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8장 - 성령의 호각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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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을 소환하는 데 정말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한 겁니까?”
“예, 반드시 필요합니다. 반드시.”
유더의 흔들림 없는 눈빛과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에 질문을 던졌던 바란토 가문의 가주 말티아스 바란토는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말이 되긴 하는데.’
유더가 요구한 품목들.
대부분 마력을 증폭하거나 회복하거나, 속성을 부여하는 등 마력과 관련된 물품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아니지 않나?’
번개의 마력을 발산하는 트라이던트와 대기의 흐름을 읽어내는 마도구가 정령왕 소환에 필요하다고?
아니, 물론 아이닉스가 폭풍과 번개의 정령왕이니 억지로 연관시키자면 못 할 것도 없기는 했지만······.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유더가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무례한 질문일수도 있지만, 말티아스 가주님께서는 정령왕을 소환해 보셨습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말끝을 흐리던 말티아스는 결국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유더가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눈빛만 보아도 무슨 말을 생략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그러십니까. 이쪽은 소환해 봤는데. 정령왕 소환하는데 이런 것들이 필요하던데. 아, 물론 해보지 않으셨으니 모르실 수도 있죠. 이해합니다. 네, 이해하고말고요. 소환해보신 적이 없으신데 어쩌겠습니까.’
유더 특유의 ‘그래서 어떻게 확인하실?’이었다.
절대적인 정보 우위를 활용한 밀어붙이기였는데, 사실 이런 억지가 통하는 것은 상황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했다.
‘크라켄을 잡긴 잡아야 했으니까.’
더욱이 코델리아가 정령왕의 계약자라는 것 역시 사실이었으니까.
실제로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는 정령왕의 계약자가 필요하다는데 뭘 어쩌겠는가. 거기다 크라켄이라는 대적과의 싸움이 코앞에 닥친 상황인데.
말티아스로서는 그냥 믿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정확히는 회의가 끝난 이후 갈라스 가문의 저택에서 이뤄진 말티아스 바란토와의 논의 과정을 모두 지켜본 코델리아는 옆에 서 있던 카이사의 소매를 쭉쭉 잡아당겼다.
“카이사, 카이사.”
“왜?”
작게 부르자 저도 모르게 작게 답한 카이사가 고개를 갸웃하자 코델리아는 므흐흣 웃으며 말했다.
“우리 유더 생활력 좋지? 응? 그치?”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을 미적지근한 눈으로 바라보던 카이사는 코델리아의 뺨을 아프게 꼬집은 뒤 유더와 말티아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코델리아가 다시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무시하며 생각했다.
‘집에 돌아가면 나도 조심해야지.’
유더와 코델리아가 분명 구해준 보답 운운하며 이것저것 뜯어내려 할 테니까.
더욱이 야생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얘들은 진짜라고 말이다.
‘부부사기단······!’
카이사가 딱 맞는 말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 때였다.
말티아스와의 협상을 마친 유더는 코델리아에게 슬쩍 윙크를 했고, 코델리아는 작은 동작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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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티아스와의 협상 이후부터는 이래저래 바쁜 일정들이 계속되었다.
크라켄이 봉인지 내에 머물고 있을 때 싸움의 결판을 봐야했기 때문이다.
세이렌들의 여왕 일리아나 칼라카니스는 가냘픈 외모와 달리 강한 지배력을 갖춘 막강한 전제 군주였다.
그녀가 크라켄과의 결전을 결의하니 세이렌 왕국 전체가 군소리 없이 전쟁을 준비했다.
“이번 전투의 기본은 인해전술입니다.”
바살로 가문의 사란디스 바살로가 세운 작전은 단순하면서 효과적이었다.
“각 가문에서 모인 일백 명의 정령술사들이 크라켄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나머지 군세 전원이 화력을 집중하여 놈을 멸하는 겁니다.”
영웅전기2에서는 말레키스를 모시는 일곱 사이렌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는 사란디스는 세이렌들의 여왕 일리아나가 그런 것처럼 외모만 똑같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원작에서는 퇴폐미가 넘쳐흐르는 마녀였지만 현재의 사란디스는 무인 특유의 엄숙함이 느껴지는 정령기사였다.
“이쪽을 봐주십시오.”
사란디스가 손가락을 놀리자 허공에 반구 형태의 건축물이 나타났다.
페르지오의 엘프들이 크라켄을 봉인하기 위해 사용한 봉인지였다.
“봉인지 내부의 너비는 크라켄 한 마리가 몸을 눕히기에 딱 좋은 정도입니다. 즉, 봉인지에 놈을 고정시킨 뒤 우측 상단에 난 구멍을 통해 공격을 퍼부으면 놈은 피하지도 못 하고 모든 공격을 얻어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크라켄이 봉인지를 빠져나오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구멍을 가리키며 말하자 세이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대로만 된다면 크라켄을 쓰러트리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전 자체가 단순하다는 것도 매력적이고.’
