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8장 - 성령의 호각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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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에 갈라스의 외모는 목소리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흑단같이 검고 긴 머리칼과 이에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
여기에 바다의 신비를 머금은 푸른 눈동자가 더해지니 굳이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뱃사람들의 영혼을 현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덕분에 경각심이 더욱 강해진 코델리아는 유더의 팔을 좀 더 세게 끌어안으며 클로에를 다시 한 번 관찰했다.
클로에는 물고기 비늘을 연상시키는 몸에 딱 달라붙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는데, 허리에는 얇은 세검 한 자루를 차고 있었다.
‘다리가 있네.’
세이렌들은 하반신이 물고기인 인어 형태와 온전한 인간형인 엘프 형태를 자유로이 전환할 수 있었다.
애당초 이 방 자체가 공기가 있는 실내였으니 인어 형태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 했으리라.
어찌되었든 상상 이상의 미인인 클로에는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뺨을 살짝 붉힌 채 생글생글 미소 짓고 있었으니 말이다.
‘여, 역시 유더를 노리는구나!’
그래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거구나!
아직 꿈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 한 코델리아의 눈에는 클로에가 유더에게 푹 빠진 걸로밖에 보이지가 않았다.
‘저거, 저거 눈웃음치는 것 좀 봐!’
착각이 아니었다.
클로에는 정말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같은 여자가 봐도 혹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어, 그런데 이쪽?’
유더와 꼭 붙어 있는 와중이었지만 본래 이런 쪽으로는 야생 동물 뺨칠 정도로 예민한 코델리아였다.
클로에는 유더가 아닌 코델리아 자신을 보고 있었고, 눈웃음 역시 유더가 아닌 코델리아 자신에게 치고 있었다.
‘어? 나? 왜?’
유더가 아니라?
코델리아가 의아함을 느낀 그때 클로에는 사뿐사뿐 걸어 유더- 정확히는 코델리아에게 다가서더니 무척이나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갈라스 가문의 클로에 갈라스가 인사드립니다.”
그러고는 코델리아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자세를 낮춰 손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자, 잠깐. 뺨은 왜 붉히는데? 왜 그렇게 수줍어하는 건데!’
바다의 에로프 아니었어?
당황한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유더를 돌아보았고, 유더 역시 클로에의 태도에 당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얘 왜 이래?’
‘잠깐, 잠깐만.’
생각해보니 클로에가 본래 자신에게 존댓말을 했던가?
아니었다.
구조당한 직후에도, 크라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도 기본적으로 유더 자신에게 평대를 하던 클로에였다.
그런데 갑자기 왜 말을 높인단 말인가.
그리고 가만 보면 지금도 코델리아에게만 예를 표하고 있었다.
‘유, 유더야?’
얘가 손을 안 놓는데? 은근히 계속 만지고 있는데? 거기다 숨결도 거칠어지고 있는 거 같거든?
하악하악?
유더는 급히 문 쪽을 돌아보았다. 클로에를 수행하기 위해 따라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세이렌 둘 역시 잔뜩 상기된 얼굴로 이쪽을- 정확히는 코델리아를 보고 있었다.
황홀함, 기쁨, 부러움, 질투 등등 수많은 감정이 실린 눈으로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물론 코델리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소녀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카이사가 들었다면 차게 식은 표정을 지을 것 같은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한 유더는 이내 그 이유를 간파했다.
‘아! 그건가?’
‘그거? 그게 뭔데?’
이제는 급기야 손등에 뺨을 비비기 시작한 클로에에게 흠칫한 코델리아가 얼른 눈빛으로 묻자 유더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정령왕.’
‘정령왕?’
‘어, 정령왕.’
폭풍과 번개의 정령왕 아이닉스.
‘아! 그러고 보니?’
대충 알 것 같았다. 클로에와 문쪽에 선 세이렌들 모두에게서 정령의 향취가 묻어났기 때문이다.
‘향취? 진짜 냄새가 나는 거야?’
‘아니, 진짜 냄새는 아니고 느낌? 마력의 기운처럼?’
영원의 숲의 엘프들에게서도 정령의 향취가 묻어있긴 했지만 각양각색이었던 반면 지금 눈앞에 자리한 세이렌들은 모두 폭풍과 번개의 정령왕의 향취가 묻어났다.
‘아이닉스는 바다의 정령왕이기도 하니까.’
물의 정령왕과 지분 다툼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바다는 폭풍과 번개의 정령왕의 영역에 속했다.
때문에 세이렌들 가운데는 폭풍과 번개의 정령들- 정확히는 폭풍의 정령들과 계약을 맺은 세이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도 갈라스 가문은 일족 전원이 폭풍의 정령들과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그리고 코델리아는 정령왕 아이닉스의 계약자라 이거지.’
