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1장 - 프라임 왕가 #2 >
&
“흠흠, 그럼 이제 이야기를 해볼까?
방 안에 놓여 있던 동그란 테이블 위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라이카 왕녀, 유더, 코델리아.
어색한 얼굴로나마 웃는 라이카 왕녀와 달리 유더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불만이, 코델리아의 얼굴에는 원망과 민망함이 함께 어려 있었다.
어찌되었든 이왕 내친 걸음이었다.
라이카 왕녀는 눈앞의 분위기를 외면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다들 난리가 났다. 정령왕이 나타났으니까.”
폭풍과 번개의 정령왕 아이닉스.
일곱 번째 검무가 유실된 것이 벌써 오백 년 전 일이었으니, 대부분의 엘프들 역시 그의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정령왕들을 본 건 또 아니지만.’
정령왕들은 말 그래도 왕이었기에 쉬이 볼 수 없었다.
신분을 떠나 그들을 소환하는 일 자체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정령의 연무를 추어도 정령왕까지는 나타나지 않는 모양이군요.”
여전히 불만 섞인 얼굴이긴 했지만 유더는 라이카 왕녀의 말을 받아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덕분에 한시름 놓은 라이카 왕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평소에는 앞의 다른 여섯 정령들처럼 평범한 폭풍의 정령이나 번개의 정령이 나온다는 모양이다.”
“어? 왕녀님도 보신 적 없으세요?”
코델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라이카 왕녀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일곱 번째 검무가 유실된 건 무척 오래된 일이라··· 너희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좀 젊은 편이기도 해서 말이다.”
라이카 왕녀의 대답에 코델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몇 살이지?’
말하는 거 보면 진짜 어린 거 같기는 한데.
그래도 엘프니까 막 백 살 넘고 그러려나?
“아무튼··· 그럼 코델리아가 정령왕과 계약한 것과는 별개로 저의 검무에는 무척 큰 가치가 있다는 말씀이군요.”
유더가 나직이 말하자 라이카 왕녀는 아픈 곳을 찔린 것처럼 미간을 좁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일단 연무가 복원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니 말이다. 한 번 끊어졌던 폭풍과 번개의 정령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 가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뭐··· 여기까지 말하면 미다스는 화를 내겠지만 너희들이니까 그냥 말하자면··· 어차피 전대 왕들 중에도 정령왕이랑 계약한 경우는 겨우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정령왕과 계약하지 못 했다는 사실이 크게 흠잡힐 것은 없었다.
문제는 인간인 코델리아가 정령왕과 계약을 했다는 것인데, 그것도 나름 해결할 방안이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널 엄청나게 띄워줄 거다.”
“띄워요?”
“그래, 좀 그런 말이지만 과대포장한다고 할까? 막 대단한 사람으로 말이다.”
어중이떠중이에게 정령왕을 빼앗긴 것 보다는 그게 훨씬 더 나았으니까.
정령왕이 택할 만한 사람.
정령왕과 계약할 만한 근거가 있는 사람.
“너흰 어차피 나갈 사람들이기도 하고.”
만약 코델리아가 엘프였다면 이야기가 좀 많이 달라졌을 터였다.
지나친 신격화는 코델리아의 추종 세력을 만들어낼지도 몰랐으니까. 라이카 왕녀 자신의 권위에 위협이 될 수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인간이었고, 늦든 빠르든 결국엔 영원의 숲을 나설 사람이었다.
[유더야, 저래도 되는 거야?]
[어, 평소에 경쟁하던 사이라도 죽으면 막 띄워주고 그러는 경우 많잖아? 어차피 죽은 사람이니 권위를 붙여줘 봐야 뭘 할 수가 없을 테니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견제하기 위해 어떻게든 그의 공을 깎아내리려고 몸부림치던 선조가 막상 이순신이 전사하고나자 태도를 바꾼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음, 아무튼 그런가 보네.]
역사적인 예시들까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이야기였기에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라이카 왕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요는 너희가 말을 좀 맞춰줬으면 한다는 거다. 내일 중으로 이쪽에서 준비한 설정을 넘겨주마.”
“설정···이요?”
“어. 아, 물론 너희 이야기도 들을 거야. 약간의 진실을 섞는 쪽이 훨씬 더 그럴 듯 할 테니까.”
