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219화 (219/473)

< 제78장 - 영원의 숲 #3 >

&

영웅전기2편의 전개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었다.

초반부에 해당하는 각자의 사정.

열한 명이나 되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은 각자 시작하는 시점도, 시작할 당시의 상황도 다르다보니 십인십색이란 말처럼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구간이었다.

이때는 오히려 루트가 겹치지 않는 캐릭터들이 나았는데, 루트가 겹칠 경우 어느 한 쪽이 스토리 내에서 망가져 버리거나, 타락하거나, 죽어버리는 경우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코델리아와 루카스처럼.’

싱글 모드에서 두 사람이 양립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코델리아로 진행을 하면 루카스가 마인이 되었고, 루카스로 진행하면 코델리아가 완전히 타락해 악마가 되어버렸다.

‘어찌되었든 북부, 중앙, 남부의 사건은 여간하면 초중반부라 할 수 있어.’

코델리아나 루카스처럼 제법 일찍 이야기가 시작되는 캐릭터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세일룬 왕국에 연달아 일어난 저 세 가지 사건을 전후하여 각자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카이사는 말레키스의 공격에서 탈출하는 게 초반 스토리니까.’

원작에서 남부는 말레키스와 용군단에 의해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버린다.

혼란한 와중에 어떻게든 가솔들을 이끌고 남부를 탈출하는 것이 카이사의 이야기였다.

‘중반에 해당하는 것이 7대 재앙.’

연달아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이미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세일룬 왕국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나아가 제국까지 몰락으로 이끈 일곱 개의 재앙과 같은 존재들.

원작에서는 결국 7대 재앙 모두를 격파하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 누적된 피해가 너무 커 결국 양대 강국 모두가 멸망하고 말았다.

‘여기서 끝이라면 그래도 새로운 희망 운운할 수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 다음이, 이야기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악마 추종자들과의 최종결전.’

이미 7대 재앙 사건 당시에 암약하고 있던 악마 추종자들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부분이었다.

대소환을 일으키려는 악마 추종자들과 이를 막기 위해 마지막 싸움에 나서는 영웅들.

하지만 이 싸움에서 결국 승리한 것은 악마 추종자들이었다.

대소환의 결과 지상에는 천국과 지옥이 강림하였고, 지옥의 대군주들과 천계의 대천사들은 지상을 전장 삼아 선과 악의 대전쟁- 아마겟돈을 일으킨다.

‘그리고 세계는 대충 멸망했습니다.’

지옥과 천계의 멸망이 아니었다.

전장이 된 지상의 멸망이었다.

인간들이 세운 국가는 하나도 남긴 없이 모두 붕괴하였고, 전쟁의 여파로 남아 있던 인류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이제는 게임 속 이야기가 아닌 현실이었다.

유더 자신의 목숨도 목숨이었지만, 코델리아나, 코델리아나, 코델리아 같은, 여기에 게일과 아델리아 등등이 전란에 휩쓸려 목숨을 잃을 거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손발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어찌되었든 중반부에 해당하는 것이 7대 재앙과의 싸움.’

그중 하나인 만변의 자바워크는 이름 그대로의 존재였다.

‘만변.’

만 가지 변신.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괴물.

자바워크는 동명의 마인인 악마의 뿔의 최상급 마인 자바워크와 합체하여 진정한 재앙으로 거듭났는데, 마주한 이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덕분에 보스전 형태가 캐릭터마다 달라서 인기가 좋았지.’

플레이어블 캐릭터에 따라 난도 역시 달라졌고.

어찌되었든 정말 만변의 자바워크라면 이건 기회였다.

‘아직 자바워크랑 합체하지 않았어.’

동명의 마인 자바워크와 하나가 되지 않았다.

야생의 땅에서 쓰러트린 눈의 여왕처럼 지금이라면 놈을 조기에 제거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재전죽이다, 재전죽.’

재앙이 되기 전에 죽인다.

그리고 어쩌면 이로 말미암아 영원의 숲과 엘프들을 모두 구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럼 완전 든든하지.’

재앙 앞에는 인간이고 엘프고 없었으니까.

분명 앞으로 닥칠 7대 재앙과의 싸움에서 든든한 우군이 되어줄 터였다.

‘더욱이 지금이라면 엘프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고.’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물론 자바워크가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면 후퇴해서 전력을 보강한 뒤 2차전을 노려야겠지만, 그것도 일단 붙어봐야 아는 일이었다.

