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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메이커-279화 (279/473)

< 제98장 - 결혼식 >

제98장 - 결혼식

지옥의 대군주는 모두 일곱이었다.

그중 둘이 소멸하여 다섯이 남은 지금 자연 그들을 받들어 모시는 악마 추종자들 역시 다섯 개의 집단으로 나뉘었다.

음욕의 대군주 아스모데우스를 모시는 악마의 손.

타락의 대군주 벨리알을 모시는 악마의 눈.

애증의 대군주 릴리스를 모시는 악마의 입.

잔학의 대군주 벨케고르를 모시는 악마의 귀.

폭력의 대군주 베헤모스를 모시는 악마의 뿔.

부서진 파라곤 왕국의 왕좌 위에 걸터앉아 있던 대사교 마누엘라는 턱을 괸 채 금속판을 내려다보았다.

악마들의 계보도가 그려져 있는 그것에는 각각의 대군주를 상징하는 일곱 개의 도형들이 그려져 있었고, 그 밑으로 강대한 악마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현재가 아닌 과거의 기록이었다.

파라곤 왕국을 바친 대가로 고대의 비술과 강대한 힘을 손에 넣은 마누엘라는 특정한 대군주 하나가 아닌 다섯 대군주 모두와 계약을 맺고 있었다.

때문에 악마 추종자들 사이에서 에버 초즌- 다섯 대군주 모두에게 선택받은 대행자라 불리는 그의 힘은 평범한 마인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지옥에 근간을 둔 대악마들조차도 그의 앞에서는 힘과 위세를 자랑하기 어려웠다.

“좋지 않아.”

순백에 붉은 빛이 더해져 화려하고 아름다운 사제복을 걸친 마누엘라가 낮게 말했다.

마인이 됨에 따라 불로영생을 손에 넣은 그의 모습은 과거와 크게 달라져 있었다.

그는 노인이 아닌 소년이었고, 길게 길러 허벅지에 닿는 하얀 머리칼 사이에 자리한 얼굴은 소녀처럼 아름다웠다.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금속판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금속판에 그려져 있던 계보도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다섯 개의 악마 추종자 집단.

하지만 악마의 귀는 사실상 궤멸한 상태였다.

악마의 뿔은 마인 자바워크를 제외하고는 전멸한 상태였으니, 남은 것은 악마의 손과 눈과 입. 이렇게 세 조직뿐이었다.

“계획이 너무나 어긋났다.”

악마의 눈은 야생의 땅을 장악하지 못 했다.

악마의 손은 왕도에 비극을 초래하지 못 했다.

강력한 동맹자였던 말레키스는 제대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유명을 달리하였으니, 그나마 목적을 달성한 것은 동방에 자리한 악마의 입뿐이었다.

이래서는 대소환을 일으킬 수 없었다.

세계를 뒤덮은 환란의 불꽃이 너무 작고 미약했다. 대소환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더 큰 혼란과 공포가 필요했다.

“가장 큰 문제는 파라곤의 다섯 영웅들.”

이들 또한 마누엘라 자신의 계획에서 어긋나고 있었다.

기껏 지옥에 가두었던 레나는 탈출하여 란디우스와 함께 하고 있었고, 함정에 빠트려 제거하려 했던 벨키안은 왕도에 틀어박힌 덕분에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란디우스.

본래 놈은 구천구문에 의해 자멸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멀쩡히 잘 살아 있는 것은 물론이고 구천구문을 이전보다 제대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자멸은커녕 팔문을 열어 초월자에 보다 가까워질 터였다.

‘구문까지는 무리일 터이다. 하지만 팔문만으로도 위협적이다.’

구천구문은 지옥은 물론이고 천계에도 속하지 않은 아홉 세계의 힘이었다.

때문에 세계의 기록을 읽는 힘을 손에 넣은 마누엘라라 하더라도 구천구문의 모든 것을 완벽히 읽어내는 것은 무리였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구문을 여는 자, 진정한 초월지경에 이르리라.’

선을 넘은 자.

한계를 초월한 자.

마치 지옥의 대군주를 소멸시킨 저 고대의 선인과 같이.

‘그 날이 오기 전에 충분한 환란을 일으켜야 한다.’

지금이라면 아직 기회가 있었다.

악마의 눈은 야생의 땅을 장악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신이라도 되듯 제국 내의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악마의 입 역시 제국과 동방의 경계점을 시작으로 제국 동부를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으니, 제국의 절반 이상이 악마 추종자들의 소굴인 셈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존재가 둘.’

지금까지는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계획이 헝클어진 것도 전부 그 두 사람 때문일지 몰랐다.

두 사람.

마누엘라가 재차 손가락을 놀리자 허공에 두 사람의 얼굴이 그려졌다.

유더 바이엘과 코델리아 체이스.

세일룬 왕국에서 진행한 모든 일에 개입하였고, 그 결과 모든 일을 망쳐놓은 파멸의 씨앗들.

