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2장 - 공습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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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1. 흥분해서 잠이 안 오는 코델리아.
2. 오랜만에 떨어져 있으니 불안해서 잠이 안 오는 코델리아
3. 보고 싶어서 그냥 와봤다는 코델리아.
4. 라면 먹을래? 라며 문을 여는 코델리아.
5. 하체 조지자며 찾아온 란디우스.
열심히 행복회로를 돌리며 경우의 수를 나열해보았지만 유더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들어오시죠.”
“그래.”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역시나 란디우스였다.
“뭐냐, 그 실망한 표정은.”
“아뇨, 그냥··· 잠시 헛된 꿈을 꾸었습니다.”
유더가 영혼 없는 미소를 짓자 란디우스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커다란 손을 유더의 이마 위에 올렸다.
“열은 없는데.”
“그보다 스승님, 무슨 일이신지요.”
“이야기를 좀 하려고 왔다. 아까는 경황이 없었으니 말이다.”
거기까지 말한 란디우스는 바닥에 털썩하니 앉았고, 유더 역시 그 앞에 마주 앉았다.
“너나 나나 잠이 거의 필요 없는 몸이니 말이다.”
“그··· 렇긴 하죠.”
육문을 온전히 연 이후로는 그렇지 않아도 짧았던 수면시간이 극도로 짧아진 유더였다.
사실 하루에 두 시간 남짓 자는 것도 습관에 가까울 뿐 작정하고 자지 않는다면 몇날 며칠이고 멀쩡한 상태로 밤을 샐 수 있는 유더였다.
그리고 그건 란디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구천구문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인간에서 멀어지는 신공이니 말이다.”
란디우스의 경지는 현재 칠문이었다.
선조회귀를 통해 얻은 고대 거인족의 힘이 아니더라도 이미 육체적으로는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아무튼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상 지금이 아니면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찾아오게 되었다.”
란디우스의 말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전투로 말미암아 시실리아가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할 터였으니 말이다.
남부7가문을 비롯한 남부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것부터 하여 처리해야만 하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그간 있었던 일들을 좀 듣고 싶구나.”
생명의 신전에서 헤어진 이후 지금까지.
란디우스의 요청에 유더는 최대한 간결하게 지금까지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시작은 다리안 왕녀를 만나 아케이만의 던전을 탐험한 일이었다.
연이어 왕도에 도착한 이후 있었던 여러 일들을 이야기하였고, 그 뒤에는 남부까지 내려오는 과정에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였다.
제일검과의 조우.
호국공과의 전투.
가모르 칸과의 혈투와 얼티메이트 시리즈.
영원의 숲에서 마주한 자바워크와 엘프들의 이야기.
여기에 세뇌된 세바스찬 르귄과 크라켄, 마두르스와의 싸움까지.
일련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란디우스는 일단 턱을 매만졌고,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스승님?”
“아니, 그냥··· 신기해서 말이다.”
그래, 신기.
신기한 이야기.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지?’
란디우스 자신도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었지만 유더는 조금 더 심한 느낌이었다.
아예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 느낌이랄까?
‘아니, 그런 게 아닌가.’
사건을 몰고 다니는 게 아니라 사건을 찾아 일부러 뛰어드는 느낌.
‘그러고 보면 애당초 만났을 때부터 그러했던가.’
북부12가문의 자제들을 납치하려던 악마 추종자들과의 대립.
지금과 달리 약해빠진 몸으로 위기를 격파한 유더는 그 뒤로도 온갖 사건에 휘말렸다.
‘야생의 땅에서 있었다는 악마 추종자들과의 싸움.’
만약 유더와 코델리아가 야생의 땅에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레나는 죽었을 거다.’
아마도 지옥의 문을 닫고 목숨을 잃었겠지.
더욱이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야생의 땅 전체가 악마 추종자들의 손에 떨어져 세일룬 왕국 북부에서 커다란 환란이 일어났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왕도 또한 마찬가지.’
유더와 코델리아가 없었다면 호국공을 막지 못 했을 터였다.
‘왕족의 전멸, 결계의 붕괴. 그로 말미암은 세일룬 왕국 전체의 혼란.’
그 자체만으로도 치명적인 일이었지만 여기에 북부의 환란까지 더해졌다면 세일룬 왕국은 사실상 국가로서의 통제력을 잃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남부인가.’
에인션트 블랙 드래곤 말레키스의 공격.
‘마치···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미리 알고 막으러 다니는 것 같군.’
물론 불가능한 이야기였지만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세일룬 왕국의- 아니, 세계의 위기에 관여하고 있는 유더와 코델리아였다.
‘더욱이······.’
란디우스는 잠시 눈을 감고 처음 만났을 당시의 유더를 떠올려 보았다.
지금은 키도 훌쩍 자라고 몸에 근육도 붙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는 전혀 달랐던 유더였다.
