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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265화 (265/473)

< 제94장 - 황금빛 태양 >

제94장 - 황금빛 태양

에인션트 블랙 드래곤 말레키스.

영웅전기2편에 등장하는 유일한 에인션트 드래곤인 놈은 세일룬 왕국 출신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에게는 사실상 최후의 시련과 같은 존재였다.

“크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놈의 포효가 하늘과 땅을 뒤덮었다.

난폭한 침묵이 주변 일대를 지배했다.

몸길이가 15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존재가 하늘 높은 곳에서 포효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신화였다.

섬에 자리한 이들 대부분이 경이와 공포를 느꼈다.

그들에게 있어 지금의 말레키스는 사실상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것은 원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작에서의 놈은 지금보다 더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은 위상을 가진 남부의 신이었다.

‘남부 최대의 시련.’

말레키스의 등장 자체는 원작 초반에 이루어졌다.

북방 야만족의 대침공과 왕도 왕족 몰살 사건에 이어 세일룬 왕국 파멸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 남부의 멸망을 초래한 것이 바로 놈이었으니 말이다.

상당한 자유도를 자랑하는 영웅전기 시리즈인만큼 원한다면 초반에 바로 말레키스와 싸우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다.

하지만 설사 진주인공이라 불리는 막시밀리언이라 한들 초반- 아니, 사실상 중후반에도 말레키스와 대적하는 것은 그저 자살행위에 불과했다.

‘놈과 대적이 가능한 것은 극후반.’

그것도 플레이어블 캐릭터들 거의 모두가 연합하여 레이드 파티를 이룬 뒤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 어떤 플레이어블 캐릭터도 말레키스와 단독으로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신과 같은 자.’

아니, 정말로 신.

남부의 인간들을 모조리 참살하고 영원의 숲을 불태운 놈은 수많은 원념과 원혼들을 집어삼킨 결과 사신邪神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원작에서의 이야기였다.

작금의 말레키스는 아직 신이 되지 못 했다.

남부를 초토화시키기는커녕 용의 수면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 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에인션트 드래곤이었다.

거듭 강조하듯 신과 같은 존재였다.

“크오오-.”

말레키스가 숨을 길게 토하며 지상을 굽어보았다.

거대하고 거대한 존재가 지상의 미물들을 내려다보았다.

[시실리아.]

놈의 목소리가 하늘과 땅을 울렸다.

동시에 섬에 자리한 모두의 머릿속에 사특하고 무자비한 의지가 전달되었다.

“으아악!”

“아흑! 악!”

노여움에 찬 말레키스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몸을 떠는 자들이 있었다.

강력한 드래곤 피어가 그들의 의지를 박살낸 결과였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마음 약한 자들이 바닥에 엎드려 간청했다. 머리를 조아리는 자도 있었고, 엉엉 울음을 터트리는 자도 있었다.

인간만이 아니었다.

고블린들과 오크들 역시 그러했다.

공포에 짓눌린 그들에게 이성적인 사고는 불가능했다.

[시실리아.]

말레키스가 다시 말했다.

그의 부름에 시실리아는 눈물을 쏟으며 앞으로 나섰다.

“여기 있습니다, 위대한 분을 모시는 미천한 계집이 여기에 있습니다.”

시실리아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말레키스와 시실리아의 거리는 수백 미터가 넘었고, 거신을 연상케 하는 말레키스의 거체에 비하면 너무나 작고 가냘픈 그녀였지만 말레키스는 시실리아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수천 명 사이에 자리한 그녀를 명확히 구분했다.

[어찌 된 일이냐.]

물음에는 애정과 친근함 대신 노여움과 질책이 담겨 있었다.

신과 같은 자의 분노를 한 몸에 받은 시실리아는 두려움에 몸을 떨며 평소 펼치고 있던 모든 의식의 방벽을 해제했다. 말레키스에게 부서져 짓뭉개지기 전에 문을 열고 그의 의지를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기억의 전승.

시실리아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

말레키스는 시간을 소모하지 않았다.

