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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250화 (250/473)

< 제90장 - 카게하마 백작가 >

제90장 - 카게하마 백작가

어수선한 밤이었다.

죽었을 거라 여겨졌던 오펀드 후작가의 참수마녀 카이사가 생환했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실종되었던 신속의 검호 세바스찬 르귄 역시 의식을 잃은 상태로나마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도 있고.’

왕도를 구한 어린 영웅들.

이제는 왕국 전체가 아는 세기의 커플.

왕도에 사랑의 도주라는 유행을 만든 두 사람이 남부에 왔을 뿐만 아니라 카이사의 목숨까지 구하였으니 말 좋아하는 호사가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겹경사가 터진 셈이었다.

“그런데 역시 이상하지 않나? 그 바다의 늑대 카이사가 해적들에게 붙잡혔다니.”

“애당초 세바스찬 르귄은 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나타난 거지? 거기다 카이사와 함께라니. 이번 납치- 아니, 유괴 사건에 세바스찬 경도 연관이 있다는 소리인가?”

“환상의 커플이 카이사를 구한 것도 신기한 일이야.”

“애당초 연관이 있던가?”

“북부12가문과 남부7가문이? 무리수지 그건.”

“아무튼 아까 멀리서나마 살짝 봤는데 코델리아 양은 소문대로 정말 천사같이 예쁘더군.”

“진짜 천사라는 이야기도 있던데?”

“이 사람이 격 떨어지게 시리. 그런 헛소문을 믿나? 세상에 레나 님 말고 천사가 또 어디 있다고. 지상에 남은 유일한 천사. 그게 바로 성천사 레나 님 아니신가.”

“으음, 그런가?”

“아무튼 환상의 커플이 남부에는 왜 온 거지?”

“남부에서도 뭔가 사건이 터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면 환상의 커플이 지나간 곳에서는 늘 커다란 사건이 터졌지 않은가.

북부에서도, 저 멀리 국경 너머 야생의 땅에서도, 거기다 최근에는 왕도에서까지!

영원의 숲과 바다에서- 그러니까 크라켄에 관한 이야기까지 알았다면 유더와 코델리아를 거의 역병신으로 까지 몰아갔을 호사가들이었지만 다행히도 거기까지는 아는 바가 없는 그들이었다.

어찌되었든 말 좋아하는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가운데 음유시인들 역시 여기저기서 열심히 노래하기 시작했다.

카이사를 구한 일을 엮어 새로운 노래를 만드는 이도 있었고, 아직 이야기가 불확실한 터라 유더와 코델리아의 과거 행적을 다룬- 왕도에서 만들어진 여러 노래들을 부르는 이도 있었다.

“유더야, 들었어? 노래에 우리 이름이 나와.”

그것도 무척이나 끈적끈적한 사랑 노래에.

코델리아가 당황한 얼굴로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하자 유더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연극도 있어.”

“연극?”

“어, 너랑 내가 주인공인 연극.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나.”

“무슨 내용들인데?”

코델리아가 당혹과 기대에 불안을 섞어서 묻자 유더는 다시 작게 속삭였다.

“왕도에서 호국공에게 맞서는 거랑, 너랑 내가······ 아, 마침 저 사람이 구연하고 있네.”

“응?”

“일인극으로 말이야. 이야기꾼인가 본데?”

야시장을 지나다 말고 한쪽 구석을 가리키자 혼자서 좌우를 오가며 이야기하는 여자 이야기꾼과 그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대의 입술이 내 입술에서 죄를 씻어내도다.”

“그럼 내 입술로 공자님의 죄가 옮겨졌나요? 아니면 내 입술에서 공자님의 입술로 죄가 옮겨 갔다구요?”

“오, 이렇게 달콤할 수가. 코델리아 양, 내 죄를 돌려주시오.”

“당신은 키스를 잘하는군요.”

