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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240화 (240/473)

< 제86장 - 세바스찬 르귄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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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 가브는 해적이었다.

경력은 10년 남짓.

어설픈 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해적 업계에서 10년이나 굴러먹었다는 것은 그가 상당한 실력과 운, 거기에 눈치까지 보유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눈치였다.

대부분의 해적은 흉악 범죄자였고, 가브 역시 그러했다.

강간과 살인과 방화를 각기 열 번도 넘게 저질렀으니 붙잡히면 교수대 행이 분명했다.

때문에 가브는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는 것에 능했다.

이길 싸움에는 앞장서고 질 싸움에는 쓱 빠지는 것이 그가 10년이나 업계에서 버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빠져야 해.’

가브는 직감했다.

하지만 섬 안에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때문에 가브는 도망치는 대신 숨기를 택했다.

통상적으로 보면 좋은 선택이었다.

과연 베테랑 가브라며 감탄할만한 빠른 판단이었고 말이다.

통상적, 그러니까 평소였다면 말이다.

“킁킁, 이상하다. 분명히 냄새가 나는데.”

“분명 여기 있어. 여기 있다구. 감이 딱 왔어.”

바닥을 파서 만든 저장고에 숨은 가브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냄새라니, 감이라니. 저게 진정 사람의 대화란 말인가.

“아, 씨. 오줌이랑 땀 냄새 때문에 잘 못 맡겠어.”

“그거 네 냄새거든?”

“찝찝해서 안 되겠다. 벗을래.”

“미, 미친년아 왜 갑자기 벗고 지랄인데.”

“그럼 어떡하라고. 냄새 나는데. 그리고 너 욕 잘한다? 귀여운데?”

욕을 잘하는 것과 귀여운 것 사이에 대체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일까.

가브는 그저 입을 틀어막은 채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바로 얼마 전에 저장고 속에 숨어 있던 여인을 강제로 끌어내 강간하면서 숨을 곳이 이런 곳 밖에 없었냐며 멍청하다고 비웃었던 기억이 퍼뜩 떠올랐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인이 숨은 곳 따위와는 달랐다.

술을 숨겨놓기 위해 만든 저장고라 눈에 잘 띄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 씨! 빨리 뭐 입어! 유더가 보기 전에!”

“왜? 유더가 보면 안 돼?”

“어, 안 돼! 안 된다구!”

이야기의 주제가 해적 잡기에서 다른 쪽으로 흘러가는 분위기였다.

때문에 가브는 자꾸만 거칠어지는 숨을 억지로 누르며 기다렸다.

제발 이대로 가라.

이대로 그냥 가라.

“알았어, 알았어. 내가 입는다, 입어.”

“근데 뭐 입으려구.”

“해적들이 입던 거 뺏어 입으면 되지 뭐. 새 거 없으면 대충 때려잡은 애 꺼 하나 벗겨서 입고.”

“으··· 해적들이 입던 걸 입는다고? 네가 오줌 지린 거 보다 더럽지 않을까?”

“음··· 그럴지도. 그런데 이거 내 오줌 아냐. 나 오줌 같은 거 안 지려.”

“뭐라는 거야 이게. 그럼 해적들이 너한테 오줌이라도 쌌다는 거야?”

“그건 아냐.”

“그럼 뭔데?”

“아무튼 내 오줌 아님. 나 오줌 안 지림.”

“지랄.”

가. 제발 가.

그냥 가라고.

“아무튼 빨리 뭐라도 좀 입어.”

“알았어, 알았어. 아까 때려잡은 놈 바지가 그나마 깨끗해 보이더라. 입으러 가자.”

“그래, 어차피 네가 입을 거니까.”

“기집애 말하는 것 좀 봐.”

“아무튼 빨리 가자.”

“알았어, 가자.”

오, 가냐?

진짜 가냐?

해적과 강도를 수호하시는 레소스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단 기도부터 올린 가브는 온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그러자 발소리가 들려왔다.

탁탁탁.

가는구나. 정말 가는구나.

안도의 숨을 토한 가브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 저장고 안에 계속 머무는 것은 위험했다. 바로 옆방에 비밀통로가 있으니, 서둘러 이동해야만 했다.

