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1장 - 프라임 왕가 >
제81장 - 프라임 왕가
평소의 유더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무척이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냉철하게 피해득실을 따져 움직이는 사람.
하지만 지금의 유더는 아니었다.
깊은 빡침.
머리에 피가 쏠려 계산을 할 수 없는 상태.
유더의 감정이 이성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유더의 두 눈에서 마치 맹수의 그것과 같은 빛이 일기 시작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러한 유더의 변화를 제일 먼저 눈치 챈 것은 코델리아였다.
그렇기에 코델리아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야야! 그냥 이마에 키스한 거야! 이마에!’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엘프들 가운데서도 유더의 변화를 눈치 채는 이들이 생겼다.
아니, 아예 정령왕부터가 유더의 시선을 눈치 채고 말았다.
“호.”
제우스를 닮은 폭풍과 번개의 정령왕은 유더의 반응에 노여움을 표하는 대신 코웃음을 쳤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씩 웃더니 다시 코델리아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저기요, 일단 돌아가요.”
[무어라?]
“일단 들어가시라고요.”
계약은 된 거 맞죠?
그럼 일단 가세요.
우리 유더 달래는 게 더 급하니까.
유더 만큼은 아니지만 코델리아의 눈을 마주한 순간 생략된 많은 말들을 간파한 정령왕은 눈을 껌벅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기, 내가 정령왕이다만?]
“네, 그러니까 다음에 뵐게요.”
계약도 했으니 일단은 이만.
제가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니, 내가-]
거기까지였다.
계약자인 코델리아의 귀환 요구와 더불어 왕궁에 비축되어 있던 마력마저 떨어지자 폭풍과 번개의 정령왕은 속절없이 정령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직후.
정령왕이 사라진 자리를 유더가 치고 들어왔다.
성큼성큼, 거의 뛸 듯이 걸어온 유더는 코델리아 앞에 섰고, 코델리아는 에헤헤 어색하게 웃더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얏호! 정령왕과 계약을 했어! 정령왕. 응, 정령왕. 정령들의 왕. 예이예~”
나름 기쁨의 어깨춤까지 쳤지만 실패였다.
정령왕이고 나발이고 유더는 함께 기뻐하는 대신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코델리아의 이마를 뽀득뽀득 닦기 시작했다.
“유, 유더야?”
그러면 화장 망가지거든?
하지만 유더는 코델리아의 예쁜 이마를 깨끗이 닦은 뒤 그대로 입술을 맞추었다.
한 번.
다시 한 번.
은근슬쩍 또 한 번.
넋 놓고 있다가 3연속 입맞춤- 아니, 어째 영역표시스러운 무언가를 당한 코델리아는 얼른 다시 메시지 마법을 보냈다.
[저기, 유더야? 그러니까 이건 그냥 뭐랄까, 계약을 위한 절차 같은 거거든? 손가락 걸기나 악수 같은··· 어, 맞아. 그런 거.]
하지만 유더는 이번에도 다시 코델리아의 이마에 입술을 맞출 따름이었다.
코델리아는 발을 동동 구르며 다시 메시지 마법을 보냈다.
[아니이! 그래, 맞아! 강아지가 뺨을 핥은 거랑 비슷한 거야! 그런 거라구!]
정령왕이 들었다면 노발대발했을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낸 코델리아였지만 이번에도 유더에게는 딱히 효과가 없었다.
애당초 강아지가 그랬어도 지금 정도는 아니지만 반응을 보였을 유더였기 때문이다.
[야! 강유더! 야야!]
유더가 이마에 다섯 번째 입맞춤을 하자 코델리아는 유더의 단단한 가슴을 두 손으로 밀어내며 다시 메시지 마법을 보냈다.
[스킨십 금지령 아직 유효하거든? 자꾸 이러면 화낸- 아니, 화는 안 낼게. 안 낼 테니까 나중에 하자. 응? 두, 둘만 있을 때. 오케이?]
머리에 피가 쏠려 코델리아만 보이는 유더와 달리 코델리아에게는 주변이 아주 잘 보였다.
이쪽을 쳐다보는 엘프들의 시선들까지도 말이다.
‘잠깐, 근데 얘 일부러 이러는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유더인데?
