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2장 - 급행 >
제82장 - 급행
사실 이래저래 정리의 시간이 필요한 유더였다.
왕도를 나선 이후, 정확히는 결전 이후 짧은 시간 사이에 얻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육문에 얼티메이트 원에 새로운 검술까지.’
특히 새로운 검술에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리 천무지체인 유더라 해도 새로운 것을 온전히 체화하기 위해서는 소위 말하는 숙련도를 쌓아야 했으니 말이다.
‘벨렌시아.’
유더는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한 채 벨렌시아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미 한 번 해봤던 일이라 그런지 이전보다 더 빠르게 벨렌시아를 찾을 수 있었다.
“후대 왔군요.”
눈앞에 나타난 벨렌시아는 전과 달리 꽤 흥분한 기색이 엿보였다.
뭔가 신나는- 아니, 재밌는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기본적으로는 늘 잠들어 있다고 했는데······.’
하지만 이번에는 깨어있을 만한 이유가 있기는 했다.
“후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어요. 네? 잡혔다고요.”
벨렌시아는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고 싶은 걸 참기라도 하는지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말했다.
‘아마 코델리아였다면 그냥 폴짝폴짝 뛰었겠지.’
아니, 깡총깡총이려나.
‘그런데 맨발이네.’
새삼 벨렌시아의 발을 돌아본 유더는 다시 고개를 들어 초롱초롱 거리다 못 해 아예 반짝반짝 빛날 거 같은 초록 눈동자에 미소를 흘렸다.
“구극태양신공에 검술을 접목하는 거 말씀이신가요?”
“맞으면서 틀려요. 구극태양신공은 애당초 검술에 근본을 둔 무공이니까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이러나저러나 란디우스는 검사였으니까.
지금이야 유더 자신처럼 무검의 검호가 아닐지 의심되는 그였지만, 영웅전기1편 당시만 하더라도 구극태양신공으로 검술을 펼쳤으니 말이다.
“구천구문은 어느 것에든 녹아들 수 있어요. 그런데 유더가 처음에는 검을 쓰지 않은 터라 지금의 구천구문은 검술보다는 권각술에 가까워요. 때문에 구극태양신공과 검술로서의 구천구문을 결합시키고, 여기에 다시 후대가 지금까지 쌓아온 여러 검술들을 더해서 하나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했어요.”
듣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작업이었지만 벨렌시아에게는 지고의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구천구문도, 구극태양신공도 전부 대단해요. 거기다 후대가 조금씩 가지고 있는 검술들도 전부 보통이 아니라 무척 재미있어요.”
순간 무슨말인지 몰라 눈을 깜박인 유더였지만 이내 이해했다.
벨렌시아는 지금 바이엘 백작가의 검술인 ‘바람의 검’과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성왕십자검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둘 모두 제대로 익힌 것은 아니었지만, 편린 정도는 갖춘 유더였다.
“아무튼 이제부터 가르쳐줄게요. 후대도 즐거울 거예요.”
발갛게 달아오른 벨렌시아의 뺨에 저도 모르게 웃은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나저러나 벨렌시아가 기뻐하니 기분이 좋아진 덕이었다.
“그런데 후대. 바로 시작하기 전에 하나만 물어볼게요.”
“네, 질문하세요.”
유더가 선선히 답하자 벨렌시아는 허리에 두 손을 올리더니 약같은 짓궂은 얼굴이 되어 물었다.
“후대는 소드 오리진으로 검술을 펼쳤을 때 생기는 이득과 손실이 뭐라고 생각해요?”
권각술을 검술처럼 펼쳤을 때 생기는 이득과 손실.
아니, 권각술로 검술을 펼칠 수 있게 되었을 때의 장단점.
‘손해는 바로 알겠는데.’
일단 리치가 짧았다.
무기의 길이만큼 공격범위가 줄어드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장점은 뭐가 있을까.
‘일단은 속도?’
아무래도 무기를 다루는 것보다는 맨손 쪽이 더 빨랐으니까.
무게도 무게였지만 검을 조작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인 인간의 수준으로 보면 후자는 별로 유의미한 차이가 아니었지만, 플레이아데스에는 초인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그 작은 차이도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건 그냥 권각술의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권각술로 검술을 펼쳤을 때의 강점이라면······.’
“변환?”
생각에 이어 목소리가 바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대답에 벨렌시아는 환한 미소를 보였다.
“맞아요. 속도와 변환이에요.”
