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8장 - 성령의 호각 >
제88장 - 성령의 호각
그리스로마 신화를 원전으로 하는 세이렌의 이미지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원전 그대로의 반인반조였고, 다른 하나는 후대에 만들어진 반인반어- 즉, 인어의 이미지였다.
어느 쪽이든 아름다운 여인과 바다의 가희라는 코드를 공유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다른 종족이라 봐도 좋을 정도의 차이였다.
영웅전기2에 등장하는 세이렌들은 반인반조와 반인반어 가운데 후자를 채택하고 있었다.
대양을 누비는 바다의 엘프들.
종족 전체가 여인들로만 구성되어 있었기에 엘프보다는 드라이어드에 가까운 이미지였지만, 애당초 영웅전기 시리즈의 배경이 되는 플레이아데스에서는 드라이어드들 역시 엘프의 일종으로 분류되었다.
“후우, 후우······.”
유더는 코델리아를 꼭 끌어안은 채 마른 침을 삼켰다.
세이렌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일곱이었다.
유더가 알고 있는 상식대로 모두 아름다운 여인들이었고, 색색의 머리칼 사이로 엘프 특유의 기다란 귀가 쫑긋 솟아 있었다.
‘역시 아직 건재해.’
영웅전기2에서 마주할 수 있는 세이렌은 크게 두 종류였다.
하나는 아르곤 제국 쪽의 바다에 거하는 세이렌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말레키스에 의해 노예가 된, 세일룬 왕국 쪽 바다의 세이렌들이었다.
‘후자는 사실상 마물이나 다름없어.’
말레키스에 의해 영성이 타락하여 마물로 전락해버린 세이렌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원전이 그러한 것처럼 사이한 노래로 사람들을 현혹해 잡아먹는 식인괴물들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닐 터였다.
말레키스가 부활하기 전인 지금이라면, 놈의 남부 제압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금이라면 제국 쪽의 세이렌들이 그러한 것처럼 왕국 쪽의 세이렌들 역시 아름답고 이성적인 바다의 엘프들일 터였다.
“동쪽하늘에서도, 서쪽하늘에서도.”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유더가 부르던 노래를 어느새 저들끼리 부르기 시작한 세이렌들이었다.
과연 바다의 가희들답게 처음 듣는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화음을 넣어가며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유더.’
품 안에서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는 코델리아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세이렌들을 겁박해 장소를 옮기고 싶은 유더였지만 참아야 했다.
이성으로 감정을 억눌러야만 했다.
‘도움을 청해야 해.’
협박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코델리아의 안위가 최우선 상황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되었다.
“아름답고 강한 인간이여.”
세이렌들이 노래하는 가운데 선두에 있던 세이렌이 유더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검은 머리칼과 파란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바다의 악마를 격퇴하는 것을 보았다.”
유더는 여인을 관찰했다. 다른 사이렌들과 달리 황금으로 된 장식을 귀와 목에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분이 높은 자일 것 같았다.
‘기억에는 없어.’
영웅전기2에서 마주할 수 있는 네임드 세이렌의 숫자는 일곱.
그중에 눈앞의 여인처럼 검은 머리칼과 파란 눈동자를 가진 자는 없었다.
‘라이카 왕녀 같은 경우인가?’
사실 그랬으면 했다.
이 망망대해에서 코델리아를 구하기 위해서는 세이렌들의 해저 왕국에 초대받는 쪽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으니 말이다.
눈앞에 자리한 세이렌의 신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일이 수월하게 진행될 터였다.
“유더 어거스트 바이엘입니다. 크라켄의 공격을 받아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유더가 빠르게 말하자 세이렌 여인은 바로 답하는 대신 유더의 품에 안겨 있는 코델리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핏기가 가신 하얀 얼굴과 보랏빛으로 물든 입술.
누가 봐도 위험한 상태였지만 세이렌 여인은 서두르지 않았다.
조급함과 노여움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유더를 관찰하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다시 말하였다.
“나는 클로에 갈라스. 갈라스 가문의 당주이신 엘렉트라 갈라스 님의 적법한 계승자이자 왕국을 지키는 72개의 창 가운데 하나이다.”
왕족까지는 아니었지만 유력한 귀족 가문의 후계자인 동시에 왕국의 기사 정도 되는 인물 같았다.
