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엔딩메이커-282화 (282/473)

< 제99장 - 재회 >

제99장 - 재회

다음날 오전.

아직 정오도 되기 전인 제법 이른 시간이었지만 접객용 응접실에는 몇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구성이 제법 눈길을 끌었다.

북부12가문 가운데 하나인 흐레스벨그 백작가의 후계자이자 유더의 등장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북부제일의 후기지수로 손꼽히던 루카스 흐레스벨그.

남부7가문- 아니, 이제는 남부6가문 가운데 맹주의 자리에 오른 오펀드 후작가의 금지옥엽이자 무투파로 이름 높은 카이사 오펀드.

사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이상하지 않은 구성이었다.

두 사람 모두 명가의 후손들인데다가 유더와 코델리아의 절친한 친구들로 유명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란히 앉은 두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는 나머지 두 사람의 존재가 작금의 조합을 이질적으로 만들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루카스와 눈싸움을 하고 있는 하늘색 머리칼의 소녀.

머리색도 특이했지만 뾰족하게 솟구친 기다란 두 귀는 더욱 그러했다.

얼핏 엘프로 보이지만 엘프는 아닌, 그렇다고 하프 엘프라 하기도 어려울 북방의 야만족.

하지만 소녀까지는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이 자리의 위화감을 폭발시키고 있는 것은 소녀의 옆에 찰싹 붙어있는 거대한 청년이었다.

피부 부터가 회색이라 특이했는데 덩치가 어찌나 큰지 옆에 앉은 소녀의 세 배- 아니, 네 배는 족히 되는 것 같았다.

청년의 팔뚝이 소녀의 허리보다 더 두꺼울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삐쭉 솟아나온 청년은 소녀와 눈싸움 중인 루카스를 가만히 노려보았고, 카이사는 어제 만난 새 친구를 위해 그런 청년을 노려보았다.

일촉즉발.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싸울 것 같지는 않은 미묘한 신경전.

바이엘 백작가의 메이드들이 곤란해하는 가운데 한 소녀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 나타났다.

“신이나, 신이나, 엣헴, 엣헴, 신이나.”

어깨춤을 추며 등장한 붉은 머리의 소녀.

엉뚱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지만 모두의 반응은 반가움 그 자체였다.

일단 루카스를 째려보던 소녀- 붉은바람이 활짝하고 웃었으니 말이다.

“언니이!”

“붉바! 아니, 붉은바람!”

코델리아가 얼른 와서 안기라는 듯 두 팔을 벌리자 붉은바람은 폴짝하고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서더니 그래도 도도도 달려 코델리아의 허리를 안았다.

“언니, 보고 싶었다.”

“나두 보고 싶었어.”

코델리아보다 키가 큰 붉은바람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구부정하게 몸을 숙이더니 코델리아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좋아했다. 물론 루카스 쪽을 흘기며 코웃음을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랑 언니가 이 정도 사이거든?’

그 눈빛. 루카스는 순간 발끈했지만 그렇다고 붉은바람처럼 코델리아에게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루카스는 코델리아에 이어 등장한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 야. 재밌을 것 하지만 그건 좀 아닌 거 같거든?’

가서 막 끌어안거나 하진 말자?

카이사가 눈빛으로 말하며 루카스의 손을 붙잡자 루카스는 흠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붉은바람이 작은 승리감에 도취되고 있을 때.

어련히 상황을 파악한 유더는 루카스를 챙겨주었다.

“이른 아침부터 만남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저와 공자의 사이 아닙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유더가 콕집어 말해주자 기가 산 루카스가 붉은바람 쪽을 흘겨보며 코웃음을 치자 붉은바람은 인상을 구기더니 베하고 혀를 내밀었다.

‘완전 애들이네.’

헌데 생각해보면 루카스고 붉은바람이고 이제 열일곱이니 애가 맞기는 했다.

그래서 유더는 이 자리에 있는 이들 가운데 제일 애 같지 않은 사람에게도 말을 붙였다.

“태양노래,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다. 반갑다.”

태양노래가 약간은 어눌한 공용어로 답하며 씩 하고 웃자 카이사도 따라서 웃었다.

짐승녀라 불리는 그녀는 눈앞의 진짜 짐승같은 청년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등빨 좋아. 아주 좋아.”

카이사의 중얼거림에 태양노래가 다시 씩하고 웃을 때였다.

“일단··· 차라도 한 잔씩 들도록 하죠.”

유더의 말에 호응하듯 코델리아는 여전히 매달리는 붉은바람을 낀 채로 자리에 착석했고, 유더를 따라 바이엘 백작가에 귀환한 마이아가 일행 모두에게 각기 차를 돌렸다.

그대로 후륵.

다들 차를 마시느라 조용해진 직후였다.

“응응, 응응응.”

코델리아가 아주 작게 흥얼거리며 괜히 왼손을 흔들어댔다. 마치 이쪽 좀 봐달라는 듯이 말이다.

