 것은 유더뿐이었다.
“코델리아 양··· 아니, 어거스트 체이스 백작님. 그날의 백작님은 정말이지······.”
엠마 파이커스는 코델리아의 손을 꼭 잡으며 신앙 간증을 시작했고, 덕분의 주변의 주목도는 더욱 높아져 갔다.
‘아니이, 나 그렇게 막 착한 애 아니거든? 천사인 건 맞는데, 천사이긴 한데, 그렇다고 막······ 아으으, 제발.’
꼭 붙잡은 손을 쳐낸다는 건 이러나저러나 진짜 천사인 코델리아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덕분에 손을 붙잡힌 채로 민망하기 짝이 없는 칭찬 세례를 들어야 했고, 주변의 시선 때문에 민망한 가운데도 엠마 파이커스에게 미소를 지어줄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 왜 그렇게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는 건데!’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엠마 파이커스가 껄끄러워진 코델리아는 구조요청을 하듯 유더를 돌아보았지만, 능글맞은 얼굴로 웃기만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구해줄 마음은 요만큼도 없는 모양이었다.
‘너 미워! 너 싫어!’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코델리아에게 구원의 손길이 내밀어진 것은.
“어거스트 체이스 백작님.”
‘실비아 언니이!’
일단 이 송별회의 호스트라 할 수 있을 실비아가 등장해 말을 거니 엠마 파이커스도 잠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파이커스 양, 죄송하지만 백작님께서는 저와 선약이 있으셔서요. 새로운 샴프와 린스 판권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나누기로 한 터라······.”
“네, 맞아요. 그러기로 했어요. 엠마 양, 죄송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정말 중요한 일이라서요.”
코델리아는 필사적으로 말했고, 그 기세에 눌린 엠마 파이커스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물러섰다.
“흐아아··· 언니 정말 고마워요.”
“말씀 낮추시죠. 백작님이신데.”
“그럼 언니는 차기 크로스벨 백작님이시잖아요.”
코델리아가 애교 있게 나오자 실비아는 피식 웃더니 연회장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말해둔 게 있으니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우긴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코델리아를 도둑맞은 유더는 쓰게 한 번 웃더니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러나저러나 이번 왕도 결전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만큼 유더에게 쏠리는 관심 역시 어마어마한 터라 말을 걸려고 다가오는 이들이 많고 또 많은 판국이었다.
하지만 유더는 코델리아와 달리 요령이라는 게 있었다.
적당히 상대하는 척하며 때를 봐 밀어내니, 어느새 유더의 곁에는 루카스 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겨우 둘만 남았네요.”
“그러게요. 일단··· 감사부터 표하고 싶습니다. 병문안을 두 번이나 오셨다고 마이아가 그러더군요.”
“당연한 일이었는걸요. 이렇게 무사히 쾌차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루카스가 사람 좋게 웃자 유더는 따라 웃으며 잠시 머릿속을 점검해보았다.
코델리아처럼 서로 짝지어주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루카스가 스칼렛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으니 어떻게 연결해줄 방법이 없나 고민이 되어서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유더 공자, 들으셨습니까?”
유더의 강권에 못 이겨 어거스트 바이엘 백작에서 예전처럼 유더 공자로 호칭을 바꾼 루카스의 말에 유더는 일단 생각을 끊고 관심을 보였다.
“어떤 이야기신지.”
“무투회가 개최된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오늘 오후에 정식으로 공표한다더군요.”
루카스의 말에 유더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코델리아와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오늘 오전에 아버지께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왕실의 건재함을 보여야 할 테니까요.”
“예, 아르곤 제국에도 말이죠.”
이 시국에 무투회를 강행하려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는데, 그 중에는 ‘십검호의 부재’가 있었다.
제국을 두 번이나 격퇴한 호국공과 검문 제일이라 불리던 빛의 검성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십검호 가운데 둘이 사라졌으니, 그 공백을 하루라도 빨리 채워야만 했다.
‘제일검의 자리는 몰라도 호국공의 자리는 쉬이 채워지지 않겠지만.’
이러나저러나 단순히 강한 검사에 불과했던 제일검과 달리 호국공은 세일룬 방위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으니, 대체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수수방관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검호가 필요해.’