“클로에 경, 부탁드립니다. 제 약혼녀인 코델리아의 상태가 무척이나 심각합니다.”
유더는 다시 한 번 간청하며 클로에의 눈을 바라보았다.
당장은 동정에 호소하고 있었지만 대답 여하에 따라 그녀를 제압해 다른 세이렌들을 협박할 마음도 있는 유더였다.
일단은 코델리아를 회복시키는 게 최우선 사항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유더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클로에는 이번에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침묵을 유지하더니 유더의 인내심이 끊어지기 직전에서야 비로소 입을 열어 말했다.
“유더 어거스트 바이엘, 강하고 아름다운 인간이여. 그대의 청을 받아들이겠다. 나 클로에 갈라스는 72개의 창 가운데 하나로서 그대를 초대하는 바이다.”
안도의 숨이 절로 나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클로에의 이야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유더를 주시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아름답고 강한 인간의 남성이여. 우리 세이렌들의 왕국에 초대받은 자들에게는 지켜야 할 법도가 있다. 그것을 알고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
영웅전기2에서 마주할 수 있는 제국 쪽 바다의 세이렌들에게도 비슷한 규칙이 있었으니까.
유더가 즉답하자 클로에는 엷은 미소를 머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되었다. 그대는 지금 이 순간부터 갈라스 가문의 손님이다. 그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라.”
“그리하겠습니다.”
마음이 급한 유더였다.
클로에는 다시 빙긋 웃더니 그런 유더에게 다가섰고, 저들끼리 작은 별을 부르던 세이렌들 역시 클로에를 따라 유더 곁에 모여들었다. 환히 웃으며 새로운 노래를 시작했다.
&
코델리아는 어둠 속에 있었다.
춥고 졸리고 배가 고팠다.
새삼 서러운 마음에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코델이라는 울음을 그쳤다.
울다보니 배가 더 고팠기 때문이다.
“흐윽. 흑.”
코델리아는 애써 울음을 삼킨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도 모르게 유더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주변엔 온통 어둠뿐이었다.
“유더야. 유더 어딨어. 유더야.”
코델리아는 어린아이처럼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정말 어린아이가 된 코델리아였다.
열 살 남짓.
하얀 드레스를 입은 코델리아는 소매로 눈물을 훔친 뒤 타박타박 걷기 시작했다.
“유더야. 언니야. 아빠. 오빠.”
온통 캄캄하니 크게 부르는 것도 겁이나 조그맣게 불렀다.
작게 부르며 계속 걷다보니 벽이 보였다. 하얀 벽에는 그림이 잔뜩 걸려 있어 마치 미술관에 온 것 같았다.
“예쁘다.”
어린 코델리아는 어느새 더 작아져 있었다.
다섯 살 남짓, 빨간 구두를 신은 채 까치발을 세워가며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액자 속 그림에는 익숙한 얼굴의 소녀가 그려져 있었다.
홍유희.
전생의 자신.
150 후반 정도 되는 키에 예쁘장하지만 동시에 까칠해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
입에 씨발을 달고 사는 고양이 같은 소녀.
“인형 같아.”
아이의 눈으로 전생의 자신을 평가하던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였다. 그림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내 방 컴퓨터.”
홍유희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왼손으로 턱을 괸 채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딸칵딸칵 누르고 있었다.
모니터 화면에는 코델리아가 있었다.
착하고 예쁘고 청순한,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 같은 사랑스러운 소녀.
영웅전기2 원작의 코델리아는 정말로 그러했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와중에도 다른 북부12가문의 자제들을 구하기 위해 살신성인하는 그녀의 모습은 성녀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홍유희는 그런 코델리아를 좋아했다.
코델리아는 눈동자를 굴렸다.
벽에 걸린 그림은 여러 개였고, 그 중에 하나가 다시 코델리아의 눈길을 끌었다.
“코델리아?”
코델리아.
검고 커다란 액자 속에 코델리아가 서 있었다.
분명 본 적이 있지만 낯선 모습이었다.
검게 물든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
홍유희가 바라보던 모니터 속 코델리아와 똑같은 얼굴이었지만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거의 반라에 가까운 차림으로 요염한 미소를 머금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본질적인 부분에서 그녀는 코델리아가 알고 있는 코델리아와 다른 사람이었다.
“마인이 되어버린 나······.”