라이카 왕녀는 재미있지 않겠냐는 듯 활짝 웃었지만 코델리아는 미간을 좁히며 생각했다.
‘유더 같아.’
아니, 유더보다는 덜 하려나?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알겠습니다. 그 문제라면 이쪽에서도 적극 협조하도록 하죠.”
유더가 속이 까만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코델리아는 흠칫했고, 라이카 왕녀는 방에서 마주한 이후 처음으로 본 유더의 미소인 터라 안도의 숨을 토하며 기뻐했다.
“고맙구나.”
“예, 그럼 마저 이야기하시죠.”
여전히 딱딱한 유더의 태도였지만 라이카 왕녀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령왕 쪽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코델리아, 그대는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나?”
“네? 어··· 아직 안 해봤는데요.”
“정령이랑 이전에 계약해본 적은 있고?”
“없어요.”
코델리아의 대답에 라이카 왕녀는 예상대로라는 듯 쓴웃음을 짓더니 가볍게 손을 놀렸다.
그러자 라이카 왕녀의 손가락 끝에서 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이내 작고 귀여운 소녀의 모습을 한 바람의 정령이 나타났다.
“와.”
페어리 같다고 해야 할까?
나비 날개만 달려 있으면 정말 똑같을 것 같은 바람의 정령이었다.
“일단 계약만 하면 정령을 불러내는 거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 정령하고 사이가 틀어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라이카 왕녀는 다시 손을 놀려 바람의 정령을 돌려보낸 뒤 코델리아를 마주했다.
“정령왕과 이제 막 계약했으니 벌써부터 사이가 틀어지진 않았겠지만, 정령왕 정도가 되면 소환할 때 문제가 되는 게 하나 더 있다.”
“마력이요?”
코델리아가 반사적으로 되묻자 라이카 왕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력.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마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쯤되자 코델리아도 라이카 왕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소환이 가능할 정도의 마력을 갖고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되려나?’
생각해보니 원작에서도 붉은바람이 폭염의 정령왕을 소환하는 것은 최종 테크까지 모두 올린 뒤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만렙용 궁극기라고 해야 할까.
“잠깐만요. 시도해볼게요.”
빠르게 말한 코델리아는 눈을 감은 뒤 폭풍과 번개의 정령왕을 불러보았다.
맹약할 당시 머릿속에 각인된 영혼의 이름을 부르자 정령왕 아이닉스의 존재를 명확히 느낄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리고 코델리아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부족해.’
마력이 턱 없이 부족했다.
대마법사인 체이스 백작에는 못 미치더라도 이미 근위마법병단의 단장들 가운데 하나인 아델리아의 마력을 뛰어넘은 코델리아였다.
그런데 그런 코델리아의 마력으로도 정령왕을 온전히 소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역시, 무리구나.”
예상한 대로였다.
인간들보다 마력량이 월등한 하이엘프들조차도 정령왕을 부리기 위해서는 수백 년 이상 부단히 마력을 쌓아올려야 했다.
그런데 이제 겨우 몇십 년 남짓 살았을 인간의 아이가 정령왕을 소환할 정도의 마력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
‘오히려 다행인가.’
앞에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코델리아가 정말 정령왕을 다루게 되면 이래저래 정치적으로 곤란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인간이니··· 아마 평생 무리겠지.’
새삼 다시 안도의 숨을 토한 라이카 왕녀였지만 이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정령왕과 계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력이 부족해 정령왕을 소환할 수 없다니.
그것도 종족의 한계 때문에 평생을 노력해도 불러낼 수 없다니.
그야말로 가엾기 짝이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유더와 코델리아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뭐야, 마력 딸려?]
[어, 딸려.]
[천사로 변해도 딸리려나? 마녀화나.]
[어, 그래도 부족할 거 같아.]
[음··· 뭐 천사 등급 올리면 되겠지?]
코델리아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 천사였으니까.
[좀 더 서두르고 싶어. 그러니까 유더야. 말레키스 잡으면 드래곤 하트는 내 꺼야. 알았지?]
[저기요, 전에도 말했지만 말레키스는 에이션트 드래곤이거든요?]
[아무튼 잡을 거잖아. 안 그래?]
[그, 그렇긴 하지.]
완벽한 해피엔딩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쓰러트려야 할 강적이었으니까.
