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2장 - 공습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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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곤 항구의 아침이 밝았다.
수평선 너머에서 떠오른 일출의 광경은 언제나와 같았지만 이를 마주하는 아르곤 항구의 풍경은 어제와 달랐다.
“바다에 나가지 말라는 건가?”
“그래, 항구 봉쇄령이 내렸다네.”
아르곤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배는 수십 척을 헤아렸고 그 종류 역시 다양했다.
평소였다면 아침부터 출항을 준비하는 배들로 분주하였을 부두였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그 어떤 배도 항구를 떠나지 못 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명령이었지만 선주들은 바로 항의하는 대신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수백에 달하는 괴물들이 아르곤 항구를 공격한 사실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라면 공격에 두려움을 느낀 이들이 배를 타고 아르곤 항구를 떠나려 할 터였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항상 다투며 힘겨루기를 하던 남부7가문이 항구를 봉쇄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다.
“말레키스의 재림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네.”
“말레키스가?!”
“그래, 중앙 광장에 블랙 드래곤의 시체가 눕혀져 있는 것을 한스 녀석이 봤다고 하네. 드워프들이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걸 성십자 수호단의 단원들이 막고 있다더군.”
“허. 성십자 수호단이?”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었지만 동시에 묘한 안도감을 주는 이름이었다.
“거기다 나도 들은 거지만, 이번 공격을 막은 게 다름 아닌 파라곤의 영웅들이라더군.”
“진짜인가?”
“나도 들은 거라니까 그러네. 그리고 사실 생각해보게. 그 많은 괴물들을 하룻밤 사이에 처리할 수 있을 만한 이들이 파라곤의 영웅들 말고 또 어디 있겠나.”
“오오, 과연.”
데몬 프린스라는 초월적 존재를 격퇴한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의 이야기는 대륙 전역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환상의 커플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네.”
“그건 또 누군가.”
“왕도의 영웅들 모르나? 이번에 호국공··· 아니, 그 천인공노할 배신자로부터 왕족 분들을 지킨 젊은 영웅들 말일세.”
“아, 그 툭하면 가출한다는?”
“어허, 말조심하게.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나.”
“아니, 뭐··· 유명하잖나.”
환상의 커플이 야반도주의 달인이라는 것은 세일룬 왕국 전체가 아는 이야기였다.
당장 왕도에서도 두 사람 때문에 야반도주가 대유행이라지 않던가.
“야반도주 한 번 해보지 않은 커플이 사랑을 논할 수 없다고 했던가?”
“흠흠, 아무튼 파라곤의 영웅들에 환상의 커플까지··· 정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네.”
“진짜 말레키스일수도 있겠구만.”
“그럴지도······.”
아르곤 항구- 아니, 남부에 거하는 이들 가운데 말레키스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삼백 년이란 시간은 분명 길었지만 놈이 대지에 새겨놓은 상흔을 지우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대영웅 카를로스와 일곱 기사들의 전설.
남부를 초토화시키려 했던 검은 악룡의 이야기.
항구 곳곳에서 온갖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남부7가문의 가주들은 저마다의 저택을 나섰다.
‘카를로스의 이름아래, 용의 검이 돌아왔다.’
성십자 수호단과 시라이온 기사단의 문장이 들어간 서신에 새겨진 글귀는 남부7가문의 가주들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용의 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단 회의실.
단상 앞에 선 카마엘은 말없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등 뒤에는 란디우스와 레나, 시라이온 기사단의 단장인 마커스 경이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마테오 루클리아를 제외한 남부7가문의 여섯 가주들이 서로 거리를 둔 채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었다.
가주들의 표정은 다양했다.
흥분, 분노, 두려움, 공포.
갖가지 감정이 뒤섞인 그들의 얼굴을 마주한 카마엘은 한 차례 눈을 감았고, 이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레키스가 돌아왔다.”
이미 모두가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카마엘의 선언은 최종선고와도 같았다.
마침내 마주하게 된 현실에 가주들은 저마다 다르게 반응했다.
신음을 토하는 자도 있었고, 애써 초연함을 유지하는 자도 있었다. 두려움에 이를 악무는 자와 눈을 질끈 감아 잠시나마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택하는 자 역시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카마엘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어젯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중앙광장에 놓인 블랙 드래곤들의 시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자는 이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 카를로스의 검 또한 돌아왔다.”
카마엘이 아스카론을 들어올렸다.