탁탁탁.

발소리가 멀어졌다.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던 가브는 속으로 숫자를 10까지 헤아린 뒤 천천히 저장고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런 가브 위에 선 두 사람.

제자리걸음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으로 발걸음 소리의 원근을 연출한 코델리아는 까맣게 웃으며 말했다.

“거봐, 내가 감이 딱 왔다고 그랬지?”

“나도 냄새 난다고 했거든?”

흥 하고 코웃음을 친 카이사는 코를 한 번 실룩이더니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포자기하여 달려드는 가브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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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델리아와 카이사가 해적섬을 통째로 뒤엎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애당초 그리 큰 섬이 아니었던 데다가 이미 반쯤은 유더와 코델리아에 의해 박살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한 시간 남짓.

해변에 아직 살아 있는, 하지만 의식을 잃은 게 분명해 보이는 해적들을 적당히 쌓아둔 코델리아와 카이사는 유더 앞에서 입을 모아 외쳤다.

“배고파!”

“맞아! 배고파! 밥 줘!”

“밥을 달라! 밥을 달라!”

나란히 서서 소리치는 모습이 딱 골목에서 놀다 돌아온 7살짜리 애들이었다.

때문에 유더는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완전 애들이네, 애들.”

평소였다면 유더의 말에 뺨을 붉히며 부끄러워했을 코델리아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바로 옆에 카이사가 있었으니 말이다.

“나 애 맞는데? 아직 성인 아닌데? 한 달이나 남았는데? 아직 열아홉 살인데?”

“맞아, 맞아. 난 이 년 넘게 남았구!”

코델리아가 신나서 맞장구를 치자 카이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잠깐. 뭐야, 너 나보다 동생이야?”

“응? 어··· 네, 언니.”

코델리아가 저도 모르게 말을 높이자 카이사는 히죽 웃더니 그대로 코델리아의 등을 팡팡 치며 말했다.

“야! 친구 사이에 언니동생이 어디 있어! 넌 내 친구야!”

“응! 친구!”

“으유, 귀여운 것.”

코델리아가 다시 신나서 소리치자 껄껄껄 웃은 카이사는 코델리아의 머리를 마구 헤집더니 그대로 이마며 뺨에 입술을 맞춰댔다.

“아씨, 완전 아저씨 같아.”

질색을 한 코델리아는 자꾸 들러붙는 카이사를 밀어내더니 그대로 쪼르르 달려 유더의 등 뒤에 숨어버렸다.

하지만 이것도 그리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유더가 바로 코델리아의 손목을 붙잡더니 카이사와 똑같은 짓을 했기 때문이다.

“아우, 으.”

하지만 코델리아의 반응은 달랐다.

질색을 하던 방금과 달리 뺨을 붉힌 채 곤란과 기쁨이 섞인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으휴, 진짜 소문대로네. 아무데서나 쪽쪽하기는.”

카이사는 다시 낄낄낄 웃어댔고, 코델리아는 부끄러워 했으며, 유더는 마무리하듯 코델리아의 뺨을 살짝 꼬집어 주었다.

그리고 이 모든 와중에 한 남자가 헛기침을 토했다.

“흠.”

결코 작지 않은, 귀가 있다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헛기침.

하지만 돌아보는 이는 없었고, 그랬기에 남자는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토했다.

“흠흠.”

“흠흠흠.”

“흠흥흠흠!”

하지만 여전히 웃기 바쁜 카이사와 부끄러워하는 코델리아와 그런 코델리아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유더였으니.

“씨부럴 카이사 년아! 나도 좀 소개를 해달라고! 방치 플레이냐?!

남자의- 드워프 벤담의 일갈에 카이사는 비로소 웃는 것을 멈추었다.

“아, 깜박했다.”

“뭣이?”

“아무튼 이제라도 소개하면 된 거잖아? 소개할게. 벤담이야. 보다시피 드워프야. 이제 됐지?”

“야 이년아! 그런 거 말고!”

재차 역정을 낸 벤담은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결국 스스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벤담이다. 강철의 맹약 길드 소속의 장인이지.”

“내가 소개한 거랑 별로 차이도 없네.”