멍하니 듣고 있던 코델리아는 이야기꾼이 허공에 대고 홀로 쪽쪽 거리자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저, 저게 뭐야.

아니, 저게 뭐냐고. 저거 지금 막 키스하는 내용이야? 그, 그것도 저렇게 느끼한 대사를 하면서?

‘거, 거기다!’

아직 없다구! 키스한 적!

키스한 적도 없는데 왜 저런 이야기가 나도는 건데!

“얘 반응이 왜 이래. 뭐야, 그렇게 끈적거리는 주제에 아직 키스도 안 해본 거야?”

카이사의 물음에 코델리아는 흠칫하더니 입술을 뻐끔 거렸고, 카이사는 다시 킬킬 거리며 말했다.

“야, 겨우 저 정도로 이러면 어떡해. 훨씬 더 야한 것들도 많은데.”

“더, 더해?”

“어, 아무래도 사랑 이야기는 찐한 씬이 필수잖아?”

찡긋 윙크하자 히익 숨을 삼킨 코델리아는 도망치듯 스칼렛에게 달라붙었다.

“남부 이상해. 남부 야해.”

코델리아의 말에 스칼렛은 쓰게 웃었다.

애당초 북부와 왕도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남부로 수출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여성진과는 별개로 유더는 신기하다는 듯 이야기꾼을 쳐다보았다.

‘셰익스피어잖아?’

정확히는 로미오와 줄리엣.

순례자와 성인이 손을 맞대는 것을 입술로 대신하자며 키스를 유도하는 장면이었다.

‘뭐, 단순히 우연이겠지만.’

플레이아데스나 전생에 살던 세상이나 사람 사는 곳이었으니까.

셰익스피어와 비슷한 발상을 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서두르자. 카게하마 백작가는 이쪽이야.”

눈에 띄지 않게 눌러 쓴 후드를 새삼 손질하며 카이사가 말하자 일행은 고개를 끄덕인 뒤 발걸음을 내디뎠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야시장에 오펀드 후작가에서 연 작은 축제까지 더해지니 이래저래 소란스러운 아르곤 항구였다.

“바로 저기야.”

카게하마 백작가.

한밤중임에도 불빛이 밝은 항구 중심과 달리 외곽부는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했다.

낮은 목조 건물 지중에 올라 카이사가 눈짓하자 유더와 코델리아 역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저 정도면··· 왕도에서 털었던 집들이랑 비슷한 규모 같은데?]

[남부7가문 가운데 하나니까. 아예 가주가 사는 저택이기도 하고.]

각자의 영지를 가진 남부7가문이었지만 막상 가주들 대부분은 왕실 직할령인 아르곤 항구에 거하고 있었다.

“스칼렛, 확실한 거지?”

증표가 영지가 아닌 이곳에 있다는 건.

“확실해. 당장 카게하마 백작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남부7가문 가주들이 아르곤 항구에 증표를 두고 있어. 그래서 연속해서 털린 거기도 하고.”

스칼렛의 소리 죽인 설명에 카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 표정을 보니 오펀드 후작가의 증표도 아르곤 항구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블랙망토, 진짜로 예고장 안 보낼 거야?”

다른 것보다 그게 불만인 스칼렛이었다.

급한 건 알지만, 그래도 로그 마스터의 행차인데 예고장을 보내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예고장을 보내면 놈을 자극하는 수단도 될 거야. 지금이라도 보내는 게 어때?”

“아니, 이번은 아냐. 애당초 훔치기 직전에 예고장을 보내는 건 좀 반칙이지 않아? 대응할 시간을 주는 것도 아니니까. 로그마스터의 명성을 신경 쓰는 거라면 보내지 않는 것보다 못 할걸?”

“그건 그렇지만······.”

그럼 그냥 예고장 보내고 내일 오면 되잖아.

카이사의 눈빛에 유더는 재차 고개를 가로저었다.

