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2장 - 조우 >
제102장 - 조우
아사인 고개를 넘은 일행은 그대로 동쪽으로 쭉 나아가 제국 아카데미가 위치한 학원도시 마나플로 향했다.
아예 낯선 이국으로 들어와 생전 가본 적 없는 도시를 찾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영웅전기2의 썩은물인 유더와 코델리아에게 있어 제국은 왕국만큼이나 익숙한 곳이었다.
더욱이 제국은 왕국과 마찬가지로 대륙 공용어를 사용했기에 언어적인 어려움도 없었다.
“그래도 말하는 거 좀 꺼려져. 발음이 우리랑 좀 다르지 않아?”
마차에 타자 한시름 놓았다는 듯 카이사가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평소에 대범한 성격인 그녀였지만 제국에 들어온 이후에는 낯선 이국의 분위기에 위축된 것인지 의외일 정도로 얌전하게, 즉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땀까지 흘렸는지 손부채질을 하며 안도하는 카이사의 모습에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뭐야, 왜 웃는데?”
“아뇨, 흠··· 조금 의외라서요.”
아사인 고개를 넘을 때까지만 해도 루카스 자신을 붙잡고 저기 보라는 둥, 산의 모양이 어쩐지 왕국하고 다르다는 둥 별의 별 소리를 다 하던 카이사였지만 고개를 넘은 직후-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제국인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자 아예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루카스, 많이 컸다? 응? 누나도 놀리고?”
카이사가 살짝 위협하듯 말했지만 마차 안이라고는 해도 제국이라 그런지 평소와 꽤 차이가 있었다.
일단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고 말이다.
“음, 네 알겠습니다.”
“알긴 뭘 아는데.”
루카스는 구체적으로 말하는 대신 여유롭게 웃었고, 카이사는 입술을 삐쭉이며 무어라 구시렁 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코델리아는 얼른 유더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유더야, 유더야. 쟤네 혹시? Hoxy?]
[···설마 이번에는 루카스 카이사야?]
[카이사 루카스일지도?]
[그게 무슨 차인데?]
그냥 이름순서 바꾼 거 아냐?
[아니거든? 아주 큰 차이가 있거든? 이거 전쟁도 벌일 수 있는 사안이거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은근히 어울리기는 하네.]
[그치? 그치그치? 카이사의 갭모에도 귀엽구, 루카스 은근 만능이야. 아무하고나 다 붙여도 돼. 범용성이 좋다고 해야 하나?]
[저기요, 이제는 다들 실존 인물들이거든요?]
[뭐래? 아무튼 잘 되면 좋겠다.]
[전에는 스칼렛이랑 밀지 않았어?]
그 전에는 붉은바람이었고.
[사실 살짝 기대하는 부분도 있어. 이제 제국이니까 스칼렛도 만날 수 있잖아? 아니, 만날 거니까 막 삼각관계라든가······.]
[삼각관계 좋아해?]
[보는 거만 좋아해. 보는 거만.]
코델리아가 입술로만 웃으며 말했고, 유더는 잡히다 못해 구겨지기 시작한 소맷자락을 돌아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뭐야, 또 둘만 무슨 밀담인데?”
루카스와의 대화로 민망해진 카이사가 화제를 돌리듯 끼어들자 코델리아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그냥. 누나는 언제나 루카스 편이라는 이야기? 누나는 루카스가 누굴 데려와도 이해할 수 있어요.”
“뭐라는 거야.”
“흐흣.”
코델리아는 다시 웃더니 새삼 루카스와 카이사를 한 눈에 담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제국이 불편하지는 않아?”
“별로, 조금 긴장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말도 통하고···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니까?”
카이사가 먼저 던지듯 답하자 루카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 변방이긴 하지만··· 전쟁의 기운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적어도 전쟁이 임박했다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요.”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국경 봉쇄령이 내려진 지금, 제국은 사실상의 적국이었다. 더욱이 일행은 그런 적국에 밀입국을 한 상황이었고 말이다.
“예, 다행입니다.”
유더는 무난하게 답하긴 했지만 사실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른 단계였다.
애당초 아사인 고개는 제국의 변방이었고, 이 일대는 왕국과 제대로 국경을 맞댄 지역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제도 인근이나 국경 지대에 진입하기 전까지는 진짜 제국의 분위기를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주 틀린 말은 아냐.’