키도 코델리아와 비슷할 정도로 작았고, 빼빼 말라 수수깡 같았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유더의 변화.
그런데 돌이켜보면 고작 1년- 아니, 1년도 되지 않는 시간 사이에 일어난 변화였다.
‘뭐지? 이 녀석 왜 이렇게 강하지?’
강해지는 속도가 정상이 아니었다.
아니, 이쯤이면 이미 정상 운운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상식을 초월한 성장 속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하나하나 헤아리면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유더는 하늘이 내린 무의 화신인 천무지체의 소유자였고, 그간 온갖 사건을 겪으면서 얻은 기연들의 숫자도 장난이 아니었다.
남들이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한 기연을 밥 먹듯이 먹고 다녔으니 말이다.
‘육문.’
현재 유더의 경지.
반년 조금 넘는 시간 만에 육문에 도달했다.
란디우스 자신조차도 육문에 도달하는 데는 5년 이상이 걸렸는데 말이다.
‘진짜 괴물이군.’
란디우스 자신이 남을 보며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날이 올 줄이야.
“스승님?”
“아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그랬다.”
적당히 얼버무린 란디우스는 다시 유더를 보았다.
살짝 미간을 좁힌 채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는 걸 보니 란디우스 자신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영 모르는 눈치였다.
‘뭐, 아무튼 잘 된 거겠지.’
유더가 빨리 강해져서 나쁠 것이 없었다.
란디우스 자신을 추월해 구천구문의 더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 역시 환영하는 바였고 말이다.
‘팔문으로의 실마리.’
유더에게 이미 몇 번이나 말한 것처럼 구천구문은 천무지체를 위해 만들어진 신공이었다.
때문에 천무지체가 아닌 란디우스는 새로운 문을 열 때마다 죽음의 고비를 넘어야 했다.
마치 다 자란 갑각류가 탈피를 할 때마다 목숨을 거는 것과 같이 말이다.
칠문을 열고 벌써 수년이 넘게 지났다.
평소였다면 억지로라도 팔문을 열기 위해 노력했을 란디우스였지만 유더를 만난 이후로- 정확히는 오문을 연 유더와 만난 이후로는 생각을 바꾸었다.
‘기존의 방식은 너무 위험하다.’
유더를 통해 구천구문을 좀 더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까지 란디우스 자신이 해오던 방식이 무모함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계속했다가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그냥 죽으러 달려드는 것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했다.
어차피 란디우스 자신의 목표는 최강의 무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악마 추종자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 다시는 파라곤 왕국의 비극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제자야.”
“예, 스승님.”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예? 아, 네. 저도 잘 부탁합니다.”
살짝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 유더였지만 이내 웃는 얼굴로 말했고, 마주 푸근한 미소를 지은 란디우스는 다시 유더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참으로 파란만장했구나.”
벌써 유더가 싸운 십검호 급 강자만 해도 다섯이 넘었다.
더욱이 호국공과 싸울 당시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약했던 유더였으니, 그 모든 전투 속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겸양하듯 말한 유더는 새삼 눈앞의 란디우스를 다시 살펴보았다.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거대한 몸이었다.
더욱이 몇 시간 전에 보았던 그 광경.
맨주먹으로 거대한 블랙 드래곤을 후두려 패던 란디우스의 모습.
‘진짜 정상이 아냐.’
그야말로 인류최강.
솔직히 카마엘이나 레나보다도 훨씬 강할 것 같은 란디우스였다.
‘맨주먹도 저렇게 강한데 칠문까지 다 열고 솔라 블레이드를 쓰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니, 아예 란디우스가 소드 오리진을 얻었다면 어땠을까.
문자 그대로 신검합일을 이룬 란디우스를 잠시 상상해본 유더는 이내 쓰게 웃었다.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벨렌시아의 불평 때문이었다.
‘후대는 정말 못됐군요. 내가 양다리도 참아줬는데.’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토라진 벨렌시아의 얼굴이 그야말로 눈에 선했다.
“제자야?”
“아, 예. 아닙니다.”
얼른 머릿속에 떠오른 벨렌시아를 지운 유더는 자세를 바로하였고, 란디우스는 직전에 유더가 그러했던 것처럼 고개를 갸웃하다 말했다.
“아무튼 제자야.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구나. 육문을 열었을 때는 선녀가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냐?”
“예, 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흠······ 그 전까지는 문을 열기만 해도 보였던 선녀였는데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다라······.”
구천구문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것은 역시 선녀였다.
애당초 흑룡을 다루는 법을 비롯하여 구천구문에 관한 것은 란디우스보다는 선녀에게 배운 것이 더 많은 유더였으니 말이다.
“뭐, 당장은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겠구나. 어쩌면 깨달음이 아직 모자란 것일지도 모르고.”
“예,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달해봐야 당장은 방법이 없었으니 말이다.
