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8장 - 결혼식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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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전역에 걸쳐 활동하는 성십자 수호단은 일종의 점조직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백여 개에 달하는 지부에 소수의 인원들이 거하고 있다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집결하여 사건을 해결한다.
이런 형태로 발전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자국 내에 범국가적 무력 단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왕국과 제국 모두가 꺼려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원 부족이었다.
성십자 수호단은 평생을 악마들과의 싸움에 바친 자들이었다.
자연 그 구성원들은 악마 혹은 악마 추종자들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이 많았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렇게 원한을 가진 자들은 악마 추종자들의 세가 강하면 강할수록 많아졌다.
‘즉, 악마 추종자들의 세력이 약해진 지금은 자연 원한을 가진 이들 역시 줄어들었다는 거지.’
물론 표면적인 약화일 뿐이었다.
야생의 땅과 왕도에서 연달아 일어난 사건들이 보여주듯 당대의 악마 추종자들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음지에 몸을 숨긴 채 기회를 노리는 맹수들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지난 백여 년 사이에 악마 추종자들의 활동이 꾸준히 감소한 것은 사실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성십자 수호단 역시 그 규모가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인원은 적은데 대륙 전역을 감시해야 하고, 그럼 자연 점조직 형태로 조직이 형성될 수밖에 없지.’
얇고 넓게 대륙 전역을 커버한다.
하지만 단순히 흩어져 있기만 하면 악마 추종자들과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없는 법이었다.
때문에 성십자 수호단에서는 여섯 단장들의 역할이 무척이나 중요했다.
대륙 전역을 떠돌며 필요에 따라 성십자 수호단의 지부들을 결집시키는 구심점들.
평범한 기사단의 경우 단장들은 일선에 나서기 보다는 본부에 대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실제로 근위 마법 병단의 일곱 단장 가운데 하나인 아델리아만 하더라도 평소에는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이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성십자 수호단은 달랐다.
여섯 단장들 가운데 필두인 카마엘조차 대륙 곳곳을 누비며 전투에 임하였다.
그런 여섯 단장들 가운데 하나.
성기사 요안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일룬 왕국의 동부 끝에서 악마 추종자들을 수색 중이던 그녀는 무척이나 진지한 성격이었다.
엄격, 근엄, 진지.
여섯 단장들 가운데 최연장자인 하이 엘프 엘사리온은 요안나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요소로 저것들을 꼽았고, 카마엘과 요안나를 제외한 나머지 단장들 모두의 열렬한 환호를 받은 바가 있었다.
“기분 안 좋으신 거 같지?”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닐까?”
각지에서 징집된 성십자 수호단의 단원들 가운데 고참이라 할 수 있을 이들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것이 보통인 요안나가 지금은 조금이지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된 이유.
요안나의 바로 곁에서 찰싹 달라붙어 있는 한 쌍의 연인.
쪽쪽.
쪽쪽쪽.
쪽쪽쪽쪽 쪽쪽.
물론 정말 쪽쪽 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보고 있자면 주변에 쪽쪽 거리는 글자들이 떠오를 것만 같은 두 사람이었다.
유더 어거스트 바이엘 백작과 코델리아 어거스트 체이스 백작.
세일룬 왕국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세기의 커플.
“부러운 건 아닐까?”
“왜, 넌 부럽냐?”
“그럼 넌 안 부러워?”
“부럽지. 부럽고말고.”
“그럼 나는 어때?”
“세상에 남자가 너만 남게 되면 세 번쯤 고려해볼게.”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던 고참병들은 직후 무어라 더 말을 이으려 했지만 이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요안나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 탓이었다.
철벽의 요안나.
성십자 수호단의 축복술로 타고난 괴력을 더더욱 강화한 그녀는 공성병기조차 막아낼 것 같은 크고 거대한 방패와 마찬가지로 성벽조차 부술 것 같은 워해머로 무장하고 있었다.
전신 또한 검은 천을 덧댄 순백의 플레이트 메일로 감싸여 있으니, 실로 움직이는 강철의 성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직인가.’