정말 전쟁이 임박했다면 아무리 변방이라 해도 전운이 감돌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진짜 카플란이 이런 식으로 구명줄이 될 줄은 몰랐네.’
제국에 자리한 성십자 수호단과 제대로 연계를 할 수 없는 지금 제국 내부의, 그것도 믿을 수 있는 협력자인 카플란의 존재는 무척이나 소중했다.
‘잘 있겠지?’
이러나저러나 악운 하나는 강한 사람이니까.
모진 아픔 속에서도 사람 좋게 웃던 카플란의 얼굴을 떠올린 유더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은 그때였다.
똑똑.
마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문을 벌컥 열며 키라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님! 주인님! 이제 마차가 출발할 거예요!”
카이사의 말마따나 제국 서부와 왕국 사이에는 똑같은 공용어를 쓰는 와중에도 약간의 발음 차이가 존재했다.
때문에 마차 조달을 비롯해 제국인들과의 각종 거래를 담당한 것은 나름 현지인이라 할 수 있을 키라라였다.
“응, 그래. 수고했어. 이쪽으로 와서 앉아.”
“네! 주인님!”
코델리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손짓하자 키라라는 호다닥 마차 위에 오르더니 그대로 코델리아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미소를 지었다.
두 눈 가득 칭찬해주세요, 저 잘했죠? 주인님 너무 좋아요! 같은 감정이 담겨 있어 무척이나 귀여웠다.
“응응, 참 잘했어요.”
“헤헤헤.”
코델리아의 칭찬에 키라라는 수줍게 웃으며 꼬리를 만지작거렸는데, 은근히 머리를 코델리아 쪽으로 들이밀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
카이사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원조 짐승녀답게 바로 알아차린 코델리아는 키라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키라라는 세상 행복한 얼굴로 꼬리를 살랑거렸다.
‘돈의 힘은 정말 굉장하구나.’
저게 그 배신자 키라라라니.
사기꾼은 사기꾼을 알아보는 법이었다.
하지만 유더가 보기에도 지금의 키라라에게는 이렇다 할 사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즉, 연기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뭐, 돈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사실상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키라라였다.
더욱이 마을의 공동재산으로서 촌장에게 학대받던 그녀였던 터라 지금까지 살면서 제대로 된 애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더러운 도둑의 자식, 거짓말쟁이, 배신자.
거기다 최근까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산왕 밑에서 일하지 않았던가.
그 결과 키라라는 만성적인 애정결핍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런 애정결핍을 해소해줄 상대가 나타난 것이었다.
“아유 예쁘다. 착해. 일처리도 잘하구. 유능해.”
“조, 좀 더.”
“응?”
“조금만 더 칭찬······.”
“응응, 당연하지. 진짜로 잘했으니까. 잘해주고 있으니까. 거기다 앞으로도 잘해줄 거니까?”
코델리아가 그리 말하며 꼭 안아주자 키라라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는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머니의 품이 이러하지 않을까?
더욱이 눈치가 빠른 키라라이기에 더욱 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코델리아의 애정에는 조건이 없었다.
키라라 자신을 어떻게 이용해먹는다든지, 부린다든지, 나중에 배신하려고 호감을 쌓는다든지- 그런 이해관계가 없었다. 그냥 정말 순수하게 예뻐해 주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식의 호의를 아예 처음 경험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키라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과거에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모두 알면서도 이렇게 대해주는 사람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래서 키라라는 코델리아를 마주 꼭 끌어안았다. 무어라 구체화하기 어려운 감정을 말로 담아내는 대신 그저 코델리아의 온기를 갈구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유더는 쓰게 웃었다.
유더 자신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불가능한가요?]
‘벨렌시아?’
불쑥 찌르듯 들어온 물음에 유더가 의아함을 표할 때였다.
키라라의 말대로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고, 다음날 오후 늦은 시각, 일행은 카플란이 기다리고 있는 학원도시 마나플에 도착했다.
&
“그런데 왜 학원 도시야? 도시 전체가 학원이야?”
“아뇨, 학원을 중심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학원 도시인 겁니다. 마나플 아카데미는 제도 아카데미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이죠.”
코델리아와 유더가 아니라 카이사와 루카스의 대화였다.
