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8장 - 성령의 호각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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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켄과의 전투는 문자 그대로 짧고 굵었다.
실제로 싸운 시간 자체는 이십여 분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세이렌들이 입은 피해는 결코 적지 않았다.
크라켄이 사용한 여러 광역 공격들로 인해 전체 병력의 절반 가까이가 부상을 입었으니 말이다.
“사망자의 숫자가 적은 게 그나마 다행인가.”
수백 명에 달하는 부상자들 가운데서 아예 죽음에 이른 자는 서른 명 남짓이었는데, 역시 크라켄과 직접 접촉한 기병대 쪽에서 가장 피해가 컸다.
크라켄의 다리나 촉수에 직접 타격을 받은 것도 있었지만 거리가 가까운 만큼 정신 공격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탓이었다.
“너무 안일했구나.”
세이렌 여왕 일리아나는 책임을 통감했다.
크라켄의 움직임을 봉쇄한 뒤 화력을 집중시켜 놈을 쓰러트린다.
작전 자체는 단순했고, 가능성도 있어 보였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놈을 봉쇄하긴 했지만 봉인지에 온전히 가두지 못 하였고, 세이렌들이 준비한 화력은 놈을 쓰러트리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였다.
‘봉인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거였던가······.’
고대왕국 페르지오의 엘프들이 크라켄을 봉인하는데 그쳤던 이유.
어지간한 화력으로는 놈을 쓰러트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마 해신의 트라이던트가 명중했다 할지라도 완전히 쓰러트리는 것은 무리였겠지.’
놈의 저력은 그만큼 엄청났으니까.
만약 유더와 코델리아가 없었다면, 두 사람이 크라켄을 다시 봉인하지 않았다면.
끝내 빛의 봉인검을 부수고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크라켄에 의해 수많은 세이렌들이 죽음을 맞이했을 터였다.
“여왕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세이렌들에게 크라켄의 저력을 온전히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 말이다.
직접 부딪혀 보기 전까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던 크라켄의 저력이었다.
“그나마 놈이 봉인지에 웅크리고 있었던 덕분에 다시 봉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대로 방치했다면 어찌하지도 못 한 채 왕국이 큰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말티아스가 위로하듯 말하자 일리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랬겠지. 하지만··· 왕국을 이끄는 자로서 조금이라도 더 크라켄에 대해 조사하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화력을 준비했어야 했다.”
그것이 지도자의 책임이었으니 말이다.
일리아나의 말에 말티아스는 안타까움과 기쁨을 함께 느꼈다.
안타까움은 승리한 와중에도 일리아나가 책임을 통감하며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고, 기쁨은 영민하고 자애로운 왕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체감 때문이었다.
“여왕님, 그래도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부상자들도 오래지 않아 회복될 것입니다. 봉인지를 잘 지키면 크라켄도 더는 우환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고요.”
말티아스가 웃는 낯으로 말하자 일리아나 역시 작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말티아스를 위해서 말이다.
“그래, 이번 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이번에는 봉인지의 경비를 철저히 해야겠지.”
사실 지금까지는 크라켄의 봉인지에 대한 경비 자체를 거의 하지 않고 있던 세이렌들이었다.
지난 수백년 동안 누구도 크라켄의 봉인을 깨트릴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봉인을 깨트린 범인 역시 찾아야 한다.’
말티아스의 말처럼 봉인지를 지키는 것도 지키는 것이었지만, 애당초 원인이 된 범인을 찾는 일이야말로 우선시해야 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새삼 결의를 다진 일리아나는 우울한 이야기들로 말티아스를 곤란케 하는 대신 즐거운 이야기들을 입에 담았다.
“그래서 말티아스, 우리의 영웅들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지?”
크라켄을 봉인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유더와 코델리아를 말하는 것이 분명했기에 말티아스는 활짝 웃으며 답하였다.
