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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268화 (268/473)

< 제95장 - 승전 (수정) >

제95장 - 승전

신과 같은 힘을 지녔다고 전해지는 에인션트 드래곤이 쓰러진 자리.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기대 앉아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괴수의 시신을 바라보던 란디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서 달려오고 있는 이들 때문이었다.

“란디우스!”

카마엘이 제일 먼저 크게 소리쳤고, 연이어 날듯이 달려온 레나가 란디우스의 몸을 살폈다.

“괜찮아? 의식은 있고? 어디 망가지진 않았지?”

레나는 란디우스의 강철같은 육신을 여기저기 촉진해가며 물었다. 일단 겉보기에는 멀쩡했지만 속은 전혀 다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아프면 속일 생각하지 말고 바로 말해. 알았지?”

레나의 경고 아닌 경고에 란디우스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그냥 많이 지쳤을 뿐이야. 왕성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깔끔하게 개벽검만을 사용했으니까. 단전이 텅텅 빈 데다가 지금 당장이라도 졸도할 것 같지만··· 그 외는 멀쩡해. 어디 긁힌 상처조차 하나 없고.”

란디우스가 과시하듯 양 팔을 살짝 들어보이자 레나는 미심쩍은 얼굴로 란디우스의 전신을 훑듯이 살피더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란디우스 말처럼 외상 부분에서는 그야말로 깔끔했기 때문이다.

“그럼 속이 안 좋은 거야?”

“개벽검을 사용했으니까. 그것도 전력을 다해서.”

사실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이었다.

실로 경천동지할 위력을 가진 개벽검이었고, 실제로 말레키스의 브레스 웨폰을 정면에서 격파하는 것은 물론이고 놈의 가슴까지 갈라놓았지만 그렇다고 말레키스를 즉사시킨 것은 아니었다.

만약 이 자리에 있던 것이 말레키스와 란디우스 뿐이었다면 기력이 다한 란디우스는 말레키스 손에 유명을 달리했을 터였다.

물론 란디우스라고 아무 생각 없이 개벽검에 전력을 쏟아 부은 것이 아니었다.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미리 들은 이야기도 있었고, 이 자리에는 카마엘과 레나, 벨키안이라는 믿음직한 동료들이 있지 않은가.

“으휴, 하여간.”

다시 한숨을 토한 레나는 란디우스에게 몸을 기대더니 그 뺨에 살짝 입맞춤을 하였고, 란디우스는 다시 씩 웃더니 카마엘과 레나에게 물었다.

“제자와 소녀는?”

“누구 씨처럼 전력을 다하다 못 해 피까지 토한 마당에 열렬한 키스를 나누다 졸도했어.”

“오······.”

“우리도 할까?”

레나가 은근한 목소리로 묻자 란디우스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살짝이지만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꽤 끌린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흠흠.”

카마엘이 헛기침을 토하자 란디우스는 무안해진 얼굴로 괜히 웃었고, 레나는 흥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걱정 마. 남들이 보는 데서는 안 하니까.”

누구누구와 달리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레나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오랜만이군, 개벽검.”

카마엘이 화제를 돌리듯 말하자 란디우스 역시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이카젤과 싸운 이후 보여주는 건 처음이던가?”

“처음이다.”

애당초 바이카젤 격파 이후 개벽검을 쓸만한 상대를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아니, 쓸만한 상대라면 하나 더 있긴 했지만 그쪽은 개벽검을 사용할 틈 자체를 주지 않았다.

‘대사교 마누엘라.’

파라곤 왕국의 멸망을 초래한 원수.

악마 추종자들 가운데서 가장 강하다고 추정되는 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자인 터라 란디우스의 인상이 험악해지자 카마엘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유더와 코델리아 정도는 아니었지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대강 속마음을 알 수 있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당장 이번에는 남부에서 함께 대사교 마누엘라를 쫓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기에 카마엘은 괜히 마누엘라의 이야기를 다시 잇는 대신 개벽검에 관한 이야기를 마저 이어나갔다.

“위력이 정말 강해졌군.”

“10년이 지났으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수련하기도 했고.”

10년 전 파라곤 왕국의 비극을 초래한 데몬프린스 바이카젤에게 영면을 선사한 것 역시 개벽검이었다.

그때도 물론 대단한 위력이긴 했지만 단순히 눈에 보이는 시각적 효과- 그러니까 솔라 블레이드로 만들어낸 개벽검의 크기만 보자면 10년 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개벽검의 칼날이 20여 미터 남짓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20미터에 불과라 하니 어색하긴 하군.’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번 전투에서 란디우스가 보여준 개벽검의 칼날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미터를 훌쩍 넘었으니 말이다.