시실리아가 의식을 개방한 직후 근래 일어난 모든 일들을 단번에 이해하였다.

그렇기에 더욱 더 거대한 분노를 표출하였다.

[어리석고 약한 것들.]

말레키스의 분노는 시실리아 한 명에게 집중되지 않았다.

하지만 의식을 완전히 열고 있던 시실리아는 분노의 편린만으로도 머릿속이 짓뭉개지는 기분이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 실금했지만 그 사실 자체를 눈치 채지 못 할 정도로 두려움에 매몰되었다.

거듭된 실책.

가모르 칸의 실종과 마두르스의 죽음.

애써 포섭한 십검호들의 이탈과 아르곤 항구에서의 패배.

결국 강탈에 실패한 아스카론.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실리아와 오르가는 섬을 지키는 것조차 실패했다.

용의 수면은 온전한 상태로 마무리되지 못 하였고, 말레키스 자신의 상처는 완치되지 못 하였다. 심지어 가슴에는 아스카론까지 박혀 있는 상태였다.

[내 너희를 친히 벌할 것이다.]

말레키스의 선언에 시실리아는 영혼이 짓밟히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말레키스가 얼마나 무자비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그녀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죽음을 갈망할 정도로 끔찍한 고통들이 이어지리라.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시실리아가 울며 빌었지만 말레키스의 관심은 이미 그녀를 떠난 뒤였다.

그는 오르가를 보았다.

자신의 피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참하기 짝이 없는 몰골로 나자빠져있는 놈의 모습에 기가 차 정신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용군단.

사실상 박살이 난 상태였다.

삼백 년 뒤 깨어나 마주하게 될 거라 생각했던 그의 군세는 부서지고 망가져 그 형태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그랬기에 말레키스는 웃었다.

섬 전체를 요동케 했다.

[하찮은 것들!]

노여움이 가라앉지 않았다.

카를로스와 라이온에 대한 분노가 새삼 솟구쳐 올랐다. 섬에 바글거리는 벌레 같은 놈들의 존재 자체가 못마땅했다.

모조리 지워버린다.

이 섬에 자리한 것들을 전부 짓뭉개 버린다.

[크라라라라라라라라라-!]

용의 분노가 하늘에 전해졌다.

신과 같은 자의 의지가 이적을 일으켰다.

쿠르릉-!

기후가 변하였다.

순식간에 몰려든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었고, 새카맣게 변한 하늘 아래 거센 바람이 불었다.

섬 주변의 파도들이 거칠어지며 폭풍우가 일었다.

콰가강!

하늘에서 벼락이 쳤다.

수십 개에 달하는 번개 줄기가 지상을 강타했다.

[크라라라라라라라라-!]

백열하는 세상 속에서 말레키스가 포효했다.

드래곤 피어를 다시 한 번 방출하였고, 심약한 이들은 심장을 붙잡고 쓰러졌다. 새카맣게 변한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쾅! 쾅! 쾅!

연달아 벼락이 쳤다.

지면이 갈라지며 섬 전체가 요동쳤다. 무지막지한 지진에 섬에 있던 인간들 대부분은 두 발로 서는 것조차 하지 못 했다.

“하악, 윽, 하으.”

카이사는 제대로 말을 만들어내지 못 했다.

평소처럼 입에 욕을 담는 것조차 무리였다. 그저 두려움에 헐떡이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은 곁에 있던 스칼렛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아, 학, 흑.”

스칼렛은 제대로 숨을 쉬지 못 했다.

마치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컥컥 거리며 눈물을 쏟아냈다. 바닥에 웅크린 채 헐떡이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콰가강!

세바스찬 르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카게하마 백작은 감히 하늘을 우러를 엄두조차 내지 못 해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감싸 쥐었고, 오펀드 후작은 이를 악문 채 하늘을 노려보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신수의 피를 이은 그조차도 그 이상의 행동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번개가 쳤다.

지진과 폭풍우가 섬을 뒤덮었다.

잠수하고 있던 배들 대부분이 떠올랐고, 세이렌들은 더 이상 노래하지 못 했다. 세이렌들의 여왕인 일리아나 칼라카니스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지팡이를 끌어안은 채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절대적인 드래곤 피어.