천하의 유더가 겨우 이 정도 일로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는다고?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더욱이 방금 이야기가 효과가 있었는지 유더의 초록색 눈동자에 다시 이성의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둘만 있을 때.”
“어? 으, 응. 둘만 있을 때······.”
얼굴이 빨개진 코델리아는 고개를 숙이더니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기 시작했고, 비로소 주변을 볼 수 있게 된 유더는 당혹과 놀라움과 어이없음이 뒤섞인 엘프들의 시선에 헛기침을 토했다.
“흠흠.”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 것일까.
유더 자신이 남들 앞에서 코델리아의 이마에 키스한 것쯤이야 문제도 아니었다.
약혼한 사이인데 뭐가 문제겠는가.
진짜 문제는 코델리아가 정령왕과 계약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폭풍과 번개의 정령왕.’
원작에서는 제대로 등장한 적이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와 동급인 폭염의 정령왕에 대한 기억이라면 있었다.
붉은바람이 정령전사 테크를 타다보면 마지막에 가서 마주하게 되는 것이 바로 폭염의 정령왕이었으니 말이다.
‘온전한 소환조차 어려운 존재.’
붉은바람의 역량으로도 정령왕의 힘을 온전히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만큼 거대하고 강력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정령왕이 코델리아를 선택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엘프들을 제치고 말이다.
‘새끼가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저도 모르게 생각한 유더였지만 잠깐뿐이었다. 바로 잡념을 떨쳐낸 뒤 상황을 분석했다.
정령왕이 한 말들과 작금의 상황을 단서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오랜 시간 영원의 숲의 엘프들과 단절되었던 폭풍과 번개의 정령들.’
정령왕과의 계약을 원한 라이카 왕녀와 켈투르 왕자.
둘 사이는 무척 친밀하지만 서로 친모가 다르기 때문인지 정치적인 알력이 존재.
알력의 이유는 켈투르 왕자의 친모인 솔페이지 자작.
‘라이카 왕녀와 미다스 입장에선 최악은 아냐.’
둘에게 있어 최악은 정령왕이 켈투르를 선택하는 것일 테니까.
‘그러니.’
넘어갈 수 있다.
이야기할 여지가 있다.
비록 엘프들 입장에서는 정령왕은 놓친 셈이지만, 그래도 일반 정령들과는 계약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더욱이.’
코델리아는 이제 정령왕의 계약자였다.
엘프들 입장에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일곱 번째 검무도 있고.’
현재 일곱 번째 검무를 출 수 있는 것은 유더 자신뿐이었으니, 엘프들과 거래할 재료는 얼마든지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놀라움에서 깨어난 엘프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솔페이지 자작은 이쪽을 노려보았고, 켈투르는 당황한 얼굴로 라이카 왕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라이카 왕녀는 미다스와 함께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유더, 코델리아.”
라이카 왕녀도 무척 놀라고 당황한 얼굴이었다.
미다스는 아예 좀 화까지 난 것 같았다.
제법 이성적인 그였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다.
정령왕의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이방인, 그것도 인간에게 정령왕을 빼앗긴 기분이 드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라이카 왕녀가 있었고, 그녀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왕가의 일원다운 행동을 보였다.
[일단 이쪽에 맞춰줘.]
짧은 메시지 마법을 날린 라이카 왕녀는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당황하고 있던 코델리아 곁에 가더니 그녀의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정령왕과의 계약이 성립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다시 폭풍과 번개의 정령들과 소통하게 될 것이다!”
“오오, 오오오오!”
바네사가 몇몇 기사들에게 눈치를 주자 어색하게나마 호응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내 엘프들 모두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보냈다.
[자세한 이야기는 좀 이따 하자.]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눈짓을 한 라이카 왕녀는 두 사람을 가리듯 앞으로 나서더니 그대로 연설을 시작해 엘프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어느새 유더와 코델리아 곁에 다가선 바네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따라와요.”
일단 자리를 좀 피하죠.
마다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기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를 따라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일단 숙소로 안내해드리죠. 거기서 기다리시면 라이카 왕세녀님이 찾아가실 겁니다.”
애당초 귀빈으로서 왕궁에 초대받은 유더와 코델리아였다. 당연히 숙소 역시 준비가 된 상태였다.
“저··· 혹시 막 큰 일이 나진 않겠죠?”
코델리아가 약간 소심하게 묻자 바네사는 방긋 웃으며 답했다.