카마엘과 레나가 새삼 감탄하자 란디우스는 다소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위력이 커진 만큼 힘도 많이 들지만. 그래서 정말 일어설 기력도 없어.”

카마엘과 레나 앞이기에 보일 수 있는 엄살이었다.

“그래도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야. 처음부터 다들 전력을 다해 몰아붙인 보람이 있어.”

언제나 그러하듯이 싸움은 가능한 빠르게 끝낼수록 좋은 법이었다.

특히나 말레키스처럼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주변 일대를 파괴할 수 있는 괴물과 맞서야 할 때는 말이다.

레나의 말에 카마엘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등 뒤를 돌아보았다.

이 자리에 자연스럽게 끼어들 수 있는 네 번째 멤버의 인기척이 느껴져서였다.

“벨키안 님.”

레나가 새삼 이름을 불렀고, 카마엘은 가볍게 묵례했으며, 란디우스는 활짝 웃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 죽어가지만 한편으로는 또 멀쩡하군. 다행이다.”

팬텀 스티드 위에 탄 그가 모두를 내려다보며 말하자 란디우스와 레나는 작게 웃었다. 너무나 벨키안다운 말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 큰 도움을 받았어요.”

란디우스의 말투가 평소보다 훨씬 더 동글동글해졌다. 마치 30대 후반인 나이가 20대 초중반으로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큰 도움을 받았어요.”

카마엘과 레나 역시 연달아 예를 표했다.

카마엘은 조금 딱딱하게, 레나는 무척이나 친근하게.

벨키안은 단순히 연장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세 사람 모두에게는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파라곤의 왕실 마법사였던 바르도 아인스버그의 친우였던 벨키안은 파라곤 왕국에서 직접 녹을 받지는 않았지만 종종 바르도의 제자인 레나에게 가르침을 내렸고, 왕실 기사단 소속인 카마엘과 란디우스에게도 전략전술, 약초학 같은 여러 지식들을 전파하였다.

때문에 세 사람이 벨키안을 스승으로 대하는 것처럼 벨키안 역시 세 사람을 제자처럼 대했다.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다. 이번 싸움도 어찌어찌 마무리가 되었고 말이다.”

사실 말레키스라는 대적을 상대로 승리한 것을 감안하면 무척이나 효율적인 싸움을 한 셈이었지만 그렇다고 벨키안은 피해가 적었다느니, 이득이 크다느니 같은 말을 하진 않았다.

이번 싸움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숫자가 적어도 수백은 헤아릴 터였기 때문이다.

수천 가운데 수백.

아마 비율로 따지면 10퍼센트도 안 되는 숫자.

하지만 벨키안은 생명을 다루는 네크로멘서였고, 그렇기에 더욱 더 생명에 민감했다.

사람의 목숨을 단순한 숫자로 대하는 것은 그가 무척이나 싫어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은 벨키안에게 교육을 받은 셋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벨키안 님.”

“말해라, 레나.”

벨키안이 레나를 지목하면 발언을 허락하자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지금 수업 시간 아니거든요?”

“그런 점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보기 흉한 자세이니 고치도록 해라.”

선생님 같은 말투에 레나는 으으하고 신음을 흘리더니 본론을 꺼냈다.

“아무튼 벨키안 님, 벨키안 님은 어떻게 오신 거예요?”

나타나서 큰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그의 등장은 문자 그대로 난입이었다.

카마엘 역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벨키안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더 어거스트 바이엘과 코델리아 어거스트 체이스와 나눈 맹약 덕분이다. 나를 소환할 수 있는 수정구를 두 사람에게 주었거든. 설마 소환 가능한 순간이 오자마자- 그것도 이런 곳에 소환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만.”

새부리 가면 속에서 쓴웃음을 지은 벨키안은 왕도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와, 정말 타이밍이 좋았네요.”

레나는 새삼 감탄했다는 듯 손뼉을 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벨키안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용군단과의 싸움에서 더 큰 피해가 발생했을 터였고, 말레키스와의 싸움 역시 지금처럼 수월하게 진행되지 못 했을 터였다.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겠지.”

