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9장 - 자바워크 >
제79장 - 자바워크
유더와 코델리아가 막사에 들어서기 이십여 분 전.
왕위 계승 서열 1위 라이카 프라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폭풍우 같은 잔소리였다.
“대체 어딜 가셨던 겁니까! 지금 토벌대를 이끌고 계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산보 나온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엘프들 사이에서도 고귀한 하이 엘프 왕가의 자손을, 그것도 왕세녀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 사람은 작금 영원의 숲에 단 세 사람 뿐이었다.
하나는 국왕인 그레이브 프라임.
다른 하나는 왕세녀의 친모인 파시어 백작.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미다스 카를로프였다.
벼락이 치는 것 같은 노성에 찔끔한 라이카 왕녀는 급히 바네사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실눈을 뜬 채 방음 마법에만 집중할 따름이었다.
‘야! 그러지 말고 좀 도와줘!’
‘맞아요, 왕세녀 님은 좀 많이 혼나셔야 해요.’
라이카 왕녀의 구조 요청에 다시 상큼한 미소로 답한 바네사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고, 소꿉친구의 배신에 입술을 깨문 라이카 왕녀는 다시 미다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냥, 그냥 잠시 바람 쐬러 다녀온 것뿐이다.”
“로이드를 타고 계셨으면 될 텐데 왜 갑자기 내리신 겁니까.”
“그냥 내 발로 좀 걷고 싶었다.”
“그럼 로이드를 데리고 걸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왜 로이드에게서 떨어지셨던 겁니까.”
“그냥 혼자만의 시간을 잠시 갖고 싶었다.”
“지금 그걸 핑계라고 대시는 겁니까? 토벌대를 이끌고 나오신 분이? 굳이 그렇게 로이드를 세워두고 수풀 너머까지 가셨어야 하는 겁니까?”
“그냥 수풀 너머가 좀 궁금했을 뿐이다.”
“그럼 수풀 너머에 미스틸테인을 내려놓으신 이유는 뭡니까.”
“그냥 잠시 두 손을 자유롭게 하고 싶었다.”
“왕세녀 전하! 장난치지 마십시오! 이게 지금 애들 장난으로 보이십니까!”
“에라이 샹! 오줌 누러 다녀왔다! 오줌 누고 왔다고! 왕세녀는 오줌도 못 누냐! 어?! 잠깐 바람 쐬러 나갔는데 갑자기 마려웠단 말이야!”
라이카 왕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마주 악을 쓰자 미다스는 순간 움찔했고, 이내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그리고 그것은 라이카 왕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미다스의 얼굴이 분홍색이라면, 라이카 왕녀의 얼굴은 빨간색이었다.
“흠흠, 흠흠흠. 좀··· 돌려서 말씀하셔도 되잖습니까.”
“했잖아! 몇 번을 돌려 말했잖아!”
타고 있던 말에서 내린 다음에 일부러 수풀 너머까지 가서 무기를 손에서 내려놓을 이유가 달리 뭐가 있는데! 엉?!
“큰 일 보는 거?”
“야!”
라이카 왕녀의 노성에 바네사는 얼른 입을 닫았고, 미다스는 평정을 되찾기 위해 무진 노력을 하였다.
“하아, 하아. 진짜.”
이러니 방음 마법을 안 쓸 수가 있나.
한참을 헐떡이던 라이카 왕녀는 다시 자리에 앉은 뒤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인간들을 이번 토벌에 참가시킬 거다.”
부끄러운 꼴을 당했지만 덕분에 주도권을 쥔 상황이었다.
라이카 왕녀가 밀어붙이듯 말하자 미다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고 보니 전하, 저 인간들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영원의 숲에 인간이라니요!”
“저도 좀 궁금하네요.”
바네사가 얄밉게 끼어들자 눈을 가늘게 뜬 라이카 왕녀는 미간을 한 번 좁힌 뒤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얼굴 한 가득 인상을 쓴 미다스가 말했다.
“그러니까, 세일룬 왕국의 백작들인 동시에 성십자 수호단의 단원이며, 요정검 벨렌시아 님의 검기를 이어받은 후예이자 요정의 숲의 드나들 수 있는 비법을 알고 있는 인간이란 말입니까?”