“갈라스 가문의 저택에서 쉬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지치기는 했지만 딱히 부상은 입지 않은 터라 밤에 있을 승전 기념회에도 참석할 것이고요.”
“다행이구나. 두 사람에게 큰 빚을 졌으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준비해야겠지.”
“그··· 하지만 여왕님. 이미 많이 가져가지 않았는지요.”
정령왕을 소환한다는 명목 하에 이미 뜯어간 것들이 어마어마했으니까.
‘잠깐, 생각해보니 결국 정령왕은 부르지도 않았잖아?’
설마 속인 건가?
애당초 정령왕 부를 생각 자체가 없었던 거 아냐?
코델리아가 들었다면 뜨끔해서 어쩔 줄 몰라했을- 그리고 유더였다면 태연한 얼굴로 ‘아닌데? 소환하려 했는데? 다만 상황이 예상과 달랐을 뿐인데?’라며 유들거렸을 생각을 말티아스가 떠올린 순간이었다.
“그렇지 않다, 말티아스. 그리고 그들이 가져간 재화들은 대부분 봉인지를 활성화시키는데 쓰이지 않았더냐.”
“그렇긴 합니다만······.”
번개의 트라이던트라든지, 이것저것 가져가서 쓰지 않은 것도 많은데요.
하지만 그런 것들을 시시콜콜 늘어놓기에는 말티아스에게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었다.
왕국의 재무를 담당하는 입장이다 보니 속이 타긴 했지만, 유더와 코델리아 덕분에 큰 위기를 넘긴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 말도 일리가 있기는 하다. 이미 많은 것을 내주었고, 때문에 우리가 당장 내줄 것이 만만치 않은 것 역시 사실이지.”
짧은 전투였지만 소비된 전비는 만만치가 않았다. 부상자들의 회복과 재활에도 막대한 비용이 소비될 터이고 말이다.
“그럼······.”
“하지만 그저 입 발린 말 몇 마디로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아니겠지. 그래서 내 생각에는······.”
잠시 말끝을 흐린 일리아나는 빙긋 웃더니 유더와 코델리아의 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물건의 이름을 밝혔고, 말티아스는 참으로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일리아나가 생각한 물건을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넘겨준다면 당장의 비용은 아낄 수 있었지만, 길게 보면 훨씬 더 큰 일이 터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말티아스, 이미 결정한 바이다. 따르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이런 면으로는 은근히 고집이 센 여왕님이었으니까.
‘그리고 사실··· 감사할 일이기도 하고.’
두 사람이 없었다면 크라켄에 의해 왕국이 초토화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마음을 좋게 먹은 말티아스는 새삼 갈라스 가문의 저택이 있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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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갈라스 가문의 저택.
승리의 주역인 유더와 코델리아는 사이좋게 마주앉아 칭찬을 하기에 바빴다.
“멜리사가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 했어.”
“멜리사 최고.”
“역시 고성능! 고대 엘프 왕국의 전문가! 세이렌들도 포기한 봉인지의 봉인 술식을 단번에 이해해서 활용하다니 정말 굉장해!”
“맞아, 맞아! 예쁘고 착하고 멋있고 믿음직해!”
유더의 칭찬은 구체적이었고, 코델리아의 칭찬은 단순했지만 진심이 묻어났다.
그리고 이런 칭찬의 포화에 멜리사는 정석적인 대응을 보였다.
[흥, 저는 어린애가 아닙니다. 그런 입에 발린 말에 넘어갈 정도로 단순하지도 않고요.]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목소리가 묘하게 흥분되어 있었다.
기분 탓인지 문 라이트의 보석 부분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처럼도 보였고 말이다.
때문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눈빛을 한 번 교환한 뒤 더더욱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소리야? 입에 발린 말이라니. 그저 사실을 나열하는 것뿐인데. 그렇지 코델리아?”
“맞아, 맞아. 그냥 전부 사실인데? 우리 멜리사 착하고 예쁘고 멋지고 믿음직한 건 그냥 팩트잖아?”