마법사로서 벨키안은 행운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번 싸움은 정말로 운이 좋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운만인 것은 아닐 거다. 애당초 이런 판이 짜이지 않았다면 운이 좋았다 한들 지금 같은 결과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도중에 난입한 터라 일련의 흐름까지는 알지 못 하는 벨키안이었지만 당장 작금의 상황만 봐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척 봐도 연합을 맺은 것으로 보이는 남부7가문과 한 자리에 모인 파라곤의 영웅들.

여기에 용살검 아스카론까지.

더욱이 말레키스는 용의 수면을 제대로 끝마치지도 못 했으니 실로 이길 수밖에 없도록 판을 짠 느낌이었다.

“야생의 땅에서도 비슷했어요. 절망적인 싸움이라 생각했는데··· 이길 방법을 준비해뒀더라고요.”

용맥을 일시에 폭주시켜 황금의 용왕을 부활시킨다.

유더와 코델리아가 준비해둔 일발역전의 계책이 없었다면 그날 레나 자신은 물론이고 야생의 땅의 전사들 모두 유명을 달리했을 터였다.

“왕도에서의 싸움도 비슷했겠지.”

왕도에서 직접 전투에 참여한 벨키안 조차도 호국공의 반란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리 소상히 알지 못 했다.

하지만 그때 역시 비슷했을 거라는 카마엘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유더와 코델리아.

벌써 세 번이나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어낸 아이들.

“마치 그 아이들의 눈에는 미래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 같아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절대적인 예언은 존재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미래의 일을 읽어내는 것은 가능했으니 말이다.

물론 진지하게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예지의 권능을 정말 갖고 있었다면 레나나 벨키안 자신이 몰라봤을 리 없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만남 김에 묻겠다. 대사교 마누엘라는 어떻게 되었지?”

사실 반쯤은 답을 알고 건넨 물음이었다.

그렇기에 란디우스 역시 가타부타 설명을 붙이는 대신 침울해진 얼굴로 답했다.

“이번에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신출귀몰한 놈이니 너무 낙담하지 마라. 네가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놈은 파라곤 왕국 때와 같이 사악한 일을 저지르지 못 할 거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란디우스는 애써 웃으며 답했지만 답답한 속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이러나저러나 벌써 10년 째 놈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지만 만날 때마다 번번이 놓치기만 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대사교 마누엘라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란디우스 자신이 마누엘라를 추적하며 놈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놈이 란디우스 자신을 여기저기 끌고 다니기 위해 틈틈이 스스로의 위치를 노출하는 것은 아닐까.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참으로 뼈아픈 일이었다.

란디우스가 눈에 띄게 침울해지자 레나는 입술을 깨물더니 짐짓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고보니 벨키안 님, 프란 소식은 없나요?”

드루이드 프란.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 가운데 마지막 다섯 번째 멤버이자 가장 어린 막내.

데몬프린스 바이카젤과의 싸움 때만 해도 십대 중반이었던 그이지만 이제는 장성하여 한창 때의 청년이 되었으리라.

‘대체 어디있는 걸까.’

그나마 뜨문뜨문 편지라도 보내 기별을 하는 벨키안과 달리 프란은 벌써 7년째 소식이 전무했다.

“미안하지만 나도 아는 것이 없구나. 연락 역시 오지 않았고.”

“그런가요······.”

침울해진 란디우스의 의식을 돌리기 위해 꺼낸 말이었는데 이번에는 레나 자신이 침울해지고 말았다.

벨키안은 그런 레나의 모습에 끌끌끌 혀를 차더니 팬텀 스티드의 고삐를 당기며 말했다.

“일단 나는 돌아가보겠다. 소환수 개념으로 온 거라 소환 유지 시간이 있으니 말이다.”

“벌써요?”

“시간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사용한 힘이 많았으니까. 소환사도 기력이 다해 뻗은 상태고.”

“으음,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그래, 당분간은 왕도에서 머물 계획이니 연락하도록.”

거기까지 말한 벨키안은 손가락을 놀려 커다란 원형의 차원문을 만들더니 그대로 팬텀스티드를 몰아 안으로 들어갔다.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하면서도 갑작스러운 퇴장이었다.

“가셨네.”

“가셨군.”

“가셨어.”

차례대로 레나, 카마엘, 란디우스.

서로를 보며 작게 웃은 세 사람은 이내 다시 어깨를 늘어트렸다.

한바탕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새삼 지친 탓이었다.

그랬기에 란디우스는 잔해더미에 몸을 조금 더 기대며 입을 열었다.

“카마엘, 레나. 미안하지만 먼저 좀 쉴게.”

“그래, 뒷정리는 내게 맡기고 쉬도록.”