정령왕과의 계약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영원의 숲의 엘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세이렌들 사이에도 당대에는 정령왕과 계약한 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코델리아가 나타났다.
다른 누구도 아닌 폭풍과 번개의 정령왕 아이닉스와 계약한 계약자가!
‘그래서 이렇게 하악 거리는 거야?’
‘그··· 뭐랄까. 좀 애매한 비유지만 독실한 신도 앞에 교황이 나타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거 이상인가.’
영원의 숲의 엘프들 이상으로 정령들과의 유대가 깊은 세이렌들에게 있어 정령왕은 사실상 신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 신과 소통하는 존재였으니, 세이렌들 입장에서는 코델리아가 신의 지상대행자 혹은 반신에 가까운 존재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너한테도 나는 거지? 그 정령의 향취라는 거.’
‘어? 어. 바로 얼마 전에 정령왕 아저씨 오른팔을 소환하기도 했으니까.’
아마 평소였다면 이 정도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을 세이렌들이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달랐다.
코델리아에게서 정령왕 아이닉스의 향취가 진하게 감도는 탓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황홀함에 몸이 달아오를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코델리아 님······.”
클로에가 헐떡이며 촉촉한 시선을 보내오자 코델리아는 어쩔 줄 몰라 끙끙 거렸다.
매정하게 손을 뿌리치기에는 클로에가 너무 예뻤고, 그런 행동을 할 정도로 마음이 모질지도 못한 코델리아였다.
‘우으으.’
뭔가 이건 아닌데.
유더가 위험하지 않은 건 좋지만 이건 좀 뭔가 아닌 거 같은데.
코델리아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자 유더는 재빨리 손을 뻗으며 나섰다.
“클로에, 코델리아가 불편해합니다.”
유더가 딱딱한 어조로 말하자 퍼뜩 정신을 차린 클로에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헉!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아, 아뇨. 괜찮아요. 일어나세요.”
놔두면 땅에 머리라도 박을 것 같은 클로에였던 터라 코델리아는 얼른 그녀를 일으켜 세웠고, 그런 코델리아의 손길에 클로에는 다시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손수 이렇게······.”
클로에가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황홀한 표정을 짓자 코델리아는 다시 끙끙 앓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유더는 더더욱 불편한 얼굴이 되었고 말이다.
‘사람이 이렇게 바뀌나.’
분명히 구해줄 때만 해도- 아니,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쿨하기 짝이 없던 그녀였는데.
‘처음에는 몰랐던 거 같고··· 나랑 이야기 하다가 갈피를 잡은 건가.’
코델리아가 아이닉스의 계약자라는 사실을.
그리고 유더의 예상대로였다.
유더와 코델리아를 처음 구할 당시만 해도 코델리아가 아이닉스의 계약자라는 사실은 까맣게 몰랐던 클로에였다.
크라켄이 일으킨 폭풍우의 여파가 워낙 강한데다가 코델리아가 마력을 모두 소진한 상태로 죽어가던 마당이라 정령왕의 향취를 제대로 느낄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정령왕의 향취가 어찌나 강한지 코델리아를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뒤에서 지켜보던 카이사는 홀로 소리죽여 웃었다.
쩔쩔매는 코델리아와 불편한 얼굴로 질투심을 마구 뿜어내고 있는 유더의 모습이 무척이나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죠.”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유더가 운을 떼자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린 클로에가 코델리아를 보며 말했다.
“정령왕의 계약자시여, 고귀한 분이시여. 갈라스 가문의 가주가 계약자님을 모셔오라 했습니다.”
“가주님이요?”
“예, 크라켄의 일을 논의하는 회담장에 동행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클로에의 대답에 코델리아는 유더를 돌아보았고,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상 세이렌들의 여왕이 각 가문의 가주들을 모아놓고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정확히는 크라켄을 어떻게 쓰러트릴 것인지 논의하는 장소일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가자. 회의를 해야 이야기가 진행될 테니까.’
‘응,’
고개를 끄덕인 코델리아는 다시 클로에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할게요. 안내해 주세요.”
“예,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시 황홀한 미소를 지은 클로에는 코델리아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이미 코델리아의 손은 유더에게 꼭 붙잡힌 후였다.
“안내하시죠.”
“···알겠습니다.”
잠깐이지만 유더를 노려본 클로에는 그대로 돌아서서 안내를 시작했고, 코델리아는 결국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어찌되었든 유더는 바다의 에로프들에게 안전할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음, 그래.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뭔가 역전된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튼.
코델리아는 한 번 시원하게 웃는 것으로 마음을 정돈한 뒤 유더에게 눈짓을 보냈고, 불과 5분 전의 코델리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변 경계에 철저해진 유더는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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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스 가문의 가주인 엘렉트라 갈라스는 클로에의 어머니답게 그녀와 거의 흡사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모녀가 아니라 자매 같네.’