봉인된 상태였기에 조금 화려한 검일뿐, 성스러운 힘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가주들 가운데 누구도 검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지 않았다.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 가운데 하나이자 성십자 수호단의 여섯 단장들 가운데서도 필두에 위치한 카마엘의 발언에는 그 정도의 무게와 힘이 있었다.
“말레키스의 수하들은 가주들이 가지고 있는 증표들을 훔쳐 이 검의 행방을 알아내려 했다. 과거 말레키스를 격퇴한 카를로스의 신물인 용살검 아스카론의 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담담히 이어진 말에 백발의 노인인 가오란 백작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부 7가문의 가주들 가운데서 최연장자인 그는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카를로스의 추종자였다.
카마엘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유더 어거스트 바이엘 백작과 코델리아 어거스트 체이스 백작이 말레키스의 수하들로부터 아스카론을 지켜냈다. 카게하마 백작의 목숨 역시 구했고 말이다.”
카마엘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카게하마 백작에게 향했다.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간밤에 있었던 일을 거의 기억하지 못 하는 카게하마 백작은 그저 미간만 좁힐 따름이었다.
“카를로스의 검이 남부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검을 그대들에게 선뜻 내어줄 수 없다. 실로 위급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가주들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가오란 백작의 경우 감히 카를로스의 신물을 강탈하려는 카마엘에게 명백한 노여움을 표했지만 다른 가주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차라리 낫다.’
말레키스가 부활한 지금 남부의 운명은 풍전등화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남부의 힘을 모아야 했다.
누군가는 카를로스의 검을 들고 남부7가문을 이끌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남부7가문 가운데 어느 한 가문이 카를로스의 검을 드는 것은 껄끄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다.’
카를로스의 검을 누가 쥐느냐를 놓고 남부7가문이 내전을 벌일 때가 아니었다.
공동의 적을 눈앞에 둔 와중에 내전을 벌일 정도로 어리석은 자는 남부7가문의 가주가 될 수 없었다.
가오란 백작 역시 감정이 앞서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자리에서 일어서거나 소리를 친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다른 가주들과 마찬가지로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누가 카를로스의 검을 들고 남부7가문을 이끌 것인가.
어느 정도 짐작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확답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그리고 이런 가주들의 반응에 카마엘은 속으로나마 안도의 숨을 토했다. 결코 어리석지 않은 남부7가문의 가주들에게 작은 찬사를 보내며 잠시 끊었던 말을 이어갔다.
“란디우스에게 카를로스의 검을 넘기려 한다. 그리고 이번 싸움이 끝나면 란디우스는 남부에 카를로스의 검을 반납할 것이다.”
카마엘의 말에 호응하듯 란디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강철의 성과 같은 거인의 풍모에 남부7가문의 가주들은 이번에도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의 숨을 토하는 이도 있었다.
‘유더의 말대로군.’
사실 카를로스의 검을 들 후보는 총 여섯이었다.
카마엘 자신, 란디우스, 레나, 시라이온 기사단의 단장인 마커스 경, 유더, 코델리아.
이중에서 유더는 고민할 여지도 없다면서 란디우스에게 카를로스의 검을 맡겨야 한다고 했다.
“그게 제일 반발이 적을 겁니다.”
카마엘은 성십자 수호단의 핵심간부였다.
대륙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강력한 단체에 속한 인물이었으니 남부7가문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성십자 수호단이 카를로스의 검을 집어삼킨 뒤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낮지만 그렇다고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은 가정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나 코델리아도 좋지 못 합니다.”
유더와 코델리아는 세일룬 왕국의 귀족이었다.
즉, 아예 카를로스의 검을 들고 남부에 눌러앉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였다.
남부7가문 입장에서는 외부에서 굴러온 상전- 그것도 북부12가문 출신의 상전이 생기는 것이었으니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마커스 경은··· 죄송한 말이지만 권위가 부족하고요.”
더욱이 왕가의 사람이니 마찬가지로 남부7가문 입장에서는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세일룬 왕가에 충성을 바치고 있는 남부7가문이기는 했지만, 단순히 세일룬 왕국에 소속되어 있는 것과 왕가의 직접 통치를 받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 말이다.
“그럼 남는 것은 스승님과 레나 님이신데, 아무래도 스승님이 낫겠죠?”
둘 다 소속 없이 떠도는 야인에,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 가운데 하나라는 명성이 있었지만 분명한 차이점 역시 존재했다.
권사- 아니, 검사와 마법사.
검을 맡겨야 한다면 둘 중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비쥬얼적인 이유도 있고요.”
