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3장 - 플래그 #3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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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수면.
치유의 잠.
여러 가지 이름을 가졌지만 본질은 단순했다.
잠을 자서 상처를 회복한다.
사실 이것만이라면 굳이 치유의 잠이라는 이름을 붙일 것도 없었다.
자연 치유력에 맡기는 것은 미물들조차 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용의 수면에는 조금 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다시 태어나는 것.
망가진 육신을 버리고 새로운 육신으로 거듭나는 것.
삼백여 년 전 말레키스는 대영웅 카를로스와 건국왕 라이온 D 세일룬에게 대패했다.
목숨은 경각을 다퉜고, 용의 파멸이라 불리는 아스카론에 당한 치명상은 평범한 회복 마법으로는 치유가 불가능했다.
때문에 말레키스는 용의 잠을 선택했다.
자그마치 삼백 년 이상을 잠들어야 했지만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복수의 그날까지 나를 수호해라.”
말레키스는 그 말을 남긴 뒤 외딴 섬에서 용의 수면을 시작했다.
영원이라 해도 좋을 시간을 살아가는 에인션트 드래곤에게 삼백 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그의 수하들에게는 아니었다.
수명이 인간의 몇 배나 되는 엘프나 드워프에게도 삼백 년은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용군단에 속한 일반적인 드래곤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용장군 오르가는 시실리아와 마두르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우리도 아버지와 함께 잠든다. 단, 셋 가운데 하나는 깨어 섬과 아버지, 그리고 잠든 나머지 모두를 지키는 거다.”
물론 평범한 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시간의 마법을 사용한 동면이었다.
시실리아와 마두르는 이를 옳게 여겨 제안에 따랐고, 백년 씩 돌아가며 말레키스를 수호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삼백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말레키스 님, 말레키스 님.”
시실리아는 몇 번이나 말레키스의 이름을 읊조리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용장군 오르가를 비롯해 말레키스 휘하의 모든 병력이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황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괜찮아, 문제없어. 말레키스 님만 깨어나시면 해결될 일이야.’
용의 수면이 온전히 완성되려면 아직 하루가 남은 상황이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말레키스를 깨워야만 했다.
나선형으로 된 계단을 걸어내려가는 대신 아예 가운데로 뛰어내려 거리를 단축한 시실리아는 복수를 떠올렸다.
영원의 숲에 대한 복수.
그녀가 받아내야만 할 피 값.
하이 엘프 왕가의 일원이었던 그녀가 말레키스의 애첩이 된 이유.
공포와 불안, 두려움이 사그라졌다.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진 시실리아는 재차 호흡을 가다듬은 뒤 눈앞에 뻥 뚫린 구멍 너머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공동과 그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말레키스를 한 눈에 담았다.
에인션트 블랙 드래곤.
몸길이가 15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신과 같은 존재.
“하아, 하아.”
여전히 숨은 거칠었지만 저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말레키스의 거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안도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말레키스 님.”
다시 한 번 읊조린 시실리아는 발걸음을 서둘러 구멍 앞에 놓여 있는 마법진 위에 올라서더니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수인을 맺었다.
콰가강!
마법진이 아니었다.
요란한 땅울림과 함께 멀리서 폭발음이 들렸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봉해두었던 관문들이 파괴되는 소리가 분명했다.
콰강! 쿵! 콰가강!
폭발음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적잖은 숫자의 언데드들을 세워 길을 막아두었지만 추풍낙옆처럼 쓰러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수인을 맺는 손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다시 불안과 공포가 커져갔다.
밖의 싸움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오르가를 압도하던 그 괴물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
인간.
수명도 짧은 버러지들 사이에서 왜 저런 괴물들이 태어난단 말인가.
아무리 숫자가 많다 한들 너무나 부조리하지 않은가.
쾅!
다시 굉음이 터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가까웠다. 시실리아는 수인을 맺으며 급히 고개를 돌렸고, 눈앞에서 커다란 빛이 이는 것을 보았다. 순백의 빛이 시야 전체를 채운 순간 요란한 소리가 연속해서 발생했다.
“아 카르다 노움!”
시실리아는 한 손으로 수인을 외우며 외치자 마법의 방벽이 펼쳐졌다. 동시에 벽면에서 발동한 마법들이 굉음의 진원지를 향해 붉은 번개를 내쏘았다.