너무 싫어서 단 한 번밖에 플레이 하지 않았던, 루카스로 플레이해야만 볼 수 있는 마인이 된 코델리아.
피로 물든 두 손을 늘어트린 채 공허하게 웃고 있었다. 아니, 서럽게 울고 있었다.
코델리아는 뒷걸음질을 쳤다. 제자리에 주저앉으며 두 눈을 꽉 감았다.
왜일까.
겨우 한 번 플레이 했을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나 선명한 것일까.
마치 홍유희의 기억처럼 또렷한 이미지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더야.”
다시 유더를 불렀다.
유더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코델리아는 눈을 떴다. 어느새 눈앞의 그림은 바뀌어 있었다.
하얀 벽위에 나란힌 걸린 커다란 그림이 두 점.
양쪽 모두 유더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알 수 있었다. 둘은 서로 달랐다.
왼쪽의 유더는 영웅전기2의 유더였다.
마치 카마엘처럼 무척이나 지치고 괴로운 눈을 한 그가 코델리아 자신을 몰아치고 있었다.
마인이 된 자신과 사투를 펼쳤다.
보기 괴로운 광경이었다.
게임에서도 저런 장면이 있었던가?
있었겠지?
그러니까 지금 저렇게 보이는 거겠지?
울상을 짓던 코델리아는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오른쪽에 걸린 유더의 그림을 보았고,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유더다.”
진짜 유더.
왼쪽의 그림 역시 유더였지만, 코델리아 자신에게는 역시 오른쪽의 유더가 진짜였다.
왼쪽과 달리 웃고 있었다.
속에 능구렁이를 백 마리 쯤 키울 것 같은 능글맞은 미소였지만 이미 콩깍지가 장착된 코델리아 눈에는 너무나 멋진 미소로만 보였다.
“헤에.”
그림 속 유더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니 벽에는 유더의 그림이 가득했다.
전생의 기억을 처음 각성한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마치 파노라마처럼 이어진 그림들 속에서 유더는 조금씩 변해갔다.
‘저럴 때도 있었네.’
코델리아는 헤실헤실 웃으며 그림들을 구경하였다.
그러다보니 새삼 다시 눈물이 나왔다.
그림이 아닌 진짜 유더가 보고 싶었다.
“유더야. 어디 있어······.”
작게 중얼거리자 눈앞의 벽이 사라졌다.
홍유희와 코델리아와 유더의 기억이 다시 의식의 수면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홍유희.
마인이 된 코델리아.
그런 코델리아를 공격하는 유더.
그리고 지금의 코델리아 자신.
지금의 유더.
“코델리아.”
코델리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너무나 반가운 목소리에 돌아섰고, 왈칵 울음을 터트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달려나갔다. 목소리의 주인을 크게 소리쳐 불렀다.
“유더!”
눈을 떴다.
잠이 덜 깨 잠시 허둥거리던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소매로 입술을 훔쳤다. 턱 선을 따라 흐르던 침을 닦아낸 뒤 연이어 눈물을 닦았다.
‘꿈이라도 꾼 건가?’
여느 꿈들이 그러하듯이 깨고 나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치 눈을 뜬 순간 누군가 기억을 감추기라도 한 것 같았다.
마인 코델리아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유더의 기억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한 코델리아는 도리질을 해 잡념을 떨쳐냈다.
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감정만은 선명히 떠올랐다.
유더가 보고 싶다.
유더가 보고 싶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속삭이던 코델리아는 깨달았다.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안고 있는 팔이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이미 유더의 품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유더야, 유더야.”
코델리아는 유더를 부르며 몸을 흔들어댔다. 유더의 얼굴이 보고 싶은데 품에 안겨 있다보니 얼굴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더야?”
다시 부른 그때였다. 돌연 허리에 감겨 있던 유더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코델리아?”
부름에 무어라 응답할 틈도 없었다. 유더가 코델리아 자신을 으스러지도록 세게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아파! 아파! 야!”
좋으면서도 괴로웠기에 다시 허둥거리자 유더의 팔에 실려 있던 힘이 약간 풀렸다.
아주 약간 말이다.
“다행이야, 다행이야. 깨어나지 않아서 걱정했어.”
유더가 무어라 계속해서 말하며 코델리아 자신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방금까지 등 쪽으로 안겨 있었는데 어느새 서로 가슴을 맞대고 있었다.