“놈이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야. 일단 카게하마 백작가의 증표까지 확보한 다음에 남은 가오란 백작가를 털 때 예고장을 보내자. 그때는 어차피 놈을 낚을 필요가 있으니까.”

유더와 코델리아의 목적은 증표를 모으는 것이었다.

정체모를 누군가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으으음······.”

이쯤 되니 아무리 고전 마니아인 스칼렛이라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합리적인 성격의 그녀였으니 말이다.

“그보다 진짜 이런 걸 쓰고 도둑질 한다고? 애당초 토끼 머리띠는 왜 하는 건데? 물론 귀엽긴 하지만.”

나비모양 가면을 쓴 카이사의 지적에 습관대로 토끼 귀 머리띠를 착용한 코델리아는 허둥거리며 답했다.

“아니, 그러니까 이건 로그 마스터의 전통이라고 해야 할······.”

“야, 그런 전통 없거든? 이게 어디서 날조를 하려고 들어!”

스칼렛이 으르렁 거리자 코델리아는 으으으 앓는 소리를 내었다.

유더 취향이라고 말하면 유더가 너무 변태처럼 보일 터이니 말이다.

‘변태 맞지만 남들이 변태라고 하는 건 싫어.’

유더가 들었다면 일단 변태부터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했을 터였지만, 이번에는 딱히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알 방도가 없었다.

“아무튼 귀여우니까 됐잖아. 그리고 일단 핑크폭탄은 나비 가면과 토끼 귀 머리띠로 알려져 있으니까 공식 유니폼 같은 거라고 생각해 그냥.”

“아니, 그러니까 애당초 왜 토끼 귀 머리띠를 쓰냐니까?”

“로그 마스터의 활동복이 어째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어야 하는 거야······.”

카이사의 의문과 스칼렛의 한탄을 대충 흘려들은 유더는 언제나 그랬듯이 화제를 전환했다.

“아무튼 잡담은 이쯤하고 마지막으로 계획을 점검하자.”

과연 스칼렛답게 철저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전조사를 해둔 상황이었다.

카를로스가 남부7가문에게 나눠준 증표- 가문의 문장이 들어가 있는 주먹만한 크기의 엠블렘이 숨겨져 있는 장소와 저택 내부의 구조, 경비 병력의 움직임과 구성 등등이 지도 위에 꼼꼼히 쓰여 있었다.

“역시 로그 마스터의 후예. 역시 대단해.”

“와, 다시 봐도 놀랍네. 우리 집도 이렇게 조사한 거야? 우리 집 꺼도 있어?”

코델리아와 카이사가 감탄하자 기분이 좋아진 스칼렛은 흥흥 거리며 젠 채를 했고, 유더는 다시 모두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저기, 우리 지금부터 도둑질하러 갈 거거든? 소풍 가는 게 아니라?”

“예이, 예이. 알아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뭐 그냥 복면 쓰고 쳐들어가서 다 해치운 다음에 물건 들고 나오는 거잖아. 안 그래?”

카이사의 발언에 스칼렛은 바로 인상을 구겼지만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왕도에서 했던 도둑질 대부분이 우아한 잠입이라기보다는 무장침입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도폭선 오랜만이야.’

유더가 새로 만들어준, 가느다란 와이어 도폭선을 어루만진 코델리아는 새삼 에헤헤 미소를 흘렸다.

만지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코델리아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자 유더는 스칼렛과 마찬가지로 두통에 시달리는 얼굴이 되어 말했다.

“적어도 양동은 하자. 카게하마 백작가의 주의를 돌린 다음에 증표를 손에 넣으면 되니까.”

“다른 거 훔치는 것처럼 해서 병력들을 유도하자는 거지?”

“그래, 바로 그거야.”

“도둑질이 아니라 무장침투 맞네.”

카이사가 다시 킬킬 거리며 웃자 스칼렛은 한숨을 길게 토했다.