말레키스가 다시 지상을 굽어보았다. 친히 불을 내뿜어 지상을 정화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지상을 굽어본 그때, 에인션트 드래곤의 초월적인 인지 능력을 가진 말레키스의 두 눈에 기묘한 광경이 비쳐졌다.

고개를 들고 있는 자가 있었다.

드래곤 피어를 정면에서 뒤집어 썼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에 떨며 울부짖는 대신 고고히 서서 자신을 마주하는 자들이 있었다.

“에인션트 블랙 드래곤.”

역병의사의 새부리 가면 속에서 벨키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두려움에 떠는 대신 수인을 맺어 거대하고 강력한 팬텀 스티드를 불러냈다. 녹색의 불꽃에 휩싸인 칠흑의 유령마가 날카로운 안광을 빛냈다.

“약해져 있어.”

레나는 번개폭풍이 일어 섬을 휩쓰는 와중에도 이지를 잃지 않았다.

머리를 조아린 채 울며 떠는 시실리아의 옆을 지나 순백의 광익을 펼쳤고, 그대로 날아올라 지상으로 나섰다.

“신이 아니다. 그저 거대한 괴물에 불과하다.”

카마엘이 검을 늘어트렸다.

이미 데몬 프린스라는 초월적인 존재와 대적한 바가 있는 그였다.

에인션트 드래곤의 무지막지한 존재감 앞에서도 그는 자신을 잃지 않았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벨키안과 레나가 그러했듯이 한 사람을 향해 나아갔다.

“강철의 마음, 불굴의 의지, 천하무쌍의 육체.”

나직이 읊조리며 고개를 드는 자가 있었다.

두 발로 우뚝 서서 하늘의 공포를 마주하는 자가 있었다.

그는 태양과 같은 자였다.

그 어떤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도 결코 빛을 잃지 않는 자였다.

어둠을 걷어내는 자.

어둠 속을 헤매는 이들에게 빛을 전달하는 자.

벨키안은 언제 어디서고 똑바로 나아갈 수 있었다.

자신의 앞에 자리한 등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그는 자신이 옳은 길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레나도 같았다. 그녀는 언제나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그와 함께하는 한 영원하고 절대적인 어둠 따위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그의 곁에 섰다.

그리고 한 사람이 더 해졌다.

검귀 카마엘.

그가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신과 같은 존재를 눈앞에 두고서도 두려움에 떠는 대신 미소를 머금었다. 이미 한 번 데몬 프린스라는 어둠을 걷어낸 자신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의 곁에 서서 하늘을 노려보았다.

“구천구문 제칠문.”

그가 말했다.

진정한 힘을 개방하였다.

그 자체만으로도 말레키스의 주박을- 저 에인션트 드래곤의 공포를 주변 일대에서 지워버렸다.

“구극태양신공.”

황금빛 태양.

란디우스가 주먹을 쥐었다.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는 말레키스의 시선을 그대로 마주하며 응축된 힘을 하늘로 내쏘았다.

콰가강!

황금의 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지상에서 비롯된 황금빛 섬광이 하늘을 때렸고, 기적을 이끌었다.

먹구름에 뒤덮인 하늘이 갈라지며 태양의 빛이 쏟아져 내렸다.

한 줄기 섬광.

어둠 속이기에 더욱 돋보이는 그것.

두려움에 떨던 자들이 빛을 보았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한줄기 섬광을, 지상에서부터 솟구쳐 오른 황금의 기둥을.

그리고 그 사이에서 란디우스는 뻗어 올렸던 주먹을 펼쳤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태양의 빛을 받아 소환하였다.

“솔라 블레이드.”

황금으로 빛나는 그것은 태양신 솔라리의 검.

말레키스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공격을 하거나 노여움을 표하는 대신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황금빛 태양.

태양과 같은 자.

란디우스가 검을 손에 들었다.

솔라 블레이드를 움켜쥐었다.

&

< 제94장 - 황금빛 태양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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