글자 읽기를 싫어하는 카이사와 달리 왕국에 있을 때부터 제국 관련으로 이것저것 예습을 해둔 루카스였기 때문이다.
“헤에, 그래? 그럼 맛있는 건 뭐 있는데?”
“예? 어··· 특산물은······.”
루카스가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주인님, 키라라만 믿으세요. 제일 빠른 지름길로 안내해 드릴게요.”
학원 도시 내부에서는 특별히 허가받은 경우가 아니면 마차를 타고 다닐 수 없었다.
때문에 무조건 두 발로 걸어야만 했는데, 카플란의 주소를 보자마자 키라라가 길 안내를 자처하고 나섰다.
산왕에게 붙잡히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륙 서부를 누비며 좀도둑질을 해댄 키라라라 그런지 지리에는 자신이 있는 눈치였다.
“응응, 키라라만 믿을게.”
“헤헤헤.”
이제는 코델리아가 반응만 해줘도 웃음이 실실 새어나오는 키라라였다.
원작에서는 고슴도치라고 불릴 정도로 가시 돋힌 모습을 보여주던 키라라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쪽이에요!”
“넘어질라, 천천히 가자. 손잡고 갈까?”
“저, 정말요?”
“응, 정말.”
코델리아가 손을 내밀자 키라라는 잠깐 망설이더니 얼른 마주 손을 내밀었다. 살랑살랑이다 못 해 이제는 아주 파닥거리는 꼬리를 보니 정말 좋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유더 공자. 카플란 교수는 마나플 아카데미가 아니라 제도 아카데미 소속이 아니었나요?”
“예, 지금도 제도 아카데미 소속입니다. 다만 제도 아카데미는 이름 그대로 제도에 있으니까요. 일단 접선하기 쉽게 제국 서부에 있는 마나플 아카데미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카플란이 아예 소속을 옮긴 것은 아니었고, 단순히 휴가 내고 내려와서 쉬고 있는 쪽에 가까웠다.
“아무튼 우리도 가자. 쟤네 벌써 저만큼이나 갔어.”
카이사가 그리 말하며 앞장서자 유더와 루카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아사인 고개 부근도 그러했지만 확실히 이곳 마나플 학원도시에도 아직은 전란의 기운이 감돌지 않는 것으로 보아 며칠 내로 갑자기 전쟁이 터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이십 여분 정도 걸었을까.
도시 외곽에 자리한 작은 저택에 도착한 일행은 문을 두드리자마자 반가운 얼굴을 마주했다.
“유더 군! 코델리아 양!”
“오랜만입니다, 카플란.”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성역에서의 일로 많이 걱정했거든요.”
레나에게 무사하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 본 것은 아니었으니까.
코델리아의 말에 카플란은 흐흐 웃으며 말했다.
“악운에 강한 제가 아닙니까. 두 사람도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훈훈하게 덕담을 주고받자 코델리아가 연이어 줄줄이 자리한 일행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제 친구인 카이사와 루카스, 그리고 키라라에요.”
“카이사 오펀드입니다.”
“루카스 흐레스벨그입니다.”
“키라라입니다!”
살짝 경계하는 얼굴로 예를 표하는 카이사와 루카스와 달리 키라라는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코델리아가 자신을 친구라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오오. 인디아나 카플란입니다. 일단 모두들 안으로 드시죠.”
일행이 두어 명인 것도 아닌데 현관에 서서 이야기하기는 뭐 했으니까.
카플란의 집은 그의 성격을 드러내듯 작고 소박했지만 무척이나 잘 정리되어 있었다. 보통 학자들의 집은 지저분할 거라는 편견을 깬다고 해야 할까?
어찌되었든 일행을 응접실로 안내한 뒤 간단한 다과까지 대접한 카플란은 한 차례 숨을 고르더니 유더에게 은근히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유더 군, 긴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냥 목소리만 낮춘 것이 아니라 유더만 따로 응접실 밖까지 불러낸 뒤 한 말이기에 유더 역시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신지.”
혹이 준비해준다던 제도 아카데미 관련 서류들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돌발상황이라든가.
“사실··· 두 사람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도착했는데, 제가 아닌 두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서 찾아왔습니다.”
카플란의 말에 유더는 눈매를 날카로이 했다.