“차이가 왜 없어! 차이가 있지!”

다른 어디도 아닌 강철의 맹약 길드 소속의 장인인 게 중요한 거잖아! 나는 평범한 드워프A가 아니라고!

“아, 진짜. 알았어. 알았다고. 그나저나 내가 은인인데 이래도 돼? 엉? 이래도 되냐고.”

어째 뒤로 갈수록 험악해지는 카이사의 인상에 펄쩍펄쩍 뛰던 벤담은 식은땀을 한 번 삐질 흘리더니 재차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구해준 건 정말 고맙다. 길드에 돌아가면 반드시 답례하겠다. 길드에 돌아가면.”

그러니 답례를 받고 싶으면 위해를 가하지 마. 알았지? 어?

간절함이 담긴 벤담의 목소리에 카이사는 킥킥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다른 누구도 아닌 강철의 맹약 길드의 솜씨 좋은 장인 벤담의 목숨 값이 얼마일지는 벤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평소엔 짐승이나 다름없는 카이사였지만 그렇다고 멍청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영악한 부분까지 있었다.

“으윽··· 아, 알겠다. 기대하라고.”

“응, 기대할게.”

자승자박에 빠진 벤담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말하자 카이사는 예쁘게 웃은 뒤 유더와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아무튼 배고파. 밥 줘.”

“···조금만 더 설명이 필요할 거 같은데.”

정황상 해적들에게 구금당해 있던 벤담을 코델리아와 카이사가 구한 것 같기는 하다만.

“이렇게 된 거야.”

코델리아는 마치 하루 종일 놀다온 아이가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하는 것처럼 유더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았고, 유더는 모닥불에 꼬치구이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상대로의 이야기네.’

감옥 안에 붙잡혀 있던 벤담을 코델리아와 카이사가 구출했다.

해적들이 굳이 붙잡아 둔 것을 보면 벤담 스스로 자부한 것처럼 길드에서 꽤나 중요한 인물인 모양이었다.

‘남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아는 게 적네.’

기본적으로 바다 위를 나돌 때가 많은 카이사였던 데다가 남부 쪽은 강제 진행 이벤트가 많아서 자유로운 수색 활동이 사실상 제한되는 곳이었다.

‘초반 지나면 바로 탈출극이고.’

말레키스의 공격으로 남부는 정말 초토화가 되는 터라 추가적인 정보 입수도 불가능했다.

‘어찌되었든 당장 중요한 건 세바스찬인가.’

정말 이 일에 시실리아가 개입한 것인지, 개입했다면 어떤 식으로 세바스찬을 부리고 있던 것인지, 왜 해적들과 손을 잡고 이번과 같은 일을 벌였는지 등등 알아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래도 일단 첫 단추는 제대로 끼운 셈인가.’

유더는 새삼 고개를 들어 옥신각신하며 꼬치구이를 먹고 있는 코델리아와 카이사를 보았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하는 거만 보면 무슨 십년 이상 사귄 친구 사이 같았다.

‘일단 카이사는 확보했고.’

목숨을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저렇게 친해지기까지 했으니 남부의 활동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벤담도 꽤 괜찮은 부수입일 것 같고.’

말레키스와 싸우기 위해서는 남부 전체의 힘을 모아야 했으니까.

드워프와 노움들의 조력을 얻는데 벤담이 도움이 될 터였다.

‘만사형통이군.’

씩 웃은 유더는 하나 더 달라며 손을 내미는 코델리아와 카이사를 위해 새로운 꼬치를 구웠다.

그리고 약 30분 뒤.

코델리아는 유더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유더야, 유더야.”

“어, 코델리아야.”

“쟤네들 진짜 데리고 가는 거야?”

섬에 정박해 있던 해적선들 가운데 하나.

카이사는 한 대씩 더 때려서 다시 한 번 의식을 잃게 만든 해적들을 꽁꽁 묶은 뒤 차곡차곡 선실에 쌓았다.

“본보기로 삼아야 할 테니까.”

영화나 만화, 소설 등을 통해 현대에 와서는 제법 미화가 된 해적들이었지만 현실의 해적은 낭만 따위와는 거리가 먼 흉악 범죄자들이었다.

