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8장 - 결혼식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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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더는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깜박였다.
찰나지간.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꿈이라도 꾼 것일까?
잠시 멍한 가운데 유더는 다시 눈을 깜박였고, 이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들을 대부분 잊어버렸다. 남은 것은 그저 조각난 애틋함 뿐이었다.
무엇인 걸까.
이내 의문조차 들지 않았다.
한 순간 꿈을 꾸었다는 기억마저도 눈 녹듯이 사라져 그저 잠시 멍했구나-하는 정도의 감각만이 남았다.
그래서 유더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연기처럼 흩어진 꿈속의 코델리아가 아닌 진짜 코델리아가 눈앞에 있었으니 말이다.
천막 안.
지붕 끝에 난 작은 환기 구멍 너머에서 달빛이 쏟아졌고, 일종의 잠옷이라 할 수 있을 편한 옷차림의 코델리아가 얼굴을 붉힌 채 앉아 있었다.
이번엔 왜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것일까.
기억을 더듬던 유더는 이내 깨달았고, 능글맞은 미소로 주저하는 코델리아를 재촉했다.
얼른.
응?
얼른.
“우으으.”
다시 뺨을 붉힌 코델리아는 입술을 움찔움찔하더니 이내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꼬며 딴청을 부렸다.
“그, 그러니까.”
“응, 그러니까.”
하지만 유더는 봐줄 생각이 없다는 듯 짓궂게 말했고, 코델리아는 다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마치 진짜 해야 하냐고 묻는 것 같은 시선.
유더가 고개를 끄덕이자 코델리아는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작은 입술을 벌려 말했다.
“으, 응애. 나 애기 코델······.”
거기까지였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말을 잇던 코델리아는 웃음보가 터지기 직전인 유더의 얼굴을 보더니 마구 주먹질을 해댔다.
“야! 니가 하라며!”
“하란다고, 진짜··· 크큭.”
코델리아의 솜방망이 같은 주먹에 연타를 당하면서도 유더는 계속해서 웃었고, 결국 울상이 된 코델리아가 소리쳤다.
“너 미워! 너 싫어!”
얼굴을 보니 정말 잔뜩 토라진 모양이었다.
유더는 급히 그런 코델리아를 어르며 말했다.
“귀여워, 귀여워. 정말이지 엄청 귀여웠어. 한 번만 더 해주면 안 돼?”
귀엽다는 건 진심이었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바로 고개를 돌린 뒤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돌아가. 안 해줄 거야.”
“그러지 말고. 응?”
유더가 슬쩍 허리를 안으며 다시 능구렁이처럼 속삭이자 코델리아는 다시 흔들리는 자신을 느꼈다.
분명 미워 죽겠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유더가 보고 싶다고 하니 해주고 싶달까?
‘그래, 뭐 까짓 거.’
한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다시 마음을 고쳐먹은 코델리아는 그대로 헛기침을 토했지만 바로 하지는 못 했다. 막상 하려니 다시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후우, 좋아.’
크게 심호흡을 한 코델리아는 다시 입술을 벌려 말했다.
“으, 응애. 나 애기······ 야! 웃지 말라고!”
“크큭, 하, 하지만. 하지만······ 하하하.”
유더가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자 코델리아는 진짜로 화가 나서 유더의 손등을 꼬집었다.
“진짜 못 됐어!”
“아, 알았어. 나도 할게. 그러니까 용서해줘. 응애 난 애기 유더. 애기 맘마조.”
“아오! 진짜!”
왜 엄한 짓은 유더가 하는데 부끄러운 건 나지?
부끄러움은 왜 내 몫인 건데!
“응애, 응애.”
“아, 진짜!”
누가 보면 자살각이 날카로울 정도로 부끄러웠다.
때문에 코델리아는 두 손으로 유더의 입을 틀어막았고,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의 손을 앙하고 깨물어버렸다.
“오늘 따라 왜 이러는데!”
정말 왜 이러는 것일까.
왜 오늘따라- 아니, 지금 이렇게 코델리아에게 응석을 부리고 싶은 것일까.
유더는 코델리아를 끌어안았다. 품 안에서 난동을 피우다 이내 잠잠해진, 마주 자신을 끌어안는 코델리아를 보듬으며 천막 천장에 난 환기 구멍을 올려다보았다.
달과 별이 보였다.
칠흑만이 가득한 밤하늘이 아닌, 별들의 바다가 유더를 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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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 자체는 전부 성공했습니다. 다만 이곳과 마찬가지로 적의 주력··· 즉, 상급 마인들은 미리 몸을 뺀 것 같습니다.”