요안나가 뒤를 돌아보며 눈빛으로 묻자 단원 가운데 하나가 작은 목소리로 답하였다.
“작전 개시까지 3분 남았습니다.”
전국의 지부를 동시에 급습하기로 하였으니까.
단원의 대답에 요안나는 미간을 한 번 더 찌푸리더니 옆구리에 끼고 있던 투구를 쓴 뒤 워해머를 움켜쥐었다.
절그럭 절그럭.
매복 중에 할 짓은 아니었지만 일부러 약간이나마 소리를 내자 다행히 반응이 있었다. 환상의 커플이 움찔하며 이쪽을 신경 쓴 것이었다.
하지만 요안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작전 개시 직전이란 것을 깨달은 두 사람이 더욱 더 질척거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유더야, 유더야. 요안나가 너무 쳐다봐.’
‘잘 됐네, 계속하자.’
‘우으응.’
뭐가 잘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좋긴 좋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정말 작전에 임해야 할 때였다.
코델리아는 아쉬움을 달래듯 입술을 움츠리더니 유더의 가슴을 살짝 밀어내 거리를 벌렸다.
[마침내!]
멜리사가 머릿속으로 외치자 코델리아는 콜록콜록 헛기침을 토한 뒤 수풀 너머를 보았다.
겉모습만 보자면 그냥 폐허.
무너진 성의 잔해.
하지만 실상은 악마의 손의 지부들 가운데서도 손에 꼽히는 규모를 자랑하는 중앙 지부의 본부였다.
지부를 이끄는 것은 상급 마인 코로스.
오늘의 기습을 위해 코델리아 자신과 유더는 물론이고 여섯 단장 가운데 하나인 철벽의 요안나와 일백에 달하는 성십자 수호단원들이 동원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작전에는 왕국군까지도 개입한 상태였다.
칠살검 세류를 필두로 한 일천여 왕국군이 저만치 먼 곳에서 느슨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단숨에 포위망을 좁혀 악마 추종자들의 탈주를 막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후우, 좋아.’
각성 신화 용장비로 거듭난 문라이트를 새삼 움켜 쥔 채 코델리아는 비어있는 왼손으로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얼티메이트 파이브- 그랜드 오더를 어루만졌다. 등에는 천상의 심판을 매고 있으니, 겉모습만 보면 마법사인지 검사인지 알 수 없는 코델리아였다.
‘후방 지원.’
필두에 서서 길을 뚫는 것은 요안나와 유더의 역할이었다.
때문에 코델리아는 속으로 숫자를 헤아린 뒤 유더에게 갖가지 마법들을 퍼붓기 시작했다.
“스트랭스, 헤이스트, 아이 오브 타이거.”
끊임없이 이어지는 주문에 옆에 서 있던 요안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열 개도 넘는 마법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구사하는 코델리아도 놀라웠지만, 저 많은 보조 마법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유더 역시 놀라웠기 때문이다.
‘과연 란디우스 님의 제자.’
보통 내구도로는 저렇게 많은 보조 마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얼굴이 워낙 미끈하게 잘생겼다보니 우락부락한 느낌을 받지 못 했는데, 어쩌면 옷 아래는 실로 엄청날지도 몰랐다.
“요안나 경.”
유더가 작게 말했고, 옷 아래를 상상하던 요안나는 흠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을 실행할 때였다.
“성스러운 태양의 빛이 함께하기를.”
이제는 사라진 솔라리 교단의 축언.
유더는 솔라리 교단의 수인으로 응답했고, 요안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유더에 대한 호감도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직후.
유더가 정면을 보고 요안나가 면갑을 닫은 그때.
수호단원 가운데 하나가 하늘에 붉은 신호탄을 쏘았다. 먼 곳에 자리한 칠살검 세류가 이를 보고 명령을 전파했다.
공격 개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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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추종자들의 지부 지하는 마치 개미굴과 같았다.
지상에 자리하고 있던 소수의 병력을 단숨에 쓸어버린 유더와 요안나는 지체 없이 지하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요안나는 몇 번이나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강해.’