“아무튼 마음에 안 들지만 시간이 없다니 이해하겠어. 블랙망토 네가 저 짐승녀랑 같이 정면을 치면 내가 카게하마 백작이 애지중지하는 녹색신의 눈물을 털러 침투할 거야. 그럼 놈들은 양동인줄 알고 다시 내게 주의를 집중하겠지.”

“그때 내가 나선다 이거지? 사실은 양동도 함정이다! 라면서?”

“그래, 맞아. 핑크폭탄 네가 제일 중요한 역할이야.”

스칼렛의 말에 코델리아는 흥흥 거리며 젠 채했고, 스칼렛은 다시 볼 멘 소리를 내었다.

“네가 문 크리스탈을 가지고 있어서 그래. 몸 빼기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없으니까.”

단거리 공간 도약을 가능케 해주는 로그 마스터의 비보.

“좋아, 단순하지만 효과적일 거 같네. 바로 실행에 옮기자.”

유더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 그때였다.

콰강!

갑작스러운 굉음과 폭발음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카게하마 백작가였다.

“설마?”

선수를 뺏겼다?

쾅! 쾅! 쾅! 쾅!

굉음이 연달아 터지며 불꽃이 피어올랐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 일색인 일단의 무리가 카게하마 백작가의 담을 넘는 것이 보였다. 얼핏 보아도 스물은 될 것 같았는데, 정확히 유더 일행이 자리한 곳과 반대편 담을 넘고 있었다. 습격하기 직전임에도 눈치 채지 못 한 것은 그래서였다.

“잠깐, 도둑 아니었어?”

저건 그냥 군대인데?

카이사의 물음에 스칼렛은 바로 답하지 못 했다. 그녀 역시 당혹스러웠기 때문이다.

“지, 지금까지와 달라.”

앞의 네 가문을 털 때는 저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은 놈이었다.

아니, 애당초 놈이 맞기는 한 걸까?

다른 세력이 ‘증표 쟁탈전’에 끼어들었을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막아!”

“백작님을 지켜라!”

깡! 깡! 깡! 깡!

저택 내부에서 고함 소리와 함께 요란한 종소리가 울렸다.

항구의 치안을 담당하는 왕실 소속 기사들을 부르기 위함이었다.

“아무튼 어쩌지? 그냥 구경만 할 거야? 보통 놈들은 아닌 거 같은데?”

아무리 반대편에 숨어 있었다지만 카이사 자신과 코델리아가 눈치 채지 못 한 것을 보면 보통 놈들이 아니었다.

담을 넘는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았고 말이다.

어중이 떠중이들 따위의 모임이 아닌, 제대로 된 군대가 분명했다.

카이사의 물음에 유더는 빠르게 판단했다.

‘발을 뺄 수 없어.’

놈들이 실력이 어떻든 그냥 좌시할 수만은 없었다.

말레키스를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해서는 카를로스의 신물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대로 친다.”

검은 복면 무리와 카게하마 백작가가 싸우는 난장판을 비집고 들어가 증표를 손에 넣는다.

‘덤으로 제압도 하고.’

지금까지 ‘놈’이라고만 불렀던 대상.

남부7가문을 털고 있는 정체불명의 도둑.

설사 놈이 아니라도 좋았다.

이번 공격을 감행한 놈들을 제압해 좀 더 정보를 모아야 했다.

“스칼렛, 넌 따로 움직이면서 증표를 확보해줘.”

“너희는?”

스칼렛의 물음에 유더는 검은 나비 가면을 고쳐 쓰더니 숨을 깊이 삼켰다. 그대로 코델리아를 돌아보았고, 눈을 깜박이던 코델리아는 유더의 눈빛에 파란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냈다.

마치 유더를 대신해 대답하듯 새카만 미소와 함께 허리춤의 도폭선을 움켜쥐었다.

&

“씨발 쾅!”

< 제90장 - 카게하마 백작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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