소드 오리진은 사용자는 사지를 검과 같이 다룰 수 있었다.
즉, 검을 이용해 적의 공격을 막거나 쳐낼 때보다 동선을 줄이고 보다 빠르게 대처하는 것이 가능했다.
공격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다.
‘여기까지는 속도.’
그리고 변환이란 무엇일까.
“사지를 모두 이용한 유연한 공격?”
일반적인 권각술이라면 적의 무기를 피해야 했지만 소드 오리진은 그렇지 않았다.
때문에 일반적인 권각술이나 검술로는 생각도 못 할 공격들을 얼마든지 펼칠 수 있었다.
“그것도 맞아요. 하지만 하나 더 있어요. 조금만 더 생각해봐요.”
벨렌시아의 재촉에 유더는 미간을 좁히며 고민했고, 이내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벨렌시아가 자꾸만 손을 꼼지락 거렸기 때문이다.
“손의 자유로운 사용?”
“정답!”
이번에는 못 참았는지 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른 벨렌시아는 손을 쥐었다폈다하며 말을 이었다.
“단순히 수도手刀로만 싸우는 게 아니에요. 이 손으로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어요.”
권과 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진짜 칼로는 적을 베다말고 관절기나 잡기 같은 기술을 펼칠 수 없었다.
하지만 소드 오리진으로는 가능했다.
“천변만화.”
우아하게 양손을 펼쳐 보인 벨렌시아는 그림 같은 미소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우리 함께 황홀해져 볼까요?”
함께 검술을 익혀보아요.
벨렌시아는 숨을 크게 삼키며 기본자세를 취했고, 유더는 미묘한 단어 선정에 쓴 웃음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합니다.”
“네, 후대.”
다부지게 답한 벨렌시아는 손을 들어올렸다.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했다.
&
다음날 아침.
한 방에서 밤새도록 명상만 한 유더와 코델리아 앞에 바네사가 다시 모습을 보였다.
처음 보는 엘프 한 명을 대동한 채 말이다.
“베리어스 가문의 카넬리아입니다. 일곱 번째 검무를 배울 검수입니다.”
“카넬리아 베리어스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바네사의 소개에 키가 크고 늘씬한 여자 엘프가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대부분 금발인 엘프들 사이에서 보기 드문 붉은 머리였는데, 무척이나 시원시원한 느낌이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해요.”
유더에 이어 예를 표한 코델리아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바네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라이카 왕녀님은요?”
“왕세녀님은 지금 좀 바쁘셔서요.”
바네사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생각해보면 왕세녀이니 바쁜 것도 당연했지만 뭐랄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은 미소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나쁠 일 같지는 않은데.
특유의 감이 발동한 코델리아였지만 괜히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나쁜 일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일에까지 머리를 들이밀면 민폐였으니 말이다.
“수련장까지 안내해드릴게요. 아무래도 여기서는 검술을 펼치기 어려울 테니.”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반말을 하던 바네사였지만 유더와 코델리아가 왕궁에 정식으로 초대받은 이후에는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지, 생각해보니 정령왕이랑 계약한 후부턴가?’
방으로 안내받을 때부터 존댓말을 들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정령왕이 대단하긴 하구나.’
코델리아 입장에서야 그냥 소환수 가운데 끝판왕이라는 느낌 정도에 불과했지만 엘프들에게는 아니었다.
정령왕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세계의 기둥과도 같은 존재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소환을 할 수 있든 없든 정령왕에게 선택받은 코델리아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 당연했다.
“이쪽입니다.”
바네사가 안내한 곳은 야외 수련장이었다.
넓은 공터 위에 잔디가 깔린 것이 꼭 축구장 같았다.
“여기서 하는 건가요?”
정령의 연무에 사용되는 검무는 기본적으로 일자전승이었다. 벨렌시아가 익힌 걸 보면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지켜지는 규칙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네, 애당초 일자전승 때문에 일곱 번째 검무가 유실되었던 터라 요즘에는 여러 사람들에게 전수하고 있습니다.”
하긴, 어떻게 보면 그저 검무에 불과했으니까.
납득한 유더는 바로 카넬리아에게 일곱 번째 검무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얼결에 따라온 코델리아는 양지바른 곳에 앉아 두 사람이 하는 모습을 바네사와 함께 구경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수련장에 다른 엘프들이 하나 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다들 유더에게 관심이 많은 눈치였다.
“토벌대의 이야기가 퍼졌을 테니까요.”