바이엘 백작을 ‘바람의 검성’으로 내세워 빛의 검성의 자리를 채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두 명이 나갔으니,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새로운 검호가 탄생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은 게일 역시 그 후보다.’
오늘 오전에 아버지께서 하신 이야기.
왕국에는 게일 외에도 ‘차기 십검호’라 불리던 젊은 기사들이 여럿 있었다.
이번에 그들을 불러 모아 실력을 증명케 한 뒤 적어도 한 명 이상에게 십검호의 자리를 내준다는 것이 왕실의 계획이었다.
‘이번 건국 기념회에 참여하지 않았던 인재들에게도 소집령이 내린 모양이다.’
세일룬 왕국 최정예 기사단인 황금 사자 기사단 내에서도 특히 두각을 드러내어 사자검이란 별칭을 얻은 리처드 갈레온.
북부를 지키는 갈까마귀들 중에서 가장 빠르고 거친 검을 가졌다고 알려진 아이오스 레인.
카이사의 오빠이자, 남부에서는 바다의 재앙이라 불리는 시 서펜트 슬레이어 칼릭스 오펀드.
‘여기에 형까지인가.’
저 넷 가운데 적어도 하나. 가능하면 둘을 새로운 십검호로 추대한다.
물론 넷 모두 기대 이하의 기량을 보이면 아예 없던 이야기가 될 터였지만, 어찌되었든 왕실의 의도가 꽤 명확한 이벤트라 할 수 있었다.
“개최는 앞으로 닷새 뒤··· 꽤 급하게 열리는 감이 있지만 무투회 자체는 본래 예정되어 있던 행사인만큼 진행 자체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솔직히··· 정말 기대가 됩니다.”
루카스가 눈을 빛내며 말하자 유더는 쓰게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무투회는 유더와 루카스에게도 아주 무관한 이벤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성인부도 있다 이거지.’
20세 이상이 참가하는 성인부와 그 이하의 연령대가 참가하는 청소년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는 건 오랜만이군요.”
“그러게요.”
세일룬 왕실이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무투회는 단순한 일대일 대결의 장이 아니었다.
북부와 중앙과 남부가 각기 편을 나눈 뒤 한 자리에 모여 큰 싸움 한 번으로 승패를 가르는, 대련이라기보다는 전쟁에 가까운 형태의 단체전이었다.
‘얼티메이트 원을 찾으러 가기 전에 왕도에서 수행할 마지막 이벤트인가.’
나쁘지 않았다.
루카스와 간만에 호흡을 맞춰보는 것도 좋은 일이었고, 뭣보다 일단 대회인 만큼 우승하면 꽤 짭짤한 상품이 나올 터였다.
‘재활의 결과를 시험해 보기도 좋고.’
여전히 불완전한 육문이었지만 검은 태양을 어느 정도 안정화 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니까.
‘남부에서 누가 올지 궁금하네.’
중앙에서야 황금 기사단과 검문에서 추가로 인원이 파견될 터인데 남부에서는 누가 또 올라오려나.
가만히 남부의 인재들을 머릿속에 떠올린 유더는 이내 자신이 왜 이렇게 흥분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처음 겪는 이벤트니까.’
왕실이 전멸한 원작에서는 무투회가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도 역시 무투회는 열리지 않았다. 세일룬 왕국 자체가 사실상 멸망해버렸으니 말이다.
때문에 유더는 세일룬 왕국 특유의 집단 무투회를 설정으로만 접했을 뿐, 실제로 경험해보지는 못 하였다.
그런데 그런 무투회가, 환상의 이벤트가 개최된다고 하니 절로 미소가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썩은물이긴 하구나.’
신규 컨텐츠에 환장하는 걸 보니.
작게 웃은 유더는 시선을 멀리해 또 다른 썩은물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고,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엠마 파이커스의 두 번째 맹공에 시달리던 코델리아가 이쪽을 향해 필사적인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유더야! 유더야! 도와줘어!’
열심히 헬프 치는 저 모습을 어찌 외면하겠는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루카스에게 양해를 구한 유더는 코델리아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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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5장 - 바람의 늑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