[그리고··· 음, 아니다. 나중에 직접 보여줄게.]
[뭔가 꼼수라도 생각났어?]
[흐흥, 아직은 비밀이야.]
흥흥 거린 코델리아는 히히히 웃더니 다시 라이카 왕녀를 돌아보았다.
“아무튼 알겠어요, 왕세녀님. 이것저것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어? 어, 그래······.”
코델리아가 실망하기는커녕 활짝 웃자 당황한 라이카 왕녀였지만 이내 무척이나 따스한 눈이 되어 코델리아를 보았다.
‘착하구나.’
대놓고 실망하면 나나 유더가 곤란해 할까봐 저러는 거겠지?
페어리들에게 이런저런 협박(?)을 하는 걸 보고 오해했는데, 역시 착한 애가 맞구나.
“왕세녀님?”
“어, 그래. 응.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렴. 정령왕과 계약을 했으니 그 밑의··· 같은 계열의 정령들과 계약하기가 좀 더 수월할 거란다.”
“네, 왕세녀님.”
코델리아가 예쁘게 답하자 다시 흡족한 미소를 그린 라이카 왕녀는 이번엔 유더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유더, 그대에게도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일곱 번째 검무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대의 말대로이다. 일곱 번째 검무를 우리 엘프들에게 전수해주었으면 한다.”
여기서 바로 ‘예, 알겠습니다.’하면 유더가 아니었다.
유더는 바로 답하는 대신 약간 뜸을 들였고, 라이카 왕녀는 왕세녀답게 침묵의 의미를 잘 알았다.
“보상이라면 걱정하지 말아라. 두둑이 챙겨줄 터이니.”
“알겠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나중에 협의하도록 하죠.”
두둑하다고만 할 뿐 뭘 준다고 아직 제대로 말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사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내는 일이 드문 유더였지만, 아무래도 아까 일 때문인지 평소보다 까칠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라이카 왕녀는 일단 유더가 수락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했는지 무척이나 흡족한 얼굴이었다.
“그래,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마저 하도록 하지.”
설정이나 검무 이야기 외에도 몇 가지 더 나눌 이야기들이 있었으니까.
라이카 왕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더와 코델리아 역시 따라 일어섰고, 라이카 왕녀는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냥 앉아 있어라. 그리고 아까 하던 것들··· 음, 마저들 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뺨을 붉히며 말한 라이카 왕녀는 그대로 돌아서더니 호다닥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남은 두 사람.
라이카 왕녀의 말을 바로 실행에 옮기고 싶은 유더였지만 코델리아는 아닌 모양이었다.
부끄러움으로 뺨을 붉히는 대신 살짝 가늘게 뜬 눈으로 유더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유더야.”
“어, 코델리아야.”
“이런 거 다 어떻게 알았어?”
정령의 연무의 존재와 일곱 번째 검수의 존재, 그리고 일곱 번째 검무까지.
평소라면 유더 위키 굉장해! -라며 넘어갔을 코델리아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저 세 가지 모두 원작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개념들이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된 거야?”
코델리아가 다시 파란 눈동자로 유더를 직시하며 물었다.
비록 지식이란 면에서는 유더보다 부족할지 몰라도 본능적인 직감이란 면에서는 몇 번이나 사선을 넘은 유더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코델리아였다.
때문에 유더는 괜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대신 솔직하게 말했다.
“검령이 가르쳐줬어.”
“검령? 소드 오리진의? 얼티메이트 시리즈에 검령도 붙어 있었어?”
“어, 붙어있더라.”
다소 바보 같은 대답이었지만 사실이었으니까.
코델리아는 계속해보라는 듯 눈짓으로 재촉했고, 유더는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소드 오리진의 검령은 요정검 벨렌시아야. 소드 오리진의 첫 번째 주인인 동시에 전대의 강력한 검호이자··· 프라임 왕가의 일원이야. 하이 엘프였거든.”
유더의 설명에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그럼 지금도 있어? 검령이니까 검에 살 텐데··· 잠깐, 그럼 유더 네 몸 안에서 살고 있는 거야?”
소드 오리진은 장착한 순간 사용자와 한 몸이 되는 검이었으니까.
코델리아의 지적에 유더는 얼른 답하지 못 하고 망설였지만 결국 답을 내놓았다.