작전이 길고 복잡할수록 실패할 확률 역시 높아지는 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이미 봉인지에 들어가 있는 크라켄의 발을 묶고 집중 타격을 가해 쓰러트린다는 작전은 그 단순함 자체가 성공을 보장하는 것 같았다.
“코델리아 님은 화력에 힘을 보태주셨으면 합니다.”
사란디스의 말에 가주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코델리아는 살짝 긴장한 가운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막타를 치려면 공격조에 속해야 했으니까.
과연 이 정도 대규모 작전에서 막타를 치는 게 가능할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대강의 사항들이 정해지자 가만히 지켜만 보던 세이렌 여왕 일리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의미는 없겠지. 마지막 준비 시간을 갖도록 해라. 앞으로 두 시간 뒤 출병할 터이니.”
애당초 예행 연습 따위가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더욱이 언제 크라켄이 봉인지를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 최대한 서둘러야만 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사란디스를 필두로 한 가주들이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고, 유더와 코델리아 역시 세일룬 왕국의 예법대로 여왕에게 존경을 표했다.
그리고 두 시간 뒤.
세이렌 왕국의 크라켄 토벌 작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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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 둥! 둥! 둥! 둥!
물속임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는 북 소리는 의외일 정도로 잘 전파되었다.
갈라스 가문의 세이렌들과 함께 해마 네 마리가 끄는 전투마차 위에 오른 유더와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토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와아······.”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세이렌들이 가득했다.
인어의 모습으로 화한 세이렌들 수백이 가문 단위로 모여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고, 해마와 길들인 상어 등등 각종 거대한 동물들 위에 올라탄 기병대 일백이 본대의 좌우에서 화려함을 뽐냈다.
중앙의 보병대. 좌우의 기병대. 전투마차 위에 탄 채 전열의 보호를 받는 후열의 정령사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이렌 여왕 일리아나와 그 친위대가 탑승한 거대한- 실로 거대한 바다거북 전차가 최후미에 자리했다.
“완전 탱크 같다. 아니, 탱크도 아니고 저걸 뭐라고 해야 하지? 기동요새?”
코델리아가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말하자 유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등껍질의 직경이 3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바다거북이다 보니 일반적인 전차와는 궤를 달리했다.
등껍질 위에 성벽을 방불케 하는 방벽들은 물론이고 각종 공성병기들까지 장착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등껍질의 중심.
옥좌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좌석 위에 자리한 일리아나가 화려하고 거대한 지팡이를 앞으로 기울이자 사방에서 호각 소리가 울렸고, 각 가문의 기수들이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진군하라.”
일리아나의 명에 다시 북소리가 울렸고, 전열에 도열해 있던 보병대가 전진을 개시했다. 어둔 바다를 밝히기 위해 소환한 빛의 정령들 아래 색색의 비늘을 가진 인어들이 진군하니 그 모습 또한 장관이었다.
“출발하겠습니다.”
클로에가 전투 마차를 몰고 앞으로 나아갔다.
해마 위에 타서 기병대에 합류해 있던 카이사 역시 무어라 소리치며 트라이던트를 높이 들었고, 세바스찬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남은 벤담은 돌아보는 이 하나 없지만 나름 열심히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일행을 배웅했다.
일리아나가 이번에 동원한 병력은 모두 합쳐 천이백 남짓.
당장 북부 국경지대에 주둔하고 있는 갈까마귀들의 숫자만 해도 일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었지만 이들 모두가 세이렌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영원의 숲의 엘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세이렌들 역시 장생종답게 병사 한 명 한 명의 기량이 무척이나 우수했다.
‘사실상 전군 출동인가.’
세이렌들의 왕국에 도착하고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이지만 이미 왕국의 규모에 대해 대강 파악한 유더였다.
이 정도면 사실상 왕국을 지킬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전군이 나선 셈이었다.
그리고 약 삼십여 분.
계속해서 나아가던 세이렌 군세의 기동 속도가 급격히 느려졌다. 봉인지에 거의 도달했기 때문이다.
“괜한 시간을 끌지 않는다. 작전대로 밀어붙여라.”
일리아나의 명에 따라 다시 기수들이 깃발을 들어 올려 뜻을 전파했다. 혹시라도 크라켄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호각을 불거나 북을 치는 행위 등은 자제하는 것 같았다.
“진군하라.”
“진군하라.”
단순한 명이었지만 이미 약조한 바가 있기에 각 가문의 기수들은 그저 돌진하는 대신 봉인지를 포위하듯 좌우로 나뉘어 전진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가운데가 비었고, 그 빈틈을 전투 마차 위에 탄 정령사들과 일리아나를 태운 바다거북이 채웠다.
“시작한다.”
기량의 차이는 존재했지만 기본적으로 세이렌들은 적어도 하나 이상의 정령들과 계약한 정령술사들이었다.
