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9장 - 재회 #3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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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달의 라이제강은 전설이었다.
인계에 강림한 날 그는 삼천칠백이십칠 개의 목숨을 거두었다.
고작 한 달 사이에 열 개의 도시를 불태웠고, 석 달도 되지 않아 나라 하나를 온전히 무너트렸다.
그는 뱀파이어들의 왕이었다.
재로 변해버린 땅 위에 수많은 언데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병처럼 번져나가며 세상에 죽음과 고통과 두려움을 흩뿌렸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지옥의 대악마인 그는 지상을 점령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라이제강이 원하는 것은 그저 더 많은 죽음과 고통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의 영역 안에 들어선 자에게 주어진 운명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솔라리 교단은 그런 라이제강의 만행을 좌시하지 못 했다.
악마들과의 연전으로 인해 이미 약해질대로 약해진 교단이었지만 라이제강을 쓰러트리기 위해 비장의 수를 내놓았다.
성기사 가리우스.
솔라리의 마지막 챔피언.
라이제강은 최후까지 전설이었다.
역대 최강의 챔피언이라 불리는 가리우스는 단신으로 라이제강에 맞섰다. 인간의 몸으로 지옥의 대악마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결국 한계는 존재했다.
스스로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싸운 가리우스였지만 끝끝내 라이제강을 멸하지는 못 하였다.
가리우스는 죽었고, 라이제강은 치명상을 입었다고는 하나 살아남았다.
[내가 돌아오는 날- 그때도 너희가 나를 막을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솔라리 교단에 의해 봉인되기 직전에 라이제강은 말했다.
자신을 죽일 수단이 없어 봉인하는데 급급한 인간들을 마음껏 비웃었다.
나는 돌아오리라.
돌아와 다시 한 번 너희를 불태우리라.
죽음과 공포로 온 세상을 뒤덮어 저 하늘의 태양조차 무색케 하리라.
그것은 저주인 동시에 예언이었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난 지금.
현재.
“얘들아! 가즈아!”
명랑한 외침에 생기발랄한 십대 청년들이 호응했다.
저마다 소리치며 자신들의 절기를 뽐냈다.
“오빠!”
“오우!”
태양노래의 솥뚜껑 같은 손바닥 위에 붉은바람의 작은 손이 더해졌다.
자연스럽게 깍지를 낀 두 사람은 정면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전쟁의 노래가 지상의 불꽃을 키우나니!”
“위대한 폭풍이여! 지금 열풍이 되어 지상을 휩쓰노라!”
그것은 노래인 동시에 주술이었다.
신에 대한 기도였고, 머리 위에 자리한 신조를 향한 명령이었다.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아-!]
불꽃의 새가 포효했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그 힘을 발하였다.
“꿰뚫어라!”
“쌍패홍염시!”
가슴을 맞대고 선 태양노래와 붉은바람이 일갈하자 불꽃의 새가 한줄기 화살로 화하였다.
열풍을 두른 불꽃의 검이 되어 라이제강을 향해 돌진했다!
[크아아아악!]
벨라스틴의 마법진에 의해 약화된 라이제강의 가슴을 불꽃의 새가 파고들었다.
아니, 벨라스틴의 마법진만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이어진 솔라리 교단의 봉인에 의해 약해질대로 약해진 라이제강이었다.
“쩔어!”
화려하게 비산하는 불꽃을 보며 호탕하게 웃은 카이사가 지면을 박찼다. 그랜드 오더를 거대한 방패검으로 변모시킨 뒤 커다란 동작을 펼쳤다.
괴력을 고스란히 살린, 참격이라기 보다는 타격에 가까운 일격을 꽂아넣었다.
“태산부수기!”
[크아악!]
정강이를 강타당한 라이제강이 고통을 토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직 약과에 불과했다.
유더가 몸을 날렸다. 양손에서 피어오른 녹색의 불꽃이 검은 불꽃으로 화하며 무시무시한 기운을 발산했다.
구극태양신공 개.
벨렌시아의 법.
흑익무극참.
아름답기 그지없는 벨렌시아의 검기에 검은 태양의 힘이 더해졌다.