“저기 말이야, 일단 그렇기는 한데, 평소에는 거의 자고 있거든? 깨어나지 않거든? 내가 부르지 않는 한 깨어나지 않는다는 느낌이랄까?”
“깨어나면 대화가 가능해? 지금도 막 우리 대화를 지켜보고 있다거나?”
“그런 건 아냐. 대화는 심상 세계라고 해야 하나, 머릿속에서 진행하는 거고.”
“흐응··· 그렇구나.”
“어, 그런 거야.”
“그래서 예뻐?”
“어?”
“예쁘냐구.”
코델리아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유더는 알 수 있었다.
미소 짓고 있는 입술과 달리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으니까.
마치 사냥감을 노려보는 맹수의 그것과 같았으니까.
유더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쩐지 모르게 축축이 젖기 시작한 등을 인식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어, 그게.”
“예쁘긴 하거든? 근데 내 눈에는, 아니, 객관적으로 봐도 네가 훨씬 더 예뻐.”
유더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하자 코델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필요한 말만 쏙 가져가버렸다.
“아무튼 예쁘다 이거네. 거기다 여자고.”
아뿔싸.
그러고 보니 아직 벨렌시아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는 코델리아였다.
하지만 지금의 발언으로 인해 여자인 것이 들통나- 아니, 확정되고 말았다.
“흥흥, 그렇구나. 유더의 검령은 여자구나. 거기다 예쁘구나. 머릿속에서 나 몰래 만날 수도 있구나.”
“아니, 저기. 어거스트 체이스 백작님?”
“거기다 합체까지 했잖아? 와, 그러네. 진짜 합체했네. 유더는 벨렌시아랑 합체했구나. 나 말고 다른 여자랑 합체했구나.”
“저, 저기요?”
단어 선정이 좀 그렇지 않나요?
“유더는 아무하고나 막 합체하는구나. 그런 남자였구나.”
외통수였다.
여기서는 무슨 말을 해도 유더 자신이 쓰레기가 되는 결말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차게 식은 눈을 유지하던 코델리아가 돌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더니 그대로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당황한 거 봐. 찔리긴 찔렸나 봐요? 네?”
마지막에 목소리를 높이는 게 무척 귀여웠지만 동시에 얄밉기도 하였다.
“흐흐흥, 오늘도 내가 이겼당.”
“아니, 그러니까 자꾸 뭘 이겼다는 건데.”
“이겼다, 이겼어.”
유더가 뭐라든 까르르 웃으며 좋아한 코델리아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으며 물었다.
“아무튼 그럼 나한테도 검령이 있겠네? 그랜드 오더도 얼티메이트 시리즈니까.”
“어, 그렇지 않아도 전에 물어봤는데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래.”
“에이, 아쉽다. 나도 멋진 남자면 좋았을 텐데.”
“코델리아 씨?”
“왜요? 아무하고나 합체하는 유더 씨?”
“크윽.”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어쩌면 업힐 때마다 합체 운운한 게 지금을 위한 큰 그림이 아니었을까?
‘말도 안 되지.’
아무리 코델리아의 직감이 굉장해도 그건 좀.
애써 이성을 되찾은 유더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요령을 가르쳐줄게. 다만 벨렌시아 말로는 뭔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검령들은 그냥 계속 잠만 자는 듯 하니 잘 안 될 수도 있어.”
“벨렌시아는 왜 깨어 있었는데?”
“검술 때문에.”
유더가 짤막하게나마 벨렌시아와 있었던 이야기들을 늘어놓자 코델리아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싸우는 모습이 좀 달라졌다 했더니 그래서였구나.”
체술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검술 같았던 유더의 전투법이었으니까.
“좋아, 아무튼 그럼 나도 명상 좀 해볼게.”
쾌활하게 답한 코델리아는 그대로 자세를 바로 하더니 그랜드 오더의 손잡이를 꼭 붙잡은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 초.
‘하던 거 마저 하기는··· 글렀구나.’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쓰게 웃은 유더는 코델리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뒤 눈을 감았다.
똑같이 검령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
“이야기는 잘되셨는지요.”
미다스의 물음에 라이카 왕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럭저럭. 내일부터 일곱 번째 검무를 전수받기로 했어. 예상대로 코델리아는 정령왕 소환이 불가능한 것 같고.”