“요약 잘하네.”
“전부 말 뿐이잖습니까!”
그랬다.
전부 유더의 말 뿐일뿐, 증거다운 증거는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거의 다 사실일 거다.”
“근거가 있으신가요?”
바네사의 물음에 라이카 왕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바네사 님의 검기를 이어받은 건 맞는 것 같다. 싸우는 모습을 내가 실제로 봤으니까.”
“본다고 아십니까?”
“어, 알아. 바네사님은 무검의 검호셨으니까. 그렇게 싸우는 사람이 달리 더 있지는 않겠지. 더욱이 나이에 비해 너무 강하더라고.”
체술을 마치 검술처럼 쓰는 자.
겨우 몇 동작이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흐음.”
열이 잔뜩 올라 무례한 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라이카 왕녀의 능력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미다스였다.
그녀가 태어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바로 옆에서 온갖 가르침을 내린 장본인이었으니 말이다.
“그 외에는?”
“영원의 숲을 오갈 수 있는 표식이 진짜라는 거? 그리고 일단 귀족인 것도 사실 같아. 인간치고는 지나치게 예쁘고 잘생겼잖아? 예법도 몸에 익었고.”
“흠.”
근거치고는 빈약했지만 그럴싸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미다스가 지금껏 살면서 본 인간들은 오크들과 별반 차이가 없을 만치 더럽고 추악했으니 말이다.
“성십자 수호단은요?”
“그건··· 뭐, 맞지 않을까? 딱히 거짓말 할 이유가 없잖아. 엘사리온 종조부님도 아는 거 같고.”
약간 자신 없는 투로 중얼거린 라키아 왕녀는 슬쩍 미다스의 눈치를 보았다.
‘어라, 이번엔 화 안 내나?’
근거가 부족하다며 노발대발할 줄 알았는데.
“왕세녀 전하.”
“어? 어. 왜?”
“감별은 해보셨습니까?”
“당연히 해봤지. 적의는 없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던진 것은 태어나서 처음 마주한 인간이 신기한 것도 있었지만, 감별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것도 있었다.
“파란색이었거든.”
적의가 없음은 물론이고 호의까지 있음을 의미하는 색.
라이카 왕녀는 자신에 대한 적의를 색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붉은 색은 살의, 노란 색은 적의, 초록색은 무감, 파란색은 호의, 분홍색은 극호의.
물론 평소에도 세상이 그렇게 보이면 이래저래 불편한 구석이 많은 터라 평소에는 능력을 봉인해두었는데, 다시 발동시키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 그래도 제대로 된 조사가 좀 더 필요합니다. 그리고··· 토벌대에 합류할 실력은 됩니까? 굉장히 어려보이던데요.”
미다스의 지적에 라이카 왕녀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실력은 있는 거 같았어. 셰이드 일곱 마리를 순식간에 처리했으니까.”
“잠깐, 셰이드들에게 공격 당하신 겁니까?!”
“어, 저주의 땅이 가까우니까.”
“왕세녀 전하! 지금 목숨이 위험하셨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어, 맞아. 그러니 저들은 내 생명의 은인들이지. 은인들을 박하게 대할 수는 없잖아?”
능청스럽게 답한 라이카 왕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실력은 확실해 보여. 그리고 여차하면 마무리만 맡기면 되니까.”
“전설이 사실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오직 인간만이 자바워크를 멸할 수 있다는 전설.
“진짜지 않을까? 그러니 아직까지 놈을 해치우지 못 했겠지. 쓰러트릴 때마다 좀 지나면 다시 부활하잖아.”
사실 자바워크 토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백수십 년 단위로 나서는 정기 행사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아무튼··· 한 마흔 살쯤 되지 않았을까?”
“왕세녀님, 인간들은 빨리 늙어요. 마흔 살이면 저렇게 생길 수가 없어요.”
“그런가? 그럼 몇 살 쯤 일거 같아?”
“서른쯤 되지 않았을까요?”
“흠, 그럴싸한데?”
라이카 왕녀와 바네사에게 있어 인간은 이야기책에나 나오는 존재였다.
제대로 된 나이를 짐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튼. 토벌에 참가시킬 거란 말씀이시군요.”
“어, 조사는 그 다음에 해도 되잖아?”