“잘 자, 란디. 이따 깨워줄게.”

레나가 뺨에 입술을 맞추자 란디우스는 흡족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 초.

란디우스가 거짓말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자 카마엘은 새삼 팔짱을 끼며 웃었다.

“훗.”

어쩐지 모르게 승자의 여유가 느껴지는 미소였다.

때문에 레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저기, 카마엘. 지금 설마 란디가 자기 이름 먼저 불러줬다고 흡족해하는 건 아니지?”

“후훗.”

카마엘은 부정하는 대신 다시 웃었고, 레나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뺨을 부풀리더니 새삼 란디우스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으로부터 100미터 남짓 떨어진 장소.

카이사와 스칼렛은 들것에 실려가는 유더와 코델리아를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기 말이야. 쟤들 참 대단하지 않아?”

카이사가 먼저 운을 띄우자 스칼렛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단하긴 하지. 그렇게 피를 토한 상태로 쪽쪽쪽쪽 난리가 났으니까.”

생각해보니 진짜 대단한 애들이었다.

피를 조금 흘린 것도 아니고 진짜 사발로 토해낸 것 같던데. 저러고 키스하면 비린맛 밖에 안 나지 않나?

스칼렛이 새삼 피맛 키스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하자 카이사는 괴악한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아니, 그것도 대단하지만 말이야. 일단 둘 다 우리보다 어리지? 쟤들.”

자기들보다 어린 주제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애정행각을 한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강함.

이제 겨우 열일곱- 아니, 이제 열여덟이라 할 수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두 사람의 강함은 경이로울 수준이었다.

아무리 용살검 아스카론을 사용했다고는 하나 저 강대한 에인션트 드래곤 말레키스의 숨통을 끊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두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만약 카이사 자신에게 용살검 아스카론을 주고 같은 일을 해보라 한다면···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무리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답이 나오는 문제였다.

때문에 카이사는 약간이지만 침울해졌고, 사실 왕도에서부터 비슷한 기분을 느끼던 스칼렛은 쯧하고 혀를 차더니 말했다.

“어차피 몇 년 차이도 안 나는데 그냥 동년배로 퉁치는 건 어떨까?”

스칼렛의 제안에 카이사는 눈을 깜박이더니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동년배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한데? 야, 너 마음에 든다. 나랑 친구하자.”

“너 몇 살인데?”

“응? 열아홉인데?”

카이사가 눈을 깜박이며 순진하게 답하자 스칼렛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난 스물이거든? 그러니까 앞으로 언니라고 불러. 알았지?”

“아까는 동년배라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지 맘대로야 무슨.”

“어허, 언니라니까?”

“흥, 그냥 친구 안 할래.”

“친구 아니면 더더욱 예를 갖춰야지. 앞으로는 언니라고 깍듯이 부르도록.”

스칼렛의 말에 카이사는 무어라 반박하고 싶어 입을 뻐끔거렸지만 딱히 생각나는 말이 없어 결국 침묵하였고, 스칼렛은 모처럼의 승리에 씩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새삼 다시 거대하기 짝이 없는 말레키스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같은 시각.

바다 건너 본토.

아르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막시밀리언의 눈을 통해 인계를, 남부를, 아르곤 항구 너머의 바다를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높은 곳의 목소리.

그는 알 수 있었다.

말레키스가 죽었다.

에인션트 블랙 드래곤이, 남부를 초토화시킴으로써 삼백 년 전의 원한을 풀려했던 악룡이.

“참으로 다행입니다.”

막시밀리언의 말에 높은 곳의 목소리는 바로 동의하지 않았다.

대답하는 대신 다른 것들을 떠올렸다.

미수로 그친 북부12가문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유괴 사건.

야생의 땅에서 펼쳐진 대전과 왕족의 목숨을 건 왕도에서의 싸움.

그리고 지금 이곳 남부에서 일어난 말레키스의 죽음까지.

그 모든 장소에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 그 모든 사건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높은 곳의 목소리시여?”

막시밀리언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묻자 높은 곳의 목소리는 대답을 내려주었다.

우선은 그에게 제국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였다.

“뜻을 따르겠습니다.”

정중히 예를 갖춘 막시밀리언은 더 이상 남부에 미련을 갖지 않고 제국이 자리한 북쪽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높은 곳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는 계속해서 두 사람을 생각했다.

유더 바이엘과 코델리아 체이스.

세일룬 왕국의 운명을 바꾼 두 사람의 행적을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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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5장 - 승전 (수정)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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