어찌되었든 이야기가 일단락되자 유더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답을 구할 수 있는 이야기를 꺼내기 위함이었다.
“스승님, 저도 한 가지 상담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음, 키라면 뭐 더 안자랄 테니 걱정 말거라. 여기서 더 커도 2미터는 절대 안 될 터이니.”
“네? 어··· 예. 다행이네요.”
“흠, 뭐 다행일 것까지야.”
아니, 다행이 맞았다.
유더 자신이 혹시라도 란디우스처럼 커질 까봐 가끔씩 노심초사하는 코델리아였으니 말이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새삼 안도의 숨을 토한 유더는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전한다는 핑계를 대며 코델리아에게 향하고 싶었지만 안 될 말이었다.
아직 진짜 하려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 했으니 말이다.
“흠흠, 스승님. 제가 상담 드리고 싶은 것은 다른 것입니다.”
“무엇이냐.”
“구극태양신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유더는 자세를 바로하더니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검은 태양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구극태양신공을 통해 유더 자신이 완성한 것.
크라켄과의 싸움 이후 조금이지만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태양의 힘.
“과연, 태양인가.”
유더의 영육 속에 자리한 검은 태양의 존재를 감지한 란디우스는 똑같이 자세를 바로 한 뒤 호흡을 가다듬었다.
유더가 그러했던 것처럼 란디우스 자신의 태양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황금빛 태양.’
유더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칠흑의 밤을 끝내고 아침의 영광을 이끄는, 진정으로 눈부신 찬란한 여명의 빛 그 자체였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란디우스의 태양이 황금빛인데 반해 유더 자신의 태양은 칠흑인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제자의 속이 까맣기 때문이다.”
“네?”
뭐라고요?
유더는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코델리아가 맨날 속이 까만 블랙망토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설마 진짜일 줄이야.
“뭐,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자의 영혼이 검은색이기 때문이다.”
칠색칠성.
영혼마다 각기 가지고 있는 일곱 개의 색과 일곱 개의 속성.
“칠흑의 영혼을 가진 인간은 무척이나 드물다. 나도 기록에서나 보았지 실제로 본 것은 제자가 처음이다.”
란디우스의 말에 유더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혹시 나쁜 건가요?”
“아니, 그렇지 않다. 영혼의 색과 소유자의 성품 사이에는 이렇다 할 관계가 없으니 말이다.”
그저 인간들 중에 칠흑의 영혼을 가진 자가 극히 드물 따름이었다.
“어찌되었든··· 대단하구나. 육문도 육문이지만 벌써 자신만의 태양을 구축했을 줄이야.”
“이대로 발전시키면 되는 걸까요?”
“그래, 내가 무어라 훈수를 둘 필요도 없다. 너의 구천구문과 구극태양신공이 이미 하나가 되었으니 그대로 태양의 힘을 키워나가면 될 것이다.”
란디우스의 말에 유더는 안도의 숨을 토했다.
애당초 처음 검은 태양의 힘을 발현했던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너무 무리수를 둔 것은 아니었는지 내심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행이다.’
제대로 하고 있었구나.
과연 천무지체.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안도의 숨을 토하던 유더는 문득 고개를 들어 란디우스를 보았다.
란디우스가 자신을 보며 씩하고 웃는데, 어째 지금까지와는 미소의 의미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스승님?”
“아마 한동안은 느긋하게 수련할 시간 따위 없을 거다. 하지만 네가 검은 태양을 이미 만들어내었으니 지체할 수도 없겠지.”
근육 단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란디우스는 유더를 똑바로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자야, 애당초 네가 구음절맥이었던 것은 극한지기를 타고났기 때문이다.”
몸에 쌓인 한기로 인해 혈맥이 막혀 기의 순환이 어그러지고, 그로 말미암아 영육이 망가지는 것이 구음절맥이었다.
유더는 태어날 때부터 강력한 한기를 가지고 있었다.
천무지체이기 이전에 극한지체로 태어났다는 소리였다.
“때문에 넌 극양의 힘을 키워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태양의 힘을 사용할 정도로 극양의 힘이 강해졌다.”
극한지기에 눌려 애당초 뿌리조차 내리지 못 하던 극양의 힘이 태양화초에 힘입어 자리를 잡게 되었고, 여기에 구극태양신공과 구천구문이 더해졌다.
“지금까지는 그저 극한지기를 억누르기만 하였다. 하지만 태양을 손에 넣은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넌 이미 극양지기이기도 하니, 극한의··· 극음의 힘을 동시에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음양지체.
서로 상극인 두 힘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둘 사이에서 새로운 조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자.
“그렇지 않나, 카마엘?”
란디우스가 등 뒤를 향해 말한 순간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문이 열렸다.
유더와 마찬가지로 극한지기를 가진 자.
검귀 카마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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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2장 - 공습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