누가 봐도 미친 듯이 강해보이는 란디우스와 겉모습만 보면 그저 아름답고 가냘픈 미녀인 레나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저는 스승님께 아스카론을 맡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카마엘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유더가 이야기한 이유들을 떠나,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모두를 이끌 수 있는 것은 오직 란디우스 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라곤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데몬 프린스라는 절망 앞에 굴하지 않던 그.
강철같은 의지로 끝내 모두를 구한 태양과도 같은 남자.
카마엘은 다시 현실을 보았다.
가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스카론을 란디우스에게 넘겼고, 란디우스는 정중히 아스카론을 받아들었다.
“대영웅의 검을 잠시 맡도록 하겠소.”
란디우스가 진중한 어조로 말하자 그나마 반발하던 가오란 백작조차도 순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란디우스가 지닌 압도적이라 해도 좋을 영웅의 풍모 덕분이었다.
‘역시.’
카마엘은 그답지 않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상황이 긴급하니 바로 대책 회의로 넘어가겠다.”
하지만 카마엘은 말처럼 가주들과 의견을 주고받을 생각이 없었다.
이미 대강의 방침을 모두 정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말레키스는 현재 이곳에 잠들어 있다.”
카마엘은 시라이온 기사단의 종자들이 설치한 거대한 해도의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르곤 항구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으로, 주변의 해류가 심상치 않은데다가 암초까지 많아 접근이 꺼려지는 곳이었다.
“말레키스는 아직 깨어나지 못 했다. 그렇기에 최선은 놈이 깨어나기 전에 섬을 점령, 아스카론을 사용해 아직 잠들어 있는 놈의 숨통을 끊는 것이다.”
카마엘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란디우스에게 향했고, 란디우스는 근엄한 얼굴로 아스카론을 가벼이 들어올렸다.
사실 현장에서 아스카론을 사용할 것은 유더였지만, 어차피 전장에 나서지도 않을 가주들에게 굳이 그러한 사실을 이야기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함대가 필요하다. 배신자인 루클리아 가문의 처단 역시 필요한 상황이고 말이다.”
남부7가문의 전력은 남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 모든 전력을 중립지인 아르곤 항구에 집결시키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였다.
섬을 점령하려면 일단 병력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루클리아 백작가의 가주인 마테오 루클리아는 현재 오펀드 후작가에 구금되어 있는 상태다. 아르곤 항구에 자리한 루클리아 백작가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포획하였지만 루클리아 백작가의 영지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마테오의 목숨을 인질삼아 놈들을 제어해야만 한다. 이 역할은 오펀드 후작가에 맡기겠다.”
카마엘의 말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오펀드 후작이 사납게 웃었다.
저런 역할을 맡으면 추후 루클리아 백작가를 해체할 때 오펀드 후작가에서 더 많은 지분을 손에 넣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가주들은 미간을 찌푸릴 뿐 딱히 반발하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동시에 무척이나 까다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카마엘 단장, 한 가지 질문이 있다.”
가오란 백작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비쩍 마른 고목처럼 늙고 여윈 그였지만 두 눈에는 생기가 넘치다 못 해 안광이 이는 것 같았다.
“전승에 따르면 말레키스의 휘하에는 강력한 용군단이 존재한다. 아룡들 따위가 아닌 진짜 드래곤들로 구성된 용군단이 말이다.”
카를로스의 전승에는 100마리도 넘는 블랙 드래곤들로 구성된 용군단이 등장했고, 이는 과장이 아닌 사실이었다.
“현재도 용군단이 존재할지, 존재한다 할지라도 건재할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놈들이 만약 건재한다면 해상을 통한 접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거다.”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드래곤 수십 마리가 상공에서 브레스를 내뿜으면 어디 피할 곳조차 없는 바다 위에서 목재로 된 배들의 운명은 그저 침몰뿐이었으니 말이다.
“이에 대한 대책이 준비되어 있는가?”
가오란 백작의 말에 다른 가주들 역시 우려 섞인 눈으로 카마엘을 보았다.
만약 정말로 용군단이 존재한다면 공격은 고사하고 남부를 방어하는 일 자체가 어려울 터였기 때문이다.
‘아무 곳에나 와서 브레스를 갈기다 돌아가면 그만일 테니까.’
남부는 넓었고, 이는 곧 지킬 곳 역시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주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카마엘은 아주 작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그에 대해 논의해보자 말하는 대신 자신있는 어조로 말했다.
“대책은 준비되어 있다.”
유더가 세운 계획.
카마엘의 입에서 일단의 설명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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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군단은 실존합니다.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소속된 드래곤의 숫자가 쉰이 훌쩍 넘는다고 합니다.”