콰가강!
번개가 터지며 주변 일대를 박살냈지만 시실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뛰어난 마력 감지 능력을 가진 그녀에게는 흙먼지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자가 생생히 느껴진 탓이었다.
“천사!”
새하얀 광익으로 붉은 번개 모두를 파괴한 자.
흩날리는 황금빛 머리칼 사이로 레나가 안광을 빛냈다. 그녀가 다시 한 번 성스러운 힘을 발하니 지하에 가득하던 사특한 기운들이 일시에 정화되었다.
“안첸타!”
시실리아가 필사적으로 외치자 보랏빛 장벽이 레나의 성스러운 힘을 막아냈다.
하지만 시간 벌이에 불과했다. 레나가 한 걸음을 내디디며 광익을 펼치자 잠시도 버티지 못 하고 부서져 내렸다.
“칸탄테!”
시실리아가 다시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허공에 수십 개나 되는 사령의 창들이 형성되었다. 하나하나가 죽은 이의 영혼을 품고 있는 강대한 저주의 무구였다.
쏜살처럼 날아드는 그것들을 보며 레나는 똑같이 주문을 외웠다. 성스러운 창들을 소환해 저주의 창들을 요격했다.
카가가가가가강-!
순식간에 수십 개에 달하는 폭발음이 이어졌고, 시실리아는 만족했다. 작금의 공방은 모두 시간벌이에 불과했지만 시실리아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 시간벌이였기 때문이다.
“코르도!”
시실리아와 레나 사이로 몇 개나 되는 석벽들이 솟구쳐 올랐다.
천장과 바닥, 벽에서 돋아난 그것들은 레나가 내 쏜 성스러운 광탄 앞에서 불과 몇 초 밖에 버티지 못 하였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너무 늦었어.”
시실리아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간이 되었다.
마법진은 발동하였고, 하루 일찍이었지만 말레키스를 용의 수면으로부터 일깨우는데 성공했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
등 뒤의 공동으로부터 거대한 울림이 전해졌다.
말레키스의 거체가 조금씩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이제 저 거체의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난 말레키스가 모습을 드러내리라.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다고!”
억누른 불안과 공포가 컸던 만큼 시실리아는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 했다.
광소하며 소리쳤고, 레나는 그런 시실리아를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두 팔을 늘어트리며 수긍했다.
“그래, 너무 늦었지.”
“맞아! 너흰 너무 늦었······.”
거기까지였다.
시실리아는 기묘함을 느꼈다. 레나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일까.
저 천사가 미친 것일까?
너무 늦었다며 저리 웃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웃는 이유.
그녀가 말하는 늦었다의 의미.
“설마?!”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시실리아는 레나를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섰고, 그렇기에 볼 수 있었다.
거체를 일으켜 세운 말레키스의 웅장한 자태와 그런 말레키스의 가슴을 향해 솟구치는 한 줄기 번개를.
지상에서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한쌍의 남녀를!
“번개!”
알았다. 깨달았다.
직전의 빛.
레나가 등장하면서 일으켰던 거대한 빛.
그때 지나친 것이었다.
시실리아 자신을 공격하는 대신 공동에 파고든 년놈들이 지금 이 순간을, 말레키스가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 순간을 노린 것이었다.
“안돼애애애애애!”
시실리아가 급히 외치며 몸을 날리려 했다.
레나가 두고보지 않고 광익을 펼쳤다.
그리고 유더와 코델리아가 말레키스의 가슴에 도달했다.
선명하기 짝이 없는, 오랜 옛날 대영웅 카를로스가 새겨놓은 가슴의 상처를 똑똑히 보았다.
“오오오오오!”
유더와 코델리아가 동시에 소리쳤다. 부서진 가슴의 상처에 용의 파멸을, 에인션트 블루 드래곤 아스카론의 영육이 담긴 궁극의 검을 박아 넣었다!
“안돼애애애애애애애!”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시실리아의 절규가 거대한 울부짖음에 짓뭉개졌다.
시실리아는 제자리에 주저앉았고, 레나는 두눈을 부릅떴다.
말레키스의 전신에 거대한 균열이 번지는 것을 보았다.
“유더! 코델리아!”