“네, 두 사람은 왕세녀님의 맹우시니까요.”
켈투르 쪽 사람이 아닌 라이카 왕녀의 사람이니까.
꽤나 정치적인 이야기였지만 동의하는 바였기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딱히 무어라 반발하는 대신 바네사를 따라 발걸음을 서둘렀다.
“와.”
정신이 없어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하나 된 엘프들의 궁정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화려했다.
마음에서 우러난 감탄을 흘리던 코델리아는 유더를 돌아보았고,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토했다.
완전히 평소의 유더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하여간.’
질투심은 많아가지고.
하지만 코델리아의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어쩐지 모르게 또 흥흥 거렸고 말이다.
“다 왔습니다.”
바네사를 따라 방에 들어선 코델리아는 다시 와하고 감탄을 토했다.
동그랗고 커다란 창문 너머로 엘프들의 왕도가 펼쳐져 있었는데, 무척이나 하얗고 예뻐 인형의 집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방안도 평범하지 않았다.
나무를 잘라 만든 것이 아닌, 바닥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을 가공해 만든 가구들이 무척이나 신비한 느낌을 주었고, 천장의 유리에서 쏟아지는 빛이 참으로 절묘하게 방안을 비추었기 때문이다.
“그럼 쉬세요.”
살짝 윙크까지 해보인 바네사는 방문을 닫고 나섰고, 코델리아는 방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침대 위에 털썩하니 주저앉았다.
“흐아아.”
안도의 숨이 절로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야 좀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정령왕과의 계약과 질투가 폭발한 유더, 여기에 당황하는 엘프들까지.
“으으으.”
긴장이 풀린 탓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코델리아는 아예 옆으로 쓰러져 눕는가 싶더니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깐뿐이지만 말이다.
“헤헤헤.”
정령왕.
정령왕과 계약을 했다.
폭풍과 번개의 정령왕과 맹약을 맺었다.
기분이 좋아진 코델리아는 헤실헤실 웃었고, 옆으로 누운 채 마치 수영이라도 하듯 발길질을 하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정령술사 테크는 탄 적도 없는데.’
대뜸 정령왕이라니.
전사로 치자면 시작 마을에서 갑자기 성검을 주운 셈이라고 해야 할까?
“흐흐흣.”
아무튼 좋았다. 자꾸만 승천하려는 입꼬리와 광대를 어찌할 수 없을 만치 말이다.
“코델리아야.”
“응, 유더야.”
코델리아는 누운 채 눈을 떴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의 머리맡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거 알아?”
“뭐가?”
“우리··· 둘만 남았네?”
“어?”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였고, 이내 얼굴을 확하고 붉혔다.
연회장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둘만 있을 때 해.’
뭐를?
어떤 거를?
“자, 잠깐.”
아니, 잠깐.
하지만 소용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코너에 몰린 상태였다.
코델리아 자신은 누워 있었고, 유더는 앉아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코델리아 자신 쪽으로 말이다.
“코델리아.”
속삭이듯 나직이 말한 유더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숨까지 멈춘 채 마치 포획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않는 코델리아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꿀꺽.
이마에서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코델리아는 마른 침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달뜬 숨을 토하고 말았다.
유더가 그런 코델리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발갛게 달아오른, 뜨겁고 말랑말랑한 코델리아의 뺨을 서늘하고 커다란 손으로 어루만지며 가만히 바라보았고, 코델리아는 다시 뜨거운 숨을 토했다. 천천히 눈을 감더니 입술을 움츠렸다.
“코델리아.”
유더가 다시 불렀다.
코델리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대신 어깨를 움츠리며 기다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 이따가 다시 올까?”
라이카 왕녀의 목소리.
문이 아닌, 벽에 달린 비밀통로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살짝 미안한 얼굴로 물었고, 유더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카 왕녀, 너마저.”
스칼렛이 없으니 네가 대신하는 거니?
코델리아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작게 중얼거린 유더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코델리아는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얼굴이 되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약간의 원망까지 섞인 두 사람의 눈을 마주한 라이카 왕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일단 미안하다.”
유더는 차게 식은 눈으로 라이카 왕녀를 바라보았고, 코델리아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두 손을 들어 빨개진 얼굴을 덮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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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1장 - 프라임 왕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