“왜 그러지? 혹시 자바워크에 대해 아는 건가?”

라이카 왕녀의 물음에 흠칫한 코델리아는 입술을 움츠렸고, 유더는 언제나처럼 자연스럽게 답했다.

“예, 사실 저희는 성십자 수호단 소속입니다. 이전에 수호단 본부에서 숲의 괴물 자바워크에 대한 기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오, 성십자 수호단이 건재했구나.”

라이카 왕녀가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로 말하자 코델리아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성십자 수호단을 아세요?”

“알고 있다. 영원의 숲의 결계가 펼쳐지기 전에, 그러니까 아직 인간들과 우리가 교류하던 시절에 조상들께서 성십자 수호단의 결성을 도우셨지.”

어림잡아도 500년은 족히 된 과거의 이야기였다.

때문에 유더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엘프들의 은혜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아직 활동 중이신 엘프 분도 계시고요.”

“정말인가? 혹시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엘사리온 님이십니다.”

“오··· 엘사리온께서. 나의 종조부 님이시다.”

라이카 왕녀의 얼굴에 반가움이 깃들자 코델리아는 유더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겼다.

[유더야, 유더야. 종조부가 뭐야?]

[할아버지의 형제.]

[아.]

500년도 더 전 사람인데 할아버지의 형제라니.

과연 천 년을 사는 하이엘프다운 이야기였다.

“그대들이 성십자 수호단 소속이라면 더 잘되었구나. 당연히 이번 일에 한 손을 거들겠지? 그리한다면 영원의 숲에 무단 침입한 죄를 사함은 물론이고 함께 싸운 그대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내리겠다. 아, 물론 나를 도운 보상 역시 더해질 것이고 말이다.”

라이카 왕녀가 씩 웃으며 위엄 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코델리아는 다시 유더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우리 왕세녀님이 더 나은 거 같아.]

다프네 왕녀 쪽이 좀 더 위엄도 있는 거 같고.

코델리아의 평에 픽하고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억누른 유더는 예를 표하며 답했다.

“그리하겠습니다.”

일단 엘프들 사이에 껴서 싸워보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튀면 되었으니까.

‘시간도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테고.’

영원의 숲이 크긴 했지만 그래봐야 작은 나라 수준이었다.

더욱이 아직 숲 외곽부인데 토벌대와 마주했다는 것은 자바워크 역시 외곽부에 산다는 이야기였으니 끽해야 하루, 길어도 이틀이면 놈과 마주할 수 있을 터였다.

“호쾌한 대답이 무척 마음에 드는구나.”

코델리아 다음다음 쯤으로 아름다운 라이카 왕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질 때였다.

“■■■■■ ■■■■■■■ ■■■■■!”

“■■■■ ■■■!”

엘프들의 목소리가 수풀 너머에서 들려왔다.

“■■■■ ■■■■!”

똑같이 크게 외친 라이카 왕녀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치는 것을 보니 토벌대의 기사들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뭐라는 거지?’

엘프 문자라면 기억의 궁전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회화가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찝찝하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 ●●●.”

코델리아가 작게 읊조리며 유더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엘프들의 말이 바뀌기 시작했다.

“■■■■······ ■■했습니다. 왕녀님.”

“그런데 왕녀님, 이 자들은 누구인··· 헉? 인간?!”

“두려워 마라. 나를 도와준 이들이니. 더욱이 우리 프라임 왕가와도 연이 닿은 이들이다.”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엘프 기사들에게 라이카 왕녀가 약간이지만 고압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유더는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와, 번역 마법도 있었어?’

‘어, 있었어.’

젠 체하듯 어깨를 으쓱인 코델리아는 마저 눈빛을 보냈다.

‘마녀가 악마들하고 소통할 때 사용하던 주문이야.’

‘아, 과연.’

그렇다면 만능 번역 마법인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아무튼 유능한데? 역시 마법사.’

‘흥흥, 더 칭찬하도록. 아니, 찬양하도록.’

의기양양해진 코델리아가 턱을 치켜세울 때였다.

“어거스트 바이엘 백작과 어거스트 체이스 백작?”

라이카 왕녀의 부름에 코델리아는 치켜세우던 턱을 얼른 내린 뒤 민망해했고, 유더는 이번에도 터지려는 웃음을 참은 뒤 담담히 답했다.