‘살인, 강간, 방화가 패시브로 깔린 놈들이니까.’

때문에 해적들은 붙잡히는 순간 사실상 교수형이 확정된 운명들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를 위해서도 필요하니까.”

“뭐가? 해적들이?”

“어, 카이사는 해적들에게 붙잡혔던 몸이니까. 그냥 우리에게 구조되어 돌아왔다는 식의 이야기가 되면 지금까지 쌓아온 해적 사냥꾼으로서의 위상이 많이 깎이겠지?”

“아··· 그래서 필요하다 이거구나. 건재하다는 걸 알려야 하니까.”

“바로 그거지. 붙잡혔지만 오히려 개박살을 내고 탈출했다. 날 건드는 놈들은 이렇게 된다. 뭐 이런거?”

“진짜 본보기구나.”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코델리아는 새삼 카이사를 돌아보았다.

키가 크고 가슴도 크고 손발도 큰 카이사.

플레이어블 캐릭터답게 미녀인 그녀는 여러모로 흑표범을 연상케 했는데, 확실히 스칼렛이나 다프네 왕녀에 비해 훨씬 더 거칠고 야성적인 면모가 느껴졌다.

‘하긴, 사략함대 선원으로도 뛰었으니까.’

아르곤 제국이나 저 먼 동방의 배들과 해전까지 몇 번이나 치른 카이사였다.

아직 스무살도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사선의 숫자만 해도 수십이 넘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세바스찬은 좀 어때?”

“부상 부위에 부목 댄 다음에 단단히 묶어뒀어. 날뛰면 곤란하니까.”

“진짜 시실리아가 한 일이면 큰일이네. 필요한 자원의 유무까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십검호 급도 세뇌가 가능하다는 거잖아.”

“뭐··· 쉽게는 못 하겠지. 원작에서도 그랬으니까.”

“우··· 진짜 그러면 좋겠다.”

하지만 유더는 물론이고 코델리아 역시 실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활약으로 인해 이미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더욱이······.’

생각보다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가 모르는 것들이 많았다.

‘결국엔 게임이었으니까.’

어마어마한 정보량을 자랑하는 영웅전기 시리즈였지만 그래도 결국 게임에 불과했다.

실제 세상인 플레이아데스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필연적인 정보의 부재와 나비효과로 인해 바뀌기 시작한 역사의 흐름.

십검호의 배신 같은 극단적인 경우는 그리 많지 않겠지만, 예상 못한 사건을 마주하는 빈도가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터였다.

“그래도 잘 할 수 있을 거야. 당장 오늘도 잘 해냈잖아?”

코델리아가 격려하듯 손을 꼭 잡으며 말하자 유더는 빙긋 웃었다. 코델리아의 이마에 새삼 다시 입술을 맞춘 뒤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잘 할 수 있을 거야.”

“응!”

헤헤헤 기분 좋게 웃은 코델리아는 눈치를 살피는가 싶더니 까치발을 들어 유더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그냥 뭐랄까,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보니 그러고 싶어서였다.

흐드러지게 많은 별들과 잔잔한 파도.

해적선 위에 나란히 선 두 사람.

충분히 낭만적인 광경이었지만 그 다음은 없었다. 카이사가 노성을 토했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진짜! 야! 좀 도와줘! 염장만 떨지 말고!”

“알았어! 갈게! 간다구!”

바로 답한 코델리아는 수줍게 웃더니 유더의 손을 잡아당겼고, 유더는 기분 좋게 웃으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코델리아와 함께 카이사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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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은 시간이었다.

아마도 자정 무렵.

평소라면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카이사가 모는 해적선이 바다를 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 좋고!”

사람이 수십 명이나 탈 수 있을 정도로 큰 배였지만 단순히 바람과 해류를 타고 나아가는 것이라면 조종에 그리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카이사는 해적섬에서 하룻밤 머무는 대신 바로 출발할 것을 제안했다.

‘길어야 몇 시간이면 도착할 거야.’

새벽녘에는 닿을 수 있을 테니 굳이 해적섬에서 하룻밤을 묵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카이사의 주장이었고, 유더와 코델리아 역시 수긍했다.