비록 검다하나 그것은 분명 태양의 힘이었으니, 태양을 두려워하는 뱀파이어들의 왕인 라이제강에게는 상극과도 같았다.
[크아아악!]
라이제강의 옆구리가 크게 벌어지며 검붉은 피를 마구 뿜어냈다.
상처에 붙은 검은 불꽃이 끝없이 타올라 라이제강에게 지독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크오! 크아! 크아아!]
단순한 베기가 아니었다. 몸의 일부가 통째로 뜯겨나간 기분이었다.
[크어어!]
하지만 아직 견딜만 하였다.
버틸 수 있었다.
아무리 약해졌다고 하나 데몬프린스인 라이제강 자신이었다.
견뎌낸다.
이겨낸다.
전신을 압박하는 마법진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힘을 잃어갔다. 봉인 역시 연속된 해금으로 인해 균열이 번져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니 버틴다.
어떻게든 견디고 견딘다.
쇠사슬이 끊어질 때까지.
자신을 옥죄는 솔라리 교단의 저주가 부서질 때까지!
“노옴! 헛된 꿈을 버려라! 지금 이 자리에서 네게 엄벌을 내릴 것이니!”
바로 그 순간 루카스가 진지한 얼굴로 소리쳤다.
빌트바인 영웅전에 나온 대사를 그대로 읊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낀 탓인지 더 없이 고양된 그는 용살검 아스카론 위에 성스러운 빛을 더하였다.
“성왕십자검.”
굳이 기술명을 읊조렸다.
용의 인자가 없어 아스카론의 진짜 힘을 이끌어내지는 못 하였지만 그래도 꿋꿋이 목소리를 이어나갔다.
“성령초래.”
아스카론의 검신이 순백으로 빛났다. 지옥의 악마들에게 상극인 성스러운 힘이었다.
“간다! 성! 혼! 일! 섬!”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외치며 루카스가 몸을 날렸다.
비록 사지가 묶여 꼼짝도 하지 못 하는 라이제강이었지만 그 덩치가 어마어마한데다 뿜어내는 기운이 흉악하기 그지없으니, 루카스의 돌진은 영웅소설의 한 장면을 재현하기에 충분했다.
[크아악!]
성스러운 왕의 검.
성혼일섬에 허벅지를 베인 라이제강이 다시 고통을 토했다. 유더의 참격처럼 상처가 불타오르지는 않았지만 뼛속까지 아픈 일검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루카스 공자! 마지막에 발동이 조금 빨랐습니다! 기의 발산을 한 박자만 늦춰보시죠!”
“헛! 알겠습니다!”
유더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인 루카스는 다시 한 번 아스카론 위에 성스러운 힘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성혼일섬!
“오오! 훨씬 좋아졌어!”
카이사의 감탄대로였다. 아까보다 훨씬 더 큰 상처가 라이제강의 허벅지 위에 남았으니 말이다.
“멋지다!”
“역시 루카스!”
“짝짝짝!”
“하하, 부끄럽습니다.”
[이 잡것들이!]
나를 누구라 생각하는 것이냐!
아니, 내 앞에서 이게 무슨 짓거리란 말이냐!
화가 났다.
그야말로 열불이 났다.
더욱이 기가 막힌 것은 저 어린 것들의 공격이 하나하나 제대로 박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나는-]
“아 닥치고!”
코델리아가 문라이트와 매직 블라스터를 동시에 들어올렸다. 라이제강의 입에 사일런트를 거는 대신 무력으로 그 입을 닥치게 할 심산이었다.
“간다!”
지금부터 펼치는 것은 태양의 마법.
레나에게 배운 성스러운 솔라리의 힘!
“떨려온다 하트!”
불타버릴만큼 히트!
질주하는 그것은 황매화빛일지어니!
“선 라이트 옐로 오버 드라이브!”
문라이트와 매직 블라스터 위로 찬란한 태양의 빛이 일었다. 봉인지 안의 어둠을 모조리 몰아낼 정도로 밝고 선명하며 아름다운 빛이었다.
[크아악!]