인간들이 보기에는 불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엘프들이었으니까.
20대 전반으로 보이는 클로에 옆에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엘렉트라가 서 있으니 자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는 짓도 비슷하고.’
“코델리아 님, 이쪽입니다.”
“어, 으, 네.”
갈라스 가문의 가주답게 폭풍과 번개의 정령- 그중에서도 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고 있는 엘렉트라다보니 오히려 클로에보다 더 코델리아에게 빠져든 것 같았다.
“이 목걸이를 차신 뒤에 마차에 오르세요.”
클로에가 내민 금목걸이 끝에는 하얀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수중에서도 호흡이 가능하도록 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코델리아는 얼른 목걸이를 찬 뒤 눈앞에 나타난 마차에 감탄을 표했다.
‘와, 유더야, 유더야. 저것 봐.’
‘확실히 신기하네.’
마차 자체는 지상의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지만, 마차를 끄는 동물이 달랐다.
말 대신 커다란 해마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가시지요.”
“네에.”
코델리아는 유더와 함께 마차에 올랐고, 카이사와 벤담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두 사람을 배웅했다.
유더와 코델리아와 달리 카이사와 벤담에게는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나름 남부7가문인데.’
남부에서 잘나가는 가문의 딸인데.
하지만 카이사의 구시렁거림에 반응해줄 이는 벤담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이십여 분 남짓.
쌍으로 하악거리는 클로에와 엘렉트라를 마주한 채 어색하면서도 불편한 시간을 보낸 유더와 코델리아는 세이렌들의 회의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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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 깊은 곳에 자리한 세이렌들의 왕궁은 전체적으로 반구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하얗고 예쁜 돔 주위에는 색색의 산호들이 자리했고, 다시 수많은 바다 생물들이 왕궁 주변을 헤엄치고 있으니, 마치 아쿠아리움에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겨우 그 정도가 아니지.’
초등학교 저학년 때 견학 갔던 수족관을 떠올렸던 코델리아는 도리질을 한 뒤 새삼 다시 유더의 손을 꼭 붙잡았다.
짝꿍 손 꼭 잡고 다니라던 선생님 말씀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쪽입니다.”
엘렉트라와 클로에를 필두로 무장한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긴 복도를 지나자 무척이나 커다랗고 동그란 문이 나타났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문 앞에 서서 대기하자 이내 문 너머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라스 가문의 가주 엘렉트라 갈라스와 아이닉스님의 계약자께서 입장하십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킨 코델리아는 어깨를 살짝 경직시킨 채 문 너머를 바라보았고, 가슴에서 우러난 감탄을 토했다.
“우왕······.”
기본적인 형태는 뉴스에서 보던 국회의사당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무척이나 높은 천장과 가운데 단상을 중심으로 계단형태로 자리한 부채꼴의 의석들.
하지만 화려함이 달랐다.
새하얀 대리석들로 이루어진 바닥과 의석들은 물론이고 곳곳에 자리한 색색의 보석들도 아름다웠지만, 진짜배기는 천장이었다.
‘예뻐.’
투명한 천장 너머로 바다의 광경이 고스란히 보였다.
거기다 무슨 마법이라도 썼는지 심해임에도 불구하고 햇볕이 직접 내리쬐는 것처럼 천장 너머 곳곳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코델리아, 가자.]
[응!]
유더와 함께 붉은 카펫이 깔린 길을 쭉 지난 코델리아는 엘렉트라와 클로에가 안내해준 기다란 의석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제일 늦게 온 거 같지?’
‘아마도.’
다른 의석은 모두 차 있었으니까.
그리고 예상했던 그대로 다들 코델리아를 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엘렉트라와 클로에 모녀처럼 헐떡이는 자들도 있었고, 영원의 숲의 엘프들처럼 약간의 호감만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마 계약한 정령에 따라 반응의 정도가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음··· 좋아. 나쁘지 않아.’
코델리아는 새삼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로프들 걱정을 던 것도 던 것이었지만, 아까부터 안절부절 못 하며 주변 경계에 집중하는 유더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귀여워라.’
꿈속이랑은 전혀 다르네.
꿈속의 유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그저 악마들과 싸우고 또 싸울 뿐이었던 복수귀.
과거의 약혼자이자, 사랑했던 이들 가운데서 유일한 생존자였던 코델리아를 스스로의 손으로 베어버린 뒤 공허한 얼굴로 피눈물을 흘리던 그 남자.
‘가여운 사람.’
강대한 마인을 쓰러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성취감도 느끼지 못 하는 유더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요사스러운 미소 속에 온갖 감정을 숨긴 채 최후를 맞이했다.
코델리아.
악마의 손에 납치되어 결국 마인이 되어버린 그녀.
최후의 순간 과거의 자신을 되찾았지만 코델리아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이 유더를 얼마나 더 힘들게 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델리아?”