워낙 과장된 동작이었던 터라- 더욱이 코델리아가 뺨을 발그레 붉힌 터라 모두의 시선은 금방 그녀의 왼손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코델리아가 바란 반응이 바로 튀어나오지는 않았는데 무척 단순한 이유였다.

첫째, 붉은바람과 태양노래는 대륙의 풍습을 잘 몰랐다. 즉, 왼손 약지의 반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둘째, 카이사는 이런 걸 신경 쓸 정도로 세심한 성격이 아니었다. 어제도 일단 약지에 체이스 백작의 반지를 끼고 있던 코델리아였으니 말이다.

때문에 모두들 멀뚱멀뚱 쳐다만 보았고, 덕분에 민망해진- 거기에 실망까지 한 코델리아가 입술을 움츠릴 때였다.

“아.”

이 자리에 있던 상식인.

그나마 코델리아의 바람을 읽어낼 수 있는 루카스가 작게 탄성을 토하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유더와 코델리아를 돌아보았다.

“축하드립니다.”

이미 약혼한 사이였지만, 직접 반지를 교환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루카스의 말에 비로소 눈치를 챈 카이사는 까르르 웃기 시작했고, 코델리아는 뺨을 붉히더니 헤헤헤 웃기 시작했다.

“흠흠.”

그리고 유더.

헛기침을 토한 그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붉은바람과 태양노래에게 설명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민망했기 때문이다.

“어···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 번 이번 결혼식에 참석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말하다보니 마치 유더 자신의 결혼식 같았지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게일과 아델리아의 결혼식.

그러고 보니 이르다고는 해도 슬슬 정오에 가까울 시간인데 저택이 왜 이렇게 조용한 것일까.

게일과 아델리아가 각기 손님 접대를 하며 바삐 오가야 정상일 텐데.

유더가 살짝 의문을 표하자 뒤에 시립하고 있던 마이아가 살짝 귓속말을 해왔다.

“그··· 두 분 모두 아직 침실에서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어? 어어, 어. 그렇구나.”

뭐 하느라 아직도 침실에서 나오지 않는 것일까.

대충 상상이 되었지만 유더는 일부러 의식을 차단했다. 형과 형수를 대상으로 그런 상상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루카스와 카이사는 유더와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인지 제각기 상상하였고, 덕분에 루카스는 얼굴을 붉힌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카이사는 므흐흐 웃어댔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사람.

여전히 코델리아의 허리를 안고 있던 붉은바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폭탄을 던졌다.

“나도 결혼식하고서 삼일 동안은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

코델리아가 눈을 깜박이자 붉은바람은 뺨을 붉히며 흐흐흥 웃었고, 태양노래는 저만치서 헛기침을 토해댔다.

‘뭐야, 뭐야. 둘이 벌써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거야?!’

‘뭐··· 우리가 야생의 땅 나갈 때부터 정략혼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둘의 결혼 자체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 그치만······.’

붉은바람과 태양노래라구? 키 차이만 거의 50cm는 족히 된다구? 덩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구?

거기다-

‘사, 삼일······.’

스칼렛과 카이사에 의해 이래저래 왜곡된 의식을 가지게 된 코델리아의 망상력이 날개를 펴 날아올랐고, 덕분에 코델리아는 뺨뿐만 아니라 전신 전체가 익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민망함에 몸부림치는 루카스와 유더.

홀로 호오호오 하며 태양노래를 쳐다보는 카이사.

한 마디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뒤에서 망설이는 마이아.

복잡한 침묵이 오가는 가운데 결국 다시 입을 연 것은 유더였다.

“그, 마이아. 미안한데 잠깐만 우리끼리 있게 해줄래? 긴히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알겠습니다. 다만······.”

“다만?”

마이아는 굳이 말하는 대신 적당히 엄한 눈으로 눈짓을 해왔고, 유더는 억울함을 가득 담아 그런 거 아니라고, 애당초 이상한 이야기를 한 건 우리가 아니라 붉은바람이라며 눈빛으로 항의했다.

아무튼 그렇게 1분 남짓.

마이아가 자리를 비우자 유더는 짝하고 손뼉을 쳐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렇게 여러분들을 따로 초빙한 이유는 사실 감사를 전하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유더의 말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기는 북부 끝도 아닌, 북부 깊은 곳에 위치한 변경도시 바일룬이었으니까.

루카스 자신이나 카이사가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하는 것은 문제될 게 없었지만 야생의 땅의 야만족인 붉은바람과 태양노래는 경우가 달랐다.

야생의 땅과의 교류가 어느 정도 시작된 흐레스벨그 백작령과 달리 이곳에서 야만족은 여전히 경계의 대상 혹은 노예로 써도 되는 이종족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붉은바람과 태양노래를 굳이 이곳까지 불러냈다.

그렇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단순히 결혼식을 축하한다는 명목 외의 다른 이유가.

“일단···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거나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저와 코델리아는 성십자 수호단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이번에는 루카스와 카이사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유더는 성십자 수호단의 총단장인 카마엘의 제자였고, 코델리아는 성천사 레나의 제자 혹은 후계자 정도로 소문이 난 상황이었다.