너무 단순한 표현이었지만 유더는 빠르고 날카로웠다.
애당초 맨몸이기 때문인지 속도가 엄청났다. 더욱이 그냥 속도만 빠른 것이 아니라 강한 공격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더욱이 사지가 검과 같다는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유더는 악마 추종자들의 검을 아무렇지 않게 팔로 받아낼 뿐만 아니라 아예 수도로 벽을 가르고 부수기까지 하였다.
그야말로 무쌍난무.
적을 무찌르는 속도가 너무 빨라 요안나 자신조차도 그저 뒤를 좇기 급급할 지경이었다.
‘정말로 총단장 같아.’
자연스레 등을 따르게 하는 강함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유더의 움직임이 카마엘을 연상케 했다.
검을 사용하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 유더가 펼치는 것은 설화십이검이 분명했다.
“쿠오오오오!”
어두운 복도 너머에서 포효와 함께 악마가 돌진해왔다. 하지만 요안나가 방패를 들며 망치를 움켜쥐었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다.
설화십이검.
검으로 피어내는 열두 송이의 눈꽃들.
유더가 악마와 정면에서 충돌한 순간 순백의 눈보라가 시야를 뒤덮었다.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봉쇄된 악마의 전신에 유더의 검격이 휘몰아쳤고, 사자 머리에 거한의 육신을 가진 악마는 그대로 아홉 조각이 되어 쓰러졌다.
터터텅!
얼어붙은 바닥과 성에가 낀 조각들이 충돌하니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설화십이검이 가진 극한의 힘이었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야.’
성기사인 요안나는 알 수 있었다. 유더의 참격에는 성스러운 힘이 어려 있었다.
홀리 블레이드.
천계의 힘이 어린 성스러운 무구들.
그리고 요안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코델리아가 유더에게 건 것은 평범한 보조마법들만이 아니었다.
‘인챈트!’
무구를 강화시키는 마법들.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했다. 고된 수행으로 인체를 강화한 자들조차 애당초 무생물에 거는 것을 전제로 한 인챈트 마법은 견뎌내지 못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더는 견딜 수 있었다.
소드 오리진을 지닌 유더만의 강점이었다.
“계속 갑니다! 라이트!”
요안나가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춘 그때도 유더는 움직이고 있었다. 검사임에도 불구하고 마법을 구사해 어둠을 밝히더니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악마 추종자들을 문자 그대로 박멸했다.
마음 속에서 유더에 대한 호감도가 좀 더 오른 요안나는 전투망치를 불끈 쥔 뒤 성언을 외쳐 자신과 주변의 모두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백작 각하의 뒤를 따라라!”
“우오오!”
악마 추종자들의 저항이 거셌지만 찍어 누르는 성십자 수호단의 힘이 더욱 강하였다.
유더와 요안나가 길을 열고 코델리아와 수호단이 마무리를 가하니 지부에 남아 있던 병력 모두가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갈 따름이었다.
그리고 삼십여 분 남짓.
최하층에 도달한 유더는 두 팔을 늘어트린 채 숨을 골랐다.
유더의 등 뒤에는 수문장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을 거대한 가고일 한 마리가 얼어붙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중급 마인에 준하는 힘을 가진 악마.
전투가 시작된 이래 마주한 적들 가운데 가장 강한 놈이었고, 그렇기에 유더는 긴 숨을 내쉬었다.
이번 전투가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 할 것이란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도망쳤어.’
여기까지 오는 와중에 마주친 적들은 대부분 악마들이었다.
지난 1년 사이 세일룬 왕국에서 일어난 여러 일들로 인해 하급 마인들의 숫자가 줄었다지만 비율이 지나쳤다.
더욱이 결정적으로 지부의 장이자 상급 마인인 코로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눈치 챈 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조심한다고는 했지만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던 여섯 단장들이 한 자리에 집결한 것이었으니까.
악마 추종자들 입장에서도 눈치 챌 여지는 분명 존재했다.