다음날 아침.
요안나의 말을 들으며 유더는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에 공격한 악마의 손의 지부는 모두 열두 개.
그중 넷은 일백 명 이상이 상주하는 거대 지부였다.
‘그런데도 상급 마인이 없었다.’
이 정도면 역시 눈치를 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 셈인가.’
상급 마인들을 살리기 위해 중하급 마인들과 평범한 악마 추종자들을 버린다.
상급 마인들 하나하나의 가치를 생각하면 충분히 해봄직한 일이기는 했지만 악마의 손 쪽도 타격이 적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이번 기습 자체는 유의미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봅니다. 아직 작은 지부들이 남아있기는 하겠지만, 굵직한 지부들은 모두 때려잡은 셈이니까요. 아마 세일룬 왕국 내에서는 놈들이 뭔가 수작을 부리기 어려울 겁니다.”
유더의 말에 요안나가 작게나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총단장께서는 상급 마인들이 제국으로 흘러간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계십니다.”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악마의 손과 악마의 눈이 손을 잡는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본래 대립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경계하던 두 조직이었지만 상황이 좋지 못 했으니 말이다.
‘역시, 앞으로의 싸움은 7대 재앙보다는 악마 추종자들과의 싸움인가.’
물론 남은 7대 재앙 자체가 큰 벽이 되기는 할 터였다.
하지만 제대로 된 주적은 역시 대소환을 일으키려는 악마 추종자들이었다.
‘제국에 자리한 악마 추종자들을 뿌리 뽑을 수 있다면······.’
아니, 최소한 그 핵심부를 무너트릴 수 있다면.
대소환을 저지할 수 있다.
천계와 지옥의 정면대결인 아마겟돈이 성사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제국에 가는 거지?]
코델리아가 메시지 마법으로 묻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일룬 왕국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제국으로 건너가 제국 쪽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을 규합한 뒤 악마 추종자들과의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그래도 당장은 아냐. 아직 준비할 것들이 있으니까.]
[응응, 언니 결혼식도 있구.]
앞으로 이십여 일 남은 게일과 아델리아의 결혼식.
그때까지면 얼추 제국으로 떠날 준비가 끝날 터였다.
“알겠습니다, 요안나. 저희는 그럼 이만 북부로 향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작전에 임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저야말로 영광이었습니다. 항상 태양의 빛이 그대를 비추기를.”
“항상 태양이 함께하기를.”
유더가 솔라리 교단의 방식으로 답하자 훈훈하게 웃은 요안나는 유더와 코델리아 두 사람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이십여 일 뒤.
북부의 변경도시 바일룬.
게일과 아델리아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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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12가문 가운데 둘.
그것도 요즘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는 바이엘 백작가와 체이스 백작가의 결합이었다.
북부를 넘어 세일룬 왕국 곳곳에서 하객들이 모여들었다.
유더에게 편지를 받은 카이사가 남부에서부터 선물을 잔뜩 들고 바일룬을 찾았고, 애당초 북부에 사는 루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북부의 갈까마귀들과 함께 바일룬을 방문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애당초 코델리아와 사이가 좋은 실비아 크로스벨은 물론이고 왕도의 사건 이후 코델리아의 추종자가 된 엠마 파이커스까지 하객으로 참여하자 다른 북부12가문들도 너나 할 것 없이 하객들을 파견하였다. 단순히 선물만 보내고 끝내기에는 게일과 아델리아의 결혼식이 범국가적 행사로 거듭난 탓이었다.
‘왕도에서도 잔뜩 몰려왔으니까.’
아델리아가 5년이 넘게 몸을 담고 있던 근위마법병단은 물론이고 게일과 연을 맺은 왕도의 여러 기사단이 앞 다투어 하객들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여러 대귀족들.
십검호 가운데 무려 셋이 바이엘 백작가 소속이었고, 왕가를 구한 구국의 가문이니 그냥 넘어갈래야 넘어갈 수가 없었다.
“정말 축하드려요.”
그리고 다리안 왕녀.
왕가의 막내인 그녀가 왕족들을 대표하여 결혼식을 축하하고자 바일룬에 방문하였다.
바이엘 백작가를 왕가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종의 퍼포먼스였고, 그 효과는 실로 굉장했다.
“하객 숫자만 천 명도 넘겠는데?”
아델리아가 처음 생각한 것은 친지들을 모아놓고 여는 작은 결혼식이었는데 이제는 숫제 국가 행사가 되고 말았다.
때문에 아델리아는 코델리아의 언니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우으으.”
뺨을 붉힌 채 울상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하는 아델리아와 그걸 또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게일.