‘인형이라도 된 거 같아.’
저도 모르게 생각한 코델리아는 피식 웃더니 유더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보고 싶던 유더의 얼굴을 보았다.
‘응, 역시 우리 유더야.’
진짜 유더.
아버지와 형과 친누나나 다름없던 마이아와··· 아끼고 사랑했던 모든 이들을 잃어버려 복수밖에 모르는 괴물이 되어버린 영웅전기2의 유더가 아닌, 코델리아 자신의 유더.
“코델리아.”
유더는 코델리아를 다시 세게 끌어안으며 연신 이마와 머리에 입술을 맞추었다.
“나, 나두.”
나도 하고 싶어.
코델리아는 유더의 뺨에 입술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쭉 뺐지만 애석하게도 뜻을 이루지는 못 했다.
새삼 떠오른 것이 있어서였다.
“자, 잠깐! 잠깐!”
그러고 보니 여긴 대체 어디인걸까.
카이사랑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지?
코델리아가 허둥거리며 묻자 유더는 일단 그런 코델리아의 머리를 다시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괜찮아. 여긴 세이렌들의 왕국이야. 아직 말레키스에게 멸망하지 않은, 영웅전기2에는 나오지 않는 건재한 세이렌들의 왕국.”
“세이렌?”
“어, 세이렌. 카이사랑 벤담이랑 세바스찬도 세이렌들이 구해줬어.”
유더는 천천히 코델리아가 의식을 잃은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요약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세이렌 왕국의 기사인 클로에와의 만남과 그녀의 초대.
지금 자리한 장소가 갈로스 가문의 저택이라는 것과 코델리아가 만 하루 만에 눈을 떴다는 사실 등등을 말이다.
“그렇구나··· 다행이다.”
카이사랑 벤담뿐만 아니라 세바스찬도 목숨을 구해서.
“그나저나 용케 그런 생각을 했네?”
작은 별을 불러서 세이렌들을 부를 생각을 하다니.
역시 유더라고 해야 할까?
코델리아의 감탄에 유더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운이 좋았어. 정황상 주변에 세이렌들이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었으니까. 그녀들이 노래에 반응해주어서 다행이야.”
“응, 세이렌은 노래에 민감하··· 잠깐. 잠깐, 잠깐.”
“코델리아?”
“아니, 잠깐만.”
세이렌?
바다의 엘프- 아니, 바다의 에로프들?!
‘이런 미친!’
영원의 숲의 에로프들을 피해 도망친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또 에로프들이란 말인가!
더욱이 세이렌이라면 문제가 더 심각했다.
‘여자 밖에 없는 종족이잖아!’
남자 엘프가 있는 영원의 숲의 엘프들조차 유더를 보며 그렇게 군침을 흘려댔는데 아예 여자 밖에 없는 세이렌들은 오죽하겠는가.
‘유, 유더가 위험해.’
정말정말 위험해. 빨리 사랑의 편지를 남기고 사랑의 도주를 해야 해. 응, 반드시 그래야만 해.
코델리아는 허둥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편지지로 쓸 만한 물건을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하얗고 동그란 방 안에는 침대 외에는 가구조차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코델리아의 속내를 간파한 유더가 생각지도 못 한 말을 꺼냈다.
“코델리아야.”
“어, 왜. 빨리 튀자고?”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그, 우리 한동안 여기 머물러야 할 것 같아. 이유는··· 너도 알겠지?”
“세이렌들 때문에? 남자에 굶주린 수천 명의 에로프들이 널 노리고 있는 거야? 막 붙잡고 안 놔주겠대? 어?”
코델리아가 패닉에 빠진 얼굴로 묻자 유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번에 영원의 숲에서도 그러더니 대체 무슨 망상을 하는지 모를 코델리아였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크라켄이 깨어났으니까.”
유더와 코델리아가 크라켄을 격퇴하긴 했지만 말 그대로 쫓아낸 것에 불과했다. 놈은 아직 건재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유더가 마저 설명을 잇기도 전에 코델리아는 이상한 점 한 가지를 찾아냈다.
“깨어나?”
깊은 바다에서 온 것이 아니라 깨어났다?
깊은 잠에서?
봉인에서?
RPG적인 물음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하나 더 알려주었다.
&
“너 뭐 하냐.”
“영역표시.”
< 제88장 - 성령의 호각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