유더가 어떻게 싸웠고, 어떻게 자바워크를 물리쳤는지에 대해.
바네사의 설명에 코델리아는 씩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엣헴엣헴.”
신이나. 신이나. 엣헴엣헴 신이나.
유더라면 귀엽다며 좋아했겠지만 바네사는 코델리아가 돌연 턱을 치켜세우며 엣헴거리자 고개를 갸웃했다.
“코델리아? 어디 아픈가요?”
“아니, 그··· 헤헤헤.”
설명하는 대신 그냥 웃음으로 얼버무린 코델리아는 다시 턱을 받치며 물었다.
“유더는 엘프들 사이에서도 강한 편이죠?”
“네, 거기다 맨손으로 검술을 펼치는 건 무척 특별하니까요. 인간들 사이에서도 특별하죠?”
“네, 유더랑 유더 스승님 밖에 없을 거예요.”
란디우스에게는 소드 오리진이 없었지만 그래도 저런 짓이 가능할 것 같았다.
란디우스였으니 말이다.
‘어쩌면 지금 시점으로는 인간계 본좌가 아닐까?’
란디우스보다 더 강한 인간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으니까.
“오, 대련을 하려나 보네요.”
“네?”
코델리아가 깜짝 놀라 다시 보니 과연 엘프 검사와 유더가 마주 본 채 기본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한창 검무를 배우던 카넬리아는 이쪽으로 다가섰고 말이다.
“카넬리아. 대련 요청이 들어온 거야?”
“네, 기본적인 동작은 다 배우기도 했고, 잠시 쉴 겸해서요. 다들 스승님에게 관심이 많네요.”
바네사의 물음에 카넬리아가 활짝 웃으며 답하자 코델리아는 다시 어깨를 으쓱인 뒤 말했다.
“우리 유더에요.”
“네?”
“아니, 그··· 아무튼. 다들 유더에게 관심이 많은가 봐요?”
같은 말의 반복이었지만 카넬리아는 환히 웃으며 답해주었다.
“네, 저도 겨우 두 시간 남짓 배웠을 뿐이지만··· 정말 보통 분이 아니세요. 검술에 대한 이해도도 깊으시고요. 특히 몸이 정말 멋져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코델리아는 마지막에 가서 눈을 깜박였다.
“몸이 멋져요?”
“네, 정말 멋지지 않아요? 가슴도 단단하고, 팔뚝 두께도 좋고, 특히 허벅지랑 허리가··· 흐흐흐.”
코델리아는 다시 눈을 깜박였다.
마지막에 설마 흐흐흐 웃은 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저도 모르게 경각심이 생긴 코델리아는 다시 카넬리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제 보니 금방이라도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유더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아. 알 것 같아. 사실 나도 좀 두근두근했으니까. 쭉정이 같은 엘프 남자들 사이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몸이지.”
“그쵸? 바네사가 보기에도 그렇죠? 몸 완전 좋지 않아요? 저런 몸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카넬리아가 꺄꺄 거리며 좋아하자 바네사 역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반적으로 호리호리한 엘프들 사이에는 유더처럼 조각 같은 몸매의 소유자를 찾아보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코델리아는 생각했다.
‘이년들이?’
아까부터 유더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던 거야?
“꺄, 저 팔뚝에 핏줄 선 것 좀 봐요.”
“불끈불끈하네.”
카넬리아와 바네사가 다시 한 마디씩을 보탰고, 코델리아는 순간 유더의 복장에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엘프들이 준 옷이었는데, 몸에 딱 달라붙는 것이 몸매가 노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민소매였던 터라 어깨도 다 보였다.
‘잠깐만. 구경하는 애들도 심상치가 않은데?’
어느새 모여든 구경꾼들 사이에도 얼굴을 붉히고 있는 엘프들이 많았다.
카넬리아처럼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엘프들도 적지 않았고 말이다.
‘잠깐, 잠깐. 아니, 정말로 잠깐.’
저기요, 약혼자가 여기 눈 시퍼렇게 뜨고 있거든요?
우리 유더 보면서 그렇게 침 질질 흘려대면 좀 불편하거든요?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더가 엘프 기사를 멋지게 제압하자 구경하던 여자 엘프들 사이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는 물론이고 환호성이 쏟아졌다.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대련.
이번 상대는 여자 엘프였고, 코델리아의 불편함은 한층 더 강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한 술 더 뜨는 일이 발생했다.
“코델리아, 여기에 얼마나 더 머무실 건가요?”