일리아나가 옥좌에서 일어서며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물의 정령들이 응답하였고, 일백의 정령사들 역시 저마다의 정령들을 불러내 하나의 명을 전달하였다.
봉쇄하라. 해류로 놈의 움직임을 묶어라. 크라켄을 봉인지에 가두어라.
정령들이 응답했다.
봉인지를 억누르는 해류가 형성되었고, 연이어 빛의 정령들이 그려낸 거대한 마법진이 봉인지 위에 펼쳐졌다.
해류는 만약을 대비한 방벽이었고, 실질적으로 크라켄을 봉쇄하는데 쓰일 것은 저 마법진이었다.
“모두의 힘을 하나로.”
일리아나가 두 손으로 지팡이를 감싸 쥐며 힘을 발하자 일백 명의 정령사들 역시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했다. 마법진에 힘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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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켄의 소리없는 포효가 주변 일대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마법진에서 강렬한 빛이 일더니 빛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십자가가 형성되었다. 크라켄이 봉인지의 구멍 밖으로 몸을 내밀기도 전에 수직으로 내리꽂혀 봉인지를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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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켄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봉인지에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빛의 봉인검이 놈을 꿰뚫어 봉쇄한 것이 분명했다.
“공격조 앞으로!”
일리아나가 봉인에 의식을 집중하고 있었기에 사란디스가 나머지 병력 전체를 지휘했다.
애당초 근접전을 위한 기병대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동행한 것이었기에 뒤에서 대기하였고, 보병대 수백이 봉인지에 뚫린 커다란 구멍 앞으로 집결하였다.
유더와 코델리아를 태운 전투 마차 역시 그런 보병대의 뒤에 자리했다.
그리고 빛이 구멍으로 향했다.
봉인지의 어둠을 몰아내니, 빛의 봉인검에 꿰뚫려 몸부림치는 크라켄의 거체가 눈에 들어왔다.
코델리아에 의해 가운데 눈이 박살났지만 아직 좌우의 눈이 남은 놈이었다. 노란 안광을 번뜩이며 이쪽을 노려보니, 그 눈빛만으로도 세이렌들의 정신을 파괴할 것 같았다.
“공격하라!”
그렇기에 사란디스는 공격을 서둘렀다. 활이나 쇠뇌같은 병기부터 시작하여 정령과 마법을 이용한 공격 등등 가능한 원거리 공격 수단 모두가 크라켄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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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가 있었다. 좁은 봉인지에 갇힌 크라켄은 공격을 피하거나 막지도 못 한 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었다.
사란디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세이렌들 역시 승리를 확신하며 공격의 기세를 올렸다.
“코델리아 님.”
클로에가 기대어린 눈으로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정령왕을 소환해 결정타를 가해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정령왕을 소환하는 대신 전신에 두른 마법구들의 도움을 받아 다른 마법을 준비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정령왕의 오른팔을 소환해 주먹을 날리는 것보다 효과적인 공격 마법이 몇이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코델리아가 마녀로 화했다.
마녀화를 처음 본 클로에가 깜짝 놀라는 가운데 코델리아는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아케이만의 비보를 동원해 마법의 위력을 증폭시키며 칼라마이트의 창을 준비했다.
‘기다려.’
전력을 다한 칼라마이트의 창을 던지는 것은 세이렌들이 준비한 결정타인 해신의 트라이던트가 사용된 직후여야만 했다.
막타를 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쪽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칼라마이트 창에는 마녀의 저주가 담겨 있어.’
이미 죽어가는 이에게 보다 확실한 죽음을 선사한다.
게임으로 치면 체력이 낮으면 낮을수록 더 큰 타격을 받게 되는, 소위 말하는 킬 결정력이 높은 마법이 바로 칼라마이트의 창이었다.
때문에 해신의 트라이던트에 일단 타격을 받은 크라켄에게 추가타로 칼라마이트의 창을 꽂아넣는 것이 보다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코델리아의 머리 위로 녹색의 기파를 뒤집어 쓴 검고 거대한 칼라마이트의 창이 형성되었다.
유더는 해신의 트라이던트를 들고 있는 사란디스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해신의 트라이던트로 투창 자세를 취한 채 주문을 읊조리고 있었다. 세이엔들의 비보인 해신의 트라이던트의 진짜 힘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공격이 계속되었다.
사란디스의 주문이 절정에 달했고, 코델리아가 만들어낸 칼라마이트의 창이 무시무시한 사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이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마법에 집중하느라 다른 곳을 신경 쓰지 못 하는 코델리아와 달리 그녀는 평소와 같았다. 때문에 직감했다. 그녀의 본능이 맹렬한 위협 신호를 보내왔다.
“폭풍.”
작게 말한 그것은 예언이 되었다.
처음엔 작은 파문이었지만 이내 거대해졌다.
먼 곳에서부터 밀려온 거대한 파문이 세이렌들의 군세를 집어삼킬 기세로 밀려왔다.
< 제88장 - 성령의 호각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