“멜리사가 없었으면 플랜B를 세울 수도 없었을 거야.”
“그것도 맞아. 멜리사가 우리 모두를 구했어. 멜리사가 없으면 역시 안 돼.”
[흠흠.]
효과가 있었다. 사람이었다면 어깨를 으쓱이며 자꾸만 치솟으려는 입꼬리를 주체 못 했을 터였다.
“멜리사, 정말 고마워.”
“맞아, 고마워. 우리 두 사람뿐만 아니라 세이렌 왕국 모두가 고마워하고 있어.”
[조, 좀 더.]
계속된 칭찬 세례에 결국 속내가 드러난 멜리사였다.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돌아오지 않는 주인님들을 기다리며 홀로 살아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본래 타고난 성격이 그런 것인지 늘 관심과 애정이 고픈 멜리사였다.
유더와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한 번 주거니 받거니 칭찬을 늘어놓았다.
“멜리사 착해.”
“멜리사 예뻐.”
“멜리사 믿음직해.”
“멜리사 똑똑해.”
[흐음, 흠.]
억제한 티가 팍팍 나는 헛기침 소리에 코델리아는 까르르 웃으며 유더를 보았다.
‘됐다, 됐어. 너도 들리지? 멜리사 완전 기분 좋아졌어.’
‘이걸로 한 동안은 안심이네.’
‘응? 왜 한 동안이야?’
‘체이스 가문 코델리아 양께서 또 잊어먹을 테니까?’
‘아니거든? 이제 진짜 자주 말 걸어줄 거거든? 둘이서 맨날맨날 수다 떨 거거든? 걸즈토킹 할 거거든?’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우씨, 진짠데.’
어찌되었든 멜리사를 달래는데 성공한 유더와 코델리아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서로 티격태격할 수 있는 것도 이번 전투에서 승리한 덕분이었으니 말이다.
“흐아아··· 힘드렀다.”
언제나처럼 발음을 뭉갠 코델리아는 문라이트를 끌어안은 채 은근슬쩍 유더의 품 안에 무너지듯 몸을 기댔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의 어깨를 안으며 머리에 입술을 맞추었다.
“조금만 쉴게.”
“푹 자. 이따 깨워줄 테니까.”
“응.”
봉인지에 마력을 쏟아 붓느라 이래저래 잔뜩 지친 와중이었으니까.
생명의 구 덕분에 실시간으로 체력이 차오르는 유더와 달리 한번 방전되면 다시 채워줄 필요가 있는 코델리아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응, 멜리사두.”
코델리아는 그대로 눈을 감았고, 유더는 코델리아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자세를 조정했다. 눈을 감고 오늘 있었던 전투를- 마지막에 사용한 검은태양의 힘을 다시 한 번 복기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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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광장에서 열린 세이렌들의 승전 연회 규모는 실로 거대했다.
연회에 참석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부상을 입은 이들을 제하고는 거의 모든 이들이 참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회의와 전투에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각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남자들 역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대부분 잡혀온 처지들이었지만 의외로 이곳 생활이 마음에 든 것인지, 아니면 잘 적응한 이들만 데리고 나온 것인지 다들 표정이 좋은 편이었다.
‘이 연회 한 번에 든 비용이 전비보다 더 드는 거 아닐까.’
하지만 필요한 일이기도 하였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슬플 때는 울고, 기쁠 때는 웃으며 감정을 표출해야만 했다.
유더가 연회장을 거닐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코델리아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응, 좋아. 우리 유더가 제일 멋있어.’
각각의 가문들이 데리고 있는 남자들 모두가 잔뜩 꾸미고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유더의 상대는 되지 못 했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코델리아는 유더의 팔을 좀 더 세게 끌어안으며 턱을 치켜세웠고, 그 모습을 뒤에서 쳐다보던 카이사는 끌끌끌 혀를 찼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정말 뻔히 보이는 코델리아였으니 말이다.