카넬리아의 물음에 코델리아는 순간 직감했다.
눈앞의 엘프가 유더를 어떻게 해볼 마음으로 가득하다는 것이 말이다.
“저, 저기요. 제가 유더 약혼자···거든요?”
“네, 들어서 알아요. 인간들은 그런 문화가 있다죠?”
카넬리아의 대답에 코델리아는 다시 눈을 껌벅였다.
그런 문화? 약혼자가?
코델리아가 혼란스러워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바네사가 웃으며 말했다.
“엘프들 사이에는 결혼 문화가 없거든요. 손이 워낙 귀하다보니 결혼 같은 걸 해버리면 인구가 팍 쪼그라들 수도 있어서.”
이게 무슨 소리야. 이게 무슨 소리냐구.
결혼이 없으니 약혼자도 없다?
애당초 정절 따위 신경도 안 쓰는 집단이다?
생각해보니 왕세녀랑 왕자는 있는데 왕비는 없는 엘프들이었다.
라이카 왕녀의 어머니도 아예 성을 따로 쓰는 백작이었고 말이다.
‘아니, 잠깐만. 그럼 저것들 죄다?’
유더를 보며 침을 질질 흘리는 엘프들이 새삼 새롭게 보이는 코델리아였다.
‘유더가 위험해!’
자세히 보니 지금 대련중인 여자 엘프도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이라고 해야 할까?
더욱이 성비도 이상했다. 모여든 엘프들 중에 과반수가- 아니, 거의 팔 할 가량이 여자 엘프였다.
“이야기책에서 본 건데··· 인간들은 훨씬 더 거칠고 정력적이라죠?”
카넬리아의 물음에 코델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데?
엉?
그리고 거칠고 정력적이면 네가 어쩔 건데?
‘씨발, 진짜 지건 마렵네.’
이 에로 엘프들 같으니.
‘확 엎어버릴까?’
코델리아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그 때 유더는 주변 상황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른 채 대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 대련을 즐기고 있었다.
유더에게는 지금의 대련이 어젯밤 벨렌시아에게 배운 것들을 체화시킬 좋은 기회였으니 말이다.
‘재밌어.’
강해지는 것이.
새로운 검술을 펼치는 것이.
육신을 자유롭게 다루고, 구극태양신공과 구천구문의 근본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열중한 유더는 땀을 흘리기 시작했고, 젖은(?) 유더의 몸에 엘프들이 다시 꺅꺅 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화룡점정을 찍는 일이 일어났다.
“유더는 정말 강하네.”
미다스를 동반한 라이카 왕녀의 등장.
그런데 이쪽도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뺨도 조금이지만 달아올라 있었고 말이다.
‘뭔데, 왜 유더 보면서 얼굴을 붉히는 건데. 당신 어제 나랑 유더랑 하는 거 봤잖아!’
비록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 아무튼.
심하게 불편해진 코델리아는 애써 화를 억누른 뒤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상대와 대련을 펼치는 유더를 보며 결의를 다졌다.
‘오늘밤이야.’
더 늦기 전에 결판을 봐야겠어.
결판을.
주먹을 불끈 쥔 코델리아는 유더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유더 앞에 선 코델리아는 다짜고짜 서신 한 장을 내밀었다.
“코델리아?”
“튀자.”
“어?”
“야반도주하자고.”
“코델리아 양?”
유더는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지만 코델리아는 요지부동이었다. 다시 한 번 서신을 유더에게 내밀었다.
“이거 침대 위에 올려두고 떠나자.”
하얀 봉투에 담긴 편지. 빨간 촛농으로 예쁘게 봉인까지 되어 있었다.
“저기, 그··· 제가 생각하는 그건가요?”
“그, 그거지. 그럼 뭐겠어.”
도주할 때마다 남기고 떠났던, 유더와 코델리아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 구구절절이 적힌 편지.
사실 이번에는 엘프들 사이에서 도망치는 거니 굳이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었지만 그래도 코델리아는 준비했다.
‘이번에야말로 필요하니까!’
그 에로 엘프들을 전부 떨쳐내야 하니까!
하지만 다급한 코델리아와 달리 유더는 느긋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굳이 지금 떠나야 해?”
“어, 떠나야 해. 벌써 이틀이나 지났잖아. 우리 예정대로면 벌써 영원의 숲 나갔어야 하는 거 알아? 이러다가 말레키스가 부활하면 어떡해. 빨리 가자. 응? 일곱 번째 검무 전수도 끝났잖아.”