“어?”
퍼뜩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니 유더의 얼굴이 보였다.
카마엘처럼 복수귀가 되어버린 유더가 아닌, 코델리아 자신의 유더가 말이다.
“괜찮아? 어디 아픈 거야?”
“어? 아, 아니. 괜찮아. 그냥. 어, 그냥.”
뺨이 축축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모양이었다.
‘뭐지?’
방금 뭘 보았던 거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마치 눈을 뜬 채로 꿈을 꾼 기분이었다.
“들어가서 쉴래?”
“아니, 괜찮아. 응, 정말루.”
다시 고개를 끄덕인 코델리아는 유더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뒤 활짝 미소지었고, 유더는 미간을 좁힌 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납득했다.
“알았어, 조금이라도 힘들어지면 바로 말하고.”
“응, 그럴게.”
다시 예쁘게 답한 코델리아는 일부러 더 활기찬 표정을 지었고, 흠칫 놀랐던 엘렉트라와 클로에는 다시 코델리아에게 헐떡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몇 분 뒤.
“여왕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궁내부원의 커다란 외침과 함께 중앙의 연단 쪽 문이 열리며 세이렌들의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왕은 그대로구나.’
영웅전기2 후반부에 말레키스의 수하로서 등장하는 세이렌의 여왕.
영락하여 노예가 된 그때와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지만 외모 자체는 거의 동일한 그녀였다.
회색에 가까운 하얀 머리칼과 현명함이 깃든 푸른 눈동자. 다프네 왕녀나 라이카 왕녀와는 달리 가냘픈 인상이 강했지만 일국을 이끄는 이다운 위엄과 기품을 겸비하고 있었다.
“여왕 폐하를 뵙습니다.”
회의장 안에 있던 세이렌들을 따라 예를 표한 유더와 코델리아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옥좌에 착석한 여왕이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세이렌들의 여왕 일리아나 칼라카니스.
영웅전기2에서는 말레키스의 충직한 노예이자 사악한 마녀로 등장했던 그녀.
“회의를 시작하라.”
일리아나의 선언에 세이렌들이 반응했다. 재차 예를 표한 뒤 회의를 시작했다.
‘일단 흐름 자체는 예상대로네.’
클로에와 이미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세이렌들의 계획 자체는 단순했다.
봉인지에 자리한 크라켄을 아예 가둬버린 뒤 좁은 곳에 갇힌 놈에게 화력을 퍼부어 쓰러트린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크라켄을 봉인지에 가둘 수단과, 놈에게 결정타를 먹일 공격 수단 두 가지였다.
‘다행히 양쪽 모두 준비된 것 같기는 한데.’
아까부터 이쪽을 바라보는 일리아나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았다.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는 눈치였다.
‘역시 정령왕인가.’
세이렌들이 유더와 코델리아- 정확히는 코델리아에게 바라는 것은 분명했다.
정령왕을 소환해 크라켄에게 결정타를 가해 달라.
사실 충분히 할 수 있는 요구이기는 했다.
애당초 유더와 코델리아를 구해준 이유도 인명 구조보다는 크라켄과의 싸움에서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이 컸을 테니까.
이쪽에게 목숨을 구해준 보답을 받겠다는 명분 역시 있었으니 말이다.
‘더욱이 우리가 아쉬운 입장이라 생각할 가능성이 높고.’
크라켄이 남부 바다에서 설치면 피해를 입는 것은 세이렌들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역시나 그런 이야기들이 나왔다.
코델리아에게 흠뻑 빠져든 가주들은 말을 아꼈지만, 아이닉스의 영향을 적게 받는- 다른 종류의 정령들과 계약한 가주들이 꽤나 노골적으로 정령왕 소환을 요구해왔다.
‘어떡하지?’
코델리아가 눈빛으로 물어왔다.
정령왕을 소환하는 것 자체는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그녀였지만, 다른 것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그냥 넘어갈 리가 없으니까.’
상대방이 간절히 바라는 게 있는 이런 상황에서, 그것도 이쪽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오는 왕족과 귀족들을 상대로 아무 것도 받아내지 않으면 유더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뭘 어떻게 받아낼 수 있을까.
정령왕을 소환해줄 테니 그 대가를 내놓으라고 하면 세이렌들과 불편한 관계가 될 터인데.
‘이쪽이 일단 목숨 빚을 지기도 했고.’
하지만 유더였다.
분명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게 분명했다.
어느새 속이 까매진 코델리아는 기대하는 눈으로 유더를 보았고, 유더는 코델리아가 요즘 들어 좋아하게 된 사악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뒤 코델리아의 기대에 응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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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을 소환하는 데 정말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한 겁니까?”
“예, 반드시 필요합니다. 반드시.”
< 제88장 - 성령의 호각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