“제거해라.”

더 이상 이쪽의 일을 방해하지 못 하도록.

마누엘라가 가볍게 금속판을 두드리자 악마 추종자들에게 동일한 명령이 전달되었다.

유더와 코델리아의 암살.

우선적으로 실행하는 것은 악마의 손.

하지만 마누엘라에게는 애석하게도 이미 때를 놓친 명령이었다.

&

“선수를 칠거야.”

유더와 코델리아는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침대 위에 앉아있는 유더의 품안에 코델리아가 쏙 들어가 안겨 있는 상황이었는데, 두 사람의 시선이 침대에 올려둔 지도 위에서 교차했다.

“우리의 목표는 이러나저러나 대소환의 저지야. 그리고 정황상 대소환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무척이나 큰 환란이 필요해.”

대소환은 단순히 이계로 통하는 차원문을 여는 정도가 아니었다.

다른 세계의 일부를 이 세상에 직접 강림시키는 세계 소환술이었다.

천계와 지옥과 인계를 겹쳐 하나로 잇는다.

이 정도의 술법을 쓰기 위해서는 그 대가 역시 엄청나야 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대환란.’

대륙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토해내는 공포와 불안,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에너지들.

실제로 원작에서 대사교 마누엘라는 이 세상에 지독한 환란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세일룬 왕국과 아르곤 제국을 멸망시키고 7대 재앙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의 삶을 도탄에 빠트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원작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 작금의 상황이었다.

“세일룬 왕국은 건재해.”

뿐만 아니라 원작보다 더 많은 영웅들이 생존해 있는 상황이었다.

코델리아와 루카스 둘 모두 무사했고, 란디우스를 필두로 한 다섯 영웅들 역시 활발하게 활동 중이었다.

반면에 악마 추종자들 쪽의 힘은 크게 꺾인 상태였다.

하급 마인들을 비롯하여 다수의 마인들을 잃은 상태였고, 호국공과 제일검이라는 카드를 잃었다.

남부의 폭군으로 군림했어야 할 말레키스의 세력은 송두리째 뿌리 뽑힌 상황이었고 말이다.

‘물론 아직 제일검처럼 살아있는 자가 있지만······.’

그래도 원작보다는 훨씬 더 이쪽이 유리한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부터 작전을 바꿀 거야.”

방어 일변도에서 선제 공격을 가하는 쪽으로.

지금까지는 상대의 힘이 너무 강한데다가 유더와 코델리아의 힘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그렇기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어도 막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호국공을 미리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라 일단 사건을 일으키기를 기다린 뒤 막았던 것처럼.’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유더는 변모한 상황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일단 세일룬 왕국에 자리한 악마 추종자들을 뿌리 뽑을 거야.”

서로 조직이 다르다 해도 결국 똑같은 악마 추종자들이었다.

대사교 마누엘라의 힘이 될 놈들이니 밀어버릴 수 있을 때 밀어버려야 했다.

지난 3개월.

유더와 코델리아가 각자의 수련에 매진한 시간.

하지만 그냥 수련만 한 것이 아니었다.

유더는 그 3개월 동안 악마의 손을 일망타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 말이 통하니까.”

악마의 손의 본부는 물론이고 각 지부의 위치를 모두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이 정보로 무언가를 할 수 없었다.

말해봐야 믿을 가능성이 낮았고, 설사 믿는다 해도 병력을 파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달랐다.

유더 자신이 여차저차 해서 알아낸 정보라며 악마 추종자들의 본부 위치를 말하면 성십자 수호단이 이를 신뢰했다.

뿐만 아니라 왕국군까지도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다.

“준비가 되었어.”

대륙 각지에 퍼져 있던 성십자 수호단의 단장들이 비밀리에 집결하였다.

왕국군 또한 각지의 악마 추종자들을 격멸하기 위해 정예 병력들을 은근슬쩍 움직여둔 상황이었다.

애당초 남부에서 말레키스가 봉기한다고 했을 때 토벌군이 빠르게 집결할 수 있었던 것도 악마 추종자들을 치기 위해 이미 출전 준비를 어느 정도 갖춰두었기 때문이다.

‘악마의 손을 지워버린다.’

성십자 수호단은 애당초 악마들과의 싸움에 모든 것을 바친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이번 기회는 실로 천금과 같았다.

단장들 하나하나의 의욕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헨리 2세도 만만치 않아.’

그는 여전히 호국공을 그리워했다.

그가 배신자이며, 수많은 왕족들을 해쳤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헨리 2세는 모든 화살을 악마 추종자들에게 돌렸다.

호국공을 타락시킨 악마 추종자들.

구국의 영웅이었던 그를 영락시켜 반란자로 만든 찢어죽일 것들.

각지에서 십검호들이 소집되었다.

그간 마주한 이들 가운데 절반 가량이 배신자 혹은 적이라는, 그야말로 기적의 확률을 보여준 집단인 십검호였지만 이제는 마음을 놓아도 되었다.