자신들이 제국에 밀입국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극소수의 인원들뿐이었다.
아니, 애당초 학원도시 마나플에서 카플란과 만날 것을 아는 것은 카플란 한 명뿐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미리 알고 찾아온 자가 있다?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더욱이 찾아온 이들이······.”
말끝을 흐리던 카플란은 다시 마른침을 삼키더니 유더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지금 제가 함정을 파거나 한 건 아닙니다. 찾아온 이들도 두 사람에게 적대적인 것은 아니고요. 오히려 두 사람의 도움을 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알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때문에 유더는 빙 둘러 이야기하는 대신 직접적으로 물었다.
“찾아온 게 대체 누구죠?”
카플란의 손짓으로 보아 2층에 있을 것이 분명한 먼저 온 손님이라는 자들이.
카플란은 바로 답하기에 앞서 숨을 한 번 크게 고르더니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황실의 친위기사들입니다.”
&
황실을 지키는 친위기사단.
속칭 로열나이트.
유더에게 있어 로열나이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막시밀리언 데 어비스와 레온 가드리엘이었다.
시기상 이쯤 되면 둘 모두 로열나이트의 정식 기사로 활동할 때이긴 했으니, 어쩌면 두 사람이 찾아온 것일지도 몰랐다.
‘문제는 어떻게냐인데.’
만약 정말로 막시밀리언과 레온이라면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든 만날 생각이었던 두 사람을 지금 시점에 만난다는 것은 일종의 행운이기는 했지만, 역시 영문을 알 수 없으니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일단 한 명은 레온이 확실한 거 같은데.’
한 명은 집안에서도 투구를 쓰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다른 한 명은 무척 젊은, 길게 기른 검은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늘어트린 푸른 눈동자의 청년이라 했으니 십중팔구 레온일 터였다.
‘레온, 레온 가드리엘.’
검술이란 영역 하나에서만큼은 막시밀리언과 대등한 수준까지 올라서는 검의 귀재.
영웅전기3편에서 죽지만 않았어도 플레이아데스를 대표하는 사대검사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했을 인물이었다.
‘지금 나이가 스물 셋인가?’
아예 노인인 케인즈를 제외하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 중에서는 최연장자였는데, 그런 만큼 시작할 당시의 기량부터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정석적으로 성장했다 하더라도 지금쯤이면 최소 달의 정수를 먹기 전의 게일 정도의 강함에는 도달했을 터였다.
‘키우기에 따라서는 검호급에 근접할 수도 있지만.’
그건 썩은물들이 작정하고 몰아주기 플레이를 했을 때 이야기였으니 게일과 십검호 사이쯤으로 보는 게 타당할 터였다.
‘음, 역시. 게일 형님과 십검호는 전투력 측정기구나.’
강함의 척도, S급 판별기.
잠시 잡스러운 생각을 한 유더는 옆을 돌아보았다. 코델리아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더니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자.’
‘그래.’
카플란과 루카스, 카이사, 키라라는 1층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로열나이트들이 오직 유더와 코델리아 두 사람과의 대면만을 원했기 때문이다.
사실 유더와 코델리아 입장에서는 엿먹으라하고 그냥 몸을 빼도 될 상황이었지만 일단 첫 만남부터 초칠 이유는 없었기에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였다.
‘여차하면 때려눕히면 되고.’
물론 로열나이트의 단장이자 제국의 이름 높은 검호인 절대기사 갤러헤드가 왔다면 지금의 유더와 코델리아라도 상대하기 벅찰 터였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아무튼 가자.’
다시 한 번 코델리아에게 눈짓한 유더는 방문을 열었고, 인기척을 느낀 탓인지 문 쪽을 주시하고 있던 로열나이트 두 사람과 바로 눈을 마주쳤다.
소파 위에 앉아 있는 두 사람.
한 명은 예상대로 레온 가드리엘이 맞았다.
가벼운 경장 차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갑옷을 입기라도 한 것처럼 떡 벌어진 어깨와 커다란 덩치를 가진 잘생긴 청년.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한 사람.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열나이트를 보자마자 코델리아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체형과 잘 쓰는 손, 투구의 형태와 가슴에 달고 있는 작은 장신구 덕분에 본능적으로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간파했기 때문이다.
“사라?”
바로 그 순간이었다.