가모르 칸의 정보라 세탁된 영웅전기2의 지식이었다.
남부의 가문들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말레키스와 그 수하들에 대해서는 잘 아는 유더였기 때문이다.
“마두르스를 잃었고, 아스카론을 빼앗는 것 역시 실패한 시실리아는 오르가에게 도움을 청할 겁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유더는 그 다음에 주목했다.
“오르가에게는 선택지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남부를 타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리를 지키는 거죠.”
애당초 시실리아가 남부를 공격한 것은 아스카론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나마도 아스카론을 빼앗기기 직전이 되었으니 병력을 동원한 거였지, 본래는 대규모 병력으로 항구를 공격한다는 계획 자체가 없던 시실리아였다.
“놈들의 방침은 기본적으로 기다린다일 겁니다.”
에이션트 블랙 드래곤은 일반적인 드래곤들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존재였다.
지옥에서 올라온 데몬 프린스조차도 격퇴할 수 있는 괴물인 말레키스가 부활하면 남부를 쓸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니, 놈들 입장에서는 괜히 움직여서 병력을 소모하는 것보다는 얌전히 말레키스의 부활을 기다리는 쪽이 상책이었다.
“가모르 칸에 따르면 오르가는 신중한 자입니다. 카를로스의 전승에서도 그를 바위와 같은 자로 묘사하고 있고요.”
원작에서도 그랬다.
그는 지키는 것에 특화된 장수였다.
“그러니 놈을 자극하는 겁니다. 병력을 모으고, 함대를 구성하고, 말레키스가 잠든 섬을 공격할 것 같다는 액션을 취하면 놈은 항구를 타격하는 대신 해상로를 봉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밑밥이 필요했다.
시실리아가 항구 곳곳에 뿌려두었을 사역마들을 소탕해 그녀의 눈과 귀를 어둡게 하는 동시에 한 가지 정보를 흘린다. 그로 말미암아 그녀를 불안하게 만든다.
“말레키스가 잠든 섬의 위치를 남부7가문이 알고 있다. 그곳을 치기 위해 병력을 모으고 있다.”
사역마들을 소탕한 뒤에는 상공에서 이쪽을 정찰할 아룡 따위의 정찰 병력을 견제해야 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쪽이 함대를 모으고 있다는 것을 노출해야 하고요.”
남부7가문이 병력을 모으고 있다.
섬의 위치를 알고 있다.
하지만 가까이 접근해서 상황을 완벽히 파악할 수는 없다.
이런 조건들이 주어지면 오르가가 보일 행동은 하나 밖에 없었다.
“해상을 봉쇄한다.”
어설프게 항구를 공격하는 대신 바다를 지킨다.
정말로 남부7가문이 함대를 보내면 바다에서 모조리 수장시켜 버리고, 보내지 않는다면 그저 기다린다.
말레키스의 부활을 눈앞에 둔 지금 시간은 용군단의 편이었으니 말이다.
처음 유더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카마엘은 반신반의 하였다.
유더의 말이 무척이나 그럴싸했지만 결국 탁상공론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카마엘은 결국 유더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애당초 완벽히 비밀리에 함대를 모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카마엘의 지휘를 받은 남부7가문은 유더의 말마따나 정보를 흘림과 동시에 차단하며 병력을 모았고, 용군단은 유더의 예상대로 움직였다.
“우리는 자리를 지킨다.”
오르가의 결정에 시실리아는 이유 모를 불길함을 느꼈지만 반발하지는 않았다.
논리적으로 보면 오르가의 결정에 옳았기 때문이다.
‘말레키스 님께서 깨어나시기 전에 아스카론을 빼앗고 싶기는 하지만······.’
항구를 공격하는 것은 용군단에게도 위험요소가 있는 일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남부7가문 측에는 현재 파라곤의 영웅들이라는 괴물들과 아스카론이 존재했으니 말이다.
더욱이 바다를 가로질러 섬을 치겠다며 저리 자신하고 있는 상황이니 괜히 용군단의 존재를 노출할 필요는 없었다.
오르가의 말마따나 바다 위에서 놈들을 수장시켜 버리는 쪽이 이득이었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시실리아. 그리고 공중을 제압한 우리는 바다에서 무적이고 말이다.”
“예, 오르가 님, 오르가 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시실리아가 순종하듯 고개를 숙이자 흑발의 엘프로 폴리모프하고 있던 오르가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르곤 항구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나절 뒤.