더욱이 불완전하다고는 하나 솔루지아 측에는 예언의 능력을 갖춘 마인도 하나 있었다.
‘그래도 성과는 있어.’
이러나저러나 도망친 것은 코로스와 일부 마인들 뿐이었다.
악마의 손의 중앙 지부는 이번 전투로 사실상 궤멸하고 말 터였다.
세일룬 왕국 전체에서 악마 추종자들의 세력을 일소한다.
야생의 땅이나 왕도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대규모 환란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다수의 병력이 필요했다. 설사 마인들이 살아남았다 해도 그 손발이 될 병력이 없다면 놈들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할 터였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아예 제국으로 튀는 거겠지만.’
세일룬 왕국에서 꾸미던 일들이 모조리 실패했으니 차라리 제국 쪽에 힘을 실을 가능성이 존재했다.
‘아무튼··· 한 건 해결인가.’
코델리아가 플래그 운운했지만 별 탈 없이 끝났으니 만족해야겠지.
작게 웃은 유더는 새삼 품안에 손을 넣어 작은 물건 하나를 어루만졌다. 카시우스에게 특별히 주문해 만든 물건이었다.
“어거스트 바이엘 백작 각하.”
요안나의 부름에 유더는 물건을 손에 쥔 채로 빙들 돌아섰다.
“아무래도 상급 마인들은 도주한 것 같습니다.”
유더의 말에 미간을 찌푸린 요안나였지만 이내 표정을 고치며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수색활동을 명하겠습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예를 표한 유더는 다시 최하층의 방을 돌아보았다.
게임에서도 몇 번 보았던 풍경이었지만 역시 현실과는 다소 간의 차이가 존재했다.
‘악마의 손.’
지옥의 대군주 아스모데우스를 모시는 악마 추종자 집단.
지부장인 코로스의 방으로 보이는 곳에 들어가자 한쪽 벽면에 그려진 아스모데우스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음욕의 군주인 동시에 지옥 제일의 검호.
원작에서는 대소환의 날 지상에 직접 강림하여 아마겟돈의 시작을 알리는 대군주였다.
‘정말 제대로 도망쳤구나.’
코로스의 방에는 이렇다 할 물건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가져갈 것은 가져가고 남은 것들은 성십자 수호단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폐기한 모양이었다.
“유더야! 뭐라도 좀 있어?”
멀리서 들려온 코델리아의 부름에 유더는 돌아섰다.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작은 반지를 다시 품안에 잘 갈무리 한 뒤 소리쳤다.
“아니! 별 거 없어! 지금 갈게!”
“빨리 와!”
“그래!”
조금은 얼빠진 대화였지만 그래서 더더욱 미소가 그려졌다.
‘다음인가.’
게일 형과 아델리아 누님의 결혼식 이후.
그 다음에 이어질 일.
새삼 가슴의 반지를 어루만진 유더는 서둘러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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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불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케인즈와 사라가 죽었다.
아델라이데가 카마엘의 위독을 알려왔고, 요안나가 엉엉 울며 성십자 수호단의 최연장자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엘사리온의 전사 소식을 전해왔다.
상황이 좋지 못 했다.
남부를 초토화한 말레키스의 용군단이 북진을 개시했고, 북부를 장악한 야만족들이 남진을 개시했다.
왕족을 잃은 중앙은 남과 북의 공격을 막을 여력이 없으니 세일룬 왕국의 멸망이 코앞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더는 전장 한복판에 주저앉아 있었다.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유더 자신이 흘린 피도 있었고 타인이 흘린 피도 있었다.
아마 케인즈와 사라의 피도 섞여 있을 터였다.
유더는 숨을 길게 토했다. 연이어 비보를 전해오는 통신기의 마력을 차단해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성십자 수호단과 악마 추종자들, 무고한 많은 이들의 시체가 겹겹이 쌓인 이 곳에서 평온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버지.’
아버지께 물려받은 질풍의 검.
바이엘 백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바이엘 백작가 자체가 사실상 소멸한 상황이었다.