역시 자매가 그러하듯이 형제 역시 닮기 마련이었다.
“그래두 언니 행복해 보여.”
코델리아의 말대로였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델리아의 얼굴에는 내내 미소가 가득했다.
결혼식.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
함께 살아가기를 맹세하는 것.
아침에 시작한 결혼식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너무 기뻐 울음을 터트리고만 아델리아를 덥썩 안아든 게일이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퇴장했을 때에는 이미 달이 뜨다 못해 저 높은 곳에 걸린 이후였다.
“그런데 형님 내외는 그렇다 치고. 얘네는 또 어디 간 거야?”
“안 보이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건 또 그러네.”
어느새 친해진 카이사와 루카스는 농담을 주고받은 뒤 창밖을 돌아보았다.
식장에서 사라진 것은 게일과 아델리아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이엘 백작가의 정원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유더의 방.
유더와 코델리아는 입술을 맞추었다. 가볍게 시작했지만 이내 농염해졌고, 서로의 혀를 탐하였다.
그리고 한 호흡.
뜨거운 숨을 토하며 달뜬 표정을 짓는 코델리아의 뺨을 유더가 어루만졌다.
부드럽고 뜨거운 뺨.
코델리아는 다시 호흡을 골랐다. 유더 냄새가 가득한 곳에서 재차 얼굴을 붉혔다.
게일과 아델리아의 결혼식 이후.
얼마 전부터 둘이 약속한 다음의 이야기.
“코델리아.”
유더의 부름에 코델리아는 입술을 움츠리다가 고개를 들어 유더를 올려다보았다.
유더는 그런 코델리아의 작은 턱을 살짝 붙잡아 올리더니 다시 짧게 입술을 맞추었다.
어느새 미소가 번졌다.
유더는 갈구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코델리아의 뺨을 살짝 꼬집은 뒤 품안에 손을 집어 넣었다.
근 석 달 전부터 준비해둔 것.
꼭 건네주고 싶었던 것.
유더는 말없이 작은 반지를 내밀었다.
이미 서로 아이템 문제로 몇 개씩 반지를 끼고 있었지만 지금까지와는 그 의미 자체가 다른 반지였다.
은색 링 위에 코델리아의 눈동자를 닮은 푸른 사파이어가 박혀 있는 약혼 반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서가 아닌, 진정으로 원하고 갈구하여 준비한 선물.
코델리아도 반지의 뜻을 모르지 않았다. 순식간에 울상이 되어, 젖은 눈으로 유더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이 끝나면··· 결혼하자.”
조금 더 멋있는 말이 있었을 텐데.
분명 더 멋진 말을 준비했었는데.
결국 입 밖에 나온 것은 무척이나 담백한 말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위화감.
기시감.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하나의 감정.
코델리아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감정을 애써 누르듯, 가슴을 짓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활짝 웃는 것으로 유더의 말에 답해주었다.
유더가 코델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오늘의 일을 예견한 코델리아가 미리 체이스 백작의 반지를 다른 손가락으로 옮겨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역시 코델리아. 준비성이 좋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치마 안에 이것저것 바리바리 챙겨들고 다녔었지.
유더가 다시 웃자 코델리아는 입술을 삐쭉이더니 손을 살짝 흔들었다. 얼른 하던 거나 하란 뜻이었다.
유더는 코델리아의 손에 반지를 끼웠다. 그대로 손을 꼭 붙잡은 뒤 입술을 맞추었고, 다시 한 번 속삭였다.
“사랑해.”
수도 없이 반복해온 말.
다시 한 번 속삭일 수 있기를 갈망해온 말.
“나두, 나두 사랑해.”
코델리아 역시 그러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활짝 웃으며 화답했다.
어쩐지 모를 기시감.
사라지지 않는 위화감.
하지만 유더와 코델리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렇게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다시 입술을 포개었다. 지금에 감사하며 서로를 보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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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상황이 바뀌었다.
달라졌다.
그리고 그 변화는 더 큰 변화를 야기할 터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다음 기회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도도하게 흐르는 시간의 흐름.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그것.
그저 따라야만 하는 순리.
위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눈을 떴다.
어지럽게 빠른 그것 앞에서 망각하였다.
하지만 남아있는 기시감.
아주 약간의 위화감.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
그로부터 야기될 또 하나의 변화.
천상의 목소리들이 지상을 주시하였다.
높은 곳의 목소리가 세상에 새겨진 상처들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
긴 잠에 빠져 있던 어린 신 아탈리아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우러렀다.
색이 바란 황금빛 눈동자에 어둠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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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8장 - 결혼식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