라이제강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겨우 눈을 감는 정도로 피할 수 있는 태양이 아니었다.
“싸우전드!”
문라이트와 매직 블라스터 위에 어리었던 태양의 빛이 일시에 방출되었다. 코델리아 주변에 수백 개에 달할 빛의 구들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코델리아의 얼굴 위에도 사나운 미소가 그려졌다.
“쳐라! 쳐라! 막 쳐라!”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
수백 개에 달한 광구들이 일시에 돌진했다. 그야말로 황금빛 폭풍이 되어 라이제강을 집어삼켰다.
[크아아아아아악-!]
빛에 뒤덮인 라이제강이 비명을 질러댔다. 광구의 숫자가 너무 많아 라이제강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스톱! 스톱! 적당히!”
바로 그때 유더가 외쳤다.
동시에 메시지 마법까지 하나 날린 그였다.
[야! 버스야! 버스! 버스 모는 중이라고!]
[알아!]
그냥 공격 더 잘 들어가라고 좀 다져주는 거야!
라이제강이 들었다면 홧병이 날 말을 아무렇지 않게 외친 코델리아는 헉헉 거리며 마법을 거두었고, 광구들이 사라지자 만신창이가 된 라이제강의 모습이 드러났다.
[크억··· 크어억······.]
쇠사슬에 의지해 겨우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모습.
하지만 아직이었다.
데몬프린스의 여력은 겨우 저 정도가 아니었다.
애당초 가리우스가 라이제강을 끝내지 못 했던 것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데몬프린스들의 체력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라이제강은 뱀파이어들의 왕답게 무시무시한 피통을 자랑했다.
때문에 코델리아는 방심하지 않았다. 씩 웃으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얘들아! 갈겨!”
밟아버려!
“우오오오오!”
“간다!”
“이것이 바로 천벌일지니!”
제각각 외치며 붉은바람과 카이사와 루카스가 다시 라이제강에게 연격을 펼쳐댔다.
[크악! 카아악!]
뱀파이어의 왕답게 유더가 남긴 상처 외에는 거의 모두 생기는 족족 회복해내는 라이제강이었지만 속은 착실히 망가져 가고 있었다.
머리 위에 체력 바가 떠 있었다면 착실하게 팍팍 줄어드는 모습을 보여줬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9분 남짓.
때리다 지친 일행이 헉헉거리며 잠시 숨을 고르자 라이제강이 마지막 힘을 다해 소리쳤다.
[저주하겠다! 너희를 저주할 것이다! 나 라이제강이 선언하노니, 너희는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두 피를 쏟으며 죽어갈 것이다!]
단순한 발악이 아니었다.
지옥의 상위 존재인 데몬프린스로서 남기는 언령이었으니, 실로 강력한 저주였다.
하지만 유더와 코델리아는 이미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응책을 꺼내들었다.
“어, 그래. 디스펠.”
유더가 미리 준비한 디스펠 스크롤 수십 장을 연달아 찢어발겼다. 저주의 힘이 워낙 강해 한두 장으로는 감당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응, 해주.”
코델리아 역시 오늘을 위해 준비해둔 해주의 스크롤을 계속해서 찢었다. 레나에게 받은 거라 효과도 강력했다.
언령이 흩어진다.
저주가 닿기도 전에 소멸한다.
하지만 라이제강은 포기하지 않았다. 유더와 코델리아의 손이 멎는 것을 기다렸다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지옥의 군주로서 남기는 최후의 저주일지니-]
상대가 방어수단을 모두 사용하게 한 뒤 다시 한 번 찌른다.
그야말로 회심의 한 수였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응응, 그래. 많이 준비해놨어.”
“역시 삼세번이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유더와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각자 다시 디스펠과 해주 스크롤을 꺼내 찢어대기 시작했다.
[크아악! 이 개 같은 놈들!]
진심이 가득 담긴 절규였다.
그랬기에 유더와 코델리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딸피다.’
‘막타 직전.’
지금 치면 막타 먹을 수 있다.
최후의 일격을 날릴 수 있다.