이 정도만 해도 라이카 왕녀 입장에서는 만족스러운 결과였지만 미다스는 아니었다.
“정령왕의 양도는 역시 불가능한 겁니까?”
“미다스, 그게 될 리가 없잖아. 정령왕이 코델리아를 선택한 거야. 계약서 양도하듯이 휙휙 주고받을 수 있겠어?”
“으으······.”
사실 미다스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무엇도 아닌 정령왕이다 보니 평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튼 켈투르를 택한 것보다는 낫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켈투르와 무척이나 사이가 좋은 라이카 왕녀였지만 이러나저러나 왕위 계승서열 1위와 2위의 사이였다.
정작 본인들에게 이렇다 할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주변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솔페이지 자작은 아직 포기한 거 같지 않으니까.’
켈투르의 친모를 떠올린 라이카 왕녀는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다시 미다스를 보았다.
“아무튼 그렇게 됐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정령왕에 대해서는 미련을 버려.”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답하는 거 같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한 번 한 말은 지키는 미다스였다.
때문에 라이카 왕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찌되었든 참 고마운 두 사람이지 않아? 덕분에 자바워크도 잡았고, 정령의 연무도 돌아왔고.”
“어떻게 보상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군요.”
“그러게. 제대로 챙겨줘야 할 거 같은데 말이야.”
새삼 나열해보면 고작 이틀 사이에 어마어마한 공들을 연이어 세운 두 사람이었다.
라이카 왕녀 자신의 목숨을 구했고, 자바워크를 쓰러트렸으며 오랜 세월 실전되어 잊힌 정령의 연무까지 복원시켰다.
“와, 이 정도면 진짜 나라도 줘야겠는데? 유더한테 애인 자리라도 내줄까?”
라이카 왕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미다스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해볼만한 일이긴 하군요.”
손이 귀한 엘프들은 애당초 결혼이란 것을 하지 않았다.
라이카 왕녀의 친모나 켈투르의 친모가 각자 작위를 가진 귀족일 뿐 왕비가 아닌 것도 그래서였고 말이다.
“왕녀세 전하 생각은 어떠십니까?”
미다스가 새삼 진지하게 물은 순간이었다.
“왕세녀 전하!”
방문을 벌컥 열며 나타난 바네사는 예를 갖출 틈도 없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왕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아버님이?”
“예, 지금 막 깨어나셨어요!”
바네사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라이카 왕녀의 얼굴에도 환희가 번졌다. 미다스 역시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영원의 숲의 엘프들을 이끄는 하이 엘프 일족의 수장인 그레이브 프라임.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그가 깨어났다.
어째서일까.
혹시 정령왕 소환이 그에게 무언가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서두르자.”
“예, 왕세녀 전하.”
생긋 웃은 바세나가 앞장서는 가운데 라이카 왕녀와 미다스는 서둘러 방을 나서 왕의 거처로 향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전혀 다른 장소.
두 사람이 말머리를 나란 한 채 왕도를 나서고 있었다.
한쪽은 십검호 가운데 하나이자 새로이 바람의 검성 자리에 오른 바이엘 백작이었고, 다른 한 쪽은 북부사강 가운데 하나이자 붉은 여명 탑의 탑주인 체이스 백작이었다.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왕가의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 사랑의 야반도주를 행한 자식들.
이미 약혼한 애들이 왜 자꾸 그렇게 야반도주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신혼여행 보낸 셈 치고 수수방관하는 것은 무리였다.
두 사람은 이제 단순히 북부12가문의 자제들이 아닌, 세일룬 왕가가 관심을 기울이는 왕국의 영웅들이었으니 말이다.
“이번에는 남쪽인가.”
저번에는 북쪽이었는데.
쓰게 웃은 바이엘 백작은 체이스 백작을 돌아보았고, 체이스 백작은 흥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고삐를 고쳐 쥐며 말했다.
“아무튼 가세나.”
“그래, 가야지.”
가출한 자식들 잡으러.
어거스트 바이엘 백작과 어거스트 체이스 백작에 이어 원조 바이엘 백작과 체이스 백작 두 사람이.
북풍을 따라 고개를 돌린 두 백작은 고삐를 당겼다.
남쪽을 향해 바람처럼 말을 달렸다.
&
< 제81장 - 프라임 왕가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