“유더와 코델리아라 부르셔도 됩니다.”

“그래, 그쪽이 낫겠구나. 그럼 유더와 코델리아. 나의 진지로 가자꾸나. 자세한 이야기는 그곳에서 나누도록 하지.”

“명을 받들겠습니다.”

옅은 미소를 지은 유더는 다시 한 번 예를 표했다.

&

“이곳에서 쉬고 있어라.”

“예, 왕녀 전하.”

영원의 숲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무로 가득 찬 장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외곽부를 제외하면 사실상 안쪽은 공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안에는 호수는 물론이고 초원도 있으니까.’

토벌대의 진지 역시 공터에 세워져 있었는데, 인구가 적은 엘프들답게 그렇게까지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토벌대 총원은 스무 명 남짓인가?’

왕녀가 직접 이끄는 토벌대 치고는 초라하다고 해도 좋을 수준이었지만 전원이 기사라면 납득할 만 했다.

[왜? 소수라고 꼭 정예인 건 아니잖아.]

[아니, 그래도 엘프잖아. 그 말 몰라?]

[앞집 소드 마스터 옆집 대마법사 뒷집 보우 마스터?]

[아네.]

왕족까지 갈 것도 없이 그냥 평범한 마을사람 A조차도 오백 년을 사는 엘프들이었다.

오백 년.

자그마치 오백 년.

자연 엘프들의 숙련도는 인간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냥 매일 같이 도끼질만 했어도 백 년, 이백 년 하다보면 재능이 있든 없든 달인의 경지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엘프들이 느리다는 건 개소리고.’

가끔 엘프들은 수명이 긴 만큼 배우는 게 느리다~라는 설정이 도입된 게임이나 소설도 있었지만 유더가 봤을 때는 너무 무리한 이야기였다.

엘프들이 무슨 모지리 집단도 아니고 인간이 십 년 동안 배울 검술을 백 년 동안 배운다는 게 말이 되는가?

백번 양보해서 세 배 쯤 오래 걸린다 해도 삼십 년이었으니 인간과는 숙련도의 레벨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레골라스도 엄청났잖아.]

[호빗에 나온 애?]

[어, 반지의 제왕에 나온 애.]

[뭐야, 너 반지의 제왕 극장에서 봤어?]

[어, 재개봉 할 때. 넌 안 봤어?]

극장 개봉할 당시에는 오지에서 구르고 있던 터라 반지의 제왕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 했다. 어차피 한국에 있었어도 나이 제한에 걸려 못 봤겠지만 말이다.

[너무 길다고 해서 안 봤어.]

[그럼 호빗은 왜 봤는데?]

[드워프가 완전 잘생겼다고 해서. 흐. 왓슨도 나왔잖아.]

[셜록 좋아해?]

[응, 좋아해.]

그러고 보면 기억의 궁전을 셜록 보고 알았다고 한 적이 있는 코델리아였다.

[영드 쪽이 취향이구나.]

[응, 아무튼 쟤네 우리 쳐다본다.]

코델리아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유더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라이카 왕녀는 측근으로 보이는 기사들과 함께 진지 중앙에 세워진 커다란 천막 안으로 들어섰고, 젊은 여자 엘프 한 명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탈란다라고 한다. 아, 공용어로 말해야지. 나는 탈란다다. 따라와라. 쉴 곳을 안내해 주겠다. 라이카 님 외에 공용어를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나뿐이다. 그러니 말할 것이 있다면 나를 통해라.”

발음이 좀 어눌하긴 했지만 알아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애당초 번역 마법도 있었고 말이다.

때문에 유더는 적당히 답한 뒤 탈란다를 따라 작은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쉬어라. 나는 밖에 있겠다.”

탈란다가 밖으로 나가자 유더와 코델리아는 천막 안을 둘러보았다.

과연 엘프들의 천막답게 가구 하나하나가 화려했다.

‘시간이 썩어 넘치는 양반들이니.’

가구 하나에도 공을 엄청 들이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유더야, 우리 그럼 셜록 이야기 할까? 몇 번째 시즌이 제일 좋아? 나는 세 번째 시즌이 제일 좋은데.”

살짝 흥분한 코델리아가 무척이나 귀여웠지만 유더는 입술 사이에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쉿, 밖에서 이야기하는 거 들어보자.”