이번에 소집되는 십검호들은 전부 이쪽 편이 확실했으니 말이다.

바람의 검성 알렉스 바이엘 백작.

질풍검 게일 바이엘.

칠살검 세류와 신속의 검 세바스찬 르귄.

신성검 프레드릭 흐레스벨그 백작.

‘그리고 황금의 검성 이안 맥클라인.’

황금 사자 기사단을 이끄는 실라테스 평원의 수호자.

그리고 무검의 검호라 불리는 유더 자신까지.

제국 국경을 지키는 부동검 안젤라 바이스 자작과 별의 검성이라 불리는 방랑검 무수를 제외한 나머지 여덟은 이미 신상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설마 황금의 검성이 배신자라는 전개가 나오지는 않겠지.’

제일검처럼 행적이 모호한 양반도 아니고.

“여기에 성십자 수호단의 여섯 단장들도 총출동할 예정이니 전력이 부족하진 않을 거야.”

십검호가 여덟에 성십자 수호단의단장이 여섯.

단순히 계산해도 상급 마인 이상의 강자가 열 넷이었으니, 상급 마인이라고 해봐야 여섯에서 일곱 밖에 없는 악마의 손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당하기 전에 친다.

7대 재앙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대신 아예 대소환을 일으킬 놈들 자체를 없애 버린다.

유더가 슬슬 사악한 미소를 짓기 시작하자 코델리아는 돌연 입술을 조금 움츠렸다. 그대로 유더의 손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런데 유더야.”

“어, 코델리아야.”

“이 정도 전력이니까 게일 아주버님은 안 싸우면 안 될까? 결혼식도 얼마 안 남았구.”

“결혼식은 아직 한 달 가까이나 남았잖아.”

“그래두 지금의 아주버님은 뭐랄까, 그··· 플래그 덩어리? 플래그 그 자체? 같은 상황이잖아?”

이번 싸움이 끝나면 결혼하자.

이번 싸움이 끝나면 함께 살아가자.

코델리아의 주장에 유더는 작게 웃더니 제법 진지한 코델리아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는?”

“어?”

“우리도 플래그 덩어리 아냐?”

이번 싸움이 끝나면.

게일과 아델리아의 결혼식이 끝나면.

그 다음은 우리였으니까.

“그, 그러네?”

유더의 주장에 코델리아는 얼굴을 확 붉히며 뽈뽈뽈 거렸고, 유더는 다시 웃었다. 코델리아의 말캉말캉한 뺨에 입술을 맞춘 뒤 말했다.

“걱정하지 마. 형은 물론이고 나 역시 강해졌으니까.”

신화 각성 용장비로 거듭난 벨렌시아와 새로 익힌 설화십이검.

그리고 지난 3개월 간의 복기를 통해 보다 자연스러워진 구천구문 제육문의 단계.

여기에 말레키스를 쓰러트리며 잔뜩 올라간 레벨까지 고려하면 지난 3개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강해진 상황이었다.

“나두 강해졌어.”

불완전하게나마 목표로 했던 것을 실현할 수 있었으니까.

더욱이 카시우스가 만들어준 장비들이 실로 유용했다.

말레키스의 드래곤 하트 조각을 이용해 만든 마법 지팡이 덕분에 일반 마법의 위력 역시 증폭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루에 한 번이긴 해도 엄청난 양의 마력을 말레키스의 드래곤 하트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세일룬 왕국에서 악마 추종자들을 뿌리 뽑은 다음에··· 다음을 하자.”

유더가 말하는 다음.

코델리아는 그 말뜻을 모르지 않았다. 덕분에 이미 빨개진 얼굴과 목을 새삼 다시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다음.”

뭔지는 모르지만, 아니, 뭔지 이제는 잘 알지만 아무튼 다음.

맨날 끊기던 꿈의 다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무언가.

그런데 그때였다. 코델리아는 돌연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유더의 얼굴이 무척이나 빨갰기 때문이다.

“귀여워.”

그렇게 말한 코델리아는 고개를 뒤로 젖혔고, 유더는 그 뜻을 모르지 않았다. 코델리아와 다시 한 번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절묘한 선을 지키는 애정행각이 이어지고 있을 때.

[저기, 저도 강해졌거든요? 파워 업 했거든요?]

이제는 막 홀로그램으로 모습도 만들어낼 수 있는데다가 혼자서 마법도 쓸 수 있거든요?

네?

각성 신화 용장비로 거듭난 문라이트.

말레키스의 드래곤 하트에 자리한 멜리사는 중얼거리는 가운데 살짝 질척거리는 밤이 깊어갔다.

그리고 이틀 뒤 아침.

게일과 아델리아의 결혼식을 이십 여일 남겨둔 그날.

전국 곳곳에서 악마의 손을 목표로 한 대규모 기습이 시작되었다.

&

< 제98장 - 결혼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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