중앙광장에서의 싸움으로부터 사흘이 지난 밤.
구름이 깊어 달과 별조차 사라진 새카만 밤하늘 아래 남부7가문의 정예 병력이 저마다의 함선 위에서 출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열함의 숫자는 총 스물 일곱 척.
하나하나가 대포를 수십 문이나 배치하고 수백 명이 넘는 인원이 탑승 가능한 대형 전투함들이었다.
여기에 여섯 척의 프리깃이 더해졌으니, 배의 숫자만 총 서른 세 척에 달했다.
물론 시간을 좀 더 들인다면 세일룬 왕가의 병력까지 동원이 가능할 터였지만, 말레키스의 부활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느긋하게 병력을 모을 시간 따윈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인 거지?’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벅찬 대병력이었지만 바다 위에서 수십 마리에 달할 드래곤들에게 공중 포격을 당할 거라 생각하면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해졌다.
가오란 백작은 물론이고 다른 남부7가문의 가주들 역시 불안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방법이 있겠지요.”
그렇게 자신했으니까.
설마 무작정 바다로 나가겠는가.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걸친 생크루트 자작의 말에 가주들 가운데 가장 어린 오리올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펀드 후작과 카게하마 백작도 참전하였으니까요. 그저 단순히 바다로 가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궁금한 것은 란디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제자야. 이제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냐.”
유더가 준비한 계획의 마지막 한 수.
란디우스의 물음에 코델리아는 배시시 웃었고, 유더는 숨을 깊이 삼켰다. 필두함에 선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시선에 예를 표하듯, 조금은 과장된 동작으로 코델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코델리아, 부탁할게.”
“응!”
신나게 답한 코델리아는 품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물건을 꺼내 입에 물었고, 카이사는 순간 짝하고 손뼉을 쳤다.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과 달리 카이사는 저 물건을 본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호각.
세이렌들에게 받은 맹약의 증표를 코델리아는 있는 힘껏 불었고, 이내 커다랗고 웅장한 소리가 항구 전체를 뒤덮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째 울림이 퍼졌을 때.
“반짝반짝 작은별.”
“아름답게 비치네.”
바다 속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동쪽하늘에서도.”
“서쪽하늘에서도.”
한 곳이 아니었다. 마치 바다 전체가 노래하는 것만 같았다.
“반짝반짝 작은별.”
“아름답게 비치네.”
항구에 서서 배웅하던 이들은 깜짝 놀라 바다를 보았다.
배 위에 타고 있던 선원들 역시 갑판에 매달려 수면 위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바다의 엘프들.
수백에 달할 세이렌들이 수면 위에 표표히 서서 남부의 함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선 여인이, 세이렌들의 여왕 일리아나 칼라카니스가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호각을 분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이틀 전에 이미 한 번 불어 세이렌들과 오늘의 약속을 나눈 두 사람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맹약을 지키나니.”
일리아나가 가볍게 지팡이를 휘두르자 세이렌들이 새로운 노래를 시작했다.
거대하고 강력한 마법을 자아냈다.
“어어?”
“배, 배가?!”
“배가 가라앉는다!”
선원들이 크게 동요했지만 잠깐 뿐이었다.
커다란 공기방울이 각각의 배를 마치 보호하듯 뒤덮었기 때문이다.
세이렌들은 계속해서 노래했다.
란디우스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다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고, 카이사와 스칼렛 역시 뺨을 붉히며 흥분했다. 레나 또한 웃음을 참지 못 했다.
“우리는 해저로 갈 겁니다.”
하늘도 바다도 아닌 바다 밑으로.
용군단의 손길이 결코 닿지 않을 그곳을 통해.
함대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부둣가에 자리하고 있던 남부7가문의 가주들은 그저 입만 벙긋거릴 뿐 무어라 말을 잇지 못 했고, 전함에 타고 있던 승조원들은 공기방울 너머에서 헤엄치는 세이렌들의 모습과 바다속 풍경에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 모든 소란의 중심.
필두함의 선두에 자리한 유더는 슬쩍 코델리아의 허리를 안았고, 코델리아는 눈을 흘기는가 싶더니 이내 씩 웃으며 유더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유더야, 유더야.”
“어, 코델리아야.”
“통수치러 가자.”
“그래.”
놈들이 생각지도 못한 루트를 통해 뒤통수를 후려쳐주자.
나란히 까만 미소를 나눈 유더와 코델리아는 다시 서로에게 기댄 채 시선을 멀리하였다.
남쪽 저 너머- 말레키스의 섬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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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2장 - 공습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