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266화 (266/473)

< 제94장 - 황금빛 태양 #2 >

&

삼백 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용의 수면에서 깨어난 말레키스는 시간의 흐름을 분명히 느꼈다.

카를로스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신혈을 타고난 라이온 D 세일룬 역시 명이 다해 세상을 떠났으리라.

그러니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말레키스 자신을 막아설 인간 따위 존재할 수 없어야 했다.

카를로스와 라이온은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존재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말레키스는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자신 앞에 무릎 꿇기는커녕 오롯이 서서 전의를 불태우는 자들에게서 카를로스와 라이온을 보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기적이 다시 한 번 일어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시실리아의 기억.

그녀가 알아낸 정보들.

파라곤의 다섯 영웅.

말레키스 자신이 잠든 사이에 일어난 대사건.

데몬 프린스들 사이에도 격의 차이가 존재했다. 지옥의 대군주들 바로 아래에 위치한 데몬 프린스와 간신히 데몬 프린스의 위치에 오른 악마를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는 없었다. 힘의 격차가 어마어마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데몬 프린스였다.

인간의 힘으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임에 분명했다.

그런 데몬 프린스를 꺾은 인간들.

그것도 그냥 싸운 것이 아니라, 이미 데몬 프린스의 영지로 화한 곳에서 불리한 싸움 끝에 승리를 쟁취한 인간의 괴물들.

말레키스는 방심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눈앞의 인간들을 카를로스와 라이온에 필적하는 존재로 상정했다. 그렇기에 주저 없이 전력을 다하였다.

“카아-!”

황금빛 기둥의 중심.

태양신의 검을 거머쥔 란디우스를 향해 말레키스가 드래곤 브레스를 내뿜었다.

직경이 40미터는 족히 될 새카만 빛기둥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광경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란디우스는 넋 놓고 바라만 보지 않았다. 말레키스가 브레스 웨폰을 내쏜 그 순간 이미 치천사의 날개를 펼치고 있던 그였다.

콰가가가가가가가-!

칠흑의 빛줄기가 지면을 휩쓸었다. 대지에 깊은 상흔을 남기며 전진한 그것은 해안에 닿았고, 바다를 갈라놓았다.

실로 경천동지할 위력이었다. 브레스 웨폰의 공격 범위 내에 있던 자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 하고 완전히 소멸했다.

범위 밖에 있던 자들도 초월적인 공격이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광경에 넋을 놓았다. 너무나 충격적인 위력에 사고를 이어가지 못 했다.

하지만 파라곤의 영웅들은 그렇지 않았다.

브레스 웨폰이 지면에 닿은 그 때 란디우스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벨키안을 태운 팬텀 스티드가 옆으로 급히 몸을 날렸고, 카마엘이 그런 팬텀 스티드의 등을 빌렸다. 레나는 란디우스와 다른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공격이 빗나갔다.

하지만 한 번 쏘아진 브레스 웨폰을 바로 끊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말레키스는 바다를 가름과 동시에 눈동자를 굴려 란디우스를 인지했다. 과거 카를로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그에게 살기를 내뿜었다.

드래곤 피어.

거기에 말레키스의 의지가 더해졌다.

에인션트 드래곤인 말레키스에게 마법은 호흡과 같은 것이었다. 수인과 주문 따위 필요하지 않았다. 의지를 발한 순간 마법을 발동하기 마련이었다.

동시에 일곱 개나 되는 마법들이 란디우스를 덮쳤다.

패럴라이즈를 필두로 여섯 가지 저주 마법이 란디우스의 정신과 육체를 공격했다. 말레키스의 머리 주위에 떠오른 수백 개에 달하는 마탄들이 란디우스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란디우스는 언제나처럼 행동했다.

“하아!”

일갈하여 저주를 떨쳐냈다. 강철의 마음과 불굴의 의지를 가진 란디우스에게 정신계 저주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천하무쌍의 육체를 가진 그는 진정 태양과 같은 자였다.

콰가가가가강!

솔라 블레이드를 휘두르자 황금빛 오라가 주변을 휩쓸었다. 수백 개의 마탄이 시간차를 두고 쏟아져 내렸지만 결코 란디우스를 해할 수 없었다.

말레키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란디우스를 카를로스와 대등한 존재로 상정한 후였기에 바로 다음 행동에 나섰다.

츄화-!

말레키스의 거체가 갑자기 사라졌다.

블링크 마법이었다. 하늘 높은 곳에서 지면으로 위치를 옮긴 말레키스는 그 움직임 하나만으로 재앙을 일으켰다. 인간들은 물론이고 아룡들과 드래곤들까지 짓밟으며 몸을 낮춘 그는 란디우스 하나에게 마법을 집중하는 대신 강력한 범위 마법을 발동시켰다.

번개.

이어지는 폭풍.