물론 버스를 모는 중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루카스나 카이사나 붉은바람이 강해지는 것보다는 이쪽이 강해지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사실 지금까지만으로도 버스는 충분하지 않을까?
게임뇌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유더와 코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서로를 보았다.
눈빛만 봐도 속을 훤히 알 수 있는 두 사람답게 바로 서로이 뜻을 간파했다.
그랬기에 동시에 움직였다.
코델리아는 급히 입술을 열어 고속영창을 시작했고, 유더는 지면을 박참과 동시에 흑룡의 기운을 방출했다.
“칼라마이트의 창이여!”
문라이트의 보석 끝에서 형성된 칠흑의 창이 라이제강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동시에 유더가 내지른 흑룡의 기운들이 라이제강의 가슴을 강타했다.
“흑룡파천! 연환!”
이미 공격이 작렬한 마당이었지만 그래도 기술명을 외친 유더는 급히 코델리아를 돌아보았고, 코델리아 역시 유더를 보았다.
원통함을 남기며 소멸하는 라이제강을 보는 대신 서로의 몸 주위에 떠오른 빛의 고리를 빠르게 헤아렸다.
그리고 몇 초.
코델리아가 본능적으로 어느 쪽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아싸!”
“야!”
유더가 주먹을 불끈 쥐었고 코델리아가 성질을 냈다.
“야 이 씨ㅂ- 아니, 아니지. 아무튼 바보야! 막타 먹음 어떡해! 버스 모는 중이잖아!”
“잠깐, 너도 먹으려고 했잖아!”
“아무튼 난 못 먹었잖아! 넌 먹었고! 이 막타충아!”
[개··· 개 같은······]
라이제강이 원념이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이미 안중에도 없는 두 사람이었다.
붉은바람과 태양노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버스가 뭐지?’라 중얼거렸고, 카이사는 바보커플이라며 까르르 웃어댔다.
오직 루카스만이 소멸하는 라이제강에게 관심을 보였다. 아니, 사실 관심을 보였다기 보다는 마지막 역할 놀이에 몰입하였다.
“악은 사라졌다.”
빌트바인 영웅전에 나오는 결정대사. 빌트바인이 강력한 적을 쓰러트린 뒤 남기는 마지막 한 마디.
[저주··· 할 거다······.]
저도 모르게 가리우스와 솔라리 교단이 그리워진 라이제강은 원통한 뇌까림을 끝으로 소멸하였다.
그리고 다시 유더와 코델리아.
어느새 바짝 붙어서서 말싸움을 하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 입술을 맞추었다.
가볍게 한 번.
그대로 연달아 여러번.
그리고 이어진 한 번의 농염함.
“푸하. 야, 뭐, 뭐야. 이런다고 다 용서되는 줄 알아?”
코델리아가 빨개진 얼굴로 말했지만 파란 눈동자에는 이미 아까의 노기가 전부 사라진 뒤였다. 목소리도 앙탈에 가까웠고 말이다.
그래서 유더는 다시 코델리아에게 입술을 맞추었고, 코델리아는 자연스럽게 까치발을 들며 유더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모든 광경에 카이사는 얼굴을 구겼다.
“뭐야, 쟤네. 저것들 왜 저래. 저기서 왜 저런 결론이 나오는 거야.”
왜 싸우다 말고 키스하는 건데.
그리고 우리가 다 보고 있거든? 여기 너희 안방이 아니거든? 니들 지금 엄청 야하거든?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유더 공자!”
루카스가 돌연 크게 외쳤다.
눈앞의 염장질에 열불이 나 지른 외침이 아니었다.
라이제강이 사라진 자리.
유더와 코델리아는 여전히 서로 얼싸안은 채 루카스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고,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저게 왜 여기서 나와.
아니, 생각해보니 당연한 건가?
이곳은 가리우스가 죽은 땅이고, 라이제강이 봉인되어 있던 장소니까.
“대박.”
“어, 대박. 완전 대박.”
정말로 진짜 너무 좋아.
활짝 웃는 코델리아의 이마에 새삼 입술을 맞춘 유더는 까만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라이제강이 남긴 물건을 향해 기분 좋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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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9장 - 재회 #3 (수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