투구를 머리 끝까지 눌러 쓴 채 남장을 하고 있던 사라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고, 레온이 급히 손을 뻗어 그런 사라를 제지했다.
‘뭐야, 여기서 사라가 왜 나와. 사라가 로열나이트가 되었다고?’
취한 용의 가호를 받는 사라.
제작진에게 비뚤어진 애정을 받는다고 알려진 박복하면서도 악운에 강한 여인.
기본적으로 검사계열 캐릭터인 만큼 루트에 따라 로열나이트가 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로열나이트 선발전에서 사라로 막시밀리언이나 레온 둘 중에 하나를 이겨야만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막시밀리언은? 설마 막시밀리언 떨구고 사라가 로열나이트가 된 거야?’
그게 가능해?
코델리아는 당황해서 유더를 돌아보았고, 유더는 심호흡으로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셜록 홈즈도 말하지 않았던가.
불가능한 것들을 전부 제거하고 나면 아무리 믿지 못 할 것이라 해도 그게 진실이라고.
아무래도 나비효과가 아주 강렬하게 작용을 한 모양이었다.
‘아예 막시밀리언이 선발전에 나가지 않았을 수도 있고.’
어찌되었든 지금 중요한 것은 눈앞에 자리한 레온과 사라였다.
로열나이트의 젊은 신진인 두 사람이 핀 포인트로 유더 자신과 코델리아를 언급하며 나타났다.
그렇다면 둘을 보낸 것은 누구이고,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자신들이 제국에 올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놀랍군요. 사라를 바로 알아보실 줄이야. 과연 운명의 두 사람.”
레온의 말에 유더와 코델리아가 다시 한 번 흠칫했다. 너무나 익숙한 단어를 들은 탓이었다.
운명의 두 사람.
다프네 왕녀가 곧잘 자신들을 가리키며 사용했던 호칭.
‘뭐야? 설마 다프네 왕녀의 안배 뭐 그런 거야?’
다프네 왕녀에게 아직 ‘천상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듣지 못 한 유더와 코델리아였다.
원작에서도 다프네 왕녀로 진행할 일은 없기에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말이다.
때문에 유더는 동요를 감춘 뒤 말했다.
“유더 어거스트 바이엘입니다.”
“레온 가드리엘입니다. 이쪽은-”
“사라··· 사라 카노트입니다.”
살짝 거친 목소리로 사라가 말하자 코델리아 역시 약식으로나마 예를 표했다.
“코델리아 어거스트 체이스입니다.”
유더는 코델리아를 에스코트해 일단 자리에 착석했고, 유더는 레온을, 코델리아는 사라를 마주한 채 잠시 동안 침묵했다.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 것인가.
운명의 두 사람이 무엇인지 물어야 할까?
아니면 자신들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느냐고?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레온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천상의 목소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제국을 구하기 위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운명의 두 사람 뿐이라고 말입니다.”
유더는 미간을 좁혔다.
천상의 목소리.
운명의 두 사람.
누가 봐도 의미심장한 단어들.
하지만 제대로 분석할 시간이 없었다. 이번에도 레온이 연달아 입을 연 탓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재상부에 의해 황실에 구금되어 계신 황족 분들을 구해야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레온이 고개를 푹 숙이자 사라가 한 박자 늦게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유더와 코델리아는 서로를 보았다.
재상부의 만행과 황실에 구금된 황족.
황족의 구출을 도와달라는 로열나이트이자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두 사람.
여기에 다프네 왕녀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 분명한 천상의 목소리까지.
[우리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아무튼 퀘스트잖아?]
깨면 보상 나오고 스토리 진행되겠지.
지극히 게임적인 이야기였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더욱이 코델리아도 말로하진 않았지만 감각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재상부가 황족들을 억압한 상태로 독단적으로 국경 봉쇄령을 강행- 왕국과 언제든 전쟁을 치를 것 같은 지금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황족 구출은 작금의 상황을 타파하는 활로가 될 수 있었다.
“일단,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죠.”
코델리아의 뺨을 괜히 한 번 꼬집은 유더는 얼른 레온에게 말했고, 덕분에 화내거나 앙탈부릴 타이밍을 놓친 코델리아는 볼을 부풀리며 레온을 돌아보았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레온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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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2장 - 조우 > 끝