‘천생연분이다, 진짜.’
어쩜 저렇게 서로 좋아 죽으려고 할까.
쟤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꽁냥거렸을 게 분명해.
애당초 태중약혼이라고 했던가?
“전생부터 꽁냥거렸을 거다.”
“그랬을 수도.”
예기치 않게 본질을 꿰뚫은 벤담의 말에 동의한 카이사는 각 가문의 남자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나 아는 얼굴이 없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시간 여.
연회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일리아나는 광장 중앙에 세워져 있는 높은 단상 위에 오른 뒤 유더와 코델리아를 불렀다.
두 사람의 공을 모두의 앞에서 치하한 뒤 상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어쩐지 왕도 생각난다.’
‘그때랑 비슷한 상황이긴 하니까.’
왕도의 참극을 막아낸 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백작위와 새로운 성을 하사받았을 때를 떠올린 코델리아는 빙긋빙긋 웃었고, 유더는 시선을 조금 멀리해 일리아나를 보았다.
이 자리 자체를 기뻐하는 코델리아와 달리 유더의 관심은 일리아나가 준비한 포상 쪽에 좀 더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뭘 준비했으려나.’
말티아스가 이미 일리아나에게 하소연 했듯이 이미 받을만한 건 거의 다 받은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설마 돈은 아니겠지.’
다다익선이라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돈이기는 했지만, 이미 금전적으로는 차고 넘치는 유더와 코델리아였다.
‘애당초 돈 쓰고 다닐 시간도 없으니까.’
돌이켜보면 전생의 기억을 각성한 이후로는 거의 항상 미래의 멸망을 막기 위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기 바빴으니 말이다.
그나마 왕도에서 무도회를 대비해 이것저것 사들였을 때 외에는 딱히 사치를 해본 기억도 없었다.
“이쪽으로.”
유더와 코델리아가 단상 위에 오르자 일리아나는 왕도에서 세일룬 왕국의 왕 헨리 2세가 그러했던 것처럼 백성들에게 두 사람의 공을 알린 뒤 치하의 말을 덧붙였다.
코델리아는 이런 순간이 정말 좋았다.
야생의 땅에서도, 왕도에서도, 이렇게 공을 인정받으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체감되었기 때문이다.
잘하고 있어.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면 돼.
사실 코델리아에게는 전생을 각성한 이후 일어난 모든 일들이 무척이나 버거웠다.
목숨을 건 싸움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 와중에 다친 적도 많았고, 정식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극심한 고통을 겪은 적도 많았다.
멸망이 예정된 미래.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항상 마음이 무거운 그녀였다.
‘유더가 없었다면.’
만약 혼자였다면.
그래서 지금까지 겪은 모든 일들을 홀로 견뎌내야 했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워진 코델리아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유더는 어떨까.
유더도 속으로는 힘들어 할까?
코델리아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유더도 코델리아 자신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코델리아는 새삼 유더를 올려다보았고, 그 순간 울려퍼진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에 퍼뜩 정신이 들어 다시 정면을 보았다.
“그대들의 노고와 활약에 감사하며 이것을 선사하는 바이다.”
일리아나가 내민 것은 뿔로 만들어진 피리- 즉, 호각이었다.
‘뭐지?’
영웅전기2에서는 본 적이 없는 물건인데.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말레키스에 의해 세이렌 왕국이 멸망한 영웅전기2의 세계에서는 눈앞의 호각은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이렌 왕국이 건재한 지금은 달랐다.
마치 소라나 조개껍데기처럼 하얀 그것을 유더가 받아들자 일리아나 여왕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성령의 호각이다. 그대들이 어디에 있든 크게 세 번 불면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우리 왕국 전체가 일어나 그대들을 도울 것이다.”
일리아나의 설명에 유더는 눈을 크게 떴고,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였다. 퍼뜩 떠오른 것이 있어서였다.