레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눈앞의 균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눈에 간파했기 때문이다.
냉정을 잃은 시실리아보다 훨씬 더 작금의 상황을 냉철히 인식할 수 있는 그녀였다.
“아아아!”
말레키스가 포효했다. 동시에 놈의 몸에 번지던 균열이 더욱 커졌다. 말레키스의 전신이 무너져 내렸고, 시실리아도 비로소 상황을 파악했다. 울부짖던 그녀의 얼굴에 다시 환한 미소가 걸렸다.
“말레키스 님!”
호응했다. 그 부름에 응답하는 크게 포효한 말레키스는 전신 균열에서 붉은 빛을 내뿜으며 솟구쳐 올랐다.
콰가강!
천장의 벽을 부수고 날아올랐다. 하늘 높은 곳에 도달해 날개를 펼쳤다.
“크라라라라라라라라라!”
용의 포효가 세상을 진감시켰다.
동시에 말레키스의 전신에 일었던 균연을 따라 몸이 부서져 내렸다.
아니, 부서진 것은 말레키스의 허물에 불과했다.
용의 수면.
온전히 다시 태어나는 육신!
“아버지이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바닥을 뒹굴던 오르가가 크게 외쳤다.
악전고투하던 용군단 모두가 하늘을 보았고, 인간과 고블린을 가리지 않고 섬에 있던 모두가 압도적인 존재 앞에 전율했다.
“크라라라라라라라라라!”
말레키스가 다시 포효하며 날개를 펼쳤다. 허물을 모두 떨쳐내며 그 존재를 명확히 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 유더와 코델리아는 엉망진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하늘 높이 솟구친 말레키스가 날개를 펼치며 발한 힘을 견디지 못 하고 튕겨 날아갔기 때문이다.
“으아아!”
유더를 두 팔로 꽉 끌어안은 코델리아가 있는 힘을 다해 광익을 펼쳤다.
몸에 걸리는 막대한 부하를 견디며 날아가는- 아니, 추락하는 속도를 어떻게든 줄여나갔다.
콰강!
하지만 온전히 제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한데 얽힌 유더와 코델리아는 마치 대포알처럼 날아 바다와 충돌했다.
콰가가-!
유더와 코델리아가 수면을 부수고 바다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충돌 직전에 몸을 회전시켜 어떻게든 코델리아가 직접 충돌하는 것만은 막아낸 유더였지만, 덕분에 등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충격이 어찌나 큰지 잠시나마 의식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하지만 유더와 코델리아는 계속 가라앉지 않았다. 유더 덕분에 직접 충돌을 피한 코델리아가 광익으로 유더를 끌어안았고, 정신을 차린 유더가 수면을 박차 급히 수면으로 향했다.
“커헉!”
수면으로 고개를 내밀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유더와 코델리아는 거친 숨을 토했다.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헐떡였고, 젖은 머리칼을 어찌할 겨를도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만치 먼 곳.
섬과 하늘의 중심에서 오롯이 날개를 펼친 채 포효하고 있는 신과 같은 존재.
거대했다.
강대했다.
지금까지 마주한 그 어떤 존재보다 강력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유더와 코델리아는 두려움에 떠는 대신 숨을 골랐다.
너무나 거대하기에 위화감마저 드는 말레키스의 거체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성공했어.”
애당초 저 거대한 괴물을 한 방에 죽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노린 것은 놈의 약화였다.
“페이즈 투··· 아니, 쓰리?”
“쓰리.”
코델리아가 헐떡이며 말하자 유더는 기억에 의존해 답했다.
막대한 존재감과 무시무시한 포효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명확히 했다.
“정상이 아냐.”
불과 하루였지만 완성도의 차이가 있었다.
더욱이 아스카론 역시 효과가 있었다.
삼백 년의 긴 시간을 치유에 투자한 말레키스였지만 깨어나기 직전에 있었던 유더와 코델리아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가슴의 상처를 완치하지 못 했다.
더욱이 놈의 가슴에는 아스카론이 박혀 있었다.
드래곤을 증오하는 드래곤의 저주가 놈의 영육을 파괴하고 있었다.
새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몸.
육신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균열.
용의 파멸로 인해 조금씩 망가져 가는 영육.