“그렇긴 한데.”
흠.
우리 아가씨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나.
왜 이렇게 안달을 하는 걸까.
“그럼 오늘 가자고?”
“어, 오늘. 여기 침대 위에 딱 편지 놔두고 호다닥 떠나자. 간다고 말하면 라이카 왕녀가 또 붙잡을 거야.”
강한 확신이 담긴 코델리아의 말에 유더는 턱을 가볍게 만지더니 코델리아가 내민 편지를 받아들며 말했다.
“코델리아야.”
“어, 유더야.”
“진짜 지금 가자고? 아직 보상도 다 못 받았잖아.”
일단 라이카 왕녀를 구한 것과 자바워크 토벌에 대한 보상은 얼추 받았지만, 그것 외에도 이것저것 뜯어낼 계획인 유더였다.
‘정령왕은 보상이 아니잖아.’
그냥 지가 튀어나와서 코델리아를 선택한 거지 엘프들이 준비한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코델리아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어, 무조건 가야해.”
“그럼 토끼 머리띠 써줄 거야?”
“어?”
“토끼 머리띠. 꼬리랑.”
여기서 그게 왜 나오는데!
하지만 마음이 급한 코델리아였다. 얼른 고개를 끄덕이더니 짐에서 토끼 세트를 꺼내 직접 착용까지 하였다.
“자, 됐지? 이제 가자.”
코델리아가 박력 있게 나오자 유더는 당황으로 눈을 껌벅였다.
하도 안달을 해서 놀려줄 생각으로 한 말인데 진짜 토끼 세트를 착용하다니.
진짜 뭐라도 있는 걸까?
“너, 설마 엘프 죽인 건 아니지? 뭔가 범죄를 저질렀다거나······.”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정말 남부로 빨리 가야해서거든?!”
영원의 숲을 빠져나간 다음에 성십자 수호단 본부에도 들러야 했으니까.
남부에 내려간 다음에는 란디우스와 카마엘도 찾아야 하고.
말하다보니 스스로의 말에 설득이 된 코델리아는 유더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니까 빨리 가자. 합체하자.”
“알았어.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또 뭔데? 아예 바니걸 옷이라도 입어줘?”
“오, 진짜?”
유더가 눈을 반짝이자 코델리아는 차게 식은 눈을 한 채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것으로 답했다.
“알았어. 애당초 부탁하고 싶은 건 다른 거였으니까.”
“아, 진짜 지건 마렵네. 대체 뭔데 그래?”
“이거.”
코델리아가 아까부터 내밀던 서신.
“읽어봐도 돼?”
뭐라고 썼는지.
과연 코델리아가 스스로 쓴 사랑의 편지는 어떤 내용일지.
“안 돼!”
절대, 절대, 절대로!
쓰다 보니 열이 올라서 별의 별 말을 다 적고 말았으니까!
빨개진 얼굴로 유더의 손에서 서신을 뺏어든 코델리아는 침대 머리맡으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잘 보이는 곳에 내려놓았다.
“이제 가자. 응? 유더야, 응?”
코델리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하자 유더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시간을 지체할 순 없으니까.”
코델리아 말처럼 갈 길이 먼 두 사람이었다.
말도 없이 떠나는 게 좀 걸리긴 했지만, 세운 공이 워낙 많으니 별 문제는 없을 터였다.
‘엘프 왕가의 사정이 좀 궁금하긴 하지만······.’
자바워크를 막았으니 별 일은 없겠지.
혹시 모를 말레키스의 위협도 이미 라이카 왕녀에게 전해두었고.
“그럼 코델리아 양, 업히실까요?”
“네!”
배낭을 짊어진 코델리아는 폴짝 뛰어 유더의 등에 업혔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를 단단히 고쳐 업은 뒤 창문 쪽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말이야.”
“어.”
“이게 벌써 몇 번째지?”
사랑의 야반도주 하는 것이.
“몰라.”
대충 세어도 다섯 번은 넘는 것 같으니까.
코델리아는 숫자를 헤아리는 대신 유더의 목을 꼭 끌어안았고, 유더는 기분 좋게 웃었다.
살짝 미련이 남은 눈으로 침대 위의 서신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코델리아게 직접 듣는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럼 출발합니다.”
“네, 공자님.”
코델리아는 유더의 목에 얼굴을 묻었고, 유더는 바람이 되었다.
검은 질풍이 되어 영원의 숲을 가로질렀다.
&
< 제82장 - 급행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