‘사실 하루 더 묵는 건 좀 찝찝하기도 하고.’

아직 세바스찬과 시실리아 사이의 관계가 증명된 것은 아니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무관하다는 증거도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이번 일에 정말 시실리아가 관계되어 있다면 섬에 계속 머무는 것은 위험할 수 있었다.

‘시실리아 성격상 뭐라도 장치를 해뒀을 테니까.’

기껏 잡은 십검호를 그냥 방치해뒀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이미 세바스찬이 제압된 것을 눈치 챘을 수도 있었다.

‘섬에 남기보다는 육지로 돌아가야 해.’

섬은 너무 제한된 공간이었다.

포위당하기도 좋고, 공격당하기도 좋으니 나갈 수 있을 때 나가는 것이 좋았다.

“별 예쁘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유더는 시선을 내렸다. 코델리아가 난간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젖혀 밤하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네.”

아직 공해 따위와는 거리가 먼 플레이아데스였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언제나 흐드러지게 많은 별들의 바다를 감상할 수 있었다.

“누워서 볼래?”

“어?”

“아니, 그렇게 보면 목 아프잖아.”

유더의 말에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이더니 제자리에 털썩 누웠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 옆에 자리를 잡은 뒤 슬쩍 팔을 옆으로 뻗었다.

“자, 팔베개.”

“응?”

“머리 아프니까?”

유더의 말에 코델리아는 눈을 다시 깜박이더니 이내 배시시 웃으며 유더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팔베개를 베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딱딱해.”

“팔?”

“어, 그래서 딱 좋아.”

아무렇게나 말한 코델리아는 조금 더 유더 쪽으로 몸을 기울인 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워서 보니 정말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아놔, 저것들 또 저러네.”

멀리서 카이사가 궁시렁 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선택적으로 음소거를 한 코델리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각과 촉각만으로 밤바다를- 유더를 느껴보았다.

신기하게도 무척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밤바람이 몰아치는 배 위에 아무 것도 덮지 않고 누워있는데도 말이다.

‘유더 냄새.’

코를 한 번 실룩인 코델리아는 새삼 유더가 보고 싶어 눈을 떴다. 그리고 가만히 숨을 죽인 채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유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더의 하얀 얼굴.

저 멀리서 들려오는 카이사의 궁시렁거림.

쏟아질 것만 같은 별의 바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지만 코델리아는 어느 순간 눈을 부릅떴다.

저 멀리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너도 들었어?”

코델리아의 물음에 번쩍하고 눈을 뜬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만치 멀리서 들려온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서펜트?!”

거대한 바닷뱀.

과연 유더의 말마따나 푸른 비늘을 가진 서펜트 한 마리가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속도가 엄청났는데, 저대로 놔두면 해적선과 충돌할 것 같았다.

“카이사!”

“이런 미친!”

얼핏 봐도 몸길이가 이십 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서펜트였다. 카이사는 급히 키를 돌려 진로를 바꾸려 했고, 유더는 여차하면 서펜트를 공격하기 위해 흑룡의 기운을 오른손에 집약시켰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주문을 외우는 대신 서펜트에 의식을 집중하고 있던 코델리아는 한 가지 사실을 간파했다.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말했다.

“돌진이 아냐.”

“어?”

“도망치고 있어.”

서펜트는 이쪽을 향해 돌진해오는 것이 아니었다.

놈은 지금 도망치고 있는 것이었다.

“온다.”

코델리아가 다시 말했다. 유더는 반사적으로 코델리아의 허리를 끌어안은 뒤 다시 정면을 보았고, 투시안을 발동시켰다. 어두운 바다 속을 꿰뚫어 본 그 순간 경악을 감추지 못 했다.

코델리아가 직감한 것.

서펜트를 도망치게 만든 것.

“키아악!”

서펜트의 비명과 함께 수면이 박살났다. 동시에 거대한 촉수가 솟구쳐 올라 서펜트를 옭아매었다.

촉수.

아니, 다리.

“크라켄.”

바다의 악마.

거대한 괴수.

카이사가 말한 그 때 다시 한 번 수면이 박살났다. 수십 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거대한 다리가 해적선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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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6장 - 세바스찬 르귄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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