밀접한 관계가 아니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남들은 알지 못 하는 정보를 조금 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보에 따르면 대륙은 지금 보이지 않은 커다란 위험에 위협받고 있습니다.”

음모론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유더가 하는 말이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거짓이 아닙니다.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입니다.”

유더는 사건들을 하나하나 나열했다.

북부12가문의 자제들 납치 시도, 프로스트 앤빌에서 있었던 충돌, 야생의 땅에서 악마의 눈이 꾸민 음모, 왕도의 난의 배후와 숨겨진 사정들, 말레키스와 협조한 악마 추종자들의 암약.

마지막으로 이번에 이루어진 세일룬 왕국 내 악마 추종자 말살 작전까지.

“그간 침묵하고 있던 악마 추종자들이 크게 날뛰고 있습니다. 놈들의 목적은 대륙 전체를 집어삼킬 거대한 환란.”

하지만 지금까지는 성공하지 못 했다.

세일룬 왕국은 세 번의 위기를 모두 극복해냈다.

“놈들이 제국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세일룬 왕국에서 꾸몄던 일들이 모두 실패한 지금, 놈들은 제국에서 보다 과감한 사건들을 일으킬 겁니다.”

어떻게든 대륙을 환란에 휩싸이게 하고자.

물론 이쯤되면 대체 환란에 빠트리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의문을 가질만도 했지만 일의 주체가 악마 추종자들이다보니 그런 의문을 가지는 자들은 없었다.

애당초 존재 자체가 해악인 자들이었으니 말이다.

“저와 코델리아는 조만간 제국으로 건너가 악마 추종자들과의 싸움을 이어갈 생각입니다.”

유더의 말에 루카스와 카이사가 동시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왕국에서의 활약은 그렇다 할지라도 아예 제국으로 건너간다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진짜 놀랄 일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제국으로의 여정에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 함께 해주셨으면 합니다.”

세일룬 왕국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들.

물론 유더와 코델리아에 비하면 약했다. 또래보다야 월등히 강했지만, 앞으로 제국에서 맞서 싸워야 할 적들 가운데 상급 마인들 다수가 포진해 있다는 걸 고려한다면 도움보다는 짐이 될 가능성마저 있었다.

하지만 유더는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이런저런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던 세일룬 왕국에서와는 달랐으니까.

제국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유더에게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네 사람을 강화할 수단이 존재했다.

“알겠습니다. 왕국의 귀족으로서, 유더 공자의 호적수로서 함께 하겠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제일 먼저 답한 것은 루카스였다.

영웅담을 좋아하는 그가 이런 일에 빠질 리가 없었다.

비록 ‘호적수’ 부분에서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긴 했지만, 그래도 든든하기 그지 없었다.

“좋아, 나도 같이 갈게. 제국엔 언젠가 한 번 가보고 싶었어. 스칼렛도 보고 싶고.”

카이사가 씩 웃으며 말하자 붉은바람과 태양노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가 가면 나도 가.”

“붉은바람과 항상 함께한다.”

예상대로의 대답들이었다.

때문에 코델리아는 모두에게 고맙다며 환히 웃었고, 유더는 준비해둔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하는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십시오. 무척이나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전력을 단번에 강화할 수 있는 수단.

다모스 산에서 만든 용장비 이야기가 아니었다.

물론 템빨 역시 누리게 해줄 생각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강화를 위한 방법은 따로 준비된 것이 있었다.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꼼수.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용가능해진 비기.

“우리는 데몬 프린스를 잡을 겁니다.”

그래서 폭렙업을 할 겁니다.

“네?”

“어?”

“응?”

모두가 당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데몬 프린스.

작위를 가진 지옥의 대악마.

파라곤 왕국을 멸망으로 몰아간 재앙 그 자체.

영웅담을 좋아하는 루카스조차 유더의 말에 흥분하기보다는 당황했다.

카이사는 말레키스의 강함을 묘사할 때마다 언급되던 데몬 프린스가 맞는지, 자기가 제대로 들은 건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고, 붉은바람과 태양노래는 야생의 땅에 강림할 뻔 했던 데몬 프린스를 떠올렸다.

그걸 잡는다고?

우리가?

아니, 애당초 그게 어디 있는데?

모두의 의문은 타당했고, 그렇기에 유더는 씩하고 웃었다.

코델리아가 너무나 좋아하는 속이 까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나 있습니다.”

그것도 잘 포장된 상태로 보관 중인 샌드백 같은 데몬 프린스가.

“응응, 하나 있고말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도 했는걸?”

그치 유더야?

코델리아의 까만 미소에 유더는 다시 한 번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붉은 달의 라이제강.”

강대하고 잔혹한 피의 군주.

“우리는 놈을 잡을 겁니다.”

이제는 대미지가 잘 박힐 테니까요.

그것도 아주 찰지게.

“후후후.”

“흐흐흫.”

“흐흐흐흐.”

유더와 코델리아는 다시 서로를 보며 악랄하고 행복한 미소를 주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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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9장 - 재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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