북부에서의 싸움으로 바이엘 백작과 그 후계자였던 게일- 유더 자신의 하나뿐인 형은 전사했다.
바이엘 백작가는 불에 타 사라졌고, 유더 자신이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이아 하나뿐이었다.
“다행이에요, 도련님.”
유더 자신의 얼굴을 보며 눈물짓던 마이아.
하반신이 짓뭉개져 양다리를 잃은 와중에도 유더 자신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미소를 보이던 그녀.
바이엘 백작가가 사라지고 한 달 뒤에 마이아는 숨을 거두었다.
누적된 부상과 악마들이 남긴 저주에 의한 결과였다.
유더는 이를 악물었다.
마이아의 얼굴을 떠올리니 새삼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땀과 피로 얼룩진 유더의 뺨을 따라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 형, 마이아.
바이엘 백작가의 모두들.
전부 잃어버리고 말았다.
악마 추종자 놈들이 모두 앗아가고 말았다.
남은 것은 아버지께 배운 불완전한 질풍의 검뿐.
하지만 유더는 질풍의 검을 버리지 못 했다. 불완전하다고는 하나 구천구문을 익히고, 카마엘로부터 설화십이검을 전수받았지만 여전히 질풍의 검을 자신의 근간으로 삼았다.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더는 계속해서 울었다.
이제 겨우 열여덟.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유더는 결국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직한 부름이 유더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유더야.”
다정한 속삭임.
유더는 고개를 돌렸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너머에 붉은 머리의 소녀가 보였다.
“코델리아.”
코델리아는 다시 답하는 대신 쪼그려 앉아 유더를 보더니 빙긋 웃었다. 그대로 두 팔을 벌려 유더를 끌어안았다. 유더의 머리를 가슴에 묻어 온기를 나누어주었다.
코델리아도 많은 것을 잃었다.
체이스 백작은 바이엘 백작과 함께 전사했고, 언니인 아델리아는 왕도의 난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큰오빠인 에드워드는 아직 살아 있었지만 정신이 나가 광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잿빛으로 가득 찬 유더의 세상에서 유일한 빛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붉게 물들었던 하늘이 새카맣게 변하고 별의 바다가 펼쳐졌을 때.
유더는 훌쩍이며 코델리아를 살며시 밀어냈다. 그리고 그 작은 손짓에 코델리아는 다시 미소지었다.
“이제 괜찮아?”
유더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몇 번이나 살을 섞은 사이였지만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으유. 완전 애기라니까.”
코델리아는 유더의 뺨을 꼬집어준 뒤 털썩하고 옆에 앉았다. 다시 한 번 유더의 손을 잡아주었다.
황폐한 전장.
연이어 들려오는 절망적인 소식들.
하지만 완전한 잿빛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유더는 코델리아의 손을 마주잡으며 충동적으로 말하였다.
“코델리아.”
“응?”
코델리아가 이쪽을 보았다.
지나치게 빨리 어른이 되고만 푸른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봐주었다.
장소가 좋지 못 했다.
분위기도 썩 좋다고는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유더는 충동을 참지 못 하고 품에 숨겨두고 있던 물건을 내밀었다.
작은 반지.
화려하진 않지만 아름다운, 어머니의 유품.
이미 약혼한 사이였다.
약혼 반지라면 이미 나눠가진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유더는 자신의 마음을 담은 그것을 코델리아에게 내밀었고, 코델리아는 다시 미소지었다. 눈시울을 살짝 붉히며 반지를 받아주었다.
“예쁘다.”
유더가 손수 끼워준 반지를 보며 코델리아가 그리 말했고, 유더는 새삼 다시 뺨을 붉혔다.
잿빛으로 물들고만 세상에서 유일한 빛인 코델리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코델리아가 수줍게 웃었고, 유더도 그러했다.
잠깐이지만 세상을 뒤덮은 절망을 잊고 두 사람은 함께 미소 지었다.
별조차 없는 검고 어두운 하늘을 함께 우러렀다.
&
< 제98장 - 결혼식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