무척이나 대충대충인 이야기였지만 말이 안되는 것은 또 아니었다.
이미 저주의 땅에 근접한 상태였고, 라이카 왕녀의 감별에서 적의 없음이 나온 이상 당장은 믿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 이번뿐입니다.”
“비 오는 날 강아지 주워온 아이 대하듯 하지 마. 쟤들은 인간이라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각은 있으시군요.”
참담한 얼굴이 되어 중얼거린 미다스는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다시 말했다.
“아무튼 대화를 해보지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왕세녀 전하의 은인이기도 하니 그에 상응한 상 역시 내려야 할 터이고요.”
“오, 역시 공정해. 이래야 내 스승이지.”
“하아······.”
그때 왜 파시어 백작의 청을 받아들인 것일까.
잠시 수십 년 전의 그날을 후회한 미다스는 바네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바네사, 방음 마법을 해제해라.”
“예, 스승님.”
바네사가 방음 마법을 해제하자 라이카 왕녀는 새삼 다시 자세를 바로 했고, 미다스는 막사 밖에 들리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인간들을 데려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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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다스에 맞서 적극적으로 옹호를 한 만큼 라이카 왕녀는 유더와 코델리아를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까지는 말이다.
‘뭐야, 쟤들 왜 저렇게 웃는데.’
뭐랄까.
조형적으로는 참 예쁜데 어쩐지 사악하다고 해야 할까?
‘까맣다’라는 수식어가 참으로 어울릴 것 같은 미소였다.
‘호수 때문에 그러나?’
스프링 페어리들이 산다는 호수.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렇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올 뿐이었다.
‘어릴 때 거기서 목욕해봤는데도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지.’
저주의 땅 근처에 놀러나갔다고 혼나기만 하고.
잠시 어린 시절 일을 회상한 라이카 왕녀는 다시 정면을 보며 말했다.
“유더, 코델리아. 다시 이야기를 되돌리겠다. 우리는 내일 아침 자바워크를 칠 예정이다. 두 사람 모두 보았겠지만 이미 셰이드들이 모습을 드러낸 상황이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자바워크가 부활할 즈음이 되면 그림자 괴물인 셰이드들 저주의 땅 인근에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벌써 무리지어 돌아다닐 정도였으니, 늦어도 내일, 어쩌면 모레쯤이면 자바워크가 완전히 부활할 터였다.
“막 부활해서 제정신이 아닌 놈을 급습해 끝을 낸다. 두 사람에게는 놈의 숨통을 끊는 일을 맡기고 싶다.”
유더가 이미 자바워크에 대해 안다고 했기 때문인지 설명이 다소 부족한 편이었지만 얼추 알아들은 유더와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전투는 내일.
지금은 오후.
그럼 해가 진 뒤에 호수에 다녀오면 되지 않을까?
똑같은 생각을 한 유더와 코델리아가 다시 까맣게 웃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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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괴한 괴성이 막사를 뒤흔들었다. 생전 처음 듣는 것이었지만 유더와 코델리아는 직감할 수 있었다.
‘자바워크!’
틀리지 않았다.
자바워크 토벌에 참가한 적이 있는 미다스가 급히 라이카 왕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놈이 깨어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예상보다 일찍 깨어나려는 모양입니다.”
“서둘러라! 지금 당장 놈을 친다!”
부활한 직후가 놈이 가장 약할 때였다.
최대한 서둘러야만 했다.
“웨이크닝은 모두 열 세번 번입니다. 지금 당장 출발하면 시간에 댈 수 있을 겁니다!”
설명을 마친 미다스는 바로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고, 라이카 왕녀와 바네사 역시 지체하지 않았다.
“유더! 코델리아! 따라 와라!”
하얗고 거대한 활을 챙겨든 라이카 왕녀가 막사 밖으로 나가자 어느새 출진 준비를 마친 기사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네사! 두 사람에게 네 말을 줘라. 너는 나와 함께 간다!”
“예! 전하!”
인간들의 군마보다 훨씬 더 다리가 길고 몸이 가는 엘븐스티드 한 필을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넘긴 바네사는 라이카 왕녀와 함께 유니콘 로이드 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두 번째 웨이크닝이 들려왔다.
< 제79장 - 자바워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