“사상최대의 보스전이야.”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이후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전투들 가운데 가장 힘겨운 싸움이 될 터였다.
“완전 레이드네.”
그것도 제대로 된 보스 레이드.
수많은 영웅들이 모여 거대한 보스를 쓰러트린다는 그야말로 RPG의 왕도.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 가운데 넷이 이 자리에 있었다.
수천에 달할 남부의 정예군들과 모두 합치면 천 개가 넘는 대포를 가진 남부7가문의 함대 또한 함께했다.
여기에 카이사와 스칼렛 또한 있었으니, 나름 초호화 멤버들을 모은 셈이었다.
하지만 무조건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에인션트 블랙 드래곤은 실로 신과 같은 존재였으니까.
단신으로 데몬 프린스를 꺾을 수 있는 괴물이었으니까.
놈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이쪽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하아, 하······.”
코델리아는 새삼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유더 또한 그러했다.
전생의 기억을 각성한 이래 정말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지만, 지금 이 순간은 보다 특별하게 느껴졌다.
어째서일까.
코델리아가 함께 있어서?
하지만 그건 왕도에서도, 야생의 땅에서도, 북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생의 기억을 각성한 이후 코델리아와는 언제나 함께였으니 말이다.
언제나 함께.
즐겁고 행복할 때는 물론이고 힘들고 괴로울 때 역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구천구문 덕분에 초인의 경지에 도달한 청각에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맞닿은 가슴 너머로 전해지는 코델리아의 고동을 느꼈다.
무심코 코델리아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파란 눈동자.
코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유더의 시선에 이끌린 것처럼 유더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하였다.
코델리아가 눈을 깜박였다. 무슨 일이냐는 듯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모습.
하지만 달랐다.
사상 최대의 적을 눈앞에 두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간 억눌러온 충동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인지 유더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아니, 더 이상 참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자신의 품 안에서 존재감을 분명히 하는 코델리아의 허리를 조금은 거칠게 끌어안았다.
“유더야?”
“좋아해.”
입밖에 내었다.
기묘한 해방감을 느끼며 유더는 계속해서 말했다.
“좋아해. 아니, 사랑해 코델리아.”
부지불식간에 쏟아진 말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꾸며낸 말 따위가 아니었다.
미사여구조차 곁들이지 못한 담백한 말.
투박하기 짝이 없는 고백.
코델리아는 눈을 깜박였다. 이윽고 다시 크게 뜨더니 숨을 멈추었다. 그대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뭐라도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랬기에 코델리아는 언제나처럼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나, 나두.”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 말에 유더는 웃었다. 코델리아는 엉망진창인 얼굴이 되어 무어라 말을 잇지 못 했다.
바다 속.
쫄딱 젖어서 둥둥 떠 있고, 하늘에는 신과 같은 악룡이 포효하고, 섬 위에서는 인간들과 고블린들이 싸우며 하늘에서는 드래곤들과 좀비 드래곤들이 격돌하는 혼란의 도가니탕.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유더는 코델리아를 보았고, 코델리아는 유더를 보았다.
두 사람 간의 거리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좁혀졌다.
코델리아는 살며시 눈을 감았고, 유더 또한 그러했다. 두 사람 모두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맞추었다.
“크라라라라라라라라-!”
멀리서 말레키스가 포효했다.
다시 한 번 세상을 진감시켰고, 드래곤들과 좀비 드래곤들이 두려움에 떨었으며, 무지막지한 존재감에 바다가 요동쳤다.
하지만 유더와 코델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아예 그 모든 것들을 인지하지 못 했다.
짧은 입맞춤.
상상했던 것처럼 입술을 맞댄 순간 환상적인 무언가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냥 볼에 입술을 맞추었을 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서로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토해졌을 때.
살며시 감았던 눈을 떠 서로를 바라보았을 때.
유더와 코델리아는 동시에 깨달았다.
무언가가 달라졌음을.
고작 입술 한 번 맞추었을 뿐임에도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레키스가 드래곤 피어를 발했다.
드래곤들과 좀비 드래곤들이 더 이상 하늘에서 버티지 못 하고 제각기 지상에 안착했고, 인간들과 고블린들은 감히 싸울 엄두를 내지 못 했다. 섬 전체가 말레키스라는 존재 앞에 숨을 죽였다.