하늘에서 수십 개에 달하는 번개 줄기가 쏟아져 지면을 강타했다. 인간과 오크, 고블린을 가리지 않고 폭사시키며 주변 일대를 휩쓸어버렸다.

삼백 년 전 익힌 수법이었다.

카를로스와 라이온은 이렇게 주변을 파괴하면 자신에게만 오롯이 집중하지 못 했다. 주변의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무리한 수를 쓰거나 스스로의 전력을 깎아먹기까지 하였다.

번개 수십 줄기가 다시 지면을 강타했다. 말레키스를 중심으로 반경 오백 미터 안에서 번개폭풍이 몰아쳤다.

“도망쳐! 도망치라고!”

번개폭풍 밖에 있던 카이사가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벼락이 그 목소리를 묻어 버렸다. 더욱이 번개폭풍 안에 있던 자들은 이미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카이사가 손을 놀렸다. 가까이에 있던 자를 붙잡고 무작정 달렸다. 칼릭스 오펀드를 비롯한 지휘관들도 계속해서 도주를 명했다.

“해안가로! 바닷물 속으로!”

콰가강!

번개폭풍이 점점 더 범위를 넓혀 나갔다. 말레키스는 눈동자를 굴렸고, 어느 순간 강대한 마력을 감지했다.

란디우스는 아니었다. 지상에서 느껴진 마력이었다.

한 사람.

눈앞의 참상에 괴로움을 느낄 지언정 멈춰 서지 않는 자. 냉혹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

말레키스는 진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일반적인 인간은 사용할 수 없는 종류의 힘이었다.

“일어나라.”

벨키안이 선언했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하이엘프인 시실리아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한 그의 명령에 시체들이 반응하였다.

이미 지배하에 있던 좀비 드래곤들이 서로를 향해 날았다.

콰! 가! 가! 가! 가!

뼈와 살이 맞물렸다. 본래 서로 다른 개체였지만 서로 엮여 하나가 되었다.

좀비 드래곤들만이 아니었다.

오크와 고블린들이 더해졌다. 빈틈을 채워 넣었다.

플래시 골렘.

끔찍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었다.

하지만 거대하고 강맹했다. 키가 100미터에 달할 괴물이 번개폭풍 밖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레나가 명령했다. 강력한 골렘술사로서 벨키란이 창조한 골렘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가라!”

구오오오오오오오오-!

플래시 골렘이 포효하며 말레키스를 향해 돌진했다. 쏟아지는 장대비와 번개 속에서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내뿜었다.

쿵! 쿵! 쿵!

지면이 울렸다. 단 몇 걸음 만에 말레키스와의 거리를 좁힌 플래시 골렘이 당겼던 주먹을 내질렀다.

쾅!

지면이 부서졌다. 동시에 플래시 골렘의 오른 주먹 역시 박살이 났다.

그리고 말레키스는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블링크로 플래시 골렘의 배후를 점하더니 그대로 몸을 크게 회전시켜 꼬리를 휘둘렀다.

콰각!

꼬리가 골렘의 허리를 갈랐다. 말레키스는 전투에 능했고, 자신의 몸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도 잘 알았다.

허리가 양단된 플래시 골렘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말레키스는 죽음의 마력을 내뿜은 사령술사와 골렘을 조종한 천사를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카마엘이 바란 그대로 말이다.

“참월.”

카마엘이 검을 휘둘렀다.

참격을 내쏘아 날카롭고 거대한 검기를 발생시켰다.

츠확!

노리는 것은 말레키스의 날개.

하지만 말레키스는 시선을 돌린 그 순간에도 틈을 주지 않았다. 드래곤 특유의 날카로운 감각으로 말미암아 카마엘이 참격을 휘두른 그 순간 위기를 감지했다. 쉴드 마법 열두 개를 호흡 한 번 할 시간에 발동시켜 참격을 막아냈다.

카가가가가가가강!

열장 째 쉴드에서 카마엘의 검기가 힘을 잃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간신히 공포를 이겨낸 오펀드 후작이 명령했다.

“쏴라! 전포 발사! 쏴라!”

명령과 반복 훈련은 이런 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오펀드 후작이 외친 그 순간 전함에 타고 있던 수병들은 반사적으로 행동했다. 평소보다 다소 느리긴 했지만 공포와 전율 속에서도 기계적인 행동을 해내었다.

쾅! 콰! 콰가가가가가가!

처음 한 두 발 이후 수백에 달하는 포문들이 연이어 불을 내뿜었다. 시간차를 고려한다 쳐도 근 팔백 여개에 달하는 숫자였다. 워낙에 거대한 말레키스였으니 조준이고 뭐고 필요없는 상황이었다.

대포알이 빗줄기를 뚫었다. 그리고 말레키스는 이번에도 인지했다. 몸을 낮추고 고개를 쳐들더니 그대로 포효했다.