유더의 말에 코델리아는 눈을 한 번 깜박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유더보다 훨씬 예민한 그녀의 귀에 엘프들의 이야기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인간? 아까 그게 인간들이라고?”

“어, 너도 처음 보지? 나도 처음 봐.”

“그런데 인간은 못생긴 거 아니었어? 예쁘던데?”

“제일 예쁜 인간이래.”

“알 것 같아. 우리 집 돼지가 정말 예쁘거든. 그래서 귀여워.”

“뭐라는 거야. 아무튼 이번 토벌에 합류할 것 같아.”

“인간이? 쟤들 몇 살인데? 40살? 50살? 완전 애기들 아니야?”

“글쎄? 인간들은 빨리 늙는다고 했는데. 한 서른 살 쯤이 아닐까?”

“핏덩이네 완전. 그래서 뭐 어디 쓸모나 있겠어?”

“있으니까 데려오셨겠지. 그리고 어쩌면 그 전설이 사실일지도 모르고.”

“오직 인간만이 자바워크를 쓰러트릴 수 있다?”

“어, 그거.”

맞는 말이었다. 영원의 숲의 엘프들이 수백 년 동안 자바워크를 잡지 못 하고 깨어날 때마다 봉인시키는데 급급했던 것은 ‘인간의 손에 죽는다’라는 저주를 자바워크가 타고났기 때문이다.

인간의 손에 죽는다.

즉, 인간의 손이 아니면 죽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다 들리게 떠들어도 되나?”

“괜찮아. 인간들은 우리랑 달리 귀가 나빠서 조금만 멀어도 못 듣는다고 할아버지가 그러셨어.”

“뭔가 불쌍한 종족이네. 수명도 짧아, 귀도 나빠, 얼굴도 못 생겨.”

“대신에 애는 많이 낳잖아. 빨리 자라고.”

“질보단 양이구나. 어쩐지 오크들 닮았네.”

“그렇지. 그러니까 잘해주자. 불쌍한 종족이잖아.”

“그래.”

“씨발놈들이 뭐라는 거야.”

마지막은 당연히 코델리아였다.

유더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말하긴 했지만, 얼굴을 보니 잔뜩 골이 난 것 같았다.

“씨발 뭐가 어째? 아주 그냥 씨발.”

코델리아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오자 유더는 새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맞아, 코델리아는 야발소녀였지.’

입에 씨발을 달고 사는 야발소녀.

근래 들어 욕하는 걸 거의 듣지 못 하다 보니 까먹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들으니 옛날 생각도 나고 좋았다.

‘음, 나도 정상은 아니구나.’

씨발씨발 하는 게 좋다니.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유더의 시선을 눈치 챈 코델리아가 흠칫하더니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말했다.

“그··· 유더야.”

“어, 코델리아야.”

“욕하는 애는··· 싫어?”

씨발씨발 거리는 거.

소심한 물음에 유더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욕하는 걸 싫어할까봐 걱정하는 코델리아가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설마 요즘 욕을 줄인 게 나 때문이었나?’

전생보다 현생의 기억이 강해져서 그런가 싶었는데.

만약 정말 자신 때문이라면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생물이란 말인가.

“유더야?”

코델리아가 다시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묻자 유더는 씩 웃으며 답했다.

“아니, 괜찮아. 씨발은 감탄사인걸.”

“진짜?”

“어, 진짜.”

유더가 다시 한 번 답하자 코델리아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치그치? 씨발은 감탄사지?”

“그럼, 감탄사고 말고.”

“응, 씨발.”

“어, 씨발.”

“으휴, 우리 씨발놈.”

사이좋게 씨발거린 유더와 코델리아는 배시시 웃었고, 문 라이트 속의 멜리사는 둘 다 정상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리고 약 이십여 분 뒤.

유더와 코델리아가 셜록 시즌 4의 결말에 대해 갑론을박을 나눌 즈음 천막의 문이 열렸다.

“라이카 왕녀님께서 찾으신다. 따라와라.”

탈란다의 안내를 따라 밖으로 나가니 제법 이쪽을 보는 시선들이 많았다.

어느새 진지 내에 소문이 다 퍼진 것 같았다.

‘그래봐야 스무 명 남짓한 규모지만.’

어찌되었는 기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라이카의 막사에 도달한 유더와 코델리아는 가벼운 신체검사를 받은 뒤 안으로 들어섰다.

“왔는가.”