하지만 유더와 코델리아는 여전히 서로만을 보았다.
코델리아가 저도 모르게 입밖에 낸 목소리에 두 사람 모두가 집중했다.
“하, 한 번 더.”
마치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몽롱한 가운데 말한 코델리아는 유더의 목을 끌어안았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를 만류하지 않았다. 코델리아의 허리를 안으며 다시 한 번 입술을 맞추었다.
달콤함.
부드러움.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
눈을 감고 있던 유더는 그런 것들을 느꼈다.
하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코델리아는 조금은 다른 생각을 했다.
언니나 달리아가 말한 것과는 조금 달랐으니까.
좋긴 좋은데, 살짝 부족한 느낌을 받았으니까.
코델리아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아직이라고.
겨우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좀 더 강한 게 필요하다고.
그럼 무엇일까.
무얼 해야 하는 것일까.
본능에 따라 입술이 벌어졌다.
코델리아의 혀끝이 유더의 입술에 닿았다.
하지만 채 밀어 넣기 직전에 유더의 입술이 멀어졌다.
저도 모르게 유더의 입술을 따라 얼굴을 내민 코델리아였지만 이미 닿기에는 너무 멀어진 유더의 입술이었다.
아니 왜애.
왜애.
코델리아는 약간의 원망과 갈증과 안타까움을 담아 조르듯이 유더를 보았고, 유더는 입술을 한 차례 깨물더니 코델리아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다음은, 이어서 하자.”
다음?
이 다음?
다음이 뭔데?
응? 다음이 뭐야?
다음은 어떤 건데?
부지불식간에 생각을 이어가던 코델리아는 어느 순간 이성을 회복했다.
그랬기에 자신의 본능이- 그러니까 유더가 맨날 말하던 짐승이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를 깨달았다.
‘꺄악!’
코델리아는 속으로나마 비명을 질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었지만- 아니, 아예 이대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무리였다.
눈앞에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다음.
어, 다음.
이번 싸움이 끝난 뒤에.
이번 싸움이 끝난 다음에!
“자, 잠깐!”
이거 플래그잖아.
그것도 사망 플래그잖아!
“바보! 하여간 바보!”
보스전 하기 직전에 사망 플래그를 세우면 어떡해!
밑도 끝도 없는 비난이었지만 언제나처럼 유더는 코델리아의 뜻을 온전히 이해했다.
그랬기에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읏.”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가라앉을 코델리아의 불만이 아니었다.
아니, 애당초 코델리아의 얼굴에 드러난 불만은 플래그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이마에나 할 거야?’
어느 쪽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에 훤히 드러난 그것에 유더는 행동했다. 코델리아의 입술에 다시 한 번 입술을 맞춘 뒤 새삼 얼굴을 붉혔다.
묘하게 부끄러웠으니까.
이상하게 앞의 두 번보다 지금의 한 번이 더 민망했으니까.
“바보.”
유더의 달아오른 얼굴을 본 코델리아는 빨개진 얼굴로 에헤헤 웃더니 다시 한 번 유더의 목을 안았다.
크게 숨을 토해 억지로 호흡을 가다듬은 뒤 다시 현실을 보았다.
하늘에서 포효하는 거대한 악룡과 그에 맞서기 위해 집결하고 있는 영웅들.
“가자.”
“그래, 가자. 이겨야 다음을 하니까.”
다음.
어, 다음.
과연 다음은 무엇일까.
왜 아델리아 언니랑 게일 아주버님이 떠오르는 것일까.
그것이 알고 싶어요.
마음 속으로나마 새침하게 중얼거린 코델리아는 표정을 정돈했다. 자꾸만 머리를 내밀려는 마음 속 짐승을 다시 꾹꾹 누른 뒤 광익을 펼쳤다.
유더 또한 전투를 준비했다.
구천구문의 구결을 외우며 검은 태양의 힘을 발동시켰다.
[다행입니다. 끼어들어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어요.]
[조금만 더 길어졌어도 끼어들었을 거예요, 후대.]
코델리아와 유더의 머릿속에 각기 울린 목소리.
두 사람은 굳이 내색하는 대신 씩 웃었고, 수면을 박차올랐다.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악룡과의 전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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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3장 - 플래그 #3 (수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