“크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세상을 진감시키는 포효에 전함에 타고 있던 수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쏟아지던 빗줄기가 옆이나 위로 튕겨나갔고, 강렬한 파문이 섬 전체를 휩쓸었다.

하지만 말레키스는 지금의 외침으로 대포알들을 막을 생각이 아니었다. 보다 강력한 마법을 발현하기 위해 강한 의지를 표출한 것뿐이었다.

말레키스가 펼친 대단위 마법.

너무도 당연한 세상의 이치에 힘을 실어주는 것.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

쏟아지던 대포알들이 어느 순간 일제히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개중에는 나름 포물선을 그리는 것들도 있었지만 말레키스의 포효로 인해 이미 약해져 있던 대부분의 대포알들은 수직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라비티 폴.

대단위 중력 마법.

말레키스는 이를 악물었다. 한 번 더 땅을 구르더니 그라비티 폴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저만치서 부서진 상체로나마 일어서려던 플래시 골렘이 다시 곤두박질 쳤다.

“크라라라라라라라라라-!”

말레키스는 그라비티 폴의 범위를 단숨에 넓혔다. 무지막지한 마력이 소모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떨어지고 부서지고 추락하라.

발아래 엎드려 벌레처럼 바닥을 기어라.

말레키스의 명령은 이미 마법이었다. 강력한 용언의 마법이 그라비티 폴의 범위 밖에 있던 자들까지 붙잡았다. 간신히 해안가에 도달한 이들 가운데 몇이 바닷물 속에 머리를 처박았고, 세이렌들 역시 깊은 수면을 향해 가라앉고 또 가라앉았다.

카이사는 신수의 피를 일깨웠지만 소용없었다. 두려움에 자꾸만 몸이 떨렸다. 카를로스의 전승에 거짓은 없었다. 말레키스는 진정 신과 같은 존재였다.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절대자였다.

절망.

두려움.

공포.

카이사는 주저앉았다. 숨 쉬는 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헐떡였고, 스칼렛도 다르지 않았다. 섬에 자리한 모두가 피아를 가리지 않고 깊고 깊은 절망 속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말레키스는 만족할 수 없었다. 오히려 노여움을 터트렸다.

결코 굴복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백 년 전 그러했던 것처럼 신과 같은 자의 명령에 항거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벌의 번개여!”

레나가 날개를 펼쳤다.

무지막지한 중력 속에 비틀거리면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은 그녀는 끝끝내 천상의 심판을 높이 들어올렸다. 말레키스를 향해 심판의 날을 발동시켰다.

쾅! 쾅! 쾅! 쾅!

수백 개가 아닌, 거대한 빛의 검 열 자루가 말레키스에게 쏟아져 내렸다.

“노오옴!”

대부분이 막히고 파괴되었다. 하지만 말레키스는 노성을 토했고, 바로 그 순간 카마엘이 재차 검기를 날렸다. 위에서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검기들이었다.

“크아악!”

말레키스의 몸길이는 150미터에 육박했고, 자연 비늘 하나의 두께는 상식을 초월했다.

하지만 카마엘의 검기가 비늘을 갈랐다. 비늘과 두터운 가죽 속에 상처를 입혔고, 극한의 힘으로 그 상처에 한기를 불어넣었다.

상처는 작았다.

사람으로 치면 생채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애당초 완치된 상태로 깨어나지 못 한 말레키스였다.

더욱이 카마엘의 일격은 라이온을 떠올리게 하였다.

말레키스는 평정을 잃었고, 더욱 강한 힘을 마구잡이로 내뿜기 시작했다.

“아아악!”

끝끝내 저항하던 레나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카마엘의 검기는 더 이상 말레키스에게 닿지 못 했고, 플래시 골렘은 완전히 뭉개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다.

중력장의 범위 내에 있던 오르가가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말레키스의 이름을 읊조렸지만 말레키스는 이를 무시했다. 지하에 있던 시실리아가 헐떡이며 괴로워했지만 이 또한 무시했다.

죽인다.

몰살한다.

이 세상에서 지워버린다!

“크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오직 말레키스만이 독존했다.

분노와 노여움, 해방감이 말레키스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레나는 비명을 질렀다. 카마엘 역시 바닥에 쓰러져 부들부들 몸을 떨 따름이었다.

하지만 벨키안은 가면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나마 웃음을 터트렸다.

성공했으니까.

말레키스의 정신을 자신들에게 집중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니까!

그것은 아침의 영광.

아무리 깊고 어두운 밤일지라도 걷어내고 마는 황금빛 태양!

“란디우스!”

카마엘이 하늘을 향해 외쳤다. 부르짖었다.

그리고 태양은, 그 어떤 절망조차 파할 수 있는 무적의 영웅은 이에 답해주었다.

하늘 높은 곳에서 눈부신 빛을 발하였다.

< 제94장 - 황금빛 태양 #2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