‘버스터 콜!’
물론 만화 속의 그것과는 꽤나 다를 터였지만, 어찌되었든 비슷한 물건이기는 했다.
크게 세 번 불면 세이렌 왕국의 군대가 나타나 도와준다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대들은 왕국의 은인이니 왕국 전체가 그 은혜를 갚는 것이 맞겠지. 하지만 그대여, 너무 섣불리 그것을 사용하지는 마라. 진정으로 우리 세이렌 왕국의 힘이 필요할 때 호각을 사용해야 한다. 알겠나?”
“그리하겠습니다.”
일리아나에게 답한 유더는 조금이지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조만간 불어야 하니까.’
에이션트 블랙 드래곤 말레키스.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데몬 프린스와 맞대결이 가능할 정도로 강대한 존재였는데 휘하에는 용군단까지 부리고 있었다.
그런 말레키스와 싸우기 위해서는 이쪽 역시 막강한 군세가 필요했다.
‘어찌되었든 잘 되었어. 여간한 아이템 받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나아.’
기분이 좋아진 유더는 호각을 챙기며 다시 한 번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멋진 미소를 지었고, 일리아나는- 정확히는 일리아나 뒤에 서 있던 말티아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몸서리를 쳤다.
“자, 두 영웅을 위해 다시 한 번 환호하라!”
“와아아!”
일리아나의 말에 세이렌들이 반응하였고, 다시 한 번 시작된 박수갈채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날 밤.
유더와 코델리아는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빠른 도주를 위해 사랑의 편지를 작성했다.
일리아나도 일리아나였지만 엘렉트라와 클로에로 대표되는 갈라스 가문의 사람들이 한동안 유더와 코델리아를 놓아줄 마음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사, 사랑하는 유더 공자님과······.”
유더가 하는 말을 따라 적던 코델리아는 얼굴을 붉히더니 유더를 힐끔 노려보았다.
“야, 이거 좀 표현이 센데?”
그리고 생각해보니 왜 또 자신이 적고 있는 걸까.
하지만 유더는 능글맞게 웃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럼 그냥 내가 적을까? 그게 좋겠다. 내용도 더 풍성해질 겸.”
“아, 아냐. 그냥 내가 적을게. 응, 내가 적는 게 낫겠어.”
그냥 맡기면 대체 무슨 말을 쓸지 무서웠으니까.
코델리아가 호다닥 다시 편지지에 시선을 돌리자 유더는 작게 웃으며 코델리아를 곤란하게 만들만한 문장들을 열심히 떠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편지를 반이나 적었을까.
얼굴이 빨개진 채 예쁘고 동글동글한 글씨를 적어내리던 코델리아는 돌연 고개를 번쩍하고 들었다.
“코델리아?”
“어? 어··· 그, 뭐랄까. 갑자기 확 생각이 난 건데.”
“어.”
“그··· 명확히 말은 못 하겠는데 뭔가 또 깜박하고 있는 게 있는 거 같아.”
[저요?]
타이밍 좋게 멜리사가 말을 보탰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아니, 너 말구.”
멜리사가 아닌 다른 것.
아니, 다른 사람.
누구일까.
누굴 깜박하고 있는 것일까.
“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 아닐까?”
그러니까 까먹었겠지.
“그러네.”
언제나처럼 타당한 유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코델리아는 머릿속에 떠올를락 말락하던 누군가를 지워버렸다.
다시 부끄러움과 싸우며 사랑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시간, 전혀 다른 장소.
코델리아의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힌 누군가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귀족가의 지붕 위에 앉아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아, 진짜! 이것들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남부에서 만나자며!
남부에서 승부하자며!
로그마스터의 후예이자, 핑크폭탄의 라이벌 스칼렛.
빨간 머리의 그녀는 원망 섞인 눈으로 북쪽을 돌아보았다.
< 제88장 - 성령의 호각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