막사 중앙에 놓인 기다란 테이블 상석에는 라이카 왕녀가 자리했고, 그 좌우로 엘프 기사 둘이 서 있었는데, 양쪽 모두 이쪽을 보는 시선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나이를 모르겠네.’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다들 노화가 느렸으니까.

그래도 오른쪽에 자리한 남자 기사는 인간으로 치면 30대 후반쯤으로 보였으니, 엘프 나이로는 사백 살 전후의 베테랑일 가능성이 높았다.

‘왼쪽은 확실히 젊은 거 같은데.’

20대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기사.

하지만 엘프들의 경우 백 살부터 삼백 살까지는 다들 이십대 초중반 외모를 유지했기에 쉬이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라이카 왕녀는 대체 몇 살이지?’

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걸 보면 백 살 아래일 거 같기는 한데.

“앞으로 함께 싸울 사이니 서로 인사들 나누어라.”

라이카 왕녀가 명하자 남자 기사는 다소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왕녀 님의 조언자인 미다스 카를로프다.”

보아하니 유더와 코델리아의 등장이 썩 탐탁치않은 모양이었다.

‘당연하지.’

이종족인 것은 둘째 치고, 처음 보는 자들이 토벌대에 갑자기 합류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왼쪽에 있던 여기사는 오히려 이 상황이 즐거운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왕녀 님을 모시는 바네사 파인이야.”

“세일룬 왕국의 유더 어거스트 바이엘 백작입니다.”

“코델리아 어거스트 체이스 백작입니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각기 예를 표하자 남자 기사- 미다스는 더욱 미간을 좁혔고, 여자 기사- 바네사는 소리 없이 두 사람의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두 사람 모두 교양으로 공용어를 익혀 말은 서툴지만 듣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니 일단 공용어로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겠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이 엘프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걸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엘프어를 할 줄 모른다 생각하면 입이 싸지기 쉬울 테고.’

필요에 의해 손을 잡기는 했지만 당장은 엘프들에 대해 아는 것이 적은만큼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자바워크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고 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일단 지도를 보도록.”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는 과연 엘프들의 물건답게 쓸데없을 정도로 디테일이 좋았다.

나무들의 모양은 물론이고 크기까지 전부 달랐는데, 위성사진을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우리의 현재 위치는 이곳이다. 자바워크는 여기서 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라이카 왕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지도 위를 가로질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지도를 보던 코델리아가 돌연 눈을 크게 뜨더니 살짝 손을 들어올렸다.

“뭔가 질문이라도 있나?”

“그··· 조금 궁금한 게 있어서요. 여기 이건 호수인가요?”

자바워크가 자리하고 있는 ‘저주의 땅’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호수.

라이카 왕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호수가 맞다. 스프링 페어리들이 거주한다고 알려진 곳이지. 실제로 본 적은 없다만.”

저주의 땅과 너무 가깝기도 했고, 엘프들이라 하여 페어리들과 항시 교류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과 별개로 유더와 코델리아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스프링 페어리?

‘봄의 가호?’

플레이아데스의 페어리들은 크게 여덟 종류로 구분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의 힘을 가진 계절 페어리들과 땅, 불, 바람, 물의 힘을 가진 사대 속성 페어리들.

이중 유더가 코델리아가 교류한 것은 여름, 가을, 겨울의 페어리 셋과 대지의 페어리 하나였다.

그런데 여기에 봄을 상징하는 스프링 페어리가 더해진다면, 새로이 봄의 가호를 얻을 수 있다면.

‘사계의 가호.’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의 가호를 모두 모아야만 완성시킬 수 있는 S랭크 가호!

유더와 코델리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반응에 라이카 왕녀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래도 웃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사실 사계의 가호만이 아니었으니까.

‘눈치 챘어?’

‘어, 챘어.’

멸망 이전과 이후.

당연히 달랐다. 많은 것이 변하였다. 하지만 호수와 언덕 같은 지형까지 그 위치가 크게 달라질 수는 없었다.

때문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어렵지 않게 머릿속의 지도와 눈앞의 지도를 비교할 수 있었고,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을 수 있었다.

스프링 페어리들의 거주지라는 호수.

그 안에 고이 잠들어 있을 또 하나의 보물을.

‘흐흣, 흐흐흣.’

‘흐흐흐흣.’

유더와 코델리아는 서로를 보았고, 속이